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306
“그대로··· 전달하겠습니다.”
이들은 ‘그냥’ 이방인이 아니다.
관료는 멤논에게서 정보를 전달받은 뒤 지사에게 전달하겠다며 급히 뛰어 근처의 청사로 향했다.
“지, 지사시여!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가?”
뉴욕 시민들에게 오사마 빈 라덴이 ‘그냥’ 아랍인이 아니듯.
“파라오 살해자 파리스, 파괴자 아킬레우스, 약탈자 오디세우스입니다!”
“뭐가 말인가?”
“그들이 지금 여기 와 있단 말씀입니다!! 파라오의 초청을 받았다 합니다!!”
지사는 그 순간, 까무러치지 않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
어떤 사회는 단순하다.
복잡한 전통과 섬세한 맥락이 쌓이지 않은 만큼, 하나하나의 행동에 담긴 의미는 직접적인 메시지만을 담으며 언어 역시 직설적이다.
일리아스에서 오디세우스가 자기 말에 대들며 연합군의 사기를 떨구는 테르시테스에게 어떻게 하던가?
교묘하고 정교한 논리로 그를 설복시켰는가?
왕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고상한 행동과 말씨로 그에게 인식시켜 굴복시켰나?
복잡한 정치적 맥락을 들먹이며 그의 입을 다물게 했나?
아니다.
그냥 팼다.
죽어라 패면서 혼냈다.
그러니까 아카이아 연합군의 병사들은 웃으면서 오디세우스에게 ‘거 참, 시원하게 패시는구려.’라면서 맞장구까지 쳐 준다. 그러자 실제로 병사들의 사기도 높아진다.
어떤 사회는 그보다는 좀 더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면 이곳, 거룩하고 비옥한 검은 땅 쿠마트의 질서가 그러하다.
한 가지 행동은 한 가지보다 더 많은 의미를 품으며, 그로써 생기는 영향 역시 훨씬 복합적이다.
여기, 하나의 행동이 있다.
‘파라오가 파라오 살해자, 파괴자, 비열한 약탈자들을 친히 초대했다.(사실 초대 안 했다. 자기들이 왔다.)’
그리고 여기서 복잡한 의미가 뿜어져 나온다.
먼저, 여러 파라오들이 내전을 벌이는 동안 페구아트와 그 일대를 반쯤 자신의 영지로 삼았던 페구아트의 지사는 이렇게 생각한다.
‘파라오의 의지가 외부로 향한다.’
당연한 귀결이다.
파리스는 전대 파라오를 살해하고 피람세스에 소란을 일으켜 새 왕조가 일어나게 만든 자다.
오디세우스와 파트로클로스는 지난 대약탈에 앞장서 공포를 퍼뜨리던 학살자들이다.
게다가··· 아킬레우스? 파라오에게 감히 대적했다던 그 남자? 말할 것도 없다.
그는 뒷구멍을 통해 하투샤가 아카이아인들을 움직여 가나안 땅을 흔들었다는 소문을 전해 들었었다.
그런 이들을 이쪽으로 포섭해낸 것이다. 하투샤의 용병들을, 쿠마트의 편으로 끌어들였다는 말이다.
즉 앞으로 이어질 것은, 저들의 난폭한 무력을 이용한 외부 정벌일 수밖에 없다! (아니다.)
그동안 내전, 분열, 반란으로 신음하던 쿠마트는 현 파라오 세트나크테가 집권하며 안정되었다.
즉, 각지에서 일어나던 신관과 귀족들의 토지 사유화와 반(半)독립 세력화에 제동이 걸렸다는 뜻이다.
세트나크테는 자신의 군사적 위용을 통해 여러 반란들을 직접 분쇄하며 파라오의 권위를 다시 끌어올렸다.
그리고 파라오의 권위가 끌어올려지는 동안 각지의 귀족과 신관 세력의 힘은 약화된다.
하지만··· 파라오의 관심이 외부로, 저 동쪽의 아시아와 서쪽의 리비아로 뻗친다면?
그 틈에 페구아트의 지사를 비롯한 각 지방의 세력들은 다시 숨 쉴 틈을 돌릴 수 있으리라.
빠르게 새 왕조의 외부 확장 정책에 발맞춰 파라오의 비위도 맞추고, 적당히 이권도 받아내고···
그들에게 희망이 생긴 것이다. (역시, 아니다.)
한편 소식을 전해 들은 쿠마트의 군사력을 책임지는 셰르덴(Sherden, 아마 사르디니아 즉 오늘날의 이탈리아 샤르데냐로 추정됨)인, 리비아인, 누비아인 용병들은 기회를 감지한다.
그 용병들을 고용하고 부리는 장군들도, 다른 쿠마트인 상비군들 역시 눈을 빛낸다.
전쟁이다.
그것도 지리한 방어전이 아니라 정복을 위한 전쟁이 다가온다. (여러 번 반복했지만, 아니다.)
저 아카이아인들을, 심지어 문자 그대로 자신에게 칼날을 들이대기도 했던 이들까지 포섭했으니, 새로운 무력과 함께 파라오의 위대한 의지는 나일 강 유역 바깥을 향하리라.
새로운 땅, 새로운 노예, 새로운 영광.
쿠마트 땅 전역의 직업군인들은 소식을 전해 들으며 전율한다.
각지의 신관들 역시 변화의 바람내음을 맡고 긴장하기 시작한다.
지난 난리 와중 아문의 대제사장이 하필 투스레트를 지지하는 바람에, 세트나크테가 파라오에 오른 지금 아문 신의 제단은 유례 없는 위기를 맞았다.
점차 쿠마트의 절대적인 권력으로서 위치를 굳혀가던 아문 신의 제단은 파라오의 노골적인 견제와 함께 다시 프타, 라, 그리고 다른 신앙들과 경쟁 구도 하에 놓이게 되었다.
아문 신전에 귀속되어 있던 수많은 토지들이 다른 신전에 할양되고, 여러 가축들이 몰수되어 파라오의 소유가 되었다.
하지만 전쟁?
그것도 아카이아인 왕자와 결탁하여 벌어질 대대적인 정복 전쟁이라?
분명 거대한 자원이 소모될 테고, 파라오는 여러 세력들에게 손을 벌릴 수밖에 없으리라.
특히 오늘날의 쿠마트에서 가장 부유한 여러 종파들에게도.
더 이상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이 전쟁을 지원하면서 파라오를 향해 충성심을 증명하고 세력을 키운다.
바람을 다스리는 아문, 태양의 라, 말로써 세상을 창조한 프타, 개중 어느 누가 위대한 제국의 척추가 될 것인가.
각 도시의 신관들이 긴장하며 사태를 주시한다.
각지의 귀족들, 관료들, 군인들, 신관들, 상인들, 기술자들, 족장들··· 모두가 휘몰아치는 이 폭풍 속에 뛰어들 준비를 마친다.
“뭐지? 왜 이렇게 대우가 융숭하지? 분명 멤논은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일 거라 했는데···.”
“파리스, 일단 저들에게 손부터 흔들고 뭔가 인상 깊은 미소부터 지어주시오.”
“아니, 오디세우스··· 저들이 왜 그러는지는 알고 대응해야···”
“저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소? 우리에게 뭔가 바라는 게 있는 것 같으니, 대강 ‘우리는 다 알고 있으며 네놈들에게 맞춰주겠다.’ 같은 표정부터 지어 보시오. 그래야 일단 얻어낼 게 많지.”
“···나중에는 어쩌려고?”
“나중을 왜 신경 쓰시오? 여기 영영 머물 사람도 아니고.”
“···아.”
그리고 일군의 아카이아인들은 어리둥절해하며 나아간다.
아낌없이 주는…
나일 강은 세계에서 가장 장대한 강이니만큼, 그 하류에 생긴 삼각주 역시 대략 벨기에만큼 규모를 자랑한다.
복잡하게 갈라지는 지류가 여러 하중도와 호수를 만들고 그 사이사이마다 번영하는 도시들이 들어찬다.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땅이 그 도시의 인구를 부양한다.
아무튼 나일 강의 수로는 매우 복잡하며, 파리스와 다른 일행들이 도착한 페구아트에서 피람세스로 향하려면 여러 도시와 여러 지류를 거쳐야만 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너무 오래 걸리지 않나요? 지나가는 모든 도시마다 들러서 무슨 총독이니, 무슨 지사니, 무슨 귀족이니 하는 사람들이랑 죄다 인사를 주고 받는데요?”
“모르지. 이게 아이깁토스의 예법일 수도 있고···.”
아킬레우스의 질문에 오디세우스가 천천히 답했다.
“···아니면, 쟤네들한테 뭔가 다른 꿍꿍이속이 있을지도 모르고.”
“오디세우스 님은 어느 쪽이 맞는 것 같습니까?”
이번에 파트로클로스가 묻자 오디세우스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답했다.
“후자.”
아무튼, 그렇게 기어가듯 트로이아의 사절단이 피람세스로 향하는 동안 자연스레 그들에 대한 소식은 아이깁토스··· 그러니까 쿠마트 전역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각지의 사제들과 귀족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그들이 가는 곳마다 구경꾼들은 점점 더 많이 몰려들었다.
경계심과 공포가 조금씩 가시자 그 다음에 남는 것은 기묘한 호기심과 뜰떠오르는 기대감이었다.
누군가는 생각했다. 이제, 저 사나운 아카이아의 해적들마저 길들이게 되었으니 해안은 안전할 것이라고. 어부와 상인들이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하는 말들이었다.
누군가는 또 다르게 생각했다. 이제야 저 위엄 있는 파라오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기울었으니 이 틈을 타서 빠르게 이전 시대에 지니고 있던 재산과 권세를 되찾아야 한다고. 테베의 사제들이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는 말이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했다.
기회가 찾아왔다.
곧 쿠마트 바깥을 향해 박차고 나갈 전쟁이 다가올 것이니, 이에 대비해야 한다.
야심찬 정복 사업이 다가온다는 사실은 어느새 모두가 공유하는 공공연한 상식이 되어 있었다. 모두가 저 동북쪽의 유대인들과 아무루인들을 정복할 파라오에 대해 떠들어댔다.
서쪽? 서쪽에도 역시 비옥한 땅이 있기야 하지만, 쿠마트만 못한 데다 가난한 야만인들투성이라 매력적이지 않은 선택지다.
남쪽? 그거야 쿠쉬 총독이 알아서 할 일이다.
지금도 아카이아인 사절단을 이끌고 있을 현임 쿠쉬 총독은 현지 족장을 임명했다 하니 인근의 야만인 부락들을 잘 길들이고, 황금도 잘 바쳐오리라. 괜히 헛바람 들어차서 반란만 일으키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나마 봐줄 만한 문명인들이 발붙이고 있는 땅, 적당히 풍요로운데다가 쥐고 있지 않으면 피람세스를 안전하게 지키기 어려워지는 땅.
역시 동북쪽뿐이다.
지중해를 따라 나아가는 만큼 해군이 중요해질 테고, 강력한 왕국들과 맞서야 하는 만큼 전차 부대의 역할이 막중해지리라.
역시 기회다.
그리고 전쟁을 기회로 생각하는 이들은 당연히 전사들이다.
각지의 영주들이 때 되면 군사를 모아오던 시절은 이제 먼 고대다. 이제 파라오의 휘하에 모인 직업 군인들과 용병들이 그의 지휘봉이 가리키는 끝을 따라 전진한다.
각지의 요새에서, 파라오의 명령을 그들은 기다린다.
“파라오께서 명하셨다?”
“그러합니다, 장군! 지금 당장 서둘러야 합니다!”
“그럼 당장 행차를 꾸려라.”
***
나는 적당히 고기 파이를 내려놓고 손을 씻으며 도시의 지사에게 웃어보였다.
“아주··· 즐거운 식사자리였습니다.”
“하하하, 아닙니다. 과연 저 북쪽 소아시아에 신으로 착각할 만큼 잘생긴 왕자가 있다더니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우리 말에도 능숙하시고, 아주 놀랐습니다.”
···아이깁토스인들이 아무리 친절해도 ‘와! 야만인 주제에 말도 할 줄 알고 음식도 잘 집어먹다니 대단해!’ 수준을 안 벗어나네. 뇌에 본능으로 박혀 있는 건가.
나는 적당히 인사치레를 건네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저 밖으로 새하얗게 빛나는 아이깁토스식 도시가 눈에 띄었다. 피람세스와 그닥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서 그런지 꽤 크고 화려하다.
“저, 저기! 그 왕자다!!”
물론 내가 도시를 보면 도시도 나를 본다.
관저 앞에 몰려든 군중 중 한 사람이 나를 보고 큰소리로 외치니 금방 소란이 번진다. 경찰 병력(그래, 여긴 그런 것도 있다.)이 그들이 관저 안으로 쳐들어오지만 못하게 막는다.
···화끈하네.
“멤논, 대체 무슨 소문이 퍼졌기에 이리들 구경꾼이 몰려드는 것입니까?”
“그야··· 그 유명한 파라오 살해자를 가장 먼저 구경하고 싶어들 하지요.
그 다음으로는 파라오에게 대적했다는 파괴자 아킬레우스, 나머지 두 사람은 그렇게까지 인지도가 높지는 않습니다. 아! 아닙니다. 오디세우스 님도 악명이 높지요.”
“···무슨 짓을 했길래?”
“몇몇 요새 앞에 신들께 남기는 예물을 바치고 도망쳤습니다. 나중에 요새 안으로 그 예물을 들여오니 안에 숨어있던 아카아아인 병사들이···”
“그야말로 기가 막힌 책략이었지. 즐거웠소.”
오디세우스는 멤논의 말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마지막 남은 파이까지 남김없이 집어먹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러자 도시의 지사가 웃으며 말한다.
“이제 그럼, 같이 사냥이나 가시지요. 여러분의 용맹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만큼 근방에 위험한 짐승들이 우글거리는 곳들을 몇 곳 골라놓았습니다.
사악한 하마와 사자들이 저곳에 가득한데 아무리 사절로 오신 여러분의 팔심이 강해도 저것들을 잡기는 어려울···”
“혹시, 그게 도시 북동쪽에 있었습니까?”
“맞습니다. 이미 멤논 총독께서 말씀하셨는지요?”
“···하하.”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가 멋쩍게 웃으며 주머니를 식탁에 내려놓는다. 지사가 열어보니 뭔가 짐승의 발톱 같은 게 몇 개씩 들어있다.
“사자가 덤벼들기에, 저 녀석들이 죽여버렸습니다.”
“···아! 역시 아무리 사나운 맹수라도 이국의 용맹한 용사들의 창칼 역시 견디지 못하는군요!”
“창칼은 아니고, 그냥 때려죽였습니다. 가죽이 상하는 게 싫다기에.”
“···.”
지사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린다. 뭔가 손님맞이 계획을 망쳐버린 것 같아 미안해지는데, 오디세우스는 두 놈의 머리를 헝클며 자랑스럽다는 듯 웃는다.
···어색한 침묵을 견디기 어렵다.
“크흠, 그럼 일단 조금 이르더라도 간식거리를 내올 터이니 연회를 기다리면서 담소나 나눕시다. 저녁의 연회 역시 마음에 드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어 송구하군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파라오의 명을 받아 이 일대를 다스리는 이로서 맹수가 손님을 위협하게 두었으니 사죄해야 할 것입니다! 손님께서는 아무 걱정 없이 머무르다 가시면···”
-쿵! 쿵! 쿵! 쿵!
뭐지?
갑자기 밖에서 소란이 일어나 지사의 말을 끊는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발코니 밖을 향한다.
거대한 북소리가 울리고 나팔이 그 뒤를 이어 소리지른다. 금속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에, 수많은 이들이 걸어오는 소리가 겹치자 길거리의 군중들 역시 곧장 좌우로 비켜선다.
···못해도 수백 명 정도가 동시에 걸어오고 있지 않는 이상에야 이런 소란이 일어날 수 없다.
수백 명 정도의 걸음, 북과 나팔, 그리고 꾸준히 들려오는 금속음.
이 시대에, 이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밖에 없다.
“아아! 파라오의 명을 받아, 왕의 서기! 북방의 감시자! 군의 사령관의 직함을 받은 페카문의 아들 호리!”
군대가 왔다.
“그분께서 파라오의 손님들을 접견하러 오시니 도시의 지사는 문을 열고 그분을 환영하라!”
지사는 뭔가 끙 소리를 내며 앓다가 손짓한다. 그러자 여러 환관과 노예들이 바쁘게 움직이니 곧 관저의 문이 열린다. 몰려들었던 군중은 흩어지지 않고, 새로운 이벤트에 외려 환호한다.
발코니 아래를 계속 내려다보니 어두운 피부에 화려한 복식을 걸친 누군가가 시종들의 부채질을 받으며 건물 안쪽으로 들어온다. 곧 묵직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그가 계단을 올라와 우리 앞에 선다.
건조하고 차분한 눈빛을 한 고관이 우리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파라오께서 피람세스로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
파라오가 군의 사령관을 내보내 아카이아인 왕과 왕자들을 맞이한다.
···갑자기? 대체 왜? 프랑스 대통령이 국방부장관을 내보내 은평구 구의원을 맞이한다고? 그것도 파리를 향해 개선식 치러주듯이 행진하면서?
말도 안 되는 사태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심지어 이건 나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마, 마, 맙소사··· 드디어 파라오께서 완전히 결단을 내리신··· 이, 이제 제국 전체가···”
방금 전까지 나랑 수다 떨던 도시의 지사 역시 몸을 벌벌 떨면서 뭔가 중얼거린다. 사령관이라는 인간이 옆에 붙어 있으니 파라오가 뭘 했고, 무슨 결단을 내린 건지 물어보려 해도 물어볼 수가 없다.
아무튼 갑자기 대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나일 강을 따라 내려가게 된 나는 강 양옆으로 개미떼처럼 몰려든 무리를 보고 긴장한다.
아카이아든, 트로이아든··· 변방의 작은 도시국가들은 파악하기가 쉽다. 군주의 손아귀에 직접 들어오는 인구라 해봐야 보통 수천 명 정도다.
그런 곳에서 나랏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고 싶나? 조선시대 원님들 생각하면 딱이다.
족장들(이방들)을 불러모아 병사를 훈련하든, 재판을 열든, 어디 망가진 둑을 고치든 집단의 크고 작은 일은 모조리 궁전(관아)에서 왕과 장로들이 뚝딱 짧은 회의로 결정한다.
하지만 아이깁토스는 너무 거대한 사회다.
와! 군주가 원님재판 하는 게 아니라 법관과 경찰이 따로 있다! 적당히 족장들이 동네사람들 모아다 싸우는 게 아니라 직업군인이 따로 있다!
그렇다. 군주랑 직접 만나서 담판 보고, 알현실 주위 분위기만 보면 대강 동네 굴러가는 느낌이 보이는 아카이아와는 다르단 말이다.
어느 도시를 가든 알 수 있는 건 대략적인 분위기뿐.
그리고 얼마 전부터 뭔가··· 내 눈에 열기가 보인다.
단순히 아카이아인을 보고 무서워서 도망가는 꼬맹이들은 이제 없다. 몰려드는 구경꾼의 인파에 휩쓸리지 않도록 각 도시에서 우리에게 호위를 붙여준다.
우리가 어느 도시에 다다르면, 곧장 신관이니 군인이니 무슨 서기니 하는 인간들이 죄다 몰려와 우리랑 악수 한 번씩은 해보려고 애쓴다.
아니, 애당초 우리의 목적은 파라오를 알현하는 것 아니었나? 눈에 띄지 않게 빠르게 움직이겠다던 멤논은 갑자기 계획을 바꿨는지 순회공연이라도 하듯 느긋이 루트를 짠다.
내가 멤논에게 분위기가 이상하다 물으면, 그는 묵묵부답으로 넘기거나 화제를 돌릴 뿐이었다. 누구 하나 이 열기의 정체에 대해 시원스레 말해주는 이가 없다.
“저기, 피람세스입니다.”
“우와아아아아!!!!”
“저기 왕자 파리스다!!!!”
“파괴자 아킬레우스도 있다!!!!”
그 상태로 결국 여기까지 왔다.
아니, 말 통하고 식사 예절 좀 알면 뭐하냐. 영어 잘한다고 유학 가서 잘 사는 거 아니잖아. 심지어 나 빼고는 다들 아이깁토스어 할 줄도 모른다. 오디세우스만 띄엄띄엄 몇 마디 뱉을 줄 알지.
갑자기 여기 뚝 떨어진 이방인에게는 이곳의 분위기를 감지하는 것만으로도 난감했다.
다들 우리만 보면 쑥덕대면서 “과, 과연··· 파라오께서 드디어···!” 같은 말이나 중얼거리고, 심지어 나도 말이란 걸 할 줄 안다고 말해주면 그런 언급마저도 꺼내보이지 않았다.
뭔가 벌어지고 있다.
그것도 나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다.
근데 나만 빼놓고 벌어지고 있다.
그 와중에 오디세우스는 중간중간 “후후, 이제야 알겠소?” 같은 말이나 꺼내면서 몇 번이나 뇌물 챙겨먹었지만, 나는 오디세우스 협박해서 뺏어먹은 것 말고는 얻은 게 없다.
정신이 없다.
“저기로, 곧장 걸어가시면 됩니다. 파라오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궁전 코앞이다.
“···정말 이대로 가면 되는 거요?”
“그러합니다. 저희도 따라가겠습니다.”
나, 오디세우스, 아킬레우스, 파트로클로스.
거기에다 무슨 뭐시기의 아들 뭐시기라는 아이깁토스 총사령관, 우릴 데려온 멤논.
이 인원 구성으로 우리는 저벅저벅 궁전의 길고 높다란 복도를 따라 걷는다. 드높은 천정에 우리의 발소리가 울려서 되돌아온다.
아이깁토스를 다룬 할리우드 영화에서의 삭막한 풍경과는 완전히 다르다. 수천 년 뒤 벽의 색칠이 모두 벗겨지고 보석도 죄다 도굴당한 황량한 폐허가 아니다.
화려하게 칠해진 벽화에, 벽과 기둥과 천정 여기저기에 금과 은이 씌워져 있고, 그만큼 화려한 복식을 걸친 고관들이 끊임없이 복도를 오가며 우리에게 인사를 올린다.
그리고 조용하다.
공기가 무겁다.
나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는데.
‘아카이아인들이 쳐들어왔을 때 파라오가 직접 현신해서 물리쳤다지.’
신들이 실재하는 세계에서, 신왕(神王)은 어떤 존재일까.
곧 문이 열리고.
“왔는가.”
저 드높은 단 위의 찬란한 옥좌에서, 햇살처럼 제왕의 옥음(玉音)이 쏟아진다.
“먼곳에서 온 사절들이여, 내 그대들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여러 번 고민했는데 마침 즐거운 소문이 있어 그를 차용하기로 하였네.”
갑자기 내리쬐는 서광에, 나와 다른 이들은 모두 눈살을 찌푸리며 겨우 위를 바라본다. 그러자 마치 인간의 형태로 만들어진 태양처럼, 한 남자가 서 있다.
“···나의, 전우들이여.”
파라오다.
…파라오
전우(戰友).
전쟁터에서 함께 싸우는 이들을 친근하게 부르는 말이다. 나도 안다. 근데···
“···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