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157
“그것은··· 하아아.”
켄타우로스는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주무른다.
“아름다움의 여신이시여, 신의 꽃을 꺾음은 죄가 맞으나 이는 부당하옵니다.”
-‘대가.’
“참으로 송구하옵니다만··· 이건 너무 비겁하지 않으십니까? 고작해봐야 작은 꽃 한 떨기가 아닙니까? 저를 꽃으로 유혹하시면서까지 그러고 싶으십니까?”
-‘긍정.’
“···.”
-‘불만, 소용 없음, 귀환, 명령.’
켄타우로스는 ‘응, 그러고 싶은 거 맞는데, 에베베베. 그래서 네가 뭘 할 건데? 뭘 할 수 있는데?’의 고상한 표현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이것이 소위 올림포스 12신의 품격이었다.
“너무··· 너무하지 않으십니까? 저는 이미 제자 하나를 기르다 죽어 별자리가 된 몸입니다. 그런데도 온갖 신들이 이렇게 청탁을 넣어옵니다. 가엾지는 않으십니까?”
-‘귀환, 명령.’
의미: ‘안 돼. 바꿔줄 생각 없어. 돌아가.’
“···지금 저는 당신의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잠시 머리를 굴려본 케이론은 지혜로운 자답게 신의 동정심에 호소하는 건 무익함을 깨달았다.
대신 그는 다른 방식의 설득을 시도한다.
“당신께서 원하신다면 아이네이아스 그 아이에게 최고의 가르침을 전해주겠습니다. 잠시간만이지만 충분히 노력을 기울여 그 아이가 훌륭한 전사가 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분홍빛 꽃잎들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조용히 그 자리를 지킨다.
설득이 거의 진행되었다 싶은 케이론은 쐐기를 박기 위해 입을 연다.
“당신께서 예뻐하시지만 피가 섞였는지도 모호한 소년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배 아파 낳으신 친아들이 있지요. 둘 중 누구에게 제가 가르침을 전하길 바라십니까?”
한참동안 꽃잎은 움직이지 않는다. 적막 속에서 케이론은 침을 삼킨다.
그리고, 올림포스의 여신과 지혜로운 켄타우로스가 등장한 이 짧은 이야기의 교훈은 간단했다.
-‘둘 다.’
권력은 보통 지혜를 손쉽게 제압한다.
케이론은 장탄식을 내뱉고는 한참동안이나 발걸음을 떼지 못하다, 결국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저, 저를··· 가르치신다고···”
제자 목록에 또 한 사람, 프리아모스의 아들 파리스를 추가하기 위해서.
“그렇다.
···미의 여신께서 직접 청해오신 일이지.”
파리스는 케이론의 우울해보이는 표정에 잠깐 의문을 표했으나, 곧 그런 사소한 사실 따위 깡그리 무시했다.
그렇게 약탈자 파리스는 아이네이아스의 사랑뿐 아니라 스승까지 빼앗게 되었다.
***
···솔직히 감격스럽다.
공무원 시험 합격, 공인중개사 합격 하면 에x윌이 떠오르듯 이 일대 유명 해적과 산적들을 꼽아보면 이 케이론의 손을 거치지 않은 이가 거의 없다.
어릴 적부터 그에게 길러진 이아손은 저 멀리 흑해의 콜키스까지 가서 국보를 훔친 뒤 찬탈자 삼촌에게 다시 찬탈에 찬탈을 선보이는 등 찬란한 업적을 세웠다.
펠레우스는··· 음, 분명 이것저것 업적이 많긴 한데 아킬레우스 아버지인 것 말고는 딱히 인상에 남는 게 없네.
악타이온도 아르고 호 원정에 참여하는 등 나름 굵직한 이벤트들에 개근했는데 정작 사람들은 아르테미스의 목욕을 훔쳐본 것 말고는 모른다.
이 둘은 그리스 영웅계의 간손미 브라더스 같은 인간들이니 제외.
아, 그래. 헤라클레스가 있었다.
케이론의 가르침 덕에 헤라클레스는 리라 선생도 쳐죽이고 라오메돈도 쳐죽이고 네메아의 사자도 쳐죽이고 올림포스를 공격하던 기가스까지 쳐죽여 그리스 최고의 영웅이 되었다.
문제는 실수로 스승인 케이론까지 쳐죽였다는 거지만.
지금도 케이론의 뒷다리에는 헤라클레스가 쏜 히드라 독을 묻힌 화살이 박혀 있다. 신들조차 영원히 고통받아야 한다는 그 히드라 독이다.
저것 때문에 케이론은 신들에게 선물받은 영생을 포기하고 죽음을 택했고, 그를 안타깝게 여긴 제우스가 그를 별자리로 올렸다.
자, 여기까지가 케이론에 대한 설명이다. 그리스 영웅들의 가장 위대한 멘토이자 신들마저 인정하고 영생과 별자리를 선물한 일타강사.
그런 이에게 길어야 3개월이라지만 잠시나마 수학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어렸을 때부터 케이론이 길러준 아킬레우스나 헤라클레스만큼은 못해도 분명 뭔가 효과가 있을 것이다.
-퍽!
“크헉, 컥, 켁···.”
“흠, 요새 영웅들은 많이 약한가 보군. 헤라클레스는 뒷다리로 걷어차도 멀정했는데.”
···까지가 방금 얻어맞기 전까지 내가 했던 생각이었다.
“아, 아니··· 케이론 님.”
“스승님이라 부르거라.”
“스승님, 보통 사람이 살면서 켄타우로스와 싸울 일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저는 켄타우로스가 많이 사는 테살리아에 가본 적도 없는데요.”
“그래. 네 말이 맞다.”
“그, 그럼···”
“그런데 내 교육은 ‘보통 사람’을 만들기 위한 게 아니다. 당장 창을 들거라.”
내가 후들거리는 손으로 창대를 쥐고 일어서자 케이론은 득달 같이 달려와 내 가슴팍을 발로 차고는 말했다.
“내 교육은 영웅을 위한 것이다. 아프로디테 님께서 그분의 영광과 너의 영달을 위하여 내게 너의 교육을 일임하셨으니 그 누구도 지금은 우리를 건드릴 수 없을 테다.”
지금 저 멀리서 이노는 이 꼬라지를 보고 비명을 질러대고, 시녀들이 훈련장으로 뛰어들려는 이노를 뜯어말리는 중이다.
난장판이다.
“너는 활쏘기에 능하나, 나머지에는 한계가 크다. 돌처럼 단단하지도 못하고, 바람처럼 날래지도 못하다. 물처럼 유연하거나, 쇠처럼 질기지도 않으니··· 어렵구나.”
“그 정돕니까?”
“물론 ‘보통 사람’보다야 훨씬 뛰어나다. 하지만 내 제자 중 아킬레우스라는 녀석과 붙는다면 너는 10합을 못 넘기고 참살당할 게다.”
“···.”
애초에 비교항이 아킬레우스인 것부터가 잘못된 게 아닌가 싶지만, 딱히 대꾸할 말도 없었다.
“아무튼 제가 전방위적으로 약하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꼭 너무 그렇게 단정지을 필요는 없다. 누구에게나 재능은 있으니.”
“···.”
“···그래, 맞다. 약하구나.
다른 이들이 싸울 때 멀리서 활로 보태는 건 되겠지만 직접 누군가와 맞부딪혀 싸우는 건 무리일 듯하다.”
그리 말하며 케이론은 창을 빙글빙글 돌린다. 무슨 이쑤시개라도 돌리는 마냥 가볍게.
“약한 이들에게는 허를 찌르는 특기와 묘수가 필요한 법이지. 말해보거라. 네가 생각하는 네 특기가 무엇이더냐?”
“···활쏘기?”
“그것 말고.”
“분위기를 보아하니 건축이나 토목을 이야기할 때는 아닌 듯하군요.
어··· 그럼 일단 사람이 없는 곳으로 옮기죠. 보여드릴 게···”
“그리고 ‘그것’도 빼고서 말하거라. 네 힘이 아닌 것은 제해야 한다.”
···‘망치’도 빼고?
내가 고민하고 있자니 케이론은 가만히 한숨을 쉰다. 나는 그 모습에 더욱 치열하게 머리를 짜낸다.
“정 없다면 무예 말고 다른 것을 익히도록 하지. 예를 들어 리라를 연주할 줄 아는 것도 영웅의 자질이다. 헤라클레스는 리라 선생을 패죽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중요성이 퇴색되지는 않지.”
자칫하다간 최고의 강사를 앞에 두고서 음악 수업이나 들을 판이다. 나는 손톱을 깨물며 생각한다.
내가 잘하는 것··· 나만이 할 수 있는 것··· 케이론에게 배웠을 때 늘 수 있을 것··· 켄타우로스에게···
···
켄타우로스에게 배웠을 때, 늘 수 있을 것.
있다.
“리라는 고상한 악기다. 아폴론께서도 그를 즐겨 타셨고, 내 제자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리라가?”
“아뇨, 특기가요.”
나는 부케팔로스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탄 나를.
적들은 그런 나를 이렇게 불렀다.
“딱 선생님께 배움받기 좋은 특기입니다.”
켄타우로스.
스승 (3)
“나한테 배움받기 좋다는 게··· 혹시 전차술이라면 나는 추천하지 않겠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워어어··· 워워···.”
내가 부케팔로스를 진정시키고 케이론의 앞에 데려오는 동안 케이론은 가만히 팔짱을 끼고 말했다.
“우선 전차술을 반대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로 전차 위에서 네가 마부 노릇을 한다면 그동안 싸울 사람이 없어진다.
그리고 둘째로, 내가 켄타우로스라 전차술을 잘 가르치리라 생각한다면 그건···”
“이랴!!”
“···.”
내가 등 뒤에 올라 발로 툭툭 옆구리를 차 주자, 부케팔로스는 신이 나서 언덕 아래로 내달리기 시작한다. 당황한 케이론은 순간 눈앞의 광경을 믿지 못하는 듯 눈을 꿈뻑거리다 곧 빠르게 따라달린다.
“멈춰보거라!!”
“부케팔로스? 멈춰.”
-푸드득.
오랜만의 질주를 막아내자 부케팔로스는 불만에 찬 듯 신경질적으로 멈춰선다. 그 덕에 하마터면 내 몸이 앞으로 기울어 떨어질 뻔했다.
그리고 내가 자세를 가다듬는 동안 저 멀리서 케이론이 우리를 따라잡았다.
그가 나를 마주본다.
“···.”
“···.”
“내가 아는 영웅 중에 말을 탈 줄 아는 이는 한 사람뿐이었다. 단, 한 사람.”
케이론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서 나와 부케팔로스를 죽 훑는다.
“페르세우스.”
“페르세우스는 저와 상황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페가수스를 탔으니까요.”
“그래, 그러니 이제 땅 위를 말달리는 영웅은 네가 첫번째다. 축하한다.”
“안키세스 님은요? 어렸을 적의 아이네이아스를 가르치셨다면 그때 만나보셨을 텐데요.”
“안키세스? 그는··· 영웅이라기엔 조금 신기한 사람이지.”
“아.”
···나는 빠르게 인정했다.
그리고 내가 인정하거나 말거나 케이론은 가까이 다가와 부케팔로스의 갈기를 쓰다듬으려 말했다.
“예전부터 전차에 의존하지 않고 말 위에 직접 오르고자 하는 이들은 많았다. 우리 족속을 자주 마주하는 테살리아 등지의 사람들이나, 트라키아와 그 북쪽의 족속들이 그러했지.
성공한 이들은 드물었고. 그렇지만, 트로이아에서는 시도조차···.”
“안키세스 님도 젊었을 적 북방의 사람에게 배웠다 하셨습니다.”
“그럼 너는 안키세스에게 배웠겠구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케이론은 턱을 쓰다듬으며 부케팔로스를 이모저모 살폈다.
“···튼튼하고, 건강하다. 전차를 끌어도 전장을 지배했을 녀석이 이제 주인을 잘 만나 날아다니게 되었구나. 방금 너희는 아주 빨랐다. 마치 켄타우로스처럼.”
케이론은 즐거이 웃으며 부케팔로스와 눈을 마주친다. 뭔가 서로 교감을 나누는 듯도 하기에 나는 살짝 기대감을 품고서 물었다.
“말들과 소통하실 수 있습니까?”
“아주 대강은. 일단 내 절반은 말이니까.”
“그러면 승마를 가르쳐주실 수는···”
“그건 얘기가 다르다.”
좋게 좋게 흘러가던 흐름이 단숨에 끊긴다.
“예?”
“너는 두 발로 걷고 있구나.”
“예, 그렇지요.”
“그럼 나한테 두 발로 걷는 법을 가르쳐보거라.”
“···그 몸으로요?”
“내 말이 그 말이다.”
현명한 켄타우로스는 머리가 아픈 듯 미간을 문지르며 말한다.
“내가 켄타우로스라서 인간에게 말달리는 법을 가르치기 좋다고 생각하고 있느냐? 하지만 네가 나에게 원숭이 길들이는 법을 가르쳐줄 수는 없지 않겠느냐?”
“어···.”
나는 뭔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마치 해외 여행 중 ‘어? 너 동양인? 니하오마, 곤니찌와. 내 발음 어때?’ 소리를 듣는 기분.
“···실수인 것은 알겠다만 다음부터는 주의하거라.”
그런 기분을 케이론이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 죄송합니다.”
“아니다. 아무튼 네게 이야기해주고 싶었던 건 간단하다. 승마술은 누구도 익힌 바가 없고, 그 때문에 누구도 네게 제대로 가르쳐줄 수 없을 게다. 특히 네가 원하는 게 말 위에 올라 창을 쓰고 활을 쏘는 거라면 더더욱.
···물론 나도 오랜 시간 공을 들이면 가르쳐줄 수는 있을 테다. 그렇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 아니더냐.”
케이론이 저 멀리 북쪽과 서쪽을 가리킨다.
“저기 다르다노스에 가서 오랜만에 제자의 얼굴도 보아야 하겠고, 또 시간이 지나면 아카이아의 영웅들이 내게 수업을 재개하길 청할 텐데. 어떻게 너만 두고서 그리 공을 들일 수 있겠느냐?”
···케이론이 단정적으로 말하니 이제는 나로서도 더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얻어걸려서 가르침받는 주제에 뭔가를 더 요구하기도 께름칙했고.
우리는 슬슬 움직이면서 오늘의 훈련을 마칠 채비를 했다. 나는 부케팔로스의 등에서 내려 그 허리를 쓰다듬으며 긴장을 풀어주었고 케이론은 조용히 석양을 바라보면서 풀피리를 불었다.
그리고···
[파리스?]그때쯤 익숙한 목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온다. 마치 향기처럼 말이다.
우리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우뚝 멈춰섰다.
[파리스, 잠시만 나와 볼래?]나는 그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복종했다. 내가 뒤쪽으로 물러서자 이번에는 같은 목소리가 또 다른 이야기를 건넸다.
[아저씨는 이쪽으로 와보세요.]“이쪽?”
[이쪽요!]케이론도 마찬가지로 익숙한 목소리가 말해오니 순순히 그 말에 따른다. 그렇게 우리 둘은 적당히 거리를 벌리고 멀뚱히 서 있게 되었다.
우리가 어색하게 눈을 마주쳤다 피했다 할 때쯤 문득 저 멀리 숲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결에 날아온 나뭇잎이 우리의 시야를 가리기에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아저씨, 기억나요?”
어느새 이노가 내 곁에 서 있었다.
“내가 나중에 다리 고쳐준다 했던 거?”
“···.”
“···.”
그리고 그 말에 나와 케이론 모두 입을 다물었고.
이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하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노, 그러니까 스승님의 다리에 박힌 건 ‘그 독’이 발린 화살인데···”
“맞아. 나도 잘 알아. 그걸 해독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보니, 지난번에 케이론이 떠나려 했을 때도 이노는 케이론의 다리를 언급하며 붙잡으려 했었다.
그때는 나도 그렇고 다들 크게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케이론도 단순 걱정으로 알아들었었고.
하지만, 나는 방금 흥미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아저씨는 그때도 다리에 박힌 화살을 못 빼고 있었잖아요. 혹시라도 독 묻은 화살촉이 다른 곳까지 헤집어놔서 통증이 늘어날까봐.”
“···.”
케이론의 고통은, 더 나아가 그의 죽음과 부활은 히드라의 독에서 연유한 것이다.
“아저씨가 떠난 뒤로도 계속 연습했어요!”
“그게··· 연습한다고 되는 게 아니지 않느냐?”
“돼요! 저는 이제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이노는 히드라의 독을 치유할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다.
“제가 고쳐드릴게요!”
이노가 손짓하자 그 주위에 순식간에 풀들이 갈색 흙을 덮으며 자라나기 시작한다. 무릎에 이를 정도로 길게, 흙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나는 이노와 함께 오랜 시간을 지내온 만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이노에게 의술을 가르쳐준 장본인인 케이론 역시 잘 알 테다.
모두 약초였다.
“아저씨가 허락해주시면, 제가 고쳐드릴 수 있을 거에요.”
“···.”
“아저씨가 가르쳐주신 거잖아요? 제가 나중에 고쳐드린다 했을 때 믿는다 하셨잖아요?”
“하하, 그건 어렸을 때 이야기지.
아이네이아스도 너와 꼭 결혼하겠다 했었는데···”
길게 침묵을 지키던 케이론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네 곁에는 다른 왕자님이 있지 않느냐.”
케이론은 지난번처럼 이노에게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이번에는 왠지 모르게 깊은 그늘이 져 있었다.
“너도 이게 무엇인지 알지 않느냐?”
헤라크레스가 바다에다 대고 화살을 조준하자 겁에 질린 바다의 티탄 오케아노스가 폭풍우를 멈추었고, 하늘에 조준하자 태양 마차를 끌던 헬리오스가 달아나 낮이 밤으로 바뀌었다 한다.
그 화살에 히드라의 독이 발려 있었기 때문에.
지금 케이론의 뒷다리에 돋아나 있는 저 화살이 그것이었다.
신들조차 겁에 질리게 만들었으며, 불멸의 존재가 불멸을 포기하게 강요하고, 마침내 그를 사용한 영웅조차도 고통 속에서 자살하게 만든 물질이 히드라의 독이다.
“내 제자 중에는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도 있었다. 그 사실을 잊지 말거라. 네가 아스클레피오스보다 뛰어나지 않다면 너는 나를 고칠 수 없다.”
“···고칠 수 있습니다, 스승님.”
내가 입을 열자 케이론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대꾸한다.
“어렵다. 네 연인이 의술의 신보다 뛰어나리라고 자만하느냐?”
“부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자만이라 하겠습니까?”
뭐, 어쩌면 또 모르지. 지금 이노가 자만하는 것일지도. 신들도 해내지 못한 일을 무슨 수로 해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