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51)
1051화. 얼음의 마왕 (1)
후우웅.
바람이 불었다.
북쪽보다는 온건한 날씨라고는 해도, 겨울에는 호남 역시 춥다. 하물며 고지대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멀리 형산(衡山)의 웅혼한 산맥 위로 허연 서리가 끼었다.
“확실히 다르군.”
무려 열흘 만에 눈을 뜬 기천웅의 자태는 여전히 눈이 부셨다.
그가 선 자리에 반경 일 장 안에는 눈송이 하나 내려앉지 않았다. 대신 주변에 제법 많은 눈이 쌓였다.
“절경이로고. 과연, 조사들께서 대륙 땅을 손에 넣고자 혈안이 되셨던 이유가 있었어.”
범부라면 털옷을 껴입고 올라도 추운 날씨에, 그는 여전히 백색의 펑퍼짐한 옷 한 자락만 걸치고 있었다.
심지어 예전처럼 맨발을 고수했다. 그렇게 맨땅을 밟고 다녔는데도 그의 발은 신경 써서 관리한 여인의 발처럼 깨끗했다.
기천웅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흐린 구름을 밀어 낸 태양 빛이 강렬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아주 좋군. 날씨가 이런데도 음기와 양기의 조화가 대단해. 열양공을 익힌 사람에겐 발전을 위한 장소로 추천할 만하지 않으나, 심신과 무공을 안정적으로 다스리는 데에는 이만한 장소도 또 없을 거야.”
“그렇지요.”
기천웅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소정광이 있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체격은 조금 왜소했지만, 잘 연마된 도객의 기도가 여실히 드러났다.
“언제부터 기다렸나?”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자네는 거짓말에 능하군. 잠깐이지만 속을 뻔했네.”
“하하,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기천웅이 피식 웃었다.
“자네들에겐 한때나마 적이었다지만, 그래도 신화의 주인이었던 사람을 속이려 하다니 정말 배포 하나는 끝내주는군.”
“제정신으로는 전쟁을 치르기 힘들지 않습니까. 이렇게 별일 없을 때 한 번씩 미쳐 줘야 진짜 미쳐 버릴 것 같을 때 버틸 수 있겠지요.”
“말은 좋군.”
“그나저나 신기하네요. 보통 중원의 무공은 명상이나 운기를 할 때 가부좌를 틀기 마련인데, 교주님께서는 입공(立功)을 하시는군요.”
“좌공이든 입공이든 동공(動功)이든, 자신에게 어울리는 길을 찾는 게 좋겠지. 당장 천화경에 오르지 않아도 운기나 명상을 하는 데 있어 자세에 구애받지는 않을 텐데?”
“제가 아직 많이 부족해서 그럽니다. 역시 고수들의 세계는 다르군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분위기를 유하게 만들고자 맞장구쳐 주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기천웅과의 대화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기천웅의 얼굴에 의외의 빛이 어렸다.
“자네의 재능은 확실히 뛰어나. 조금 다르긴 하지만, 자네와 그렇게 죽고 못 사는 벗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을 걸세.”
“죽고 못 사는 게 아니라 때려죽일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친한 척하는 겁니다.”
“그래도 자네는 군사의 길을 택했을 터인데, 어찌하여 무장(武將)의 냄새가 진하게 나는지 모르겠군.”
소정광이 멋쩍게 웃었다.
“현장 지휘가 안 되는 군사는 반쪽짜리에 불과하지 않겠습니까. 저 망할 흑도 놈들을 데리고 싸우려면 저도 어지간히 피를 봐야 할 겁니다.”
“재미있는 동네로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어렸을 때만 해도 흑도에 뛰어들어서 칼춤이나 추고 살 줄은 몰랐습니다.”
“나라고 대륙으로 건너와 아들놈과 싸우려 들 줄 알았겠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게 현실인걸, 뭐.”
소정광이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경치 좋지요?”
“웅장하고 아름답군.”
“이 봉우리는 교주님과 참으로 잘 어울립니다. 이곳은 형산의 축융봉(祝融峯)이라 하는데, 축융이란 저희 중원의 화신(火神)을 뜻합니다. 실제로 저기, 조금만 더 가면 축융신을 기리는 곳도 있습니다.”
“아네. 오른 첫날 가 봤지. 불의 신일 줄은 몰랐네만.”
“형산은 남악(南岳)이라고도 하지만 수악(壽岳)이라고도 불립니다. 축융, 즉 중원의 화신은 사람의 목숨이나 인연도 관장하거든요. 해서 장수하고 싶은 이들이 형산에 오르곤 합니다.”
“그랬군.”
“교주님께서는 오래 사실 겁니다.”
“내 나이가 몇인 줄 아는가?”
“백 세는 안 되시지 않았습니까?”
“머지않았지.”
“전쟁이 끝나고도 오래오래 사십시오.”
기천웅이 피식 웃었다. 단둘이서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지만, 소정광의 넉살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신화를 본래대로 돌려놓고도 살아남는다면, 그때는 혼자서 대륙을 도모해 보도록 하지.”
“그때가 되면 어려우실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우리 성주님 성질머리가 워낙 독해서요. 그때는 정말 끝장을 볼지도 모릅니다.”
“하하하.”
기천웅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소정광도 마주 대소했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자네와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이제야 몸이 좀 풀리는 것 같구먼.”
“열흘 동안 같은 자세로 서 있으셨으면서 고작 이 정도로 몸이 다 풀리셨습니까? 괴물이십니다.”
“자네와의 대화는 참 즐겁지만, 나도 경우가 없는 사람은 아니야. 바쁜 사람을 오래 붙잡고 있을 순 없으니 굳이 힘들게 찾아온 이유나 토해 보게나.”
소정광의 얼굴이 단번에 진지해졌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교주님께서는 북해빙궁을 아십니까?”
“……!”
기천웅의 눈이 깊어졌다.
“빙륜교(氷輪敎)를 말하는 건가.”
“예? 빙륜교요?”
“몰랐나?”
“……?”
“북해빙궁의 전신이 빙륜교였네. 저희들끼리는 천정빙륜신교(千晶氷輪神敎)라고 간판을 내걸었네만, 당시 사람들은 그냥 빙륜교라고 불렀지.”
“세상에는 참 종교가 많군요.”
“그렇지. 왕이니 황제니 들먹이는 것보다 시원하게 신을 자처하는 게 낫지 않겠나.”
“그릇이 다르네요.”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라, 내전이 어지간히도 많이 터졌다고 하더군. 혈교 본파가 사라지고 삼공가가 삼교로 바뀌기 전인가? 변방에서 몇 번 국지전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고 들었네.”
“……허어.”
“여하간 빙륜교는 왜?”
보아하니 삼교 측에서는 북해빙궁을 줄곧 빙륜교라고 부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즉, 자신들보다 그들에 대해 잘 안다는 뜻이다. 그것만으로도 소정광은 하루의 기다림이 아깝지 않았다.
“북해빙궁에서 파견한 무사들이 중원으로 들어왔습니다.”
“…….”
“강 신장을 도룡단과 함께 보냈지요. 맹 측에서도 사람을 보낼 겁니다.”
“그들에게서는 별다른 말은 없었나?”
“그렇습니다.”
“그것참, 신경 건드리는 녀석들이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가뜩이나 잔뜩 날이 서 있는데 말도 없이 섬서로 들어와서 버티고 있지 뭡니까. 다만 위치가 위치인 만큼 싸움을 걸러 온 것은 아닌 것 같긴 합니다만.”
“만약 빙륜교 놈들까지 끌어들였다면, 그들을 시선 끌기용으로 써먹고 다른 곳을 타격할 수도 있겠군.”
“역시 전술을 아십니다. 저희도 그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자네들 생각은 어떤데?”
“아무것도 확신할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일단 붙자고 왔을 확률은 낮지만, 그렇다고 마실이나 나왔을 리도 없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겠지.”
“그들 역시 이쪽 세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면 우리와 삼교 간의 싸움이 임박했음을 알아차렸을 겁니다. 아마 뭔가를 얻기 위해 동맹 제안을 하러 온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만.”
기천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글쎄, 나는 잘 모르겠군.”
“어찌 그렇습니까?”
“빙륜교는, 아니 그쪽 동네 놈들은 워낙 편협하고 폐쇄적인 성향으로 악명이 높아. 오죽하면 천 년의 세월을 그 자리에 박혀 살겠나.”
“으음.”
“물론 개중에는 독특한 놈들도 있어서, 한 번씩 세상 구경을 하겠다고 대륙까지 오기도 했다고 들었네.”
“예. 대문파들의 사서에도 기록되어 있다더군요. 하나같이 대단한 무력의 소유자들이었고, 뼛속까지 얼려 버리는 빙공의 대가들이라고 합니다.”
“그건 사실일 걸세. 본교의 사서에도 그들에 대한 묘사나 특성이 잘 적혀 있으니까.”
기천웅이 뒷짐을 진 채 걸었다. 소정광이 한 발짝 뒤에서 그를 따랐다.
“빙륜교에 대해서는 삼교 중 그나마 본교가 잘 아는 편이라네.”
“어째서입니까? 역시 불과 얼음이라는 상반된……?”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나마 우리가 그쪽과 지역이 가까워서 그렇다네.”
“아, 역시 그렇지요?”
“하지만 자네 말도 맞네. 멀지만 마음만 먹으면 왕래를 못 할 사이도 아니지. 그래서 우리는 항상 빙륜교를 신경 썼다네.”
“빙륜교가 더 북쪽이지요?”
기천웅이 미소를 지었다.
“역시 자네는 뭘 아는군.”
소정광이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북쪽에서 내려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말하자면 뚜껑인데, 그렇다면 신화교 입장에선 참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겠군요.”
“당연하지. 사절이라도 보내서 최소한의 친분만 나눌까 했다는데, 그마저도 거부했다더군. 워낙 긴 세월을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아서,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낸다네.”
“그렇다고 아주 무시할 수는 없고요?”
“그래서 더 조사하고 알아내려고 했지. 심지어는 선공으로 그쪽 지역을 다 먹어 버리자는 강경파들도 대대로 많았네. 불안해하며 눈치를 보느니, 차라리 전쟁을 벌여서 영토를 확장하자는 뜻이지.”
“조금 잔혹하긴 합니다만……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결과적으로 몇 번의 국지전을 제외하고는 싸움다운 싸움은 벌어지지 않았네.”
소정광은 난감함을 느꼈다.
분명 기천웅은 중원인들보다 북해빙궁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지만, 도움이 될 정도로 많이 아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 기천웅이 말했다.
“그랬던 놈들이 그 먼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다는 게 무슨 의미겠나?”
“그걸 모르겠습니다.”
“모르긴 왜 몰라?”
“예?”
“자네가 말했잖은가. 우리는 영토가 가까웠다고.”
“……?”
“그렇게 많은 수의 빙륜교도들이 움직였는데, 신화가 그것을 포착하지 못했을까?”
“……!!”
소정광의 눈이 흔들렸다.
기천웅이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우리 쪽 지역을 머리로 그릴 수가 없으니 놓칠 수밖에 없었겠지. 이해하네.”
“교주님의 말씀은 그럼……?”
“둘 중 하나겠지. 빙륜교 놈들이 우연히 이런 시대, 이런 순간에 동맹을 맺자고 찾아왔거나…….”
“신화교와 손을 잡은 걸 숨긴 채 찾아왔거나.”
“우연히 왔을지언정 신화교 역시 쉽사리 싸움을 걸진 못했을 걸세. 빙륜교는 강해. 전쟁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이런 판국에 일정 이상의 전력 소모를 감당할 수는 없었겠지.”
“하지만 어떻게든 해결을 볼 생각이었다면, 그게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물론 그렇겠지.”
“그렇다면…….”
기천웅이 고개를 저었다.
“알 수 없네. 다만, 내 아들놈 성질머리를 생각하면 그걸 그냥 놔뒀을 리는 없을 것 같으이.”
“그렇다고 그처럼 강한 병력과 싸워서 전력 소모를 감수할 만큼의 바보도 아니잖습니까?”
“그것도 그렇지. 하지만 어차피 빙륜교도들이 중원과 손을 잡는다면, 신화교 입장에서도 발등에 불 떨어진 격이야. 무공부터가 상극인 데다가 그걸 그냥 놔두고 있었냐는 광혈과 사음의 질타를 받게 될 테니.”
소정광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 먼저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나도 끝났네. 같이 내려가지.”
파아아악!
두 사람이 눈 쌓인 축융봉을 단숨에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