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307
“그렇다.”
여전히 파라오의 음성은 내 귓가에 마치 메아리처럼 어른거린다. 어딘가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 같이 아득하다. 거기에 약간 이질적인 느낌까지.
이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게··· 아.
헤파이스토스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제야 깨닫는다.
나는 지금 인간과 마주하고 있는 게 아니다.
나와 다른 일행들이 멀뚱히 그를 올려다보고 있자니 옆에 서 있던 멤논과 무슨 장군이 함께 무릎을 꿇어 경외의 뜻을 표한다.
나는 그렇게는 할 수 없다. 지금 나는 트로이아 연합의 사절이니까.
한편으로는, 이렇게 멀뚱히 있을 수만도 없다. 나는 한낱 인간이고 파라오는···.
일행들도 모두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지 눈만 꿈뻑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멈췄다.
파라오의 옥음이 이어진다.
“중간에 계획이 크게 바뀌었지. 이런··· 인원 구성으로 올 줄은 내 몰랐으니.”
파라오의 시선이 아킬레우스에게 가닿더니, 멈춘다.
“···.”
“···아무튼, 그대들은 전쟁 중이지. 전사들에게는 무기가 필요하고, 왕들에게는 결단력이 필요한 때임을 잘 안다.”
파라오는 천천히 다시 옥좌에 앉는다. 그러자 그를 둘러싼 광휘는 조금씩, 조금씩 약해지더니 곧 완전히 사그라든다.
그제야 나는 그의 모습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고집 있고, 강단 있으며, 결단을 내려야 할 때 결단을 내릴 줄 아는 유형의 인간. 내가 그의 얼굴에서 느낀 인상은 그랬다.
파라오 세트나크테가 옥좌의 팔걸이에 걸치고 있던 오른손을 들어올린다.
“트로이아의 왕자여, 그 반지를 끼고 왔군.”
“···두 왕국을 다스리는 파라오시여. 예, 그러합니다.”
나는 그제야 겨우 제대로 자세를 잡고서 반지를 빼어다 옥좌를 향해 내밀었다. 파라오는 멀리서 내가 벗은 반지를 지켜보려는 듯 몸을 앞으로 내민다.
“잘 안 보이는군.”
“제가 가져가겠습니···”
“그럴 필요 없네.”
파라오는 들고 있던 오른손으로 손가락을 튕긴다.
그러자, 순간 황금 같은 섬광이 그 손안에서부터 일어나더니 기묘한 인력에 내가 들고 있던 반지가 끌려간다.
파라오 세트나크테가 오른손을 펼치자 그 위의 허공에 반지가 부유한다. 나는 그 초현실적인 광경에 다시 몸이 굳는다.
그는 문자 그대로 현인신이다.
“검게 변했군. 멤논, 그대가 말한 그대로일세.”
“그러합니다, 두 왕국의 통치자시여. 아주 강력한 저주가 그에게 깃들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반지가 그를 겨우 보호하였으나 이미 삿된 기운에 오염되었습니다.”
“흠.”
저주? 오염?
내가 뭔가 입을 열기도 전에 파라오가 주먹을 꽉 쥐니··· 공중에서 반지가 녹아내린다. 마치 여름날의 열기를 못 이겨 녹아내리는 얼음처럼, 황금과 에나멜로 된 반지가 녹는다.
황금으로 된 물이 파라오의 발치에 떨어지니, 빠르게 식은 웅덩이가 얇은 금판이 되어 파라오의 발 아래 깔린다.
“이제, 가게. 앞으로 그대들에게 줄 것이 많네. 이곳에 그대들을 부른 것은 결국 나의 관대함을 보이기 위함이었으니.”
“···.”
“···.”
“···.”
“사령관 호리.”
“파라오시여.”
“나의 손님들을 숙소로 데려가게. 멤논, 자네는 잠시 머무르게.”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우리가 뭔가를 생각할 새도 없이 많은 게 결정된다. 사령관이라 불리운 남자는 우리에게 한번 절을 올리고는 알현실 바깥의 문으로 안내한다.
우리는··· 그의 뒤를 따랐다.
***
“쿠쉬 총독, 그대의 동족들을 보니 어떻던가?”
“···.”
멤논은 파라오의 말에 잠시 고민한다.
일단 저 중 자신이 동족이라 여기는 건 그나마 친척 관계인 파리스 하나뿐이고, 사실 그보다도 에티오피아의 누비아인 부족원들이 더 친숙하며, 다른 것보다도 아카이아인들에게는 ‘해적’ 이상의 생각이 들지 않는다 말할까 생각한다.
“너희 비백인들(유색인종이란 말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끼리 있으면 막 단합심 생기고 그러니?” 따위 소리를 들은 이들의 기분과 비슷하다.
그러나 멤논은 대강 동족을 오랜만에 만나 고향에 온 듯 마음이 편해진 야만인처럼 말 없이 웃는다. 상대는 파라오니까.
세트나크테 역시 자신의 수하에게 관용적인 상사가 되어 기분이 좋아진다. 이렇듯 휘하의 야만인에게까지도 신경 쓰는 군주가 쿠마트를 다스리니 제국은 안정되고 번영하리라.
어쨌건 그렇게 겉으로나마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잠시 이어지다가, 다시 파라오의 말에 분위기는 일변한다.
“한 번, 저들을 위엄으로 대하였으니 이제는 자애로 대할 때가 되었군.”
본론으로 들어간다는 생각에 멤논은 정신을 집중한다. 이내 파라오의 말이 이어진다.
“이미 제국 내에서도 왕자에 대한 소식이 파다하니, 머잖아 하투샤에서도 알게 될 터이네.”
트로이아의 왕자를 쿠마트로 초청해 우호를 다졌다. 전쟁이 예비된 지금 이 순간에.
“저 소아시아의 야만인들이 뒤가 불안하겠군요.”
“못해도, 한 5,000명 정도는 가나안을 지키기 위해 머물러야 하지 않겠나.”
정복 전쟁이 예비되었단 소문이 퍼졌을 때, 그를 내버려둔 것이 불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었다.
아직 제국은 외부 확장을 노릴 때가 아니다. 아니, 외부 확장은커녕 지금도 내부의 불안 요소들이 산적해 있다.
새 왕조에 칼을 가는 아문의 사제들, 기껏 자신의 영지로 만든 땅을 빼앗기길 거부하는 지역 귀족들···.
그러나 이제 그 모두가, 파라오는 전쟁을 원한다 생각한다. 곧 페니키아의 상인들도, 히타이트의 하티인과 네샤인과 루위인들도 그리 생각하게 되리라.
그 생각만으로도 하투샤는 한쪽 팔이 묶인다. 가나안 땅으로 무리하게 진출한 대가를 이제 치루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간접적인 지원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페카문의 아들 호리와 이미 군사적 지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았네.”
사령관과는 이미 이야기를 끝냈다. 그런데, 굳이 멤논을 자리에 남겨 다시 이야기를 꺼낸다. 의미가 명확하다.
파라오가 손가락 2개를 들어보인다.
“2,000명.
물론 그들을 태우고 갈 배까지 준비해 둬야겠지.”
보병으로만 따지자면 8개에서 10개 중대 정도 되는 병력이다.
“적어보이지만 저 아카이아의 굶주린 해적떼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훌륭한 병력일 터이니. 그 병력의 지휘권을 자네에게 맡기지.”
“황송합니다.”
“그 이상은 내주기 어렵네. 아직도 제국은 분란의 세월을 온전히 이기지 못했어. 당장 내주기도 어렵겠지. 어차피 하투샤가 오기도 전에 대규모 군대를 보낸다면 트로이아에 손해만 끼칠 테니 상관 없겠지만 말일세.”
“···.”
파라오가 둘이던 때도 있었다. 형제와 부모자식이 서로를 죽이고 찬탈하던 시절도 있었다. 이름조차 불리어선 안 될 폭군이, 역시나 이름조차 불려선 안 될 신에 대한 신앙을 퍼뜨리던 것도 불과 수십 년 전이다.
100년 전 위대한 람세스의 시절 이후로 이어진 혼란이 진정된 지 오래되지 않았으니.
직업군인 2,000명 정도면 사실상 파라오가 하투샤에 내리꽂는 비수라 해도 무방하다.
하투샤가 얼마를 보낼지는 몰라도 20,000명에서 30,000명을 넘기지는 않을 테다. 그 10분의 1이다.
적군의 발을 묶고, 큰 규모의 지원군을 저 지중해 너머까지 보낸다. 이 정도면 동맹으로서 훌륭한 시작이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남았지.”
“지금쯤 사령관이 그들을 안내하고 있을 겁니다.”
“좋아. 따지고 보면 나를 권좌에 올린 것은 저자의 기지가 아니던가?
···부디 내 선물을, 만족스레 여겨줬으면 좋겠군.”
그러나, 파라오는 여기서 성의 표시를 끝낼 생각이 없었다.
***
“총사령관 호리, 설명은 모두 들었소만. 그러니까 군사적 지원에, 하투샤를 외교적으로 압박하고··· 그걸 전부 해준다고?”
“예, 전부 사실입니다.”
“파리스? 혹시 파라오가 뒤통수를 후려치려는 게 아닌지 확인해보시오.”
“모두가 그대처럼 남 득 보는 일 안 해주려고 혈안이 된 것은 아니오, 오디세우스. 그리고 상대가 아카이아어를 몰라도 맥락으로 대강 뜻을 유추할 수도 있잖소?”
“그래서 웃는 얼굴로 얘기 중인 거 아니오?”
“···.”
인간은 기본적으로 합리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우선해 움직인다.
일명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인간 모델.
스미스와 리카도부터, 마르크스, 케인스, 프리드먼까지 모든 경제학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대전제.
예외도 자주 있다지만 추상적인 ‘모델’이란 게 원래 그렇고, 과학적이고 거시적인 분석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 오차는 어쩔 수 없다.
아무튼··· 이는 웬만하면 뗀석기 시대의 사냥꾼부터 21세기의 방구석 인터넷 폐인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인간에게 적용되는 모델로 여겨지며, 아이깁토스의 파라오든 명나라의 황제든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들 역시 주어진 정보를 활용하여 자신에게 최선의 결과를 내기 위해 행동한다.
멍청해 보이고 실제로 멍청한 선택일지라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나름 합리성이 작동한다.
그리고 그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선택의 결과, 겉으로 보기엔 대단히 이타적으로 보이는 결과가 산출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중원의 어느 제국의 황제는 어느 날 아무 일도 안 하고 놀고 먹기로 결심하였다. 무려 30년 동안.
그러면서도 반역은 피하고 싶고, 권위는 유지하고 싶던 차에 번국의 전쟁 소식을 들었다.
번국을 지원하는 황제,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인가?
그래서 그는 제국의 기둥뿌리를 뽑아 번국을 지원했다.
그 제국은 명나라였고, 황제는 만력제이며, 번국은 조선이었다.
황실의 재정을 털어 남의 나라 백성을 위한 구휼미를 마련하고, 조선이 직접 마련한 병력보다도 더 많은 병력을 조선에 대한 지원군으로 편성하고, 아무튼 온갖 정신 나간 짓거리가 일어났지만 근본은 황제 개인의 권위욕과 명예욕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조선 입장에서는 알 게 뭔가, 결국 그렇게 물심양면으로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는 수십 년 뒤 알아서 관짝으로 들어가 상국으로서 횡포도 부릴 수 없게 됐는데.
선조도 웃었고, 만력제도 웃었으니, 만주족의 압제 하에 들어간 수천만 한족들의 피눈물만 제하자면 해피엔딩이었다 할 수 있으리라.
···파라오가 만력제라는 뜻은 아니다.
그 역시 자신과 자신의 제국을 위해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으리라. 혼란기를 끝내고 왕위에 오른 실력자가 그리 무책임하게 움직일 리는 없다.
하투샤? 제국의 강역을 빼앗아 가고서는 꾸준히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견제해야 한다.
아카이아? 어차피 멀리 있어서 정벌도 어렵고 통제 안 되는 해적 소굴이니 누가 정리를 해줘야 한다.
트로이아? 요새 강철도 나고 나름 부유해졌지만 어차피 거리도 멀고 솔직히 강철 좀 난다고 나라가 나일 강 유역만큼 부유해질 수는 없다. 지원해준다 해서 무리도 없다.
그렇게 합리적인 판단에 합리적인 선택이 쌓이고, 또 쌓인 결과가 이것이었다.
“감사··· 압도적 감사···!”
“···파리스, 왜 그러시오?”
“자애로운 파라오를 향한 감사를 몸으로 표현하는 중이오.”
“길에서 그런 짓 하면 부끄러우니 당장 일어나시오.”
“파리스 님? 오디세우스 님? 오시지요.”
나는 오디세우스의 말에 빠르게 몸을 털어내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마침 그새 무슨 건물 안에 가 있던 아이깁토스의 총사령관 호리가 다시 돌아와 우리를 부른다.
우리가 그 건물의 안쪽으로 들어가니··· 뭘 하는 곳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대장간이군. 그것도 금붙이를 다루는.”
“파라오께서 파리스 님을 위하여 새로운 보물을 주문하셨습니다. 지난번에 오염된 반지를 대신할 물건을 찾으라 하시더군요.”
“헌데, 저기 사제들로 보이는 이들이 있소만?”
흰 옷을 걸친 이들 수십 명이 어딘가를 둘러싸고 서서는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다.
일정한 리듬에 따라 수십의 목소리가 무언가 읊조리는 광경은 음산하고 장엄한 느낌을 주었다.
“예. 사제들이 맞습니다. 저기, 저쪽에 서 있는 이가 보이십니까?”
“보이오.”
“그가 오시리스의 대제사장입니다.”
“뭐라고?”
아니, 추기경급 인사가 왜 여깄어.
대제사장이 주문을 읊으며 사제 무리가 둘러싸고 있는 중심으로 걸어가 허리를 숙인다. 자세히 보니, 탁자 위에 무언가 올라가 있고 대제사장이 손가락으로 그 위에 무언가를 새긴다.
“대제사장께서 거룩한 문자들을 새기고 계십니다. 곧 헤카를 섬기는 신관과 셰드를 섬기는 신관이 또 다른 축복을 보물에 부여할 것입니다.”
그리고 총사령관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제사장이 그 무언가에 숨결을 불어넣고, 그러자 섬광이 사제 무리의 가운데서 일어난다.
그와 함께 저 멀리서 황소를 끌어내어 목을 치고, 염소를 잡아죽인다.
제물이 바쳐지고, 주문이 이어지고, 뭔가 성스러운 의식이 이어지는데··· 내가 알 수 없는 것들이다.
머지않아 섬광이 멎고.
대제사장이라는 인물이 웃는 얼굴로 내게 문제의 물건을 내민다.
이전의 반지처럼 호루스의 눈이 새겨진 목걸이다.
“파라오께서 내리신 물건입니다. 신들의 가호가 깃들었으니, 당신을 온갖 악으로부터 지킬 것입니다.”
나는 감사인사를 건네며 그를 목에 걸었다. 그러자 미약한 광채가 눈에서 뿜어져나온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가 준, 호루스의 눈이 새겨진, 마법의 힘이 깃든, 황금 목걸이.
나는 왠지 카드놀이가 하고 싶어졌으며, 동시에 밑장빼기가 심하게 땡겼으며, 파라오의 권한으로 몬스터카드를 특수 소환하고 싶어졌다.
“···고마워, 또 하나의 나.”
“뭐라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닐세.”
···아무튼 그랬다고.
파라오의 축성
쿠쉬(Kush).
중국인들이 남쪽에 사는 이민족들을 남만(南蠻)이라 불렀듯, 아이깁토스인들은 자기들 남쪽에 사는 이들을 쿠쉬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 영역은 오늘날 수단 공화국의 강역과 얼추 맞는다.
아카이아인들은 이들을 검게 탄 얼굴이라는 뜻의 에티오피아라 불렀으니, 멤논을 에티오피아의 왕이라 한다면 이곳의 사람이리라.
멤논이 에티오피아의 왕이라는 기록은 트로이 전쟁 전후의 서사를 다룬 서사시환(敍事詩環, Επικός Κύκλος)에서도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아’가 아닌 아르크티노스가 쓴 ‘아이티오피스’에 기록되어 있다.
근데 호메로스가 살아 있던 시절에야 아이깁토스가 완전히 맛이 가고 쿠쉬 왕국이 독립해 나갔지만, 지금은 아직 제국이 펄펄한 이집트 신왕국 시대다.
쿠쉬··· 그러니까 에티오피아 일대는 지금 아이깁토스 치하에 놓여 있다. 에티오피아를 지배하는 건 파라오에게 충성을 맹세한 독립 영주들, 족장들과 파라오가 파견한 관료들이다.
그러니까 에티오피아의 왕이라면··· 쿠쉬 총독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멤논이 옆에서 총독님 소리 들을 때도 그런갑다, 하고 넘겼는데···
“···쿠쉬가 파라오의 주된 자금줄이라더군.”
“어떻게 그렇게 되는 거요? 제국의 변방 아니오?”
“금광이 그쪽에 죄다 몰려 있다나.”
파라오의 최측근이다.
그것도 최근에야 임명되었단다.
정확히는, 멤논을 우리한테 사절로 보내기 직전에.
그냥 근처에 있는 야만인한테 적당히 던져준 감투인 줄 알았더니만.
부유한 변방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자율적으로 행사하면서, 당연히 토착민을 제압할 무력도 쥐게 되고, 역사적으로 여러 신들의 대제사장직이나 재무관 같은 직위까지 겸임하기도 하며, 까딱하면 반란도 일으킬 힘을 가진···
북부대공?
아니지. 남쪽에 있으니 남부대공이다.
아무튼 대강 변방에 사는 아카이아 출신 야만인인 그가 이런 직위에 올랐다는 건 의미하는 바가 명확하다.
“파라오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다는 말이오. 그러니 이렇게 많이 남겨주겠지.”
그러니 이 천년 아이템···이 아니라 부적도 줬을 것이다. 이걸 위해 바친 황소도 내가 본 것만 수십이었고 대제사장까지 제작에 참여했으니, 이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지원이리라.
“···고마워, 파트너.”
“···얼마 전부터 그 목걸이만 차면 이상한 소릴 지껄이던데, 역시 파라오가 이상한 세뇌 주문 같은 걸 걸어놓은 게 분명하오. 주시오. 아킬레우스가 반으로 쪼개볼 테니.”
“건드릴··· 생각도 마시오.”
카드놀이 근본 시리즈의 추억을 자극하는 아이템을 어디서 건드리려고.
그 뒤에 무슨 아카데미가 나오느니 무슨 오도방구 타면서 듀얼을 하느니(그 시절 학부모들은 자전거 타고 카드놀이 하려던 아이들을 말리기 위해 뛰어다녔다.) 하는 게 나왔어도 역시 내 마음속엔 파라오뿐이다.
아, 이야기가 딴 데로 샐 뻔했다.
“아무튼, 우리에 대한 파라오의 기대감이 아주 강한 듯하니 적절히 그에 부응해주면 얻을 게 많을 것이오.”
이렇게 지원을 받으면 아이깁토스에 종속되지는 않겠느냐고?
얼마 전까지 바로 앞마당이던 가나안 땅에도 독립 군벌과 유대 왕국이 일어났는데 통제 못했다. 걔네가 통째로 하투샤에 복속되는 걸 지켜보기만 했다.
그런데 육로로 이어져 있지도 않은 트로이아로 제대로 된 영향력을 뻗쳐 올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게 넌센스다.
어차피 파라오 역시 황상의 은혜에 감복한 북방 오랑캐들이 자연히 중화의 덕을 입어 복속해오는 상황 따위 바라지도 않을 거고.
결국 그가 보는 건 두 가지다.
하나는 국내의 여러 세력들.
피람세스에 온 뒤에야 알았지만 정복 사업이니 뭐니 말이 많았다지. 이 소문이 불안정한 국내 상황을 진정시켜 주리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 다음은···
“하투샤.
파라오가 하투샤를 신경 쓰고 있으니 여기서부터는 우리의 몫이오. 저들의 팔 하나 정도는 꺾어둬야 앞으로 우리가 아이깁토스와 교류할 때 면이 서겠지.”
나쁘지 않다.
어쨌건 트로이아 왕실의 일원이 아이깁토스 내에서 말도 안 될 정도로 높은 고위직을 차지했고, 아이깁토스의 군 사령관이 직접 군사적 지원이 있으리라 확답을 했다.
아이깁토스의 시민들 역시 우리와의 공조를 기정 사실로 알고 있는데다, 하투샤 역시 이에 외교적인 압박을 받을 테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보답으로 우리가 줄 건 많지 않다.
“···이기면 되는 거 아닙니까?”
“씁, 어른들 이야기하는데 끼어들고 그래.”
“어··· 죄송합니다.”
오디세우스가 농담처럼 막았지만, 아킬레우스의 말이 옳다.
이기면 된다.
어차피 아이깁토스는 우리를 향해 본격적으로 영향력을 투사할 형편이 안 된다. 간섭이든, 종속이든 걱정할 것 없이 저들의 지원을 활용해 승리하면 되리라.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파리스 님, 파라오께서 부르십니다.”
“곧 가지.”
질 생각 따위 애초부터 없었으니까.
***
여러 환관과 서기들의 안내를 받으며 알현실로 향하니, 그때와 같이 파라오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볍게 절을 올리고 보니 이번에는 그의 옆에 어린 청년 한 사람이 더 서 있었다. 누군지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파라오 세트나크테가 먼저 입을 연다.
“내 아들, 람세스일세.”
“그대들이 내 아버지의 손님들인가? 환영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