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79
79화. 증오받는 자 (3)
“‘그냥 좋아하는 사람’이라···.”
파리스와의 대화를 마치고 오디세우스는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사촌 시논은 또 어디서 사냥에 미쳐있는지 며칠 동안 숲에 진을 쳐놓고 돌아오지를 않고 있다.
그 덕에 방을 넓게 써서 좋기는 하다만.
오디세우스는 의자에 드러눕듯이 앉는다. 양털을 넣어 푹신하게 만든 쿠션이 그의 등을 받쳐준다.
‘결혼을 전제로 한 관계인가?’
상식적으로 보면 그렇다.
서로 사랑하는가? 맞다.
궁전 바로 옆에 있는 저택에서 공공연하게 동거하는가? 그것도 맞다.
그런데 아직 결혼은 안 했다고 한다.
게다가 대답 또한 ‘그냥 좋아하는 사람’, 애매하기 짝이 없다.
오디세우스는 파리스의 대답을 듣고 난 직후에 자신의 표정이 이상하지는 않았을지 걱정한다.
분명 호의를 사야 할 대상인데··· 개인적인 호기심만 잔뜩 안고서 돌아왔다.
대체 그 요정과 왕자 파리스 사이의 관계는 뭐란 말인가?
‘신기한 사람이네···.’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게 많은데, 또 다시 불쑥 초대를 요청하기에도 조금 무례한 것 같으니··· 자연스럽게 마주치면서도 단 둘이 이야기할 기회를 잡을 수 있게···
곧 그가 지시를 내렸던 시종 하나가 돌아와, 파리스의 거동에 대한 정보를 물어온다.
옳지.
그래. 거기서 마주치면 되겠구나.
다음날, 오디세우스는 외출용 망토를 챙기고 호위들에게 따라나설 준비를 하라고 일러둔다.
곧 칼을 찬 사내들이 양옆으로 뒤따르는 가운데 오디세우스는 위풍당당한 발걸음으로 트로이아의 광장을 향한다.
그곳에 있는 특정한 시설을 이용하기 위해서.
***
“은혜로운 주인이시여···. 안탄드로스의 제 동료이자 신하인 이들에게 축복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은혜에 저는 감출 수 없는 기쁨만을 느낍니다.”
그리 읊조리고는 나는 주머니 속의 철전을 와르르 쏟아 불 속으로 던져버렸다.
이내 불꽃의 온도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수준까지 타오르는 듯 싶더니, 갑자기 보랏빛으로 물들어 내가 던진 철전을 모조리 녹여버린다.
그리고 불이 확 꺼진다. 재만 남은 성화대를 들여다 보자 내가 던진 철전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후··· 언제 봐도···.”
“언제 보아도 신들의 권능이란 참 놀랍지요.”
“아, 다레스.”
돌론의 지지자였던 헤파이스토스의 사제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인다.
“최근에 안탄드로스의 대장장이들에게 주어진 축복에 대해 건너건너 들었습니다. 파리스 님은 진정 신들의 사랑을 받으시는 분입니다.”
“아닐세. 그저··· 헤파이스토스 님을 섬기는 방법을 골몰하는 사람일 뿐.”
“그런 겸손함이 또 신들을 기쁘게 하는 요인 중 하날까요?”
사제는 날 향해 약하게 웃더니 망토 자락을 휘날리며 뒤쪽을 가리킨다.
어둠 속에서, 저 멀리 인영이 흐릿하게 움직인다.
“그런데 그 마음이 신들뿐 아니라 인간들 역시 움직이나 봅니다.
손님이 기다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인영이 점차 가까워지더니, 익숙한 왕자의 모습으로 변한다.
“파리스 님, 여기서 다시 뵙게 되는군요.”
“오디세우스 님께서 헤파이스토스 님의 신도인 줄은 몰랐습니다.”
아마 나를 보러 온 거겠지만.
오디세우스 역시 그를 숨길 생각은 없는지 싱긋 웃으며 사제 다레스에게 조용히 말한다.
“혹시 두 사람이 대화 나눌 만한 곳이 이 신전 안에 있겠나?”
당연히 있다. 이 신전의 크기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오디세우스는 사제로부터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어낼 수 있었고, 이내 우리는 오디세우스가 주문한 ‘두 사람이 대화 나눌 만한 곳’으로 옮겨와 마주 앉았다.
벽 너머에서 금속들이 부딪히고 마찰하는 소음이 맥박처럼 희미하게 들려온다. 헤파이스토스 신전을 대장간으로서 살아숨쉬게 하는 소리다.
그 소리를 잠시 귀기울여 듣던 오디세우스는 빙긋 웃으며 말한다.
“대장장이들의 주인 되시는 분께서 정말 파리스 님을 총애하시나 봅니다. 들리는 소식들이 많던데요?”
“그분께서는 그저 종복들이 바친 충성과 사랑을 귀히 여기시는 분일 뿐입니다. 제가 그분을 경애하기에, 그분이 저를 아껴주시는 것뿐이지요.”
“오오··· 과연.”
오디세우스는 가볍게 미간을 주무르다 말한다.
“저도 왕자로서, 포세이돈께 올리는 제사를 주관하기도 하고, 데메테르 님을 위한 축제를 준비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더군요.”
“부왕께서 이미 잘 해내오셨을 테니 그분께서 해오신 대로 충실히 따르기만 하더라도 신들께서 만족하지 않으신까요?”
“글쎄요···.”
오디세우스는 한숨을 쉬며 웃음지었다.
“신들을 잘 모셔서 도시를 번영으로 이끌어야 할 텐데. 항상 그 부분이 걱정입니다. 파리스 님처럼 잘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또 다시 나는 오디세우스를 딱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신들의 축복과 제일 거리가 먼 사람이 내 눈앞에 있는 오디세우스인데.
아들내미가 영구실명된 포세이돈이 지랄하고, 기껏 쓸 데 없는 바람을 자루 속에 가둬서 도와줬더니 선원들이 풀어봐서 말짱도루묵이 된 아이올로스가 외면하고, 갑자기 자기 소를 약탈당한 헬리오스가 대노하는···
내가 아는 한 가장 많은 신들에게 미움받은 인간이다.
저런.
내가 다 눈물이 나려고 한다.
목마만 안 타고 오면 정말 잘해줄 자신 있는데.
***
“어땠어?”
“응? 뭐가?”
“뭐긴 뭐겠어. 아까까지 ‘그 파리스’의 저택에 머물다 왔잖아.”
시논이 눈을 빛내며 오디세우스의 맞은편에 앉는다. 이제 그들은 곰팡내와 나무 썩은내 나는 선실에서 벗어나, 깨끗하고 호화로운 트로이아 왕궁의 손님용 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시논이 뿔잔에 음료를 따라다 건네자, 오디세우스는 단숨에 들이킨 뒤 시논을 마주본다.
“정말로 소문처럼 눈빛만으로 인어를 제압할 만큼 사나운 게 맞아? 아니면 입을 열 때마다 강철검이 뿜어져 나왔어?”
“후자의 소문은 처음 듣는데.”
“아, 이건 내가 막 트로이아 현지에서 수집한 따끈따끈한 소문이지.”
시논의 기대감 어린 눈빛에 오디세우스는 가볍게 뒷머리를 긁으며 답했다.
“뭐··· 일단 트로이아의 강철이 파리스 왕자의 소유라는 추측도 맞는 것 같아. 그리고, 생각보다 훨씬 영리한 것도 맞고. 바로 얼마 전까지 순진한 양치기로 묻혀 살았다기에는 내 이야기에 너무 잘 따라오던데.”
“호오, 재밌네.”
“그리고 눈빛만으로 인어를 제압 어쩌고 하는 건 헛소리야. 팔다리 근육이 탄탄한 것도 맞고 몸가짐을 보니 무예가 뛰어난 것도 맞는 것 같기는 한데, 머리까지 근육으로 차 있는 부류는 아니야.”
“아이고···.”
시논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탄식을 내뱉다, 주머니에서 금화 몇 개를 꺼내 오디세우스에게 던졌다.
“내가 졌네.”
“내가 맞았고. 너 덕분에 내가 아주 이 짓만으로 부자가 되겠어.”
내기 성공. 이것으로 오디세우스의 50연승이 달성되자, 시논은 부루퉁한 태도로 일어서더니 말한다.
“그래서··· 파리스라는 사람은 그렇게까지 흥미롭지 않았나 보네. 뭔가 대단한 능력도 못 쓰고. 소문은 믿을 게 역시 못 돼. 무슨 길거리에 나도는 얘기만 들으면 다르다노스의 재림인가 싶으니.”
그리 말하며 시논이 낄낄거리자 오디세우스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한다.
그리고 고개를 젓는다.
“···아니. 그건 아냐.”
“그러면?”
“우리가 생각한 우락부락한 영웅은 아니더라도, 범상치 않은 사람인 건 확실해.”
말이 잘 통했나?
아니다. 긴장이라도 했는지, 파리스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계속 말을 멈추거나 버벅거렸다.
관심사나 성격이 비슷했나?
그렇지도 않았다. 나이 차이도 한참 나고, 살아온 궤적이 워낙 다르다 보니 접점을 찾기도 힘들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나를 아주, 아주 오래 전부터 잘 알던 사람과 대화하는 기분이었어···.
아주 오래된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다고.”
오디세우스는 파리스와의 만남이 좋았다.
뭔가 신기한 눈빛으로 계속 그를 쳐다보는 것도 나름 신선한 기분이었다. 그것 때문에 오히려 더 친근감이 느껴지기도 했고.
왕자와 요정 정혼자, 왕자와 대장장이로서의 어린 시절···
거기에 더해서 이것까지.
오디세우스는 손가락으로 작은 금속 조각을 튕겨본다.
‘이 주화는 안탄드로스의 군주 파리스가 그 가치를 보증하노라.’
안탄드로스에서 주조된 철전을.
왕자와 관련한 이상한 얘기가 많다.
“파리스 왕자랑 다시 만나봐야겠지?”
실리적인 이유에서든.
개인적인 즐거움을 위해서든.
***
외교 사절이란 게 그렇지만, 프리아모스가 제안을 거절했다 해서 오디세우스가 ‘차라리 라오메돈 다시 오라 그래! 저 사람 말은 들으나 마나야!’ 같은 식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오디세우스와 함께 온 밀수꾼들이 트로이아 여기저기서 사업을 벌여야 하는 만큼 트로이아에 발붙이고 있는 기간은 오디세우스 혼자 결정하는 게 아니었다.
오디세우스 역시 이곳에 체류하면서 나를 비롯한 이 지역 사람들과 친목을 쌓을 수 있었으니 손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파리스 님? 여기 한 잔 더 받으십시오.”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지금까지 사절로 다닌 나라들 중에서 트로이아가 제일 편하군요.”
“그렇다면야 정말 기쁘군요.”
그리고··· 나도 그렇게 친목 쌓는 오디세우스를 따라다니며 따라서 먹고 마셨다.
뭐, 추태를 부리거나 한 건 없다. 술이 없으니까 취할 일도 없었다.
주위에서는 오히려 내게 계속 오디세우스와 붙어 있으라고 밀어주기도 한다.
특히 프리아모스는 이타카와의 관계가 경색될 것을 걱정 중이었나 본데, 내가 오디세우스가 곧 왕이 된다는 소식을 띄워주자 곧바로 그를 포섭하라고 등떠민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디세우스는 그리 말하며 뿔잔을 들어 저 바다 너머를 가리킨다.
“저 좁고 산투성이인 땅에 사는 아카이아 놈들은 대부분 자기들끼리 치고박고 싸우기 바쁩니다. 미케네가 어느 정도 패권을 잡고 있다고는 하나, 그것조차도 다들 못 마땅해하죠.”
“···그렇습니까?”
“예. 제가 지난번에 오이칼리아에 들렀을 때는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아십니까? 그 지역 왕이 제 얼굴에 물을 뿌리면서 꺼지라고···.”
“어이쿠, 저런.”
“언젠가 내가 그 새끼는 꼭 좆 되게 만들··· 아, 아닙니다.”
저런.
근데 그건 니 할아버지 때문이잖아.
오이칼리아의 왕 에우리토스가 연 궁술대회에 헤라클레스가 참가한 동안에, 오디세우스의 외할아버지 아우톨리코스가 에우리토스의 말을 훔치고 헤라클레스에게 누명을 씌웠다.
그 결과 화난 헤라클레스가 오이칼리아의 왕자 이피토스를 죽였고, 에우리토스는 헤라클레스를 추방한다.
나중 가면 헤라클레스가 결국 오이칼리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놨으니, 따지고 보면 나라 하나를 말아먹게 만든 오디세우스의 외할아버지 쪽이 개새끼다. (아니 헤가 놈은 대체 멸망시킨 나라가 몇 개란 말인가?)
그놈 손자 사지를 안 찢고 물 뿌린 걸로 끝냈으면 오히려 이 시대 기준으로는 아주 젠틀한 편이다.
“저희 자랑스러운 외할아버지께서는 항상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은혜는 잊어도 원수는 잊지 말라고. 그 모욕은 언젠가 반드시 갚아줘야죠!”
···정작 당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지만.
나는 그리스 신화상 가장 졸렬한 복수마를 적으로 돌린 오이칼리아인들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요새 미케네를 차지하고 떵떵거리는 아가멤논도 저는 능구렁이 같아서 싫습니다. 사람이 항상 정직할 줄 알아야죠. 하여튼 간에 그 새끼도 애비부터 글러처먹은 인간이었으니···”
시시포스가 친아빠에 그리스의 역대급 도둑놈이 외할아버지인 인간이 그런 말을 하는 게 맞는 건가 싶었지만 나는 열심히 맞장구쳐 주었다.
물론 우리 둘만 있는 구석으로 데리고 가서.
애비가 존속살해에다 식인요리사인 아가멤논을 애비가 신성모독범에 외할애비가 사기꾼인 오디세우스가 까다니 가슴이 웅장해진다.
그리스 최고의 후레자식 혈통들만 알뜰살뜰하게 모아두었다.
오디세우스와 대화하면서 몇 가지를 깨달았는데,
우선 덜 중요한 첫번째.
“파리스 님, 아카이아 놈들은 집안 종으로도 쓰지 마십시오. 집안에 들이면 3대를 말아먹을 종자들입니다.”
“아··· 예.”
“하하하하! 제 말을 이렇게 들어주시니 정말 기쁩니다! 이렇게 경청해주신 건 파리스 님뿐입니다!”
흥분하면 할 말, 못 할 말을 못 가린다.
왜 폴리페모스에게 티배깅했는지 알겠다. 이 인간은 가슴에 품은 게 있으면 삭히고는 못 사는 기분파형 인간이다.
기본이 귀족이고 왕족인 놈들이 이런 소리를 듣고 오래 참아주기는 힘들었으리라.
내가 공무원들에게 굽실거리며 지원금 타내던 스킬로 접대하니 호감도가 미친듯이 빠르게 쌓였다.
그리고 두번째.
“아가멤논··· 그 음습한 놈이 누가 봐도 맥아리 없는 동생을 데려다 스파르타 왕위를 홀랑 집어삼킬 것 같은데. 기분이 더러워서 어쩝니까?”
“그···런가요?”
오디세우스는 아가멤논을 별로 안 좋아한다.
“미케네는 아카이아의 중심이고, 스파르타는 아카이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하나인데 그게 모두 그놈 손에 들어가면 제가 그 밑에서 굽실거려야 하잖습니까.”
“그렇군요.”
많이 안 좋아한다.
···뭐, 아무튼 많은 걸 알게 된 시간이었다.
그렇게 열흘 정도가 지나고 나자 낯선 손님을 맞이한 도시의 흥분도 슬슬 가라앉고, 밀수꾼···이 아니라 오디세우스의 수행원들(개인적인 짐을 좀 많이 싸들고 온)도 주머니를 두둑히 채운다.
그리고 나선···
“안녕히 계십시오, 파리스.”
싱거운 작별이었다.
오디세우스는 노을에 얼굴이 벌게져서는 쾌활하게 나를 끌어안았고, 나도 그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가는 길이 안전하기만을 빕니다.”
가다가 무슨 이상한 동굴에서 양떼를 발견하면 처먹을 생각 말라고, 예언 아닌 예언을 해줄까 싶었지만··· 말았다.
만약 오디세우스가 오디세이아에서 묘사된 것과 같은 미래를 맞는다면, 그 전에 오디세우스가 트로이아를 멸망시켰다는 걸 테니.
그냥, 그런 미래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일단은 지금의 약삭빠르고, 쫌생이 같으며, 적당히 서글서글한 오디세우스만을 머리에 남기기로 했다.
“다음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나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곧 무수한 파도가 쳤다.
그 겹겹이 싸인 파도를 뚫고서, 오디세우스는 이타카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