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196
클라리스가 잠시 이노의 말에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기울이더니, 눈을 깜빡인다.
그리고 그곳에서 작은 물방울들이 떨어진다.
[나는, 왜 너처럼 못했을까.]“···.”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결국 이렇게 될 때까지, 후회할 거면서 그 사람을 따라서 못 떠나고···.]이노는 잠시 뒤로 물러선다.
곧 클라리스는 ‘자기자신’의 위를 올라, 그 나뭇가지에 앉는다. 그리고는 멀리 어딘가를 쳐다본다.
갑자기 나비 수십 마리가 그녀의 몸에 달라붙는다.
[그럼 너는 후회 안 하는 거네? 그 인간 남자애가 너보다 훨씬 일찍 죽어버릴지도 모르는데?]클라리스의 말에 이노는 고개를 끄덕인다. 클라리스의 얼굴조차, 하나둘씩 날아드는 나비들에게 가려진다.
[···좋겠다.]그게 마지막이었다.
클라리스를 온통 뒤덮은 나비들이 바람에 날리듯 흩어졌을 때, 그녀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고목은, 우지끈거리는 소리를 내며 쓰러진다.
이노는 그 광경을 잠자코 바라보다 눈을 감는다.
다시 그녀의 귀에 왁자한 소리들이 오가기 시작한다.
영원을 사는 별들, 기나긴 삶을 사는 요정들, 찰나를 사는 벌레들.
그 각각의 것들이 모두 살아있었다.
자신의 박자에 따라 춤을 추고 있었다.
이노는 조용히, 떠나간 요정을 기리면서 숲을 떠났다.
평생을 약속한 어느 필멸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떠나는 건 두렵지만···
그래도, 좋아하니까.
전야
한 남자의 흐릿한 눈에, 나무에 앉은 새의 모습이 보인다. 날개깃을 이리저리 다듬던 새는 한번 남자와 눈을 마주치더니 휙 돌아서서 도망쳐버린다.
남자는 조용히, 자신의 몸을 내다본다.
수많은 적들을 베어죽이던 팔에 더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피부에 검푸른 빛이 더해가고 혈색이 사라진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장년층에 가까웠던 그의 얼굴은 마치 가을과 겨울을 맞이한 나뭇잎처럼 순식간에 생기를 잃고 쭈그러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몸에서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일평생 궁정 구석구석에서, 전장 한복판에서 맡아온 냄새였다.
죽음의 냄새였다.
그 자신의 것인 만큼, 여느 때보다도 진하고 생생하게 그의 코를 찔러온다.
아가멤논은 군데군데 검은 빛으로 자신의 팔을 내다보면서 조용히 침묵에 귀를 기울인다. 자신의 맥박 소리 말고는 다른 그 무엇도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아가멤논은 입을 열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건 확실하군. 이대로, 전하게.”
가까이 있던 하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가멤논은 말을 이었다.
“메넬라오스만큼은, 반드시 살라미스로 향해야 한다. 내 아들 오레스테스는 아직 어리니까.”
지금의, 트로이아와 아카이아 사이의 이 화약은 아트레우스의 자손들이 이뤄낸 것이라고 만방에 알려야 한다.
고로 그 역사적인 날, 아트레우스 가문의 아카이아에 대한 패권을 확정 짓는 그날에 메넬라오스가 가문의 대표로서 나가야 한다.
결정을 내린 뒤 아가멤논은 갑자기 기력이 떨어지는지 눈을 감는다. 그 어둠 속에서 그는 이런저런 생각을 굴려본다.
내가 떠나면, 그래. 내 아들 대신 한동안 메넬라오스가 가문의 수장 노릇을 하겠지.
어쩌면 헬레네와 관계가 개선될 수도 있고, 내가 없으니 기이한 야망이 그놈의 마음속에서 자라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있으니 괜찮다. 몇 년만 있으면 오레스테스 역시 권좌에 오를 나이가 될 테니 역시 나쁘지 않다.
메넬라오스가 무슨 일을 벌이더라도 가문만큼은 무너지지 않으리라.
하지만.
역시 아쉽다.
조금만 더 오래 살 수 있었다면.
죽기 전에 오레스테스가 장성한 모습만 볼 수 있었다면.
많은 위험들을 제거할 수 있었을 텐데. 다른 모든 음모와 위협과 변수들을 꺾어버리고 온전히 패권을 향한 길을 닦아놓을 수 있었을 텐데.
아가멤논은 그런 무의미한 잡념들을 머릿속 한 켠으로 치워놓고는 말을 이어간다.
“나는··· 가지 못할 걸세. 목숨 부지하기도 힘든 늙은이가, 거친 바다를 어떻게 견디겠나.”
“···.”
눈앞의 시종은 그저 조용히 왕의 말을 듣고만 있다. 좋다. 이럴 때 과묵함이란 미덕이었다.
“자네가 스파르타에 가서 전하게.
메넬라오스, 그 아이가 가야 한다고. 가서 가문을 대표하여 트로이아와 아카이아 사이의 오랜 은원을 끝맺으라고 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아가멤논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던 시종이 뒤돌아 손님을 받는다.
“왕이시여, 몸은 좀 어떻습니까?”
“어때 보이나?”
“···아주 나빠 보이는군요.”
“역시, 자네는 정직한 의사야. 의사의 정의는 곧 정직함에 있지. 아스클레피오스 님께서도 자네를 자랑스러워 해도 괜찮겠군.”
“너무 말씀을 많이 하지 마십시오. 안정이 흐트러집니다.”
마카온은 급히 들어와 아가멤논의 맥박을 재어보고 그 혈색과, 충혈된 눈의 흰자위를 살핀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아가멤논에게 쓴 약을 내민다. 은으로 된 잔에 담겼건만, 저 진초록색의 끈적한 액체는 도저히 사람이 먹을 꼴이 아니다.
아가멤논은 얼굴을 찌푸리며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곧장 물로 입을 헹군 뒤 뱃속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며 시종에게 마저 말한다.
“아, 그리고 조만간 트로이아에 보낼 사절도 준비하고 있게.”
“알겠습니다, 주군.”
“그래, 그리고 프리아모스의 아들 파리스도··· 아니, 아닐세. 이건 조금 더 생각을 해봐야겠군.”
아가멤논은 드디어, 자신의 계획에 마침표를 찍을 순간이 다가왔음을 느낀다. 그 사실에서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을 얻는다.
살라미스의 왕 텔라몬이 소식을 보내왔다.
헤시오네가 슬슬 마음을 먹었다.
라오메돈의 살아남은 유일한 딸이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
“···살라미스? 또?”
“네, 아가씨. 아시다시피 미케네의 왕께서는 몸이 좋지 않으시잖아요. 지난 여러 원정에서도 한번도 제대로 참가한 적 없으시지요.”
“메넬라오스 님께서는 그분이 곧 나으시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시는 것 같긴 한데, 어쨌건 이번에도 아가멤논 님께서 행사에 직접 참가하시는 건 어려울 것 같아요.”
시녀는 목욕을 마친 헬레네에게 옷을 입히는 척 그녀의 귀에 가까이 입을 가져가 속삭인다.
“그래서 이번에도 지난 정벌들에서 그랬던 것처럼 메넬라오스 님께서 대신 살라미스로 가지 않으실까···.”
“쉿.”
막 웃옷을 걸친 헬레네의 명령에, 곧 옷시중을 들던 시녀들이 빠르게 입을 다문다.
욕조의 물소리 아래로 낮게 울려퍼지는 소리 죽인 발걸음의 울림.
헬레네와 시녀들이 긴장 어린 침묵을 이어나가자 발걸음 소리는 잠시 멎었다가…
가까워지다가··· 다시 멀어진다.
염탐꾼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시녀들은 더 조심스러운 태도로, 헬레네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삭여댔다.
“아마 근시일 내에 메넬라오스 님께서는 이 땅을 떠나실 거예요.”
“···.”
“지금 메넬라오스 님은 초조하기도 하실 거예요. 이카리오스 님께서 아예 떠나버리셨으니까요.”
이카리오스.
익숙하고도 그리운 이름이다. 몇 번씩이나 메넬라오스의 만류를 뚫고 궁전에 찾아와 자신의 손을 잡고 위로해준 고마운 삼촌.
그 삼촌이 떠났다.
스파르타를 떠나 저 멀리 이타카로.
도망치거나 한 것은 아니다. 패배당하여 자신의 영역을 빼앗긴 것도 아니다.
오히려 도시의 시민들 중 상당수를 이끌고 이타카로 이주해갔으니 당당하게 자신의 명망과 힘을 뽐내며 길을 나섰다고 할 수 있으리라.
메넬라오스에 대한 항의와 모욕의 의미로서, 스파르타 왕실의 큰 어른이 오늘날 스파르타의 왕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뜻으로서 그는 떠났다.
수천 명이 머무르던 도시는 반쯤 텅텅 비었고, 그 막대한 재산도 말끔히 챙긴 채 이카리오스는 사위가 다스리는 도시 이타카로 떠났다.
이 초유의 사태에 메넬라오스는 지금쯤 당황하여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고 있으리라.
인근의 여러 왕들을 만나러 다니면서 지지를 호소하고, 헬레네에 대한 핍박을 해명하며, 떠나간 이카리오스에게 사절을 보내면서 어마어마한 정치적 출혈을 감수하고 있겠지.
헬레네는 가벼운 베일을 걸치고, 어깨에는 망토를 두른 채 욕실에서 나온다. 헬레네와 친한 시녀들이 똘똘 뭉쳐 그녀를 보호하듯 에워싸다가, 다른 시녀들이 다가오자 빠르게 흩어진다.
“여기서부터는,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메넬라오스가 심은 이들이다. 헬레네는 입을 꾹 담고, 그 안쪽으로 살을 씹으며 시녀들을 노려본다.
“···그래. 피곤하니 침실로 가고 싶구나.”
“알겠습니다.”
어차피 이 시간에는 침실이 아닌 다른 어디로 향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실랑이를 벌일 바에야 제 발로 걸어가는 게 낫다.
헬레네는 이제 분하게 느껴지지도 않는 냉대 어린 시선에 둘러싸인 채 머릿속으로 생각을 굴려나간다.
근시일 내에, 메넬라오스가 살라미스로 향한다.
지금처럼 스파르타에서의 정치적 입지에 구멍이 숭숭 뚫렸을 때, 자리를 비워야 한다. 그것도 헬레네 자신을 남기고서.
그 뒤통수가 얼마나 가려울까? 그 아름답고도 혐오스러운 눈동자가 얼마나 불안에 떨까?
헬레네는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급히 이빨에서 힘을 빼낸다.
“여왕이시여, 입에서 피가 흐릅니다.”
-탁.
“놔둬. 내가 닦을 테니.”
헬레네는 가까이 다가오는 시녀의 손을 쳐내고서 자신의 옷깃으로 슥삭 닦아낸다. 하얀 천에 검붉은 자욱이 남는다.
스파르타의 여왕은 자신을 가둬버리듯 둘러싼 시녀들을 곧장 앞질러 걸어가서는 침실에 들어간다.
그녀는 싸늘한 달빛이 내리는 침대에 앉아, 새어나오려는 눈물을 막고서 의지를 다진다.
드디어.
삼촌이 스파르타를 떠나는 강수를 두어준 덕에, 거기에 메넬라오스의 살라미스행이 겹쳐준 덕에···
드디어 이 비참 속에서도 희망이 보인다.
운신의 폭이 생긴다.
헬레네는 달빛에 신성하게 반짝이는 자신의 금발, ‘친아버지’를 닮았다는 그 금발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는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얻어내고, 어떻게 ‘남편’을 압박할 것인가.
그녀는 복수가 눈앞에 다가오기라도 한 것마냥 설레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신중하자.
여기서 한발짝만 더 내딛으면, 어쩌면.
자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
테우크로스는 왕궁의 돌벽 사이에 난 틈으로 새하얀 달빛이 비쳐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마치 노인의 긴 백발처럼, 그것은 기나긴 세월의 질곡을 품은 신비로운 은백색으로 빛나며 그의 시야를 밝혔다.
아직 밤이 늦지 않아 하인들이 곳곳에서 횃불을 밝히고 있다. 텔라몬의 서자는 그들을 방해하지 않으려 어두운 곳을 골라다니면서 비스듬히 비쳐들어오는 달빛을 쬔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난 뒤, 그는 어느 단단한 나무 문 앞에 선다. 그 앞을 말없이 서성이며 문을 두드릴지 망설이고 있자···
“들어오렴.”
부드러운 목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온다. 테우크로스는 그 말에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잡고 문을 밀친다.
방 안에서는 한 노인이 창틀에 앉아 쉬고 있는 새에게 빵부스러기를 먹이고 있다. 자신의 주름 가득한 손을 부리로 콕콕 쪼아대는 날짐승을 지켜보며, 노인은 즐겁게 웃었다.
“보렴. 잘 먹지 않니? 네가 젖먹이일 때 얼마나 힘이 좋았는지 얘기해줬던가? 하마터면 가슴이 떨어져나갈 뻔했는데···.”
“이미 수도 없이 말씀하셨습니다.”
테우크로스는 어머니의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주름이 가고, 야위었다. 그 옛날 어릴 적에 볼을 비비면 부드러웠던 볼살도 이제는 움푹 꺼져 광대뼈가 옆으로 비죽 튀어나왔다.
그러나 그 눈.
희망을 품은 저 두 눈은 소금기 어린 바람을 맞아 별처럼 빛난다.
“어머니.”
“시킨 일은 다했니?”
“여기서 모으셨던 재산은 전부 팔아서 어머니를 돌보아줬던 늙은 시녀들과 그 가족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잘했다.”
“다들 어머니께 감사해하더군요. 몇몇은 울면서 제게 꽃 같은 걸 내밀었는데···.”
“감사할 게 뭐가 있니. 받은 대로 주는 건데.
···그래도 그건, 챙겨가자꾸나.”
헤시오네는 빙긋이 웃으며 아들이 가져온 크로커스 꽃을 어느 화병에 꽂고 찬 물을 따라놓는다.
“이건 내가 직접 안고서 배에 타야겠구나. 어차피 이제는 짐도 많지 않을 텐데, 이쯤이야 괜찮을 게야. 그렇지?”
“물론이죠. 트로이아인들이 설마 어머니께서 화병 하나 가져가신다고 타박할까요.”
“그래, 그래도 맨손으로 떠나온 고향에 꽃 몇 송이는 들고 돌아가야지.”
“···.”
테우크로스는 어머니의 그 말에 잠시 말문이 막힌다. 무언가를 말하려 입을 열다가 다시 다물기를 반복하자 어머니가 피식 웃는다.
그 웃음에 테우크로스는 용기를 얻어 말했다.
“아버지께서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어머니께···”
“사과한다고? 차마 용서를 구하지는 못하겠지만 어떻게든 보답을 하고 싶으니 뭔가 금붙이라도 남겼니?”
“···.”
“역시나. 참 어떻게 보면, 아니 어떻게 보아도 쉬운 사람이란다. 네 아버지는.”
헤시오네는 복잡한 미소를 지으며 아들이 가져온 꽃을 바라본다.
“구태여 더 말할 필요 없는 것들이라 전해주거라. 라오메돈의 딸 헤시오네는 울면서 살라미스에 왔고 이제 웃으면서 떠나니 그것으로 된 것 아니냐고 말해주면 그만이다.”
“···울지 않으시는군요.”
“내가 왜 울겠니.”
헤시오네는 어느덧 믿음직스럽게 자라난 아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나이든 손들이 하나하나 따서 모았을 꽃들을 살펴보고, 아까까지 자신이 주는 빵을 먹어 통통해진 작은 새를 본다.
마지막으로, 쓸모 없는 가구들을 모두 빼내어 침대와 작은 탁자, 의자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신의 방을 둘러보았다.
만족스러웠다.
“이제 미련이랄 게 없구나.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은 사람이 그런 걸 가져봐야 짐스러울 뿐이지.”
“···.”
“이미 나는 많이 울었다. 고향이 불탈 때부터, 낯선 억양을 익히고, 이곳에서 온갖 핍박을 받으며 살아갈 때부터···”
“어머니.”
“···지난번에 그 잘생긴 아이, 파리스라는 내 조카를 만났을 때나 다른 고향 사람들을 보았을 때까지.”
헤시오네는 손뼉을 쳐 작은 새를 날려보낸다. 새는 만월(滿月)에 가깝게 스치듯 날다가 곧 궁전의 담장을 넘어 시야 바깥으로 떠나버린다.
“울음은 이제 충분하다. 이제 웃어야지.”
“···.”
“그러니까, 너도 울지 말고. 고향 땅을 밟아 보는 일이잖니. 기쁜 일이야.
너는 나와 다르게 곧 돌아오겠지만··· 그래도 거기에는 가족들이 있단다. 언제든 찾아오렴.”
헤시오네는 아들을 끌어안는다. 테우크로스는 눈물을 흘리다, 작고 초라해진 어머니의 어꺠를 마주 끌어안았다.
모든 걸 끝낼 시간이었다.
아가멤논의 술수니, 트로이아와의 동맹이니, 하는 복잡한 일들은 지금에야 막 시작하는 듯하지만 헤시오네에게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이곳에서의 삶을 모두 매듭지었다.
그것으로 되었다.
가장 아름다운 사람 (1)
헤라클레스의 유산을 찾고 왔더니, 온 아카이아가 해적질 열풍에 난리가 나고. 헥토르와 아이네이아스의 무기를 만들어준 다음엔, 에티오피아에서 온 사촌을 만나질 않나, 게다가 아마존과의 전쟁까지···.
그동안 꽤나 많은 일이 지나쳐온 것 같은데.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길지 않은 시간은 곧.
“트로이아의 왕중왕께 인사 올립니다.
라오메돈의 딸 헤시오네 님께서 드디어 귀향을 결심하셨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갈무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기도 했다.
살라미스에서 온 사절이 그 소식을 전할 때 프리아모스가 어떠한 정치적 고려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고, 헤카베는 눈물을 흘렸으며, 모든 장로들과 왕실 인사들이 경의를 표하며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나는 곁에 선 헥토르에게 무심결에 그리 말했다. 헤시오네라는 사람이 나를 처음 봤을 때의 반응이 떠올랐다.
-“그저, 고향의 말씨를 쓰는 사람이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녀는 고향의 해안이, 막내동생의 늙은 모습이, 그 자식들의 얼굴이 궁금하다고 했었지.
나도 모르게 속에서부터 무언가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세월에 조금씩, 조금씩 자신의 일부를 깎아가며 견디던 어느 노인의 얼굴.
아니, 아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수동적으로 자신을 파괴하고 희생하며 살아온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만들었다. 고향으로의 길이 열렸다는 이유만으로 손쉽게 버릴 수 없었던 그런 삶을.
그러니까···
숭고한 사람이었다.
헥토르는 잠시 내 모습을 지켜보다,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가늠하는 듯 고개를 기울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분께서 이곳을 마음에 들어하시길 바라야지.”
그분께서, 그분이 떠나온 잿더미로부터 일어난 이 도시를 보고서, 수십 명의 조카들을 보고서, 자신을 일평생 동안 그리워해온 막내동생과 이 도시의 시민들을 보고서.
부디 마음에 들어해주시기를.
“분명히, 헤시오네 님은 이곳을 좋아하게 되실 겁니다.
고향이니까요.”
“그래, 고향이지.”
트로이아가 물론 내 고향은 아니었다. 이곳에는 내 ‘진짜 가족’들이 없었고, 진짜 이웃들도 없었다.
나는 잠시 안탄드로스를 떠올린다. 오랜만에 부모님이나 다시 보러가야겠네. 전쟁 끝나고서 마을에 들렀을 때 다들 호들갑 떨면서 괜찮냐고 물어보던데. 자주 만나봐야지.
그렇지만, 뭐, 지내다보니 괜찮은 도시였다.
한 사람이 그녀에게 걸맞는 행복을 누리며 늘그막을 보내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으리라.
“헥토르, 파리스, 한 번만 더 고생해 주려무나.”
프리아모스가 겨우 돌덩이처럼 굳은 입술을 움직여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