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96
〈 96화 〉 아무래도 잘못 걸린 것 같다(1)
* * *
시험은 사흘 밤낮으로 이어졌다. 숲의 외곽을 따라 세워둔 막사에서 학생들은 야영했다. 아침 해가 떠오를 새벽녘에 그들은 다시 숲에 도전한다.
숲의 중심에 무엇이 있을지 그들은 모른다.
그저, 시험을 통과했다는 벨노아와 라크가 들것에 실려 나오는 것을 보며··· 만만치는 않으리라 예상할 뿐이다.
‘숲의 공터에 있는 보스를 잡는 것.’
그것이 시험의 통과 조건이다. 학생들은 이를 악물고 숲의 환영을 돌파한다. 첫날에는 마수에 쫓기기 바빴지만, 이튿날에는 꽤 많은 학생이 숲의 깊은 곳까지 들어섰다.
말도 안 되게 어려운 시험이다.
그러나, 반복해서 도전하다 보면 대체로 어떻게든 되는 법이다. 학생들은 끊임없이 도전한다. 숲을 헤매고, 뛰어다니며 길을 찾는다.
셋째 날,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때쯤.
세 명의 학생이 숲의 중심인 공터에 도착한다. 정말이지 힘든 시간이었다. 이제, 보스만 사냥하면 모든 게 끝난다.
‘보스가 무엇일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셋이 함께라면 할만할 거다.
“오.”
그렇게 기대감에 부푼 그들을 반기는 건 흉측한 마수가 아니다. 전혀 예상외의 인물이 그 곳에 서 있다.
“드디어 왔네.”
라니아 반 트리아스.
아플리아의 악몽이라 불리는 교수.
해골바가지를 비스듬히 쓴 그녀가 해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마치 꽃 피는듯 화사한 그녀의 미소와 달리, 학생들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린다.
벨노아의 손가락이 박살 나 있던 이유.
라크의 코에 핏자국이 묻어있던 이유.
그 이유를 학생들은 알게 된다. 그들의 앞에 선 라니아 교수에 대한 악명(?名)을 모르는 이들은 없다.
꿀꺽.
그러나, 어쩔 것인가.
그들 스스로 선택한 전투 마학과다.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
“으, 으아아아아악!”
비명인지 함성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르며 학생들은 돌격한다. 아플리아의 악몽에게. 그렇게 그들은 몸소 체감하게 된다.
라니아 반 트리아스.
그녀가 왜 아플리아의 악몽이라 불리는지.
정신적 고통을 넘어, 이번엔 육체적 고통까지 선사하는 악랄한 교수의 앞에 학생들은 쓰러진다.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는다.
“큽···.”
그 모습은 꼭, 재앙의 앞에 무릎 꿇는 기사들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끄읍, 끅······.”
“으윽, 에에엑···.”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새어 나온다.
비명이 메아리치는 숲에 사흘째의 해가 저물어간다. 삼일간의 시험이 끝을 맞이한다.
“······그, 라니아 교수?”
“예?”
“내 자네에게 할 말은 많지만, 무척이나 많지만 말일세······.”
삼일간의 실습 시험이 끝났을 때.
“일단은, 수고했네······.”
라니아가 가진 악명은 더 높은 곳을 향한다. 적어도, 전투 마학과의 학생들 사이에서 그녀의 이름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라니아 반 트리아스.
아플리아의 깊고 두려운 악몽이여.
2.
실습시험이 마무리된 다음날.
나는 교수실의 소파에 반쯤 드러누운 채 문제지를 넘기며 검토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한마디 하셨을 스승님도 지금은 별말이 없으셨다.
‘당장 들어갈 수업이 없으니까.’
딱히 출근해도 할 일이 얼마 없다. 복습 겸 예습으로 과제만 잔뜩 만들고 있는 매일 이다.
‘방학이 끝나긴 했지만, 아직 수업을 진행하긴 힘든 여건이니까.’
해골바가지의 습격 이후, 아플리아는 학사의 소독 및 보수작업을 위해 단기 방학을 시행했다. 방학 동안 소독은 얼추 끝난 모양이지만······.
‘보호 결계를 새로 만든다고 했지, 아마?’
큰맘 먹고 공사를 시작한듯싶었다.
한 학기에만 해도 마수의 침입이 벌써 두 번이다. 이번 기회에 아예 외부 인력까지 끌어다가 결계를 재정비한다던가.
‘마탑주급 마법사도 몇 보였고.’
그 규모가 생각보다 컸다.
흑마탑주 예투알이 학사 내를 돌아다니는 것을 몇 번 보았다. 규모만큼이나 결계의 정비 작업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개학은 했지만, 수업은 어려운 상태.
그게 현재 아플리아 아카데미의 상황이었다.
‘전투 마학과처럼 실습이면 또 몰라.’
실습 위주의 전투 마학과와 달리, 교실과 연구실을 사용해야 하는 이론 위주의 수업들은 상황이 좋지 못하다. 결계의 재정비로 인해 교실에는 외부 인력들이 득실거린다. 도무지 수업할만한 여건이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건 내가 맡은 ‘마나의 거래학 기초’ 수업도 마찬가지였고.
‘과제만 나눠주고 해산.’
요즘은 그런 식의 일과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 내면 될까요?”
나는 검토를 마친 과제를 스승님께 보였다. 스승님은 종잇장을 팔랑팔랑 넘기시더니, 이내 말씀하셨다.
“이번 주까진 자습을 돌려야 할 것 아니더냐. 1주일 분량이니 좀 더 내줘도 된다.”
“······여기서 더요?”
“학생들의 학구열이 뛰어나다 한들, 잦은 방학으로 인해 해이해진 상태지. 흐트러진 학생들의 기강을 잡는 것도 교육자의 역할이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번에 이만큼 내줬을 때, 비명을 질러댔던 거 같은데.’
힐끗, 나는 스승님이 쌓아둔 종이 더미를 흘겨봤다. 그 전부가 과제인듯싶었는데, 그 양이 심상치 않았다.
‘확실히, 스승님 것에 비하면 좀 적을지도.’
그럼 더 내는 게 맞겠지?
하긴, 생각해보면 지난번 과제가 많았다고 원성이 자자했던 것도 다 시험 기간인 탓이었다. 시험 기간도 끝난 지금은 스승님 말마따나, 조금 더 과제를 내줘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사락.
나는 빈 종이 두세 장을 더 꺼내다가, 새롭게 회로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런 것도 반복해서 하다 보니 작업속도가 더 빨라진 느낌이었다.
“라니아.”
“네?”
그렇게 작업을 하다 보니, 문득 스승님이 내 이름을 부르셨다. 고개를 돌리니 스승님이 턱을 괸 채 날 바라보고 계셨다.
“오늘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그런가요?”
“실습 시험 감독을 다녀온 뒤로부터 기분이 좋아 보이더구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느냐?”
그런가?
“오랜만에 몸을 좀 푸니까 기분이 좋은 것 같기도 해요. 애들이 뛰어다니는 거 보는 것도 재밌었고.”
“······몸을 풀어? 뭘로?”
스승님이 눈을 깜빡이신다. 이윽고 그 낯빛이 어두워진다. 그렇게 스승님이 무언갈 말씀하시려 한 순간.
따르릉, 하고.
책상에 새겨둔 알람 회로가 소리를 냈다. 고개를 돌려 시간을 확인해보니 시계 바늘이 2시를 가리키고 있다.
‘오후 2시.’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시간.
하루마다 정해둔 카페에 갈 시간이었다. 나는 스승님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게 무슨 소리······.”
“스승님, 저 카페 좀 들렀다 올게요.”
스승님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다녀오너라.”
깊은 한숨이 섞인 목소리였다.
스승님의 목소리에서 피곤함이 느껴지는 걸 보니, 쌓인 업무가 좀 많으신 듯 싶었다.
‘올 때 커피라도 한 잔 사다 드릴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걸음을 옮겼다.
교수실을 나와 복도를 걷는다. 오후의 햇살이 내리쬐는 아플리아는 평화롭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라 그 년이 아플리아를 돌아다니는 탓에 마경의 풍경을 엿보는 듯 했으나··· 이제는 다 옛일이다.
‘떠난 지 좀 됐지, 아마?’
지금쯤이면 사라니 카일이니, 레미아니 다 전장으로 돌아갔을 터다. 왕도에서 다시 마주칠 일은 거의 없겠지.
‘애초에 용사가 왕도에 있으면 안되지.’
그럴 시간에 전선 하나를 더 뛰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카페에 도착해 있었다.
짤랑.
카페의 문을 열자, 그윽한 커피 향과 함께 카페의 점주인 알렌이 나를 흘겨봤다.
“안녕하세요, 알렌.”
“반, 반갑습니다. 라니아 교수님.”
나를 반기는 목소리가 묘하게 떨린다.
그 모습에 나는 쓰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직도 이러네.’
내가 사라의 목덜미에 커피를 들이부었던 날 이후로 알렌은 줄곧 저런 모습이다. 그 모습이 그렇게나 충격적이었는가 싶었다.
‘사라 그년이 평소에 하는 말을 들으면, 놀라서 쓰러지겠네.’
나는 커피잔을 닦는 알렌을 바라보며, 장난스레 말을 이었다.
“사장님, 주문 안 받으세요?”
“······주문은 뭘로 하시겠습니까?”
사실 주문이랄 것도 없다.
나는 툭, 하고 테이블을 건드리며 말했다.
“늘 시키던 걸로 할게요.”
“카페에서 그런 식으로 주문하는 건 라니아 교수님이 유일할 거에요······.”
“에이, 다 알아듣잖아요.”
투덜거리면서도 알렌은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일류 연금술사답게 알렌의 계량은 언제나 정확하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커피를 달이는 모습은, 마치 고급 포션을 정제하는 연금술사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카르디는 차 더럽게 못 타던데.’
내 눈에는 고대의 연금술사보다, 눈앞의 이 젊은 바리스타가 더 대단해 보였다.
“여깄습니다.”
알렌은 내가 늘 시키는 모닝빵과 함께 커피잔을 내밀었다. 그윽한 커피 향이 코끝에 맴돈다. 정교한 계량에서 오는 풍미는, 시중에서 파는 커피와 비할 바가 못 된다.
‘이래서 내가 여길 못 끊는다니까.’
나는 엷은 미소를 흘리며, 커피잔을 쥔 채 창가의 자리로 향했다. 테이블에 커피잔을 내려놓고, 나는 짧게 숨을 내뱉었다.
“후우···.”
하루의 일과가 된 티타임이지만, 오늘만큼은 마냥 휴식을 위해서 카페에 들린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돌려, 이미 옆자리에 앉아있는 선객(?客)을 바라본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흠칫, 하고 어깨를 떨며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로 보자고 했지, 라크?”
라크 반 그레이스.
전투 마학과 소속의 학생이자, 내가 눈여겨보고 있는 학생 중 하나. 내 부름에 라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음, 그게···.”
그가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상담을 좀 받고 싶습니다. 라니아 교수님.”
“그래, 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보고 싶은게 뭔데?”
3.
실습 시험의 조기 통과자는 둘 뿐이다.
그 둘 중 하나인 라크는, 요즘 들어 생각이 부쩍 많아졌다. 본래 그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언제나 생각보다 행동이 앞섰다.
그런 라크는 요즘 위화감을 느끼고 있다.
운동장을 뛰어다닐 때도, 도끼를 휘두르며 훈련을 할 때도, 자꾸만 정신이 딴 데 팔리곤 했다. 집중이 잘 안 됐다.
‘이유가 무엇인가.’
사실 라크도 그 이유는 잘 알고 있었다. 실습 시험에서 느낀 기묘한 감각 때문이다. 그때 느꼈던 감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가열(Heating)을 통한 육체 강화.
라크가 열다섯 살 무렵부터 쓸 수 있게 된 강화법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간 라크는 단 한 번도 가열 상태에서 이성을 붙들지 못했다.
‘본능에 충실해진다. 시야가 좁아진다.’
그러니까, 이성이 마비된다.
전투감각이 이끄는 대로 도끼를 휘두르고 달려들 뿐이다. 사실, 그것은 부끄러워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니까.’
수십 년간 전사로서 살아온 긍지 높은 북방의 특무대들조차, 가열(Heating) 상태에서 이성을 붙잡기란 어려운 일이다.
아직 어린 라크는 가열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전사들에게 부러움을 샀다.
그래서, 여지껏 라크는 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이성이 마비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 당연함은 깨졌다.
지난번 실습 시험에서 라크는 이변을 경험했다.
‘본능 속에서 이성을 잡았다.’
무척이나 기이한 감각이었다.
몸은 뜨겁다. 숨은 가쁘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눈 폭풍이 부는 것처럼 서늘했다. 시야는 넓었고, 등골은 쭈뼛 서는 일치감을 느꼈다.
그 기이한 감각.
그 기묘한 일치감.
그것을, 라크는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었다. 그 감각을 완전히 제 것으로 삼는다면 벨노아를 상대로도 승리를 점 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혼자선 불가능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그것을 알 만한 건······.’
아마도, 그때 상대가 되었던 교수님뿐이겠지.
“······이상입니다.”
설명을 마친 라크는 옆에 앉은 교수를 흘겨봤다. 그녀는 커피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가느다란 속눈썹 사이로 푸른 눈동자가 착 가라앉았다.
무언가를 생각하는듯한 모습이다.
한동안 침묵하던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한 번 감을 잡았으면, 그걸 체득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아.”
그녀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사실 그런 데는 실전이 제격이긴 해.”
“실전, 말씀입니까?”
“어, 이건 내가 아는 사람 얘기인데··· 그 사람 근처에도 빡 대가리가 하나 있었거든?”
······빡 대가리?
“애가 머리가 나빠서 그런지, 돌진밖에 몰라. 한번 싸우고 나면 몸은 다 망가져 가지곤 하루죙일 침대 신세를 져야 했대.”
“어, 으음.”
어째 남 말 같지가 않다.
라크는 가만히 앉아 그녀의 말에 귀 기울였다.
“그런 놈도, 전장에서 뒹굴다 보니까 얼추 감을 잡더라고. 생존본능이란 게 생각보다 대단하거든.”
“그럼······.”
“근데, 너를 당장 전장에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당장 보내도 1인분은 할 것 같긴 한데··· 위험하긴 하니까.”
어디 마땅한 장소가 없을까.
“옛날이었으면 대충 변두리 하나 잡아다가, 삼사일 정도 굴리고 오면 되는 건데, 쩝······.”
뭔가 아쉽다는 듯 그녀가 입맛을 다신다.
그 말에 라크는 왜인지 모를 섬뜩함을 느낀다.
“그, 그럼 제가 한번 다시······.”
“아, 맞아.”
라크가 황급히 내뺴려던 찰나다.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짝하고 그녀가 박수를 쳤다. 그리곤 어디선가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편지지?’
꼭 편지지처럼 생긴 종이였다. 마나의 흐름이 느껴지는 게 마도구인 양 싶었다.
스륵.
그녀가 마나를 실어 편지를 쓴다. 라크는 그녀가 쓰는 편지를 슬쩍 흘겨봤다. 종이 위로 마나가 담긴 글자가 춤추듯 녹아내린다.
사라락.
글자가 완성되는 족족 사라져, 그 내용을 정확히 보기는 힘들지만···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글자들이 있기는 하다.
‘르, 뤼······.’
반복되어 쓰이는 글자가 있다.
누군가의 이름인듯싶다. 라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
‘······엘?’
그리고, 그 이름이 완성된다.
완성된 단어를 라크는 속으로 한번 읉어봤다.
‘르뤼엘.’
그 이름이 낯이 익다.
“······어?”
라크가 눈을 깜빡였다.
편지에 가볍게 적기에는, 결코 가볍지 않은 이름이 그곳에 쓰여 있었다.
‘······르뤼엘 왕녀 전하?’
세상 물정에 어두운 라크라 한들, 라크 또한 일단은 명문가의 자제다. 르뤼엘 왕녀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왕가의 미친개, 르뤼엘 왕녀.
그런 인물의 이름이 어째서 저 편지지에 적히는가. 라크는 고개를 들어 라니아를 바라봤다.
“그, 지금 누구한테 편지를 쓰시는······.”
“아, 그냥 아는 사람 있어.”
“아는 사람··· 이요?”
“얼마 전에 알게 됐는데, 좀 높은 사람이거든.”
높은 사람.
“빚을 만들어둔 게 좀 있어서 말야. 부탁하면 들어줄 것 같거든.”
“그, 그렇습니까?”
라크는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그의 직감이 경고한다. 당장 저 편지를 찢어버리고 이 자리에서 도망치라고.
“음, 으음···.”
라크는 안절부절못한 채,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긴장감에 목이 탔다. 라크는 시켜놓곤 정작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커피잔을 쥐었다.
쓰디 쓴 검은물.
시럽 한 방울 타지 않은 검은 물이지만, 오늘만큼은 달게 느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