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41
41화. 안도
“아겔라오스의 아들 파리스라 합니다.”
“···파리스?”
“그렇습니다. 제 아버지께서 저를 배낭(Πᾰ́ρη, 파레)에 넣어서 집으로 데려오셨다 하더군요. 그래서, 제 이름을 파리스(Πάρις)라 지으셨다 합니다.”
“하하, 재미있는 이름이군.”
내가 이름을 말하자, 안키세스의 눈이 기묘하리만치 크게 떠진다.
빠르고 능숙하게 침착함을 가장하지만, 입술이 마르는지 혀로 입가를 핥는 저 습관적인 동작.
남들의 시선따위 신경쓰지 않고 노골적으로 나를 훑는 저 시선.
안키세스는 나를 안다.
더 정확히는
내 정체를 안다.
“아프로디테 맙소사··· 정말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구나. 지고의 아름다움 그 자체이신 아프로디테 님의 축복을 받았어.”
“감사합니다, 안키세스 님.”
축복은 무슨. 폭탄을 떠앉았다는 쪽이 사실에 더 부합할 설명이리라.
그러나 안키세스는 제 딴에는 나름 진심이었는지 계속 감탄하며 나를 바라보다,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말한다.
“아, 내 아들이 딱 네 또래구나. 아이네이아스.”
아이네이아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내 앞에 다가선다.
그리고 나 역시 만만찮게 당황한다. 나뿐만 아니라 내 주위의 모든 장로들과 총독, 스클레오스 아저씨까지 당황하지 않은 이가 없다.
고작 노예 소년을 소개시키려 자기 아들을 부른다니?
“인사하거라.”
“안녕하십니까.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아겔라오스의 아들 파리스라 합니다. 지금은 스클레오스 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대장장이···를 섬긴다고?”
“네.”
“너, 양치기 아닌가?”
“···네?”
“너 오른손.”
아이네이아스가 내 손을 눈짓으로 가리킨다.
“굳은살 박힌 게, 지팡이를 자주 짚고 다녔어. 양치기들이 그래.”
귀족 나으리가 양치기들 손 생긴 건 또 어떻게 아는 거지?
내가 대답하지 못하고 스클레오스 쪽을 바라보자 아저씨는 헛기침을 키며 나와 아이네이아스의 사이에 선다.
“그렇습니다. 본래 양치기지만, 아이가 총명한 듯하여 그 부모에게 돈을 쥐여주고 제가 임시로 부리고 있습니다.”
“부끄럽지만 내 아들이 꽤나 관찰력이 좋다네. 이렇게, 나도 알지 못했던 사실을 들춰내고 나를 놀라게 하고는 하지.”
“명철한 아드님을 두셔서 기쁘시겠습니다.”
“물론. 하지만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겠지.”
“무슨 말씀이신지요.”
안키세스는 날 한번 보고 가볍게 눈을 찡긋거렸다.
“나도 저런 시종을 갖고 싶군.”
“하, 하하···.”
젠장.
첫만남부터, 완전히 걸려버렸다.
***
안탄드로스에 도착한 첫날, 안키세스는 총독의 관저에서 묵었다.
그 말인 즉슨 관저에서 뻑적지근한 환영 연회가 열린다는 의미였다.
예고도 없던 사절의 방문에, 원래 도로 완공 기념 연회를 위해 준비학고 있던 하객과 식자재들은 안키세스를 위해 대신 할애되었다.
그리고 안탄드로스의 실권자인 평소의 파리스라면 몰라도, 스클레오스의 하인인 지금의 파리스가 그곳에 참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하··· 그냥 환영한다고 북문으로 나가있지 말걸 그랬나 봐.”
안키세스가, ‘너 같은 아름다운 아이가 오늘 밤의 연회에서도 자리를 밝혀주었으면 좋겠구나. 네 주인께서 허락하신다면 말이다.’라고 말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래도 소용은 없었을걸. 아마 ‘스클레오스, 자네가 파리스라는 총명한 미동을 데리고 있다고 저 북쪽에서부터 소문이 자자하더군. 한번 데려오는 게 어떻겠나?’ 이렇게 말하면 끝이니까.”
“그것도 맞는 말이네.”
심지어 그랬으면, 나는 안키세스나 아이네이아스에 대해 제대로 파악도 못한 채 연회로 불려나갔겠지. 그건 오히려 악수다.
한숨만 나온다.
“그때 봤을 때, 데려온 하인이랑 호위병들이 꽤 많았었어.”
“그래. 아마도 내일부터면 도시 곳곳으로 흩어져서 정보를 수집하고 있을 테지.”
내 정체를 아는, 왕실의 인척이, 예고도 없이 사절로 왔다.
그 목적은 뻔하다. 당연히 반란 고위험 지역에 대한 정탐이 아니겠나?
그리고 그 반란의 수괴가 될 것이 분명한 ‘왕자’를 주목하는 것도 당연할 테고.
“형, 내가 연회에 나간 동안 인부들 적당히 안탄드로스에서 멀리 치워줘.”
“알았어.”
“그리고, 그 하인들 인원 수가, 아마 47명 정도 되었을 거야.”
“용케도 다 기억하고 있네.”
“당연하지. 이제 앞으로 형이 죄다 쫓아다녀야 할 인간들인데.”
“···뭐?”
“아니, 형이 일일이 찾아다니고 건 아니고. 어차피 트로이아에서 온 놈들은 말씨가 다르니까 알 수 있잖아?
애들 시켜서 적당히 하나씩 하나씩 딴길로 새게 하라 그래. 뭐··· 적당히 이것만 쥐여줘도 가능하겠지.”
나는 테오 형에게 철전이 가득 든 꾸러미 하나를 던져주었다. 테오 형은 그 내용물을 확인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좋은 생각이네. 어차피 이 지역에서보다 트로이아에서 철전의 값어치가 더 높을 테니. 그놈들도 이걸 보면 환장하겠지.”
“하인들을 홀릴 자세한 방법은···”
“난 초짜가 아냐.”
테오 형은 피식 웃으며 말한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안키세스 님이랑 아이네이아스 님이나 잘 구워삶고 있어.”
“파리스! 나오거라!”
“스클레오스 님께서 부르신다. 가 봐.”
테오 형이 내 어깨를 툭 밀친다.
나는 붉은 빛이 감도는 망토를 핀으로 고정하고서 스클레오스 아저씨의 마차 옆자리에 탑승한다.
그래, 이제부터 시작이다.
첫째 날 밤의 연회는 그냥저냥 넘겼다.
어차피 다들 왕도에서 내려온 인사와 얼굴을 못 마주쳐 안달이었으니까.
원래 도로 완공 축하 연회에 올 예정이었던 인근 도시의 인사들도 안키세스와 아이네이아스 주변에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어 그들이 옴싹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둘째 날에는 아노이토스의 저택에서 다시 연회가 열렸다.
“파리스, 어제는 연회에 불러놓고 한 마디도 대화를 나누지 못했구나.”
“하찮은 노예에게 일일이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안키세스 님.”
“그래? ‘하찮은 노예’라고?”
안키세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내며 내게 음료를 건넨다. 나는 잔을 받아들고 안키세스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그리고 연회장의 구석에 가자, 어디에도 어울리지 못하고 있는 아이네이아스가 보였다.
“아이네이아스, 이 아이도 사실 이 근방이 고향이라 할 수 있단다. 이다 산에서 5살 때까지 살았지.”
“이다 산에서요?”
나는 이다 산의 양치기였다. 대체 어떻게 안 마주친 거지?
“나, 나는··· 요정들께서 키워주셨으니까.”
아이네이아스의 작다란 목소리는 그에 대한 충분한 대답이 되어주었다.
내가 7살 때쯤 신들의 존재를 눈치 챘던가? 그 전까지는 이노 외의 신화적 존재를 마주할 수 없었고.
아이네이아스와 내가 동갑이니 요정들 곁에 있다 5살에 떠났다면 보지 못했을 수밖에.
어느새 안키세스는 아이네이아스와 나를 붙여놓고 스클레오스에게 접근하기 시작한다.
나는 아이네이아스에게 꾸벅 절한 뒤, 어색한 침묵을 감내하기 시작했다.
“아이네이아스 님께서는 그럼 이 근처의 지리에도 익숙하시겠습니다?”
“···난 요정들이 살던 숲 밖으로 나가본 적 없어. 아무것도 몰라.”
그리고 또 침묵.
나는 ‘우리 애가 소심해서 그런데 같이 놀아줄래?’ 소리 들은 애마냥 아이네이아스의 곁에서 이것저것 말을 붙여봤지만 아이네이아스와의 대화는 뚝뚝 끊기기 일쑤였다.
···아니, 이게 아프로디테의 아끼는 아들, 트로이아 최고의 영웅이자, 로마의 건국자라고? 이 아싸가?
“이 계절이면 숲이 아름다울 텐데요.”
“요정들이··· 그래서 이 날씨를 좋아했어.”
뭐든 말끝마다 요정, 요정. 나는 어쩔 수 없이 대화 주제를 그쪽으로 틀었다.
“그럼 아는 요정이 있으신지요?”
“아, 오이노네 님이라고! 이다 산을 관장하시는 요정이신데 정말 예쁘셨···”
“다른 얘기로 넘어가죠.”
···왠지 기분이 나쁘네.
나중에 이노한테 이 아싸에 대해 물어봐야지.
그렇게 둘째 밤은 갔다.
셋째 밤쯤 되자, 테오 형은 능숙하게 안키세스의 하인들을 철전과 즐거운 도박으로 이끌었다. 그놈들은 아마 자기들이 이상할 정도로 운이 좋다는 사실에 기뻐만 했겠지.
그렇게 넷째 밤이 가고, 다섯 째 밤이 지난다.
며칠이 지나고 나서, 이날의 연회는 스클레오스 아저씨의 저택에서 펼쳐졌다.
마침내 안키세스는 내 주위 어른들에 대한 탐색을 모두 마쳤는지 내게 다시 돌아왔다.
“파리스, 미안하다. 그동안 내 아들을 네게 맡겨놓듯 했구나.”
“무슨 말씀을. 아이네이아스 님과 대화를 나누니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내 반어법에 한 방 얻어맞은 듯 쓰게 웃은 안키세스는, 곧 내 귀에 조곤조곤 속삭인다.
“네가 이 도시의 대장간을 세운 장본인이라 들었다만.”
“어린아이가 내던진 엉뚱한 발상을 스클레오스 님께서 실현하신 게 사실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과장과 허풍을 즐기기 마련이죠.”
“겸손하기까지! 하하, 오늘은 너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구나.”
한참이나, 안키세스는 내 곁에 머무르며 이런저런 말을 꺼냈다.
···놀랍게도, 하나도 영양가가 없었다.
“참 너는 아름답구나. 마치 아프로디테 님께서 그분의 아끼는 보석을 네 눈에다 박아넣은 듯해.”
“감사합니다.”
“노예로 살아가기에는 아까운 미모구나. 혹시 내가 말 타는 법이라도 가르쳐 줘도 되겠느냐?”
“제가 허벅지로 온몸을 붙들고 있을 만큼 건장하지는 못하여···”
전부 내 외모에 대한 칭찬이었으니까.
둥기둥기 받고서 기분 좋아지는 것도 한두 번이지. 약 4시간 동안 중년남성의 느끼한 세레나데를 듣고 있으니 속이 안 좋아졌다.
아무튼, 이 대화를 끝내고 나서는 더 이상의 연회가 없기만을 바랐고.
“나는 내일이면 왕도로 돌아갈 거란다.”
놀랍게도 그 바람은 실현되었다.
나는 급히 안키세스를 돌아보았다. 그는 어쩐지 안심한 듯 편안한 미소를 내게 지어보인다.
“너는, 훌륭하고 똑똑하고 잘생긴 소년이다.”
“···감사합니다.”
“너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도 잘 알지.”
“저는 언제나 노예로서의 본분에 충실하게 살아왔습니다.”
“그것 말고.”
나는 순간 온몸이 굳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고개를 돌리자, 안키세스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네 비극적인 처지에도, 항상 너는 정직하고 훌륭하게 살아왔구나.”
안키세스는 웃으며 내 머리칼을 헝클었다.
“잘생기고 선량한 소년아.”
그 뒤로, 안키세스가 뭐라 작게 속삭였다.
오직 그 시끄러운 연회장에서 나만이 그의 마지막 마디를 들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반역 따위 생각조차 하지 않았구나. 이 불쌍하고 착한 것.”
***
연회가 끝물에 접어들고, 사람들은 저마다 흥청망청 먹고 마시기도 질린 듯 보인다.
그때쯤 안키세스는 스클레오스의 저택을 잠시 나섰다.
저 하늘에는 신들의 눈처럼 맑고 밝은 별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고.
바닥에는 가이아의 솜털처럼 부드러운 잔디가 그의 발가락을 간지럽혔다.
‘다행이다.’
안키세스는 그리 생각한다.
만일 파리스라는 왕자가 반역을 꾸미고 있다면, 이 도시의 사람들이 그가 왕자임을 알고 그를 추대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스승이라는 스클레오스도, 후원자라는 아노이토스도, 그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분명 이 도시에서 아름다운 파리스는 뭔가 권위를 쥐고 있는 듯 보였지만, 정작 그 권위를 가지고 무엇을 하려는지가 불명확했다.
반역을 저지르려 한다는 어떤 확증도 없었다.
반역을 저지를 생각이 없다는 정황증거는 가득했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아름다운 소년이 반역을 저지르려 할 리가 없지.’
[나의 연인이여.]아프로디테 님.
자신의 연인을 만나러 아프로디테가 잠시 내려와 그를 쓰다듬는다.
여신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 그분의 사랑을 확인했을 때, 여신께서 자신에게 아들 아이네이아스를 잉태해주셨을 그때를 그는 모두 기억했다.
그는 아프로디테의 첫째 가는 신도로서 알았다.
파리스처럼 아름다운 소년은.
유죄일 수 없다.
부싯돌을 쥔 안키세스의 손 안에서 무언가가 불씨가 일어나더니, 어딘가로 옮겨 붙는다.
모두 글씨가 새겨진 나무판자들이다.
-‘···명히 위험합니다. 이 도시 전역이 이미 저 소년에게 장악당한 듯···’
-‘···반역의 의지가 없더라도 처단해야···’
허튼 소리가 적힌 것들.
이것들을 적은 불경한 자들의 이름은 기억해두었다.
안키세스는 모든 보고문을 흔적도 남지 않게 불태운 뒤 아프로디테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한 여신과 한 인간 남자가 서 있던 곳에서 발목에 편지를 묶은 비둘기 떼가 날아오른다.
찢겨진 구름처럼 새하얀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비둘기 떼는 자신들이 가려는 방향에 알맞은 기류를 찾아낸다.
따뜻한 바람을 싣고 북쪽으로 향하는 남풍을 타고, 그들은 날개를 쭉 편 채 힘겨운 퍼덕임을 멈추고 지구의 동력에 기댄다.
몇몇은 방향을 잃고 흩어지기도 하고, 몇몇은 눈앞의 쉼터나 먹이에 시선이 팔려버린다.
또 몇몇은 천적의 등장에 혼란스럽게 도망치다 목숨을 영영 잃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순항을 이어간다.
제각기 선두를 바꿔가면서, 바람을 가르는 부담을 나누어 지면서 기나긴 항행을 지속한다.
그리고, 그들의 북적이는 고향, 그들에게 먹이를 주고 그들이 평생 동안 지켜야 할 소임을 가르쳐준 고향 트로이아에 다다르자, 마침내 며칠 동안 이어지던 여정을 끝내고자 고도를 낮춘다.
날개를 퍼덕이는 속도가 점차 빨라지다가, 절정에 다다르고, 다시 느려진다.
그들은 횃대에 내려앉는다.
“이번에 온 서신은?”
“안탄드로스 총독의 표식입니다.”
“왕께 직접 전달드릴 내용이다. 건드리지 말고, 내가 직접 왕께 전달하겠다.”
높은 지위의 환관이 종달새가 그려진 망토를 입고 종종걸음쳐 화려한 타일이 깔린 궁정의 바닥을 밟고 지나친다.
많은 이들이 왕을 위해 봉사하는 그에게 경의를 표하거나, ‘남자 구실’을 못하는 몸뚱아리를 뒤에서 비웃으나 이제 늙은 그는 그런 사소한 것들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오직 그의 주인의 확장된 신경망으로서 작동하기 위해 존재한다.
-벌컥.
“왕이시여. 안탄드로스 총독, 필리포스의 아들 니키스의 서신입니다.”
“주게.”
왕은 손님과 장기를 두면서 고개도 돌리지 않고 정확한 위치에 손을 내민다. 그리고 환관 역시 매끄럽게 왕의 손에 서신을 전달한다.
이 자로 잰 듯한, 한 몸 같은 움직임이 바로 숙달된 환관의 자부심이었다.
그리고 그의 자부심은 한 가지 더 있었으니.
“왕께서 중요한 서신을 읽으실 때가 되셨습니다.”
“어, 아··· 실례가 많았사옵니다.”
“아닐세. 장기판은 이대로 둘 테니 다음에 와서 다시 두지.”
그는 미간의 사소한 떨림, 미세한 손가락의 움직임만으로도 주인의 감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트로이아의 왕께서는 혼자 있으셔야 했다.
프리아모스가 습관처럼 귀 뒤쪽을 지긋이 누르며 두통을 억누르는 동안, 환관은 문을 닫고 손님을 전송했다.
그리고 문 너머에서 왕이 내뱉는 안도에 찬 한숨 소리를 들으며, 왕께 좋은 소식이 가닿았음을 확신했다.
***
다행이다.
프리아모스는 주름진 손으로 주름진 얼굴을 쓰다듬으며 생각한다.
정말 다행이다.
내 손으로 자식을 죽일 필요가 없어서.
내 아내, 헤카베에게 또 다시 눈물을 안길 필요가 없어서.
한 많은 인생에서 몇 안 되게 순전히 기뻐할 수 있는 순간이 와서.
그는 잠시 의자에서 호리호리한 몸을 일으켜 문을 가볍게 네 번 두드린다.
오늘, 손님은 더 받지 말라는 의미다. 그와 수십 년을 함께해온, 마치 외투처럼 익숙해진 저 환관은 그의 의중을 잘 헤아려주리라.
오랜만의 한가함을 즐기는 프리아모스에게 곧 간단한 요깃거리와 음료들이 대접된다.
프리아모스는 즐겨먹는 견과류에 달콤한 과실즙을 곁들이며 긴장에 차 있던 마음을 푼다.
주전부리를 들고 온 시종들조차 물리고 나니 중정에는 벽 너머로 타고 들어오는 속삭임만이 있을 뿐 완전한 침묵이 감돈다.
프리아모스라는 한 남자와, 그의 그림자와, 어느새 벽 너머로 저물어가는 태양의 붉은 자욱만이 남아 있을 뿐.
이 안도감을 더 즐기기 위하여, 프리아모스는 의자에 더 깊이 등을 기댄다. 촘촘히 짜인 무명 천과 솜이 왕의 몸을 받친다.
천천히 보랏빛으로 물드는 하늘을 바라보다, 누군가 허락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을 본다.
“아버지? 신하들이, 오늘 어쩐 일로 일정들을 미루셨는지 여쭙고 싶다기에···.”
“···내 딸.”
카산드라, 내 불쌍한 딸자식.
프리아모스는 딸을 가까이 오게 한 뒤, 세게 끌어안았다. 딸은 당황했지만, 자신의 외투가 아버지의 눈물로 젖어들어감을 깨닫고 침묵을 지켰다.
“아, 카산드라. 정말 신들께서 아직 트로이아를 사랑하시니 얼마나 다행인지···.”
“···.”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늙으셨나?
이제 고작 초로의 나이에 접어드셨을 뿐인데, 벌써 흰머리가 성성하고 눈가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하니···
아버지의 눈물에 카산드라 역시 까닭없는 눈물을 참아야 했다.
“미안하구나. 네게 이유도 말하지 않고 감정을 내보이다니. 성숙하지 못했어. 왕답지도 못했지.”
“아녜요, 아버지.”
카산드라가 순종의 의미로 고개를 숙이자, 프리아모스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딸을 품에서 놓아준다.
“무슨 일이었는지, 얘기해주마. 네 오빠에 대한 이야기다.”
예언의 자질을 타고난 카산드라는, 그의 자식들 중에서도 몇 안 되게 버려진 차남에 대해 알고 있는 아이였다.
“그 애의 양부로 붙여놓은 아겔라오스가 말하길, 이름이 파리스라 하더구나.”
그렇기에 그는 거리낌 없이 파리스라는 이름을 꺼냈고.
카산드라의 어깨로부터 불안한 떨림이 일어나자 당혹했다.
-탈그락. 탈그락.
카산드라의 몸에서 경기가 일어난다. 균형을 잃고 주저앉으려는 몸을 프리아모스는 급히 일어나 붙잡았다.
갑자기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워지고, 식은땀이 이마와 목에서 흘러나온다.
“따, 딸아. 왜 그러느냐? 어째서···.”
“프, 프리아모스와 헤카베 사이에서 나온 자식이··· 둘째 아들이···”
“마, 맙소사, 또···.”
또다.
딸의 광증이 도지기 시작한다.
프리아모스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흐르고, 딸의 몸은 점차 그의 팔에서 빠져나와 공중으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주위의 도기들에 금이 생기고, 바닥에는 작은 균열이 일어난다.
대지의 인력을 무시한 채, 온전히 공중에 그 몸을 맡긴 딸을 프리아모스는 공포 어린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프리아, 모스의 아들, 파, 파리스는, 트로이아를, 멸, 망시킨다.]딸의 입에서, 악몽과도 같던 지난 날의 기억이 다시 되살아나는 것을 들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