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83
83화. 데메테르 (2)
불멸하는 신들을 직접 만날 기회는 생각보다 흔하지 않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한 이들이 데메테르의 이름을 부르며 씨를 뿌리고, 또 결실을 거두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수십만··· 아니 어쩌면 수백만이 그녀를 향하여 자신의 신심을 바친다.
위대한 도시들이 값비싼 석재로 그녀의 형상을 조각한다.
강력한 군주들이 그녀를 칭송하기 위한 축제를 개최한다.
그러나, 여신은 굳이 이 땅에 왔다.
자신을 위한 변변한 신전조차 세워져 있지 않은 도시로.
그 의미는 명백하다.
‘기대하고 계신다.’
‘신들이 안탄드로스와 그 군주를 주목하고 있다.’
아, 위대한 도시의 빛나는 군주시여···
[상인의 아들아.]아노이토스의 마음이 주군에 대한 자부심으로 잠시 부풀어오르다, 엄습하는 압도감에 다시 빠르게 사그라든다.
[아이야. 네가 누구의 충복으로서 이곳에 왔는지 나는 이미 안다.]슬며시 말려올라간 입꼬리, 막 자란 어린 풀처럼 살랑이는 눈썹.
[네가 내게 가져온 선물이 어떤 훌륭하고 덕이 높은 군주의 것인지도 안다.]따뜻한 눈빛, 부드러운 말투.
무엇보다도 발가락을 간지럽히며 저 흙과 씨앗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듯한 음성.
마치 거대한 대지가 직접 말을 거는 듯하다. 필멸자가 어디서 이보다 더 큰 압도감을 느낄 수 있으랴.
그들이 먹고, 마시고, 사랑하며, 증오하는 모든 것들을 먹이고 굶기는 것이 바로 눈앞의 위대한 분이시니.
[상인의 아들아. 그러나 내 눈으로 살펴보기 전에 너의 입으로 이야기를 듣고 싶구나. 네가 가져온 것은 무엇이라 하느냐? 그리고 무엇을 위한 것이더냐?]“···‘호미’라 하는 기물입니다.”
[‘호미’··· ‘호미’···.]어렵지 않은 발음임에도 먼 나라의 맵고 짠 향신료처럼 어딘지 낯선 느낌이 드는 낱말.
그 낱말의 말맛을 음미하던 여신이 다시 눈앞의 필멸자에게 되묻는다.
“파리스 님께서는 먼 동방에서 유래했다 하셨습니다만···”
예상치도 못하게 신을 마주한 아노이토스는 저도 모르게 말을 버벅거렸다.
그는 아노이토스 본인이 저 ‘호미’라는 물건에 대해서는 이름밖에 몰랐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설명을 들은 적이 없는 사람은 남에게 설명을 할 수도 없었다.
“그게···”
그렇게 말꼬리를 흐리며 아노이토스가 한참 시간만 끌고 있을 때.
“호미는, 텃밭을 일굴 때 특히 좋은 물건입니다.”
그의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무릎 꿇은 채 등 뒤를 돌아보니 그의 주군이 성소의 입구 앞에 서 있었다.
안탄드로스의 군주 파리스가 천천히 아노이토스의 곁으로 걸어와 그의 어깨를 토닥인다.
아노이토스의 시들어가던 얼굴빛이 살아난다. 그는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켜 주군의 뒤로 물러선다.
“여신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에 뒤늦게 오게 되어 죄송합니다. 제가 오랫동안 저의 영토를 가꾸지 않은지라 신민들이 붙잡는 터에.”
[괜찮다. 나는 기다릴 가치가 있는 이들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으니.]파리스는 가볍게 주위를 돌아보았다.
사제들의 다 쓰러질 것 같은 집이 몇 채, 밭이 몇 뙈기, 포석도 깔리지 않은 흙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제단과 신상.
정말로 이곳은 농민들과 몇몇 지주들이 조금 신경 써서 세운 곳이었다.
제법 솜씨가 들어간 신상의 질 등을 보아 초라하다고까지 할 수는 없었으나, 올림포스의 한 자리를 차지한 이를 숭배하는 곳이라 보기에도 어려웠다.
“···이 도시의 군주로서 고통을 느낍니다. 지금껏 안탄드로스가 대지의 어머니께 마땅한 공경을 드리지 못하였으니 죄스러운 마음뿐입니다.”
[죄스러울 게 무엇이 있더냐? 너는 네 백성과 네 백성이 기르는 짐승들을 살찌웠으니 그것이면 되었다.]“이 땅의 곡식들이 풍성히 자라남은 모두 당신의 은혜 덕택입니다. 고작 하나의 도시를 겨우 일굴 뿐인 저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입니다.”
파리스의 말에 데메테르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신을 공경할 줄 아는 아이로구나.]“감사합니다, 데메테르 님.”
아노이토스와 달리, 파리스는 데메테르가 내뿜는 압도적인 존재감에도 전혀 눌리지 않고 그를 대면한다.
“이 호미라는 물건은 흙을 파거나 부수고, 씨앗을 심거나 잡초를 뽑을 때 좋습니다. 정원 같이 작은 땅을 알뜰하게 사용할 때 좋지요.”
[작은 땅을 돌볼 때 좋다 하였느냐?]“예. 그렇습니다. 텃밭을 가꾸고, 꽃과 채소를 돌보기에는 이보다 좋은 물건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작은 것은 커다란 밭과 들판을 가꾸기에는 좋지 않겠구나.]데메테르의 얼굴에서 미소가 살짝 흐릿해진다.
[도시에서 몇몇 이들이 여흥으로 꽃과 풀을 돌볼 때나 도움이 된다면, 많은 아이들에게 안탄드로스의 군주가 베푼 은혜를 퍼뜨리기는 어렵겠구나.순간 성소 주위에 불던 향긋한 바람이 약해진다.
[부유한 이들의 여흥은 나의 마음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니.]여신의 기분에 따라 조용히 흩날리던 풀잎들은 가라앉고, 사제들은 제각기 공경하는 마음을 담아 고개를 숙인다.
[아이야. 나는 흙을 제 손으로 파헤쳐 끼니를 구하는 자들의 신앙을 받는단다.흙으로부터 멀어져 금실로 몸을 두른 채 진창에 발 담구기를 꺼리는 이들이 어째서 나를 찾겠느냐?]
불안한 마음에 아노이토스는 슬며시 자신의 주군을 돌아본다.
그러나 파리스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다.
흐트러짐 없는 자세와 목소리로, 그는 그렇게 말했다.
“농부들의 후견자시여, 걱정하지 마소서.”
파리스는 왼손을 들더니,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긴다.
그에 맞춰 발걸음 소리들이 우르르 일어난다. 그 소리에 아노이토스가 뒤돌아보자 인부들이 한 무리를 이뤄 성소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노이토스가 이제껏 본 적 없는 물건들을 들고서.
“아직 위대하신 분을 위한 선물이 많이 남았습니다.”
***
수차.
이제 수차라고 하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내가 저거 하나 만든다고 피눈물을 흘리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던 시절이 있었다니.
그때는 저거 하나 무너지면 트로이아가 망하니 마니 하면서 진짜 개고생을 했었는데···.
지금 언덕에서 내려다보니 예닐곱 대의 수차가 강줄기로부터 힘을 얻으며 돌아가고 있다.
저것들이 모두 거대한 고로에다 바람을 불어넣고, 또 거기서 나온 쇳덩이를 마구 두들길 무거운 망치를 움직여준다.
“지금 지어지고 있는 것들까지 모두 합하여 곧 10대까지 그 수를 늘리려 합니다. 옛날과 비교하면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늘어나는 것이죠.”
“괜찮군요. 거기까지 걸리는 기한은 이전에 얘기한 것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겠죠?”
“물론. 오히려 전보다 부릴 수 있는 목수들이 더 늘어났으니··· 상황은 더 나아졌을 게다.”
나는 스클레오스의 보고에 만족스럽게 기지개를 켰다.
계획은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오히려 초과 달성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신들의 은총이 더해진 덕에 일이 크게 잘못되지는 않는다.
“수차를 10대 정도까지 늘릴 거라 했었던가요?
“그것도 당장 생각하는 목표일 뿐이니 더 나아간다면··· 가장 많게는 15대나 16대까지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한두 대 정도는 다른 목적으로 돌리는 게 낫겠어요.”
“다른 목적이라면, 혹시 어떤 것인지 여쭐 수 있겠습니까?”
“예, 지금 제 생각으로는··· 거기를 새 데메테르 신전으로 삼으면 괜찮을 것 같네요.”
“신전?”
스클레오스가 전혀 예상치 못한 답을 돌려받았다는 듯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춘다.
나는 그런 스클레오스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마침 도로망이 있는 게 잘 됐네요. 대규모로 설치하면 아마 효율도 더 나을 테니까. 아··· 그런데, 생각해보면 동네마다 근처 실개천에 작은 물레바퀴를 더 세워도 좋겠군요.”
“커다란 수차 하나를 다 쓰고, 또 그것으로 모자라 작은 것들을 새로 세운다고.”
“네.”
내가 그때 수차라는 발명품에 안간힘을 다해 매달렸던 게, 순전히 강철만을 염두에 두고 그랬던 건 아니다.
물론 그때는 강철 말고는 제대로 안 보이기는 했지만.
수차는 동력원이다.
어디에든 쓰일 수 있는.
“무얼 위한 것인지 물어도 되겠니? 신전이라는 대답은 예상을 하지 못해서 말이다. 네가 아노이토스에게 데메테르 님을 위한 제사를 준비하게 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스클레오스는 내 말에 적잖이 당황했는지 공대하던 말씨도 내려놓는다.
그리고 나는 스클레오스의 질문에 가볍게 몸을 떨었다.
내가 이 시대에 떨어져서 가장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 중 하나가 바로 먹거리였다.
“···슬슬 거친 빵은 그만 먹고 싶더군요.”
현대에 비해 빵의 품질이 아주, 아주 끔찍하다.
효모로 발효된 빵은 귀하고, 오븐에 구운 빵 역시 저 이집트로 가야 그나마 보기 쉬워진다. 밀로 만든 빵만큼이나 보리로 만든 빵이 많고, 거친 보리빵은 현미밥만큼이나 맛이 없다.
무엇보다 밀을 제대로, 곱게 가루내어 먹기가 어렵다. 절구에 넣고 곡식을 빻는 일은 꽤 많은 노동력을 소모하는 일이니까.
그러나 내게는 인류가 이럴 때마다 축력 다음으로 애용한 동력원이 있다. 웬만한 가뭄이나 홍수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에야 안정적으로 공급되던 그런 동력원 말이다.
그러니까, 내게는 수차가 있다.
나는 스클레오스에게 내 목표를 말해주었다.
“제분소를 만들 겁니다. 수력으로 움직이는.”
***
물론 전쟁을 목전에 두고 고작 빵맛이나 좀 개선해 보겠다고 이런 일을 벌이는 건 아니다.
지금 안탄드로스에는 철광석과 석탄을 캘 광부가 필요하다.
나무를 구할 목수가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앞으로 병사가 될 수 있는 이들이 필요하다.
그 모든 필요를 한 마디로 줄이자면 이렇다.
나는 잉여 노동력이 필요하다.
이 시대에 잉여 노동력을 늘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소위 원시 공산제 사회라 불리는 수렵채집사회, 또는 초기 농경사회는 생산력이 쥐꼬리만 하니 모두가 식량 생산에 집중한다.
국가와 정부를 지탱할 만큼 생산물이 풍부하지 않으니, 쓸 곳도 없는 잉여 생산물을 만들 바에야 그냥 논다. 그래서 원시 부족의 노동시간은 보통 서너 시간을 안 넘는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넘어가면 상황은 달라진다.
식물의 작물화와 동물의 가축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자 잉여생산물이 축적되고, 그 산물은 생업에 종사하지 않는 인구를 떠받치는 데 사용될 수 있게 된다.
드디어 국가와 정부, 계급과 직업 군대, 전문 장인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즉, 농부 이외에 잉여 노동력을 늘리려면 방법은 하나뿐.
생업에 필요한 노동력을 줄여야 한다.
잉여생산물을 늘려야 한다.
광부가 부족하다면 농부를 줄여야 한다.
농부를 줄이려면 밭을 갈고, 이삭을 베고, 곡식을 찧는 데 필요한 노동력을 줄여야 한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농업생산성의 향상이다.
“조심. 그 신상의 오른손에는 도금한 밀이삭을 들려줄 테니 이번에는 반대쪽부터 조각하게.”
“알겠습니다, 주군.”
그게 내가 데메테르 여신의 신전을 굳이 짓는 이유다.
그리고 그 옆에 대규모 제분소를 짓는 이유고.
어차피 수차로 풀무를 작동시킬 정도의 기술적 성취는 이뤘다.
그 구조 그대로 유지하되, 끝에 맷돌만 달아주면 그만이다.
이미 여러번 지어본 물건을 다시 짓는 만큼 목수들의 움직임도 수 년 전, 첫 수차를 지을 때보다 훨씬 빠르고 능숙해졌다.
그때 수 개월을 걸렸을 일도 이제는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끝날 정도였다.
“그 안에 밀알을 넣어보게.”
“밀알 꾸러미 가져와! 당장!!”
“데메테르시여, 당신께서 은총으로 내려주신 양식을 사용하오니···.”
수차를 짓는 것과 동시에 방앗간을 건설하니, 걸린 시간은 딱 한 달.
그리고 시범적으로 밀알을 넣어보고, 밀가루가 곱게 잘 갈려져서 나오는지 확인하고 개량하는 데 다시 며칠.
“어떤가?”
“사람 손으로는 며칠 걸릴 분량이 아침이 다 지나기도 전에 끝나더군요! 모두 강의 신께서 도우심입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나도, 목수들도 이제 수차 몇 개씩 부숴먹고 요정들 앞에서 오열하는 초짜가 아니다.
“아노이토스? 지주들에게 소식을 전해라. 이제 수확한 곡식을 이곳으로 모아오면 사소한 수준의 사용료만 받고 빻아주겠다고.”
“주군, 굳이 조금만 받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지주들은 군말없이 주군께 사용료를 바칠 텐데요.”
“그야 그렇겠지. 근데 푼돈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니까.”
만약 금화를 좇을 거였다면 적자를 부르는 도로망 따위 건설하지도 않았을 테고, 건설한 뒤에도 막대한 통행료를 받아냈으리라. 트로이아 유료도로당 같은 걸 만들어서 돈을 갈퀴로 모았겠지.
그런데 굳이 그러지 않았다. 고작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괜히 그러다가 노예들이 사용이라도 꺼리면 곤란하니까, 그냥 놔두는 게 나아.”
사용료를 비싸게 받아봤자 노예들이나 영세농들이 사용을 꺼리게 된다면 외려 악수다.
어차피 가난한 저들에게 남아도는 건 시간뿐이니 비싼 사용료를 요구하면, 그냥 남는 시간에 절구로 집에서 빻고 말리라.
조선시대 농민들이 길게 보면 오히려 가성비 좋은 기와지붕을 올리는 대신, 주기적으로 시간만 들이면 되는 초가지붕을 택한 이유와 똑같다.
그런 상황을 초래하느니, 차라리 싼 값에 노동력의 절약을 이끌어내는 편이 낫다.
사용료를 덜 받는 대신 나는 그들의 남아돌게 된 시간을 살 수 있다.
몸이 놀게 된 이들은 먹을 걸 벌러 일거리를 찾는다. 농한기에 피라미드를 지으러 가던 이집트 농부들처럼.
그들은 광산의 광부가 되고,
대장간의 잡부가 되며,
내 병사가 될 것이다.
그게 내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