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38)
1038화. 계승하다 (5)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이 묵룡부 안으로 들어서려 할 때였다.
“……?!”
연호정의 눈빛이 바뀌었다.
우웅! 우우웅!
허리춤의 흑백쌍룡부가 사나운 진동을 발했다. 손에 든 광룡부는 고요하기만 했다.
늑대들은 짖었고, 호랑이는 고요히 살기를 피운다. 연호정의 기도가 순식간에 전투태세로 돌입했다.
“사부님.”
“…….”
“뭡니까, 저 안에 있는 작자는?”
양천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화교주다.”
“……!!”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황궁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들었느냐?”
“조금은요.”
“그래, 그 이야기도 해 줘야겠구나.”
양천은 황궁에서 어떤 사건이 터졌는지, 그리고 지금까지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연호정은 침묵했다.
신화교주 기천웅.
그는 만나 본 적 없는 사람이다. 이번 생에서도, 회귀하기 전의 생에서도.
하지만 언젠가 꼭 싸워야 하는 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광혈교주도 그러했다.
한데 그중 하나가 양천과 함께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야말로 느닷없는 등장이었다. 회귀 후 이런저런 놀라운 일들을 겪었지만, 이처럼 의외의 사건은 처음이었다.
“즉, 저 작자는 우리와 함께 삼교와의 전쟁을 치르기로 했다. 물론 삼교 중 신화교를 담당하겠지. 개인적인 복수심과 목표가 있는 사람이니까.”
“……세작일 확률은 없습니까?”
“아예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사람 속이야 자기 자신만 아는 거 아니겠느냐.”
오히려 그 말을 들으니 기천웅이 세작일 가능성은 거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그 자리에는 아버지도 있었고, 권신과 검선까지 있었다.
저 사음교의 삼사왕조차도 세 사람 앞에서는 감히 속내를 숨길 수가 없을 것이다. 특히나 아버지의 심검은 타인의 정신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만약 기천웅에게 삿된 의도가 있었다면, 아버지가 먼저 검을 뽑았을 것이다.
“한번 만나 보겠느냐?”
“……예.”
스르륵.
불타오르던 기도가 잠잠해졌다.
연호정이 안광을 피워 올리며 말했다.
“반드시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 * *
묵룡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숲.
땅에 광룡부를 박아 놓고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던 연호정은 한 줄기 뜨거운 기운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스르륵.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꿈틀거렸다.
황룡기가 저절로 깨어나며 온몸에 충만한 기운을 퍼트렸다.
상대를 적으로 여겨서가 아니었다. 황룡기의 반응은 압도적인 힘을 지닌 강자의 등장에 자연스레 대비하는 연호정의 습관과 닿아 있었다.
연호정이 눈을 떴다.
그 순간, 이미 그자는 삼 장 거리에 있었다.
금빛 머리, 하얀 피부, 커다란 키.
맨발로 걸어왔음에도 흙 한 덩이 묻지 않았다.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로운 기도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팔짱을 푼 연호정이 바르게 섰다.
“대단하군.”
기천웅의 얼굴에 감탄이 일었다.
“그대가 연호정인가?”
“……그렇소.”
저도 모르게 반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삼교라는 족속을 대할 때면 반사적으로 흘러나오던 살기나 증오는 없었다. 하지만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다. 나 자신을 잘 다스린다 해도, 습관까지 어쩌기는 힘들었다.
연호정은 그 습관을 억누르고, 상대를 교주가 아닌 사람으로 대했다.
오묘한 표정으로 연호정의 얼굴을 살피던 기천웅이 물었다.
“나이가 어떻게 되는가?”
“아직 서른 전이오.”
“서른 전…….”
기천웅이 탄식을 토해 냈다.
“대륙이 괴물을 낳았구나. 본교에도, 다른 두 교에도 자네 나이에 이만한 경지를 이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아니, 삼교 역사를 통틀어 존재하긴 할지 의문이구나.”
“…….”
“듣기로 신에 이른 안목과 감각을 지닌 군략의 재능도 타고났다 들었다. 모두가 인정하는 군략의 재능에 이십 대에 천하제일을 논하는 무공까지. 괴물이라는 표현조차 어색할 만큼의 괴물이야.”
“…….”
“나는 여태껏 내 아들과 광혈의 새 교주가 천하제일의 재능을 다툰다고 생각했다. 한데 아니었군. 그 두 사람의 재능도 자네에 비하면 천재와 범재만큼의 차이가 있어.”
“칭찬, 고맙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연호정은 또 한 번 자신을 다스렸다. 황룡기를 끌어 올려 중단전을 감싸니, 잔재하던 증오와 떨떠름함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기천웅의 눈이 반짝였다.
탁무자가 전수해 준 무공으로 상단전을 다스리고 있어, 상단전이 무너지기 전과는 달리 미세하게나마 상대의 기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볼 수 있었다.
‘마음을 다스리고 있군.’
기천웅의 눈이 흔들렸다.
‘한데 저 진기는……?’
왜인지 모르게 신경이 쓰이는 진기였다.
어느 한 가지가 아닌 여러 가지 기질을 품은 힘이었다. 그렇다고 난잡하진 않았다. 오히려 지극히 신비롭고 성스러운 기운이었다.
‘엄청난 무공이군.’
무공의 경지가 아니라, 저 내공술 자체의 깊이가 대단하다는 걸 깨달았다.
‘천하제일을 논하는 무학에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싶은 재능, 거기에 더해 신에 이른 전술안은 물론 단단한 마음까지.’
눈이 부신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기천웅이 한숨을 쉬었다.
“십 년, 아니 오 년만 지나도 천하에 자네와 당적할 만한 고수가 없겠군.”
“…….”
“자네가 나를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들었네. 하지만 나 역시 자네가 보고 싶었어. 어떻게 생겨 먹은 괴물이기에 그처럼 놀라운 일들을 벌였는지 궁금했지.”
기천웅이 쓰게 웃었다.
“과연 그럴 만하네.”
“묻고 싶은 게 있소.”
“무언가?”
툭 던지듯 말하는 기천웅의 얼굴에는 한 점의 삿된 의도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인생의 많은 것을 내려놓은, 나이 많은 현자의 분위기가 풍겼다.
‘다르군.’
연호정은 자신이 상상했던 신화교주와 실제 신화교주 사이에 하늘과 땅 같은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직접 보지 않았으면 절대 믿지 못했을 것이다.
‘나에게도 편견이 있다는 것이다. 무조건 저들이 절대악이라는 편견이.’
상대가 악이라서 싸우는 게 아니다. 서로의 가치 차이 때문에 싸우는 것이다.
그러나 연호정에게 있어 삼교인들은 하나같이 악이었다. 악이 아니면 안 되기도 했다.
연호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상단전, 소교주 때문이오?”
“양 부주가 어느 정도 설명했을 것 같은데.”
“자세히 들었소. 하지만 모르는 건 모르오.”
“내 잘못이지. 아들을 그렇게 키운 죄야. 적어도 절반은 내 잘못이라고 보고 있네.”
“…….”
“나머지 절반은 사음교주겠지.”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사음교주가 소교주를 이용하고 있단 말은 들었소.”
“그렇다네.”
“하면 그가 광혈에도 손을 뻗었소?”
“정확히는 알 수 없네. 하지만 나는 그렇다고 보고 있네. 물론 깊숙한 곳까지 뻗지는 못했겠지.”
“그렇군.”
연호정이 또 한 번 한숨을 쉬었다.
“탁무자 노선배에게 상단 무공을 전수하였구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니까. 자칫 본신진기의 절반 이상을 건드리게 되면, 그날이 곧 내 무공이 상실되는 날이라네.”
“…….”
“뭐, 지금은 괜찮네. 전력까지는 아니지만 무리하지 않는 선이라면 얼마든지 무공을 구사할 수 있어.”
탁무자는 기우희에게도 그 무공을 전수했다.
말하자면, 탁무자 역시 기천웅이 배신하거나 나쁜 마음을 품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연호정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대로 싸울 수 있겠소?”
기천웅은 솔직하게 답했다.
“신화를 말하는 거라면, 아니라고 답하겠네. 나는 신화를 무너트릴 생각이 없어. 정화하고 싶을 뿐이야. 물론 부득이하게 싸워야 하는 순간은 오겠지만, 그것이 신화의 멸망으로 이어지진 않을 걸세.”
“…….”
“다만…… 내 아들놈은 다르지.”
기천웅의 눈이 서늘해졌다.
천하에서 가장 뜨겁고 격렬한 내공을 가졌음에도, 눈빛은 저 머나먼 북해의 얼음도 비기지 못할 정도로 차가웠다.
“내 아들은 내가 죽일 것이다. 그 한 번의 기회를 위해 무공을 다스리고 있었어.”
“그렇군.”
“그게 걱정이었나?”
가만히 기천웅을 보던 연호정이 광룡부를 뽑고는 몸을 돌렸다.
“그저 보고 싶었소. 언젠가 적장으로서 만나 목숨 걸고 싸우게 될 사람들을 상상했는데, 그중 하나가 당신이었으니까.”
“그렇구먼.”
“이유야 어찌 되었든 손을 잡았으니, 서로 사고 치지 말고 맡은 바 소임을 다합시다. 그저 그 말이 하고 싶었소.”
기천웅이 미소를 지었다.
증오해 마지않던 적이 아군이 되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살기를 일절 드리우지 않고 저런 반응을 보이기는 쉽지 않다.
‘참 담백한 녀석이군.’
처음 봤지만, 듬직한 것이 왠지 모르게 신뢰가 갔다.
천천히 걸어 나가는 연호정의 등을 보며, 기천웅이 물었다.
“이걸로 끝인가?”
연호정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끝이오. 언제나 주시는 할 테지만, 일단은 안심하고 갈 수 있겠소.”
“가볍구먼.”
“……?”
“자신의 눈을 너무 과신하는 것 같네. 물론 내가 보기에도 자네가 대단한 사람인 건 맞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리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야.”
연호정이 등을 돌려 기천웅을 바라보았다.
기천웅이 웃으며 말했다.
“진정 서로에 대해 알고 싶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야.”
“괜찮겠소?”
“검선 늙은이 덕에 괜찮네. 전력 승부는 안 되겠지만, 서로를 알아볼 정도로 어울리는 건 충분히 가능하지.”
말이 어울리는 거지, 전력을 다하지 않은 기천웅의 실력만으로도 어지간한 무극수는 대처 자체가 쉽지 않을 것이다.
당장 황궁에 나타났을 때만 해도 그랬다. 곡경은 기천웅의 무공을 보며 상대는 될지언정 승리를 거머쥐긴 힘들겠다는 생각부터 했다.
기천웅은 그 정도로 막강한 상대였다.
가만히 그를 보던 연호정이 광룡부를 어깨에 걸쳤다.
후우우우웅!
그의 몸에서 황금빛 기운이 연기처럼 흘러나왔다.
“증오의 잔재가 다 사라지지 않은 시점이오. 손속이 다소 거칠 수 있으니 유념하시오.”
“나야 자네에게 아무 감정 없으니 살초 따위는 쓰지 않을 걸세. 다만 조심하는 게 좋아. 불이란 의도치 않아도 온 산을 불태우는 법이거든.”
“마음에 놓이는군.”
“보면 볼수록 제법이로고.”
“먼저 가겠소.”
파아아악!
연호정이 돌진하며 광룡부를 휘둘렀다. 기천웅은 자세를 낮추며 시퍼런 불꽃을 피워 올렸다.
인종도 다르고 목적도 다르지만, 두 사람은 무인이었다.
무인은 본인이 가장 자신하는 공부로 스스로를 증명하는 법.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조금씩 조금씩 알아 가기 시작했다.
* * *
“하면 이주하시는 겁니까?”
“그래야지. 물론 시간이 없으니 나도 따라가지는 못할 듯하네. 이주 전에 가서 훑어보고, 무림맹으로 가야 할 것 같네.”
“무림맹 말씀이십니까?”
“그래. 곡경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지금쯤 아직도 안 오고 있냐면서 있는 대로 화를 내고 있을 걸세.”
백서가 고개를 숙였다.
“부주님.”
“음?”
“정말, 후회가 없으십니까?”
양천이 피식 웃었다.
“이 사람아. 이 나이 먹고 후회 남을 일을 왜 하겠는가?”
“…….”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이겠지만, 후회는 안 하네. 게다가 그놈, 어떤 의미로는 나보다 더 흑도를 잘 이해하고 있어. 분명 잘해 나갈 것이네.”
“알겠습니다.”
“자네도 꽤 아쉽지?”
백서가 고개를 들었다.
평소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저는 주군을 모신 것이지, 묵룡부의 주인을 모신 것이 아닙니다.”
“허허허.”
“오히려 부주직을 내려놓으신다면 저도 한결 편해지겠군요.”
“같이 늙어 가는 사이인데 앞으로는 더 편하게 해도 괜찮네.”
“그렇게 하지요.”
“이 사람, 아주 기다리고 있었구먼?”
양천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마주 웃던 백서가 품에서 서신을 꺼내 들었다.
“다만 이것까지는 부주님께서 처리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음? 그게 뭔가?”
“연심과 정안, 보타암의 검수들에게서 온 서신입니다.”
양천의 눈이 반짝였다.
“보타암이라…… 하기야, 내가 싼 똥은 내가 치우고 가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