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42
42화. 소환
이곳에 왔을 때만큼이나 갑작스럽게, 떠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안키세스 님이, 바로 오늘 왕도로 돌아가신다고?”
“어쩐지 오늘은 연회 약속을 안 잡아 두시더니만···.”
“항상, 연회가 있던 저택에서 방을 빌려 주무시지 않았나? 약속을 잡아두지 않으셨을 때부터 난 알아봤네.”
나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스클레오스 아저씨를 비롯한 이 도시의 귀족과 상류 자유민들은 이 사태를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고로,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며 이 사절의 무례하고도 경우없는 행태에 대해 마구 뒷담화를 펼쳐나간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안키세스는 여전히 밝고 평화로운 얼굴이다.
이미 길 가는 어린아이들에게 손까지 흔들어보이며 안탄드로스 관광 100배 즐기기 모드에 들어갔다.
제우스에게 벼락을 맞아서였던가? 절뚝거리는 다리를 들고도 건실한 체력으로 그를 극복해 잘만 돌아다녔다.
“파리스, 저기가 그 유명한 제철소인가?”
“아··· 그렇습니다.”
안탄드로스는 기존의 성벽 너머로 두 번째 성벽을 축조하고 있었다.
도시의 인구가 늘어나기도 했고, 새로 생긴 거대 제철소-대장간 근처로 헤파이스토스 신전도 옮기려 하는데 그런 중요 시설을 성벽 바깥에 놓기에는 영 애매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광경을 즐겁게 지켜보며 안키세스는 내게 속삭였다.
“자네의 비밀을 내가 여기서 읊지는 않겠네.
왕자님께도 자신의 지키고픈 일상이 있을 테니.”
“···감사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넨 조각 같이 잘생겼단 말이지. 프리아모스 왕과 헤카베 왕비께서 두 분 다 출중한 외모를 갖추신 것은 맞네만, 자네는 거의 신과 같지 않은가.”
“그, 그만해주십시오. 주위 사람들 듣겠습니다.”
안 그래도, 내가 당신이랑 딱 붙어서 같이 걷고 있는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려 있는데.
내가 허둥대는 모습에 안키세스는 킥킥대며 저 멀리 홀로 걸어가던 자신의 아들 아이네이아스를 가리킨다.
“내 아들이 많이 외로워보이지 않나?”
“···확실히 그렇지요.”
“저 아이는 항상 고향을 그리워했지. 요정들과 같이 평화롭게 살다, 낯설고 북적이는 트로이아로 오고나서는 항상 적응을 못했으니.”
안키세스는 이제 자기 아들의 사적인 얘기까지 내게 꺼낼 정도로 여유로워졌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오늘 우리가 떠날 때 잠시만 따라나와서 이다 산을 안내해줄 수 있겠나?”
“예···예?”
“10년이나 지났잖나? 요정들이야 변함없겠지만 그 주위 지형지물은 많이 바뀌었겠지. 안내인이 필요하네.”
“그건 어렵겠습니다.”
당신이 여기서 벌려놓은 일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그 뒷수습 때문에 한창 바쁠 예정이란 말이다.
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낙천적인 얼굴에 한 방 때려먹여주고 싶어지긴 하다만··· 그래도, 왕에게 내가 반역 혐의가 없다고 증언해줄 인물이 아닌가.
그 사실을 생각하면서 나는 겨우 짜증을 삭였다. 그래,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아들 걱정도 하는 가정적인 인간이고.
“씁, 아깝구만. 참고로 내 아들은 자네 정체를 모른다네. 그래서 고향 친구로라도 자네와 사귀게 해줄까 했더니만.”
“사양하겠습니다. 반역 혐의를 받은 왕자가 다르다노스의 후계자와 친하게 지내기까지 하면 왕께서 뭐라 생각하시겠습니까?”
“자네, 참 생각하는 게 조숙하군.”
“어쩌면 안키세스 님께서 생각이 별로 없으신 걸지도요.”
“뭐? 아하하하하! 참 유쾌한 친구야!”
안키세스는 재미있다는 듯 내 등을 연신 두드려댄다. 더럽게 아픈 걸 보니 등이 벌게졌을 게 뻔하다.
“···뭐, 아무튼 다 잘 되었으니 다행이 아닌가?”
어느덧 안탄드로스 북쪽 외곽까지 다다랐다.
“어이 거기들! 빨리 걸어오게!!”
“···네에, 안키세스 님.”
“쯧, 하인들이 안탄드로스에 온 이후로 아주 게을러졌어. 왜 이리들 이 도시에서 나가려고들 하지 않는지 모르겠네. 여기에 새살림이라도 차린 건가?”
제가 저놈들 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들어주긴 했습니다만.
당연히 그 얘기를 입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다시 안키세스와 아이네이아스를 처음 마주하던 그때처럼 나와 스클레오스 아저씨, 아노이토스, 니키스 총독과 다른 장로들이 북문 앞에 주르륵 늘어섰다.
아이네이아스는 마차에 올랐고, 안키세스는 마음에 드는 말 한 마리를 시장에서 고르더니 대강 굴레만 씌워놓고 풀쩍 뛰어올라 앉았다.
“···말도 탈 줄 아셨습니까?”
등자고 뭐고 없는 이 시대에? 승마를 한다고? 다리도 불편한 양반이?
“하하, 내 여러 잔재주 중 한 가지지. 어때, 여기 태워주면 좀 안내인이 되어줄 마음도 들려나?”
“제가 또다시 안키세스 님의 제안을 거절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농담일세.”
안키세스는 주위를 둘러본다.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총독과 눈을 마주친 뒤 나지막이 말한다.
“···아마 자네에게 던지는 마지막 농담이겠지.”
안키세스는 또다시 내 머리를 헝클었다.
“잘 있게. 양치기 왕자여.”
“···안녕히 가십시오, 다르다노스의 군주시여.”
짜증스럽긴 하다만, 꽤나 정감가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퍽 그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이들에게도 가볍게 인사를 올린 뒤 안키세스는 말의 허벅지를 살짝 발뒤꿈치로 두드렸다.
말이 터벅터벅 걷기 시작하자 하인들과 마차들의 행렬도 그 뒤를 따른다.
곧 그 무리는 내 시야를 벗어난다.
멀리 북쪽으로.
트로이아가 있는 방향으로.
***
안키세스는 뒤돌아보면서 안탄드로스가 완전히 시야에서 지워진 것을 확인한다.
연회는 활기 찼고, 선량한 왕자의 무고함도 증명할 수 있어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적어도 자신에게는.
안키세스는 아들에게도 즐거운 시간이었을지 확인하기 위해, 말의 속도를 늦추어 아들이 탄 마차 곁으로 말궁둥이를 바싹 붙였다.
“아들아, 오랜만에 고향 가까이 온 기분은 어떠냐?”
“···요정은 한 명도 보지 못했네요.”
토라진 듯한 얼굴.
다른 아버지였다면 15살이나 먹은 사내가 계집애처럼 군다며 따귀를 올려붙이고 배를 발로 찼겠지만, 안키세스는 그런 종류의 아버지는 아니었다.
안키세스는 대신 부드럽게 타이르길 선호하는 아버지였다.
“우리가 놀러온 게 아니잖니. 왕의 신하로서 안탄드로스를 밟았으니 어쩔 수 없구나.”
“···.”
“하하··· 그렇게 아쉬우면, 한번 이다 산 근처를 둘러보며 돌아가도 괜찮겠지.”
마음이 약한 아버지이기도 했고.
“정말, 그래도 괜찮나요?”
안키세스는 밝아진 아들의 표정을 보며 쓰라린 마음을 다스렸다.
불쌍한 것. 아직도 요정들과 함께하던 어린 시절을 못 잊고, 이렇게···.
“그럼, 아직 여유가 있으니 이틀에서 사흘 정도는 돌아가도 괜찮을 게다. 오랜만에 야영하면서 같이 사냥도 하고, 고기도 굽자꾸나.”
그리 말하며, 안키세스는 말머리를 이다 산이 속한 안탄드로스 북쪽 방향으로 틀었다.
마부들은 당황했지만 상전이 움직이는 대로 가는 게 그들의 일이니, 한숨을 쉬면서 그 뒤를 따랐다.
어쨌건 간에 돌아가는 내내 냉랭할 것 같던 도련님의 얼굴이 펴지기는 하지 않았나?
며칠 간 늘어날 고생을, 그 사소한 이익과 되바꾸며 이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상황이라고 아랫것들은 애써 자위했다.
그러다,
갑자기 머리 위로 드리운 그림자에 놀라 그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안키세스도 그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재빨리 목을 움직여 하늘을 날아다니는 점들의 집합을 예리한 눈으로 좇았다.
구름이라기에는 너무 지나치는 속도가 빨랐다.
“···어?”
“웬 비둘기가 이 철에 남쪽으로 날지?”
“한두 마리도 아니고 떼 지어서?”
호위병들과 마부들, 하인들은 제각기 쑥덕대었으나, 안키세스는 순간 그를 진정시킬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고삐를 꽉 쥐었다.
그는 저 비둘기 떼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북쪽에서, 트로이아가 있는 방향에서 안탄드로스로 날아드는 비둘기 떼의 의미를.
왕께서 결단을 내리시었다.
***
“···아니라고 믿고 싶구나.”
프리아모스는 탈진한 딸을 끌어안고 그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어주었다.
카산드라는 ‘예언’을 마친 뒤, 식은 땀에 젖은 몸을 다시 지상에 내려놓은 채였다.
중정의 집기들은 여기저기가 깨져 못 쓰게 되어 버렸고, 벽과 기둥도 어느 정도 수리가 필요해보였다.
주위의 몇몇 새들은 날개에 경련을 일으키며 이곳저곳의 바닥에 뻗어 있었다.
이곳에서 멀쩡한 것은 오직 막 떠오르기 시작한 초승달뿐.
그 외의 모든 것은, 프리아모스와 카산드라의 영혼을 포함한 모든 것은 부서져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쯤은 프리아모스에게 조금도 신경쓰이지 않았다.
그저 프리아모스는 정신을 잃은 딸의 땀으로 축축한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그 창백해진 얼굴에 핏기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뿐.
그러나, 여전히 카산드라의 몸은 관절마다 실이 연결된 인형처럼 불안하게 삐걱였고, 그 입에서는 게거품과 함께 신음 또는 비명 같은 목소리가 계속 비져나왔다.
“파, 파리스가, 트로,이아를, 멸, 망시킨···”
“제발···.”
“프리아, 모스의, 차, 남이, 멸망을, 불러···”
“네 말이 틀리기만을 또 다시 바라게 되는구나···.”
카산드라의 한 마디 한 마디,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뱉어지는 그 말들이 프리아모스의 가슴을 쿡쿡 찔러대었다.
카산드라 때문만이 아니었다.
과거가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이 아이가 이 나라를 멸망케 할 겁니다.”
그의 또다른 아들, 예언자 아이사코스가 그에게 던졌던 그 말들.
헤카베는 분노하여 당장 그를 내쫓도록 명했고, 결국 프리아모스는 새로 사제들과 무녀들을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아폴론께서도 저희에게 미래의 영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불, 사그라지는 부귀와 영예, 그리고 왕자. 멸망은 왕의 차남으로부터 오리라.”
그러나 아폴론 신전의 사제들과 무녀들이 역시 한 목소리로 외쳤다.
헤카베 역시 자신의 태몽에서 횃불 하나가 트로이아를 불태우는 광경을 봤다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프리아모스는 자비를 베풀기를 택했다.
나라 전체를 도박판 위에 올려두고서, 오직 아들 하나의 목숨을 되찾기 위해 그리했다.
그 자비심이, 실은 결단을 내리기 두려워 한 자의 나약함이었던가?
멀리 떨어져 있는 아들을 보살피고, 보호하였던 그 모든 순간이 망국을 향해 내달려가는 지름길 위에 있었단 말인가?
“멸··· 망···.”
여전히 그의 딸은 품 안에서 속삭였다.
과거의 망령들이 그의 귓속에 멸망을 속삭였다.
크로노스가 우라노스를 유폐하고, 모든 필멸자와 불멸자의 왕이신 제우스가 다시 크로노스를 단죄하였던 것처럼, 프리아모스의 자식이 프리아모스가 공들여 재건한 나라를 무너뜨릴 것이라 예언했다.
그리고.
프리아모스는 그 모든 속삭임들을 믿지 않기로 했다.
불쌍한 카산드라, 미쳐버린 나의 딸아이.
또 광기어린 말로 나를 속이려 들었구나. 너의 의지는 아닐지 몰라도, 너의 혓바닥을 빌어 나타난 그 목소리가 나를 끌어당겼었다.
“···그러나 더는 속지 않으련다.”
프리아모스는 딸아이의 머리칼을 쓸어내린 뒤, 그 몸을 들어올려 의자에 앉혀놓았다.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궁정은 조용하다.
안키세스는 아마 자신이 보냈던 명령에 따라 안탄드로스로부터 멀어지고 있으리라.
그렇다면 이 서신을 받는 것은 아마 안키세스가 아닌, 안탄드로스의 총독일 터.
‘만일··· 내 아들이 정말 반역을 꾀한다면.’
그리하여 이미 총독조차 거기에 포섭된 뒤라면, 이 서신은 자살시도가 될 터다.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으며 프리아모스는 갈대로 된 펜을 집어든다.
잉크를 찍으며, 천 위로 글귀를 적어내려가며, 그는 점차 마음을 진정시킨다.
곧 믿을 만한 이들에 의해 수십 장으로 복사된 그 글귀는, 치밀하게 암호화되어 비둘기의 발목에 묶인 채 날아오른다.
남쪽으로.
***
안탄드로스의 총독, 필리포스의 아들 니키스는 조용히 총독 관저로 돌아와 창가를 내다보았다.
이 도시에 머무른지도 어언 10년이 넘었다.
야심 있는 귀족으로서 그 역시 왕도 트로이아의 요직으로 뻗어나가길 기대하며, 안탄드로스행을 그 밑거름으로 생각했더랬다.
이 촌구석에서의 기나긴 시간을 인고하고 기다리면, 언젠가 그에게 왕의 가까이에서 일할 기회가 오리라고 생각했더랬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안탄드로스 주변의 인구가 두 배로 늘었다.
물론 무슨 개나 고양이처럼 사람이 새끼를 쳐서 그렇게 인구가 늘어났을 리는 없다.
아마 유랑민들이나, 피난민들이 정착한 탓이리라.
이전에는 없는 것으로 취급되었던 인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그들에게서 세를 거두고 그들을 노동력으로 써먹을 수 있게 되었다.
수많은 황무지들이 새로이 개간되었다.
게다가 시민 아닌 것들을 인구에서 제하더라도, 주위 도시들로 연결된 도로에서 타국의 시민들이 몰려들어오면서 도시 자체도 몸집이 커졌다.
얼마 전에 4,000을 넘을까 싶던 시민의 인구는 이제 7,000명을 내다본다.
왕자 파리스를 마주하고 단 수 년만에!
그렇다면 한 해가 더 지나고, 두세 해가 더 지난 이후로 이 안탄드로스는 얼마나 더 위대해질 것인가?
그 도시의 번영을 이끈 자신은 얼마나 드높이 올라갈 수 있을 텐가?
막 트로이아에서 온 사절들을 성공적으로 접대하고 돌려보낸 뒤라 그의 자신감과 낙관은 여느 때보다도 강해져 있었다.
그리고···
-푸드덕
그 낙관은 한 마리 새의 날개짓에 의해 깨진다.
“···뭐지?”
처음에는 그저 길 잃은 철새나, 전령조라 하더라도 근처 도시에서 온 연락 수준인 줄 알았다.
그러나 날개짓 소리는 점점 더 많아진다.
뒤돌아보자 비둘기들의 울음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비둘기들이 그 하얀 날개를 햇빛에 쪼이며 난간에 기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무수한 까만 눈은, 뭔가를 예고하는 듯했다.
총독 니키스는 직접 그 많은 비둘기들의 다리에 묶인 매듭들을 풀어헤쳤다.
총독 관저의 고용인 수는 불어난 도시의 몸집과 달리 아직 많지 않았다. 전령조를 통한 연락이 흔치는 않은 만큼 이런 일은 자신이 알아서 처리하는 편이 편했다.
그리고, 그는 편지 안쪽에 그려진 문양을 확인한다.
그 다음으로는 급하게 천을 풀어헤쳐, 그 매듭지어져 있던 천 속에 적힌 내용을 살폈다.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총독은 아까의 단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트로이아에서의 서신.
-‘나의 둘째 왕자 파리스를···’
왕에게서의 서신.
-‘···트로이아의 궁정으로 소환한다.’
총독은 질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