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365
그리고 놀랍게도 이들이 내 국정 운영의 핵심 인사들이다. 4명 중 반은 광신도에 1명은 인간조차 아니지만 아무튼 그렇다.
-탕!
나는 내 등 뒤에 펼쳐놓은 벽, 거기에 붙여놓은 거대한 크기의 검은 석판을 두드렸다. 그 위에 대강 석고랑 이리저리 해서 만든 분필 대용품으로 커다랗게 써놓은 글씨가 드러나 있다.
-‘안탄드로스 메트로폴리스 건설 계획.’
“그대들을 부른 것은 역시 이것 때문일세. 아까 간단하게 안내해놨으니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지.”
그래. 이들을 빼놓고는 안탄드로스의 확장 계획에 대해 논할 수조차 없다. 나는 손을 들어 조잡한 약도에 간략하게 표시된 케브렌 강을 두드렸다.
안탄드로스의 척추가 되는 강이다.
“일단 도시는 케브렌 강을 중심으로 확장할 예정일세.”
“케브렌 강? 아빠한테 도와달라고 해? 아, 맞다. 아빠가 너 한번 보자는데.”
“···.”
“왜 그래? 왜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몸이 뻣뻣해지고 그래?”
찔려서.
왜 부르는지 짐작되는 이유가 너무 많아서.
케브렌 강의 지류에다 해온 짓도 많고, 앞으로 할 짓도 너무 많아서.
“그, 그건··· 나중에 고려해 보자. 당장은 물난리만 안 나고 강이 오염되지만 않으면 되니까.”
나는 이노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생각한다. 아무튼 간에.
수운.
안탄드로스도 원래는 항구를 접하는 도시였다. 그를 통해서 강철을 수출하거나 제철, 제강에 필요한 원료들을 수입해왔고.
안탄드로스와 그 근교에서야 철제 농기구도 쓰이고 수천 명이 철제 무구로 무장하지만, 여전히 지중해의 다른 지역에서 강철은 다루기도 쉽지 않고 제대로 녹여 사용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아직까지, 강철은 황금보다 비싼 귀금속이다. 트로이아의 영향력을 벗어나면 말이다. 조금씩 강철의 값이 내려갈지 몰라도 당장은 아니다.
즉, 내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의 대부분은 상대적으로 소규모에 불과한 강철의 대외 수출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안탄드로스가 바다와의 연결을 잃는다면 내 수입은 급감한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 시대에 수운이 가져다주는 이점을 생각하면 바다와의 연결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수천 년이 지나도 그렇지만, 대량의 화물을 옮길 때는 육로보다 해로가 훨씬 저렴하고 빠르다. 공업이 발전한 근대도시들 중 해안에 접하지 않은 도시를 찾기가 어려울 거다. 있더라도 적어도 강이나 호수에는 접하고 있으리라.
“고로, 안탄드로스는 케브렌 강의 수운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어야 한다. 수운을 통해 도시 전역을 연결하고 대장간이 자리한 ‘구’시가지를 바다까지 잇는다.
그게 당장의 계획일세.”
···그래. 여기까지 요약된 바를 훑어보면 알 수 있겠지만 이 도시는 굉장히 특이하다.
“명심하게. 이 도시는 칼리폴리스나 트로이아처럼 주요한 교역로에 접하고 있지 않네. 이 일대에 비옥한 평야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아, 목재와 타르의 수급이 원활하긴 하다. 그러니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서도 아이네이아스가 함대를 꾸린 장소가 안탄드로스로 나오겠지.
하지만 그 외에, 원래 역사에서 안탄드로스가 대단한 역할을 하긴 하던가? 큰 족적을 남기던가?
내가 알기로는 그렇게 아이네이스에서 언급된 것도, 안탄드로스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몇 안 되는 사례일 뿐이다.
이 도시는 에게 해를 마주한 수십, 수백 개의 작은 도시들 중 하나로 남아 세상에서 잊혀졌다.
대단한 전략적 요충지도 아니다.
주요 교역로에서는 빗겨나 있다.
농업 생산력을 받쳐줄 평야가 드넓게 펼쳐지지도 않았고.
특별히 귀중한 자원이 많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종교적, 정치적 상징성이 받쳐주지도 않는다.
역사적인 사례들을 보자.
근처에 있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또는 이스탄불. 흑해와 지중해의 병목을 쥐고 있다.
한양 또는 서울. 한반도의 중심인 데다 한강에 닿아 있고 방어에도 유리하다.
도쿄. 강원도만 한 넓이의 광활한 간토 평야가 그 주위로 자리잡고 있다.
로마. 천년제국의 심장이자 보편교회의 중심지라는 역사성이 소도시로 전락했던 곳을 근대 통일 이탈리아의 수도로 부활시켰다.
안탄드로스에는 저 도시들을 수천 년 뒤까지 존속시킨 그런 밑바탕이 없다.
그럼, 무엇이 안탄드로스를 강력하게 만들었는가?
답이야 뻔하다.
오로지 강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이 노리던 강철이 이곳에 있었다.
그렇다 해서 이 근방에서 질 좋은 철광석이 나오는가? 아니다. 동쪽 아드라미티온 인근의 광산에서 채굴해 온다.
석탄은? 말해 뭐하겠나. 코크스의 재료가 될 역청탄을 수입하러 흑해까지 배를 보내고 있는 실정이다.
원자재는 대부분이 수입. 안탄드로스가, 그러니까 내가 쥐고 있는 가장 결정적인 키는 고도로 숙련되고 잘 조직된 기술자 집단과 완비된 생산 설비뿐이다.
···이 도시는 어쩌면, 세계 최초의 공업도시일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내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여왔구나 싶어 헛웃음이 나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긴장감에 식은땀이 흐르기도 한다.
수천 년을 앞선 질 좋은 제철, 제강 기술이 있다고?
“스클레오스 아저씨? 지금이야 대장장이들이 저를 향한 충성심으로 이곳에 붙어 있지만 몇 세대만 지나면 각지에 흩어질 수도 있어요.”
“···안다.”
다른 도시로 떠난 그들이 이곳에서 쌓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제철용 고로와 제강용 도가니로를 재현할 수도 있고.
물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겠지만, 강철은 황금보다 귀한 사치재인 ‘동시에’ 전략자원이다.
그런 강철을 양산할 수 있다면, 자원을 아끼지 않을 이들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나머지 기술과 학문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 분야를 관장하는 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오소르콘, 말해 보게. 지금 갑자기 내가 떠나버린다면 아이깁토스인들이 이곳에 머무를까? 아니면 내 뒤를 따를까?”
“열에 아홉은 망설이지 않고 주군의 뒤를 따를 것입니다.”
오소르콘은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열에 하나는 망설이다가 뒤따르겠지요. 이 도시의 수많은 장인들, 학자들··· 모두 뒤돌아보지도 않고 당신과 함께하려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노이토스, 당장 내가 죽고 이 도시의 대장장이들과 기술자들이 모두 흩어진다 생각해보게.”
“···상상하기도 싫은 가능성이군요.”
“상상하게. 상인으로서, 자네가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있는가?”
아노이토스는, 항상 기인처럼 나를 우러르던 아노이토스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전혀 없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이노의 손을 잡았다. 이노는 내가 뭘 물어볼지 이미 알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 도시의 방비가 튼튼한 건 공동주택 덕분인 것도 있지만 시민들이 잘 조직되고 무장된 것도 커.”
내가 아는 최고의 전략가가 확답을 내놓았다.
“도시가 스스로 죽어간다면 안탄드로스의 시민들은 침략에 버틸 수 없어.”
이 도시는 특별하지 않다.
내가 특별하다.
내가 심어놓은 제철과 제강의 기술이 특별하다.
획기적인 농법은 철제 농기구가 받쳐주어야 하고, 도로망은 안탄드로스의 재력과 패권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기술자들과 학자들이 모여 있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저들에게 신앙에 가까운 맹목적인 충성심을 이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항해학교를 중심으로 한 기술자들의 공동체도, 결국 충성심 외에 그들이 이곳에 머무를 이유를 마련하려 만든 것이니.
공업도시는 그 산업 역량의 우위를 잃으면 몰락한다. 디트로이트와 멘체스터가 그랬듯이.
“나는 이 도시가 수백 년 뒤에도, 아니 수천 년 뒤에도 무너지지 않도록 만들고 싶네.”
“···.”
“···.”
“그래서 내가 낸 결론은 이걸세.”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뿐이다. 세계를 정복하거나, 안탄드로스를 제외한 나머지 세계가 청동기 문명에 머무르도록 억압할 게 아니라면야.
“언젠가 강철 따위가 중요하지 않을 정도로, 안탄드로스를 키워야 하네.”
침묵이 감돈다.
너무 머나먼 미래의 이야기였나? 너무 막연했나?
그럴 수 있다. 나는 손뼉을 치고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목소리 톤을 높였다.
“뭐, 일단 여기까지는 나중에 차차 생각하면 되겠지. 아노이토스, 자재는 충분한가?”
“예! 인근의 광산들에서 나오는 대리석은 모조리 긁어모으고 있습니다. 벽돌과 기와 공장 역시 가동이 준비 중인데 다만 인력이···”
“말만 하게. 인력은 충분하네.”
그것도 만 단위로 충분하지.
내 말에 아노이토스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숙인다. 이노 역시 한숨을 내쉬며 내 어깨에 턱을 올려놓는다.
“언니들··· 설득한다고 엄청 고생했고, 엄청 오래 걸렸어. 목재가 부족하지는 않을 건데, 보상이 있어야 할 거야.”
“걱정 마. 요정들한테 바칠 장난감이랑 제물은 이미 잔뜩···”
“나에 대한 보상.”
“···앞으로 일 끝나고 돌아가자마자 쉬는 일 없이 오징어 놀이 같이 해줄게.”
“최소 3시간. 코리토스랑 멍멍이도 같이 하고 싶대.”
“···최소 3시간.”
“아주 좋아.”
이노가 웃으며 내 뺨을 꼬집는다. 다음에는 스클레오스가 헛기침을 켜면서 입을 열었다.
“대장간이 완전히 다시 가동되려면은 시간이 걸릴 듯싶구나.”
“괜찮아요. 인력 문제가 해결된 덕에 당장 자금이 크게 쪼들리지 않으니까요. 대신, 대장간이랑 강철 관련해서는 나중에 좀 길게 얘기를 나누죠.”
“그래. 조만간 대장장이들을 모아보겠구나.”
이제, 오소르콘이 나설 차례다.
그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양조장들은 미리 옮기고 있습니다. 한 곳으로 모아서 관리하면 되겠습니까?”
“자네가 관리하게. 화재 위험이 없도록 주의하게.”
“이를 말씀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제게 맡기신 다른 연구는 여러 연금술사들을 모아 진행하고 있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좋네.”
가장 기초적인 것들은 모두 정리되었다. 그러니까, 도시를 본격적으로 건설할 수는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내가 참고할 도시 모델은 역사에 존재하지 않는다. 원래 세계에서 청동기 시대에 제강업으로 성장한 도시 따위 있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당장 이 세상에는 정치적, 종교적, 군사적 패권에 따라 움직이는 도시들이 주류다.
그 거대한 피람세스만 하더라도 람세스 2세가 북방을 견제할 목적으로 건설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화려한 위세를 자랑하지 못했을 테다.
“강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도시, 그 뒤로 시가지는 점차 확장될 걸세. 수도교를 대대적으로 확장해서 식수를 끌어올 준비를 하지.”
일단, 내 계획에 따르면 안탄드로스는 케브렌 강을 따라 길쭉하게 뻗어나가는 독특한 구조로 확장하게 된다.
케브렌 강의 수운을 따라 교통이 이루어지고, 아마 길쭉한 수도교와 하수도 두어 줄기가 도시 전체를 도시 전체를 가로지르며 상하수 시스템을 정리할 것이다.
수차를 여러 채 더 지으면서 대장간 이외에도 다른 제재소나 제분소 단지를 확장할 생각도 있다. 케브렌 강을 중심으로 다양한 생산업들을 활성화하고 주변 농촌과의 분업 관계를 확고히 하는 거다.
···물론, 한계가 많은 도시 설계다.
길쭉한 구조 때문에 교통에 불편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은 차치하자. 아노이토스의 차륜선 버스가 버텨줄 거라 생각하자.
하지만 교통 문제를 빼고서라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방어의 문제.
당연히 지금 당장은 외침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아테네가 그랬듯 도시를 따라 길쭉한 형태의 성벽을 쌓는다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확장에 취약하니 끌리지 않는다. 애당초 시가지는 안탄드로스처럼 밀집된 공동주택으로 건설할 생각이기도 하고.
그러니 좌우 근처에 방어용 위성도시들을 박아넣으면서 육로로 이어질 침공에 대비한다.
물론 점차 좌우로 뻗어나갈 안탄드로스의 시가지가 그 위성도시들을 차즘차즘 집어삼키겠지만.
끝내, 신들이 새로 만들어준 평야를 전부 채워버릴 때까지.
바다를 통한 침공은? 본격적으로 항해학교와 조선소가 다시 가동되면 앞으로 수백 년 동안 지중해는 안탄드로스의 것이다. 걱정할 이유가 없지.
물론 지금 당장 이 평야 전체를 도시로 메워버릴 정도로 안탄드로스에 사람이 많지는 않다. 수십만에서 백만에 가까운 도시를 유지하려면 어마어마한 생산력이 들어간다.
그게 가능하려면··· 아이깁토스와 같이 축복받은 환경을 갖추고 있거나.
아니면, 로마처럼 전세계적인 제국과 유통망을 완성하거나.
둘 중 하나다.
나는 거기까지 뻗어나가던 생각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자기 수많은 업무를 떠맡은 저 네 사람(요정 포함)의 눈에도 피곤한 기색이 엿보이지만···
그를 피하지는 않았다.
그들 역시 기대하고 있으니까.
이 도시가 찬란히 빛나며 이어지기를.
잊혀지지 않기를.
전문가 (2)
나는 스클레오스 아저씨의 뒤를 따라 걸어가다가, 낯선 얼굴들을 마주한다. 원래 이 대장간에서 내 눈에 ‘낯선 얼굴’이 들어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닌데.
지금 내 앞에 있는 이들 중 몇몇은 연장을 내려놓고 어색하게 머리를 조아린다. 저들이 인사를 올리는데 워낙 다양한 언어로 들려오는 통에 몇 마디는 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저들의 작업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슬슬 물러선다. 그러자 저 대장장이들도 내 배려에 감사하며 곧장 하던 대로 구리를 녹이고 납을 구부린다.
납, 구리, 아연, 금, 은, 청동 등등을 만지작거린다.
저들은 안탄드로스의 철을 다룰 줄 모른다.
“요새 신입들이 조금 늘었잖아요?”
나는 그들과 충분히 거리를 벌린 다음 스클레오스 아저씨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아저씨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방금 마주쳤던 대장장이 수십 명을 조용히 내다보더니 고개를 까딱인다.
“···허, 수백 명을 조금이라 하기는 어렵지 않겠느냐?”
전쟁 때 수많은 이들이 난리를 피해 안탄드로스로 들어왔다. 양치기와 도적떼와 상인과 농민들이 우르르 몰려왔는데, 대장장이가 거기서 예외일 리는 없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도, 그들은 대부분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이유는 명확했다. 이 도시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게 장식된 신상이 누구의 것인가?
헤파이스토스. 게다가 하루에 24번 움직이며 망치를 두드리기까지 한다.
안탄드로스는 대장장이들을 위한 땅이다. 대장장이의 자식들이 가업을 물려받더라도 다리를 분지르거나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고도 도시에서 존경받는 지위를 누릴 수 있다.
“신입들이 적응은 잘하나요? 많은 게 낯설 텐데.”
“···적응이라.”
내 말에 스클레오스 아저씨는 조용히 뺨에 남은 작은 화상자국을 쓰다듬으며 나를 내려다본다.
“네가 말하는 낯섦이, 단순히 말이 다르다거나 하는 문제에 대한 것은 아니겠지.”
“그렇죠.”
“···혼란스러워하더구나. 처음 안탄드로스에 왔을 때는 다들 긴장하면서도 기대감에 차 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냥 자기들끼리 여기저기 공방을 늘어다 놓고 일하는 중이다.
보시다시피.”
나는 스클레오스의 말대로 이리저리 대장간을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철을 위한 시설들이 설치된 큼지막한 공방들 너머로 공간을 잘게 쪼개 겨우 비집고 들어간 새 공방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곳에서 새로 온 대장장이들은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구리 광석을 녹이고 납 막대를 구부리고 아연을 잘라내면서.
“상황이··· 대강 보이네요.”
혼란스러워할 수밖에 없다.
본래 이 시대의 대장장이란, 명품 시계 제작자나 보석 세공인 같이 주로 사치품을 만지는 수공예 장인이다.
금속 자체가 귀한 시대다. 철이든, 금이든 청동이든 모두 귀금속처럼 취급된다.
안탄드로스의 권역 바깥으로 나가면 금속으로 된 일상용품은 정말 드물고, 결국 무기나 사치스러운 물건을 만드는 게 대부분이다. 내가 처음 대장간 일을 배웠을 때도 그랬다.
하지만 안탄드로스에서는 아니다.
안탄드로스에서 대장장이란, 특히 철을 다루는 대장장이들이란 진정한 의미의 생산업자다.
기술집약적인 시설을 통해 대량으로 철을 양산해 다양하게 가공한 다음 곳곳에 보급한다. 그게 대장장이의 일이다.
비유하자면 스위스에서 일하던 시계 장인들을 쿼츠식 디지털 시계 공장에 초빙해 온 셈인데.
그렇다고 저 숙련된 장인들에게 당장 잡일 따위를 시킬 수는 없으니 자그맣게나마 공방을 차려 운영하게들 둔 것이었다.
그 덕에 안 그래도 번잡스럽던 안탄드로스의 대장간이 더 어지러워졌지만.
둘러보면 대장간 지구 여기저기가 헐리기 직전의 구룡성채처럼 오밀조밀하고 복잡하게 꼬였다. 좁다란 골목들 사이로 몇 개나 되는 공방들이 힘겹게 들어차 있다든가.
-저벅. 저벅. 저벅.
내가 이곳저곳을 그렇게 기웃거리고 있자니, 멀리서 나나 스클레오스 아저씨의 것이 아닌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아저씨는 오랜 세월 큰 소음에 청력이 상했다 보니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나는 그 인기척을 빠르게 감지했다.
“저··· 와, 왕이시여?”
뒤돌아보자 아까까지 주석과 구리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대장장이들이다.
얼굴 하나하나는 낯설지만 그래도 몇 달 동안 마주쳐 온 이들이다.
저 말씨나 자주 만지작거리는 일을 확인하니 그들이 어디서 온 이들인지 대강은 짐작되었다.
내 기억으로 저 중 키가 큰 남자를 따라온 이들은 아드라미티온에서 온 미시아인이고.
한쪽 팔에 유난히 흉터가 많은 자 주위에 몰려 있는 이들은 아카이아인 해적들의 발흥에 질려 넘어온 레스보스인들인 것 같은데···.
뭐, 이제는 다들 안탄드로스인들이니 참고사항일 뿐이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그대들의 왕일세.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고, 무슨 일인가?”
그리 웃으며 말을 건네도 저들은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고 내게 조심조심 고개를 숙인다.
“···저희가 서로 생각하기로 꼭 전해 드려야 할 말씀이 있을 것 같아 이리 모였습니다.”
어느새 나와 스클레오스의 주위로 몰려든 대장장이들만 하더라도 수십 명이다. 대부분은 안탄드로스에서 길게 일한 이들이 아니다.
최근에 합류했거나, 그게 아니라면···
“안 그래도 스클레오스 님께서 대장간 시설을 재정비한다고 말씀하시기에.”
“의견이 있다는 말인가? 이렇게 많은 이들 모두가?”
“예. 꼭 드려야 할 말씀인 듯하여.”
강철을 주로 다루지 않는 이들.
아무리 일이 바빠져도 대장간에서 관심을 끈 적은 없다. 다른 건 몰라도 제철과 제강에 대한 일에 대해서만은 끊임없이 체크하고 있으니.
이들의 얼굴 중 제철 작업에서 자주 보이는 이들은 없다시피 했다.
수십의 대장장이들은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며 눈치를 본다. 그러다 몇 사람이 서서히 걸어나와서 나와 스클레오스 앞에 고개를 숙였다.
“···왕이시여, 이 도시에 강철이 몹시 중요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왕께서 이루신 부의 대부분이 이 대장간의 강철에서 나왔음도 알고 있습니다.
허나, 이렇게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대장간에서는 주석과 아연과 구리를 녹이고 다루기가 너무도 어렵습니다.”
“그러합니다. 안 그래도 금이나 다른 귀한 금속들은 챙기는 것조차 극히 까다로운데 이리 혼란스러우니···”
“···흠.”
나는 다시 주위를 돌아본다.
대장간 지구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공방들이 이어지면서 이루어졌다. 그게 이 시대의 대장장이들에게는 익숙하니까.
저들은 원래 소량생산에 종사해 온 이들이다.
자기 가족들, 제자들, 잡부들 몇몇이나 데리고 소소하게 금목걸이나 반지 정도 만드는 게 주된 일과였다. 좀 큰 규모의 일이라 해봐야 장식용 솥이나 화로 따위를 짓는 게 전부였고.
그렇게 대장장이들에게 익숙하고 편한 구조의 공방들 사이사이에 제철 시설을 배치했다.
역청탄을 쪄서 코크스로 만드는 코크스로(爐)나, 그 코크스와 철광석을 태워 선철을 만드는 용광로, 용광로에서 나온 선철을 다시 강철로 만드는 도가니로가 곳곳에 끼어 있으니.
심지어 그것들은 작은 공방 한두 곳에서 사람 서너덧 명 동원한다고 관리하고 운영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케브렌 강의 유량과 유속이 급변하면서 시설이 대부분 멈춘 것만 봐도 알 수 있지만, 저 화로들을 수력으로 돌릴 수차는 대장장이들이 직접 뚝딱거려서 움직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