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58)
1158화. 백음귀(百淫鬼) (8)
허공에서 폭발한 경파가 사위를 휩쓸었다.
기척도 없이 다가와 폭발하는 진동의 무공, 암공파의 위력이었다.
쿠구궁.
연호정이 딛고 선 땅에서부터 사방으로 실금이 뻗어 나갔다.
그야말로 인정사정없는 공격이었다. 천하의 연호정조차 미리 방비하지 않았다면 크게 내상을 입었을 정도로 하은교의 암공파는 필살의 의지를 담고 있었다.
다행히 연호정은 방심하지 않았고, 약간의 충격만으로 그 위력적인 발경술을 없애 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공격은 없애 버렸지만, 그녀의 이성을 되돌려 놓지는 못했다.
“선배님.”
“너는, 내 새끼가 아니야!”
날카롭고 뾰족한 목소리였다.
하은교 특유의 고운 미성이 이렇게까지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지 몰랐다. 의도하지 않아도 목소리에 알아서 내공이 실린다. 그 외침 자체가 하나의 음공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위력 증폭을 위해 그 소리가 연호정에게만 집중되었다는 것.
너무나도 높은 경지에 도달했기에 오히려 주변 사람들은 안전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다. 저는 하 선배님의 자식이 아닙니다.”
“너, 너는!”
“하지만 언제고 하 선배님을 걱정했습니다.”
하은교가 이를 악물었다. 가면을 썼지만, 그런 표정일 것이다. 아니, 분명 그런 표정이다. 연호정은 알 수 있었다.
“저는 강동 연씨세가의 장남으로, 음제 하은교의 자식이 아닙니다. 그러나 피가 이어진 사이만이 부모 형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닌 법, 고작 이틀밖에 되지 않는 시간이라도 제게 있어 선배님은 어머니와 같았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진심이었다.
살짝 놀란 데 그친 강량과 달리 진양은 경악했다. 보이는 것과 달리 감성적인 면이 있는 사람이라는 건 알았지만, 설마 적이 빤히 보고 있는 앞에서 하은교를 어머니처럼 생각했다는 말을 할 줄은 몰랐다.
그 담담한 의외성은 허백의 표정조차 미세하게 바꾸어 놓았다.
하은교가 비틀거렸다.
그녀가 비틀거리는데도, 한옆에 물러난 육십여 명의 백음귀들은 조용히 그녀를 지켜보았다.
“나는…… 너, 너는…….”
“제멋대로 그리 생각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 마음은 진실로 그러했습니다. 선배님께서 제 운공을 도와주시고 제 어깨를 토닥여 주셨을 때, 저는 기억조차 흐릿한 어미의 정을 느꼈습니다.”
“……!”
“물론 저의 착각일 수 있지요. 하지만 중요한 건 제가 그렇게 느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저는 하 선배님을 절대 죽일 수 없습니다.”
연호정이라는 개인으로서 하는 말이었다.
말의 무게감이 달랐다. 절대 죽일 수 없다는 것, 즉 그녀가 이대로 중원의 적이 된다 한들 자신이 나서서 마주하지는 않을 거란 말이었다.
하지만 흑제성주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러나 끝까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신다면, 흑도 무림의 수장으로서 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부득불 손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너!”
뾰족한 음성. 연호정은 고막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그래도 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래도 이해해 주실 겁니다, 선배님이라면.”
“으윽!”
“아주 잠깐이라도 어미의 정을 느꼈다는 것, 그저 저의 착각일 수 있습니다만 그리 믿고 싶진 않습니다. 마음은 주고받는 것이라 하였지요. 하 선배님께서 제게 보내 주신 그 따뜻한 마음이 아니었다면, 저 역시 그런 안온함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연호정은 단정 짓듯 말했다.
“선배님은 제게서 자식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단도직입적인 말이라서 위험했다. 하은교의 붉어진 좌측 눈동자에서 무시무시한 살광이 뿜어져 나왔다.
연호정은 개의치 않았다.
“괜찮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떠나보냈지만, 누구보다도 멋진 아버지가 살아 계십니다. 하 선배님이 저를 자식의 대용품으로 보았든, 잠시나마 자식처럼 여겼든…….”
콰아앙!
이전보다 더 묵직한 암공파가 연호정의 상반신을 휩쓸었다.
“형님!”
“대형!”
두어 걸음 비틀거린 연호정이 손으로 상의를 털었다. 옷 여기저기가 헤져 있었지만, 다행히도 큰 충격은 없는 듯했다.
“뭐가 되었든, 저는 괜찮습니다. 아주 잠시라도 어미의 정을 느낀 것만으로도 선배님께선 제게 하해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신 셈입니다.”
“……말하지 마.”
“그러니 이만 정신 차리시지요.”
“닥쳐! 말하지 마!”
강량과 진양, 허백이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광범위하게 퍼진 음공에 그들도 순간적으로 고통을 느낀 것이다.
화아아악!
연호정의 몸에서 황금빛 찬란한 기운이 퍼져 나왔다.
부풀 듯 확장한 기운이 어느새 비단처럼 사방을 휘어 감았다. 그 어떤 힘으로도 뚫지 못할 황룡의 방패였다.
“저를 흑제성주가 아닌 연호정이란 이름의 애송이로 대해 주십시오.”
“닥치라고 했어!”
“저 역시 하 선배님을 음제라는 무인이 아닌 하은교라는 사람으로 대하고 싶습니다.”
“이놈!!”
순간 하은교의 입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가 엄청나게 굵어졌다.
마치 십팔 층 지옥 밑에 거하는 이름 모를 마왕의 외침을 연상케 한다. 귀신이라도 씐 것처럼 무섭게 깔리는 목소리는 인간 본연의 공포를 자극하고 있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목소리는 제게 통하지 않습니다.”
본능 수준에서 발휘되는 목소리만으로도 사람의 감정을 제멋대로 자극한다.
오직 악기를 다룰 때, 사람의 감동을 끌어낼 때만 썼던 그 기묘한 힘이 폭압의 기세로 쏟아진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마성(魔聲)을 듣는 것만으로도 공포에 질려 주저앉았을 것이다.
하지만 연호정은 조금의 공포도 느끼지 않았다.
공포는커녕 연민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소리로 사람의 마음을 조종할 만큼 음(音)으로 독보적인 영역에 도달한 예인이요, 무사가 그녀였다. 한데 그리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던 사람이 타인에게 조종당한 채로 고향에 왔으니, 이처럼 서글픈 일이 또 어디 있으랴.
진심 어린 안타까움. 연호정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배어 있었다.
그 진심을, 감정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는 예인이기 때문에 하은교도 흔들리고 있는 것이리라.
동시에, 연호정은 자신이 흑제성주이자 강호의 무림장(武林將) 중 하나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선배님.”
“이이익!”
“어차피 거짓은 통하지 않을 테니, 저의 진심을 알려 드리지요.”
안타까움으로 가득했던 연호정의 눈에서 조금씩 위엄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저의 아버지, 벽산연가의 가주께서 진심으로 저를 죽이려 한다면, 저는 응당 죽을 것입니다. 그럴 일은 없다는 걸 알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저는 그것이 운명이라 생각하며 순응할 것입니다. 그 앞에…… 흑제성주라는 이름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강량과 진양, 허백과 호종대는 더더욱 연호정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패도(覇道)가 아니기 때문에.
오로지 세상이 하나 됨을 원하기 때문에,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만이 목적이기 때문에.
더 나은 백도, 더 나은 흑도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 상처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우우우우우웅!!
황룡기가 아가리를 쩍 벌리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선배는 다르지요.”
“이이익!”
“인간 연호정에게 있어 하은교라는 사람은 맞서 싸우고 싶은 적도 아니요, 비무로라도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은 어른입니다. 하지만 선배님께서 절 죽이려 한다면, 저는 연호정의 이름 너머 흑제의 별호를 꺼내 와 반드시 반격할 것이고, 나아가 선배를 죽일 것입니다. 그것이 흑도 무림의 수장으로서 가진 책임입니다.”
연호정이 한 걸음, 한 걸음 하은교에게로 다가갔다.
일 보를 나아갈 때마다 연호정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파가 사나워졌다.
“그리고 그것이 제 아버지와 선배의 차이입니다.”
“이놈! 이놈!”
“제 아버지는 저의 아버지시고, 선배는 선배입니다. 선배가 아무리 제게서 자식의 환상을 봤다 한들, 제가 선배의 얼굴 너머에서 돌아가신 모친의 따사로움을 느꼈다 한들, 하은교란 사람은 제 진짜 어미가 아닙니다.”
번쩍!
서부 전선에서 적을 휩쓸었을 때보다 두 배는 더 커진 황룡의 환상이 미친 듯이 몸부림치며 사나운 경파를 일으켰다.
그 미친 몸부림은 곧 연호정의 마음이라.
흑제성주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정신 차려, 하은교! 내가 흑제성주로서 나서게 하지 마라!!”
콰콰콰쾅!!
두 사람이 피워 올리는 기파가 부딪치며 무시무시한 충격파를 만들어 냈다.
그 충격파는 하은교의 음공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파괴력으로 주위를 휩쓸었다. 흑제성의 일원들은 물론 육십여 명의 백음귀들까지도 이십여 장 밖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는 무신들의 충돌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하은교의 좌측 눈이 동공과 자위의 구분이 없는, 완전한 적색으로 물들었다.
“하아아아압!”
콰콰쾅!!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연달아 폭발이 터져 나왔다.
연호정의 주먹은 백호공, 호왕구벽세의 투로를 따라 하은교의 사자후를 깨부쉈다. 그러고도 하은교는 멀쩡했고, 정작 연호정이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 순간.
연호정은 흑제성주로 돌변했다.
쾅!
무시무시한 진각과 함께 황룡기를 극한까지 끌어올린 연호정이 혈익휘천을 펼쳤다.
번쩍!
그야말로 빛살이 따로 없었다.
일순 하은교의 코앞에 나타난 연호정의 두 주먹이 불새의 날개가 되었다.
실로 오랜만에 펼쳐지는 홍염육살공(紅焰六殺功)이었다. 일익비살(一翼飛殺), 쌍익비살(雙翼飛殺), 화익포궁(火翼抱躬), 홍련일섬(紅蓮一閃), 홍화섬(紅禍閃)에 이은 마지막 초식 초열(焦熱)까지 일수유에 펼쳐졌다.
사신무 중에서도 반드시 적을 죽인다는 극살의 무공이 다른 누구도 아닌 하은교를 향해 쏟아진다. 그것도 기존의 사신무를 뛰어넘어 무도의 극한이라 불리는 황룡기로 펼쳐 낸 황금빛 불새의 살법이었다.
콰콰콰쾅!
휘몰아치는 황금빛 불꽃은 마치 기천웅의 열양공을 보는 듯 살벌한 열기를 피워 올리며 하은교를 위협했다.
퍼퍼퍼펑! 콰르르릉!
금화(金火)에 휩쓸린 하은교의 몸 곳곳에서 우두둑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근골이 어긋났다가 다시 맞춰지는 소리, 파멸의 위력을 자랑하는 연호정의 권법 절기에 맞서 그녀의 육신이 최선의 방어책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었다.
“캬아아앗!!”
빈틈 따위 보이지 않는 무신의 공격이었지만, 상대 역시 무신의 칭호를 얻은 절대자였다.
한 줄기 날카로운 소리로 연호정의 연환기를 주춤케 한 하은교가 곧바로 쌍장을 휘둘렀다.
육안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평범한 장법.
하지만 연호정은 한 쌍의 섬섬옥수에서 저승길 위에 선 차사들의 눈빛을 보았다.
콰콰쾅!
호왕구벽세의 호포살(虎咆殺), 호왕살(虎王殺), 호악흉마(虎顎凶魔)의 세 초식이 연환으로 펼쳐지며 하은교의 장법을 분쇄했다.
할퀴고, 팔꿈치로 찍어 내리고, 무릎으로 올려 차는 일련의 과정이 거대한 호랑이 아가리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폭발하는 경파 속에서 하은교가 미친 듯이 뒤로 물러났다.
명백한 후퇴였다. 연호정의 강공을 버텨 내지 못한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정기신이 어긋난 지금의 하은교로서는, 혼신의 힘을 다한 연호정의 공격을 절대 감당할 수 없었다.
차르르르르륵!
우측 소매 안에서 흘러나온 교룡쇄가 어느새 백룡부와 결합하고, 언제 뽑았는지 좌수에 들린 흑룡부엔 광기 어린 살기가 가득했다.
“하은교!!”
번쩍!
광룡공(狂龍功)의 광룡섬으로 날아간 흑룡부가 하은교의 심장을 노렸다.
하은교 자신은 물론 그 어떤 무극수가 끼어들어도 막을 수 없는, 빛살과도 같은 이기어(以氣馭)였다.
하은교의 눈이 흔들렸다.
퍼버버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