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Corporation: Joseon RAW novel - Chapter (562)
562화 단절. (1)
허후의 단호한 대답에, 향은 다른 대신들의 얼굴을 바라봤다. 국방부 장관인 조말생만이 아니라 모든 대신들-심지어 이사철마저-의 표정이 비슷한 것을 본 향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러 번 느낀 거지만, 이 양반들 맺힌 것이 많나 보네.’
향의 생각처럼 지금 조정의 핵심을 차지한 대신들은 명에 맺힌 것이 많았다.
그들이 한창 원로 개국 공신들 밑에서 실무를 보고 있던 때는 영락제가 명을 다스리던 시기였다.
조선의 힘을 약화시켜 명에 굴복시키기 위해 영락제는 온갖 명분으로 조선을 압박했었다.
이런 압박을 견디다 못한 대신들은 하륜을 시작으로 태종에게 ‘조왜연수론’을 제안했었다.
“썅!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차라리 왜와 손을 잡고 명을 칩시다!”
물론, 이 제안을 들은 태종은 바로 거부를 표했다.
“이놈의 노인네들이 노망이 들었나!”
이런 모든 일을 현장에서 봤던 대신들이었기에, 명과의 일전불사도 단단히 각오한 것이었다.
‘하지만, 돌다리도 두들겨 보라고 했다.’
향은 대신들의 결심을 다시 확인하고 싶어졌다.
“이대로 형세가 흘러간다면 명과의 관계가 최악이 될 것은 명약관화입니다. 그리된다면 지금까지 외교의 핵심이었던 사대는 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거기서 더욱 악화되면 우리 조선의 흥망을 건 일전을 명과 벌여야 할 것입니다. 많은 이들의 희생을 감수해야 할 것이며, 백성들의 원망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각오는 되어 있으십니까?”
향의 물음에 대신들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황희를 시작으로 모든 대신들은 깊은 고민에 빠졌고, 향과 사관, 주서들은 조용히 그들의 대답을 기다렸다.
가장 먼저 입을 연 이는 황희였다.
“참으로 힘든 시간을 버티고, 많은 희생을 각오해야 함은 확실하옵니다. 하지만, 이는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옵니다. 우리 조선이 자존, 자강, 자립할 수 있는 대국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등용문이옵니다.”
“등용문이라….”
“흐음….”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은 황희가 언급한 ‘등용문’이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잠시 후, 김점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등용문이라! 참으로 지금 상황에 딱 맞는 말이외다! 하하하! 막혔던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소!”
말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은 김점이 향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저하, 황희 대감의 말이 맞사옵니다. 이제 우리 조선은 명의 그늘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설 때이옵니다. 물론, 명이 이를 그냥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이 확실하옵니다. 그렇다고 벗어나는 것을 포기한다면, 명이 망하거나 조선이 망할 때까지 조선은 명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옵니다.”
황희와 김점의 뒤를 이어 다른 대신들 역시 비슷한 발언을 이어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사철이 입을 열었다.
“신은 여전히 평화로운 교린이 최선이라 생각하옵니다. 하지만, 도리를 버린 이에게까지 평화 교린을 고집할 생각은 없사옵니다.”
이사철의 발언이 끝나자, 향은 결론을 내렸다.
“여러분 모두 각오하셨다고 생각해도 되겠지요?”
“예.”
“그럼 모두 최선을 다해봅시다.”
향의 결정에 대신들은 모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서 주어를 감추고, 목적어를 감추며 이리저리 빙빙 돌려 말해왔던 대명결전(對明決戰)이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 * *
향과 대신들의 결단을 내리고 있을 때, 군관 한 명이 헐레벌떡 승화당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인산진에서 급보이옵니다!”
말과 동시에 군관은 두툼한 종이뭉치를 내밀었고,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내관이 그 뭉치를 받아 향과 대신들에게 나눠줬다.
“적의 1차 공세, 방어 성공. 후우~, 다행입니다.”
“후우~. 첫 고비는 무사히 넘겼군.”
보고서의 첫머리를 읽은 향과 대신들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의 1차 공세, 방어 성공.
적의 피해 추정 약 5만. 아군 피해 약 2천.
적은 교두보로 후퇴해 농성중.
적의 전의는 아직 왕성함.
발광통신기를 이용해 전해진 급보였기에, 내용은 지극히 간결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중요한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급보의 내용을 살피던 향은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조말생을 바라봤다.
“국방부 장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하문하십시오, 저하. 최선을 다해 답하겠사옵니다.”
“단 한 번의 전투로 5만의 병력을 상실했는데 물러나지도 않고, 전의도 살아있다니, 과연 가능한 것입니까?”
향의 물음에 조말생은 짧게 대답했다.
“적의 핵심병력과 장수들이 모두 명나라 출신이니 가능합니다.”
“아~.”
조말생의 대답에 황희를 비롯한 대신들은 모두 이해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향이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조말생이 설명을 덧붙였다.
“저 중원의 국가들이 벌였던 전쟁을 보면 가장 강한 무기는 머릿수입니다.”
“아!”
그제야 향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 * *
그 옛날 한무제 시절부터 중국의 가장 큰 무기는 대군이었다. 외적을 상대로 벌이는 전쟁에서 적군 1명이 죽을 때마다 아군 2, 3이 죽어도 중국은 그 손실을 보충할 수 있지만, 상대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결국, 최후의 승자는 중국이었다.
이는 영락제 시절 벌였던 북원 정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5번에 걸친 정벌에서 영락제는 매번 10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했었다. 결국, 군비 문제로 더 이상의 정벌은 없었지만, 북원 역시 중원을 넘볼 수 없게 되었다.
* * *
“이로써 더욱 확실하게 되었사옵니다. 이번 전쟁, 주기진의 독단은 절대 아니옵니다.”
급보를 확인한 조말생은 확신에 가득 차 결론을 내렸다.
“이는 배후에 황제가 있지 않는 한 절대 벌어질 수 없는 전쟁이옵니다. 그 근거는….”
조말생은 자신이 생각한 근거를 이야기했다.
-이번 전쟁에서 출진한 적의 규모는 약 40만으로 추정된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주기진이 요동에 온 이후의 시간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 규모의 군대를 양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저들 대부분은 명군에서 보낸 이들이 확실하다.
-그 정도의 군대를 차출하는 것은 아무리 주기진이라 하더라도 독단으로 행할 수 없다. 반드시 황제의 재가가 필요하다.
-저들이 오이라트를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을 공략하기 위한 선봉을 위장한 것이라 생각하면 저 왕성한 전의도 더욱 확실하게 이해가 간다. 조만간 본대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 전쟁은 황제가 계획한 것이 확실한 것이옵니다.”
조말생의 설명에 향과 대신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 * *
우습게도 이는 조병덕을 비롯한 요동군 지휘부가 내린 결론이었다.
주기진을 황태자 자리에서 요동왕의 자리로 내쳤지만, 뒤에 붙인 단서 조항이 그 심증을 확신으로 바꿔주었다.
-조선을 얻으면, 칭제를 허락한다.
“아마도 외왕내제를 허락한다는 뜻이시겠지. 대업이 시작되면 확실하게 지원이 있을 것이다.”
주기진과 요동군 지휘부, 그리고 조선이 모두 같은 오판을 하게 만든 것은 선덕제가 주기진에게 건넨 미끼가 너무나도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명 조정의 1년 예산에 해당하는 거액의 군자금.
-15만에 이어 추가로 지원된 10만의 병력.
-화룡포를 시작해 각종 화포와 철총, 기타 병장기를 만들 대규모의 장인들.
이 엄청난 것들이 단지 소모품이라고 생각할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선덕제만을 제외하고.
자신의 의중을 알게 되었을 때, 변심하거나 반발할 것이 확실한 주기진을 의식해 비밀을 지킨 것이 이러한 오판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 * *
조말생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 향은 허후를 바라봤다.
“외무부 장관, 내일 바로 출발 가능하십니까?”
“날이 밝자마자 바로 제물포의 수영으로 향하겠사옵니다. 해응이라면 그 누구보다 빨리 서해를 횡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대한 빨리 북경에 가서 황제에게 따지십시오. 단, 황제의 의중을 알아챘다는 것은 내색하지 마시고, 요동에 주둔한 이들의 도발만을 강력하게 따지십시오.”
“명분만 얻어오면 되는 것이옵니까?”
허후의 물음에 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향의 대답을 확인한 허후는 비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죽어서라도 명분을 얻어오겠사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최대한 몸 성히 돌아오십시오.”
“이리도 걱정해 주시니 참으로 감읍하옵니다.”
허후에게 명령을 내린 향은 김점과 재경부 장관을 돌아봤다.
“총력전 체제로 전환은 어느 정도나 진척되었습니까?”
“화포와 화약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끝났사옵니다.”
“압록강에서 결착이 나는 즉시 총동원령을 발령할 것입니다. 때에 맞춰 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지금 동원된 예비군은 북부 지역에 한정된 이들이었다. 하지만, 향이 총동원령을 발령하는 순간, 조선 전역의 모든 예비군들이 동원될 것이었다.
김점과 재경부 장관에게 명령을 내린 향은 조말생을 돌아봤다.
“좌익과 우익에서 연락은 왔습니까?”
“예. 그동안 발광통신을 통해 들어온 보고에 따르면 늦어도 나흘 안에 인산진에 도착할 것이라 하옵니다.”
“최대한 빨리 도착하라 명하세요. 그리고, 최윤덕 장군에게도 명령을 전달하십시오. 좌익과 우익이 도착해 작전에 들어가는 즉시 공세 준비선을 벗어나 북진하라고 말입니다. 명이 먼저 움직일 시간을 줘서는 안 됩니다.”
“예, 확실하게 전달하겠사옵니다.”
상황을 정리한 향은 대신들을 돌아봤다.
“그럼, 등용문을 한번 넘어봅시다.”
향의 말에 대신들이 일제히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반드시 우리 조선이 황룡으로 승천하도록 만들겠사옵니다!”
황룡은 황제의 상징이었다.
* * *
회의가 끝나고 홀로 남아 생각에 잠겨있던 향은 내관을 불렀다.
“가서 한명회를 불러오라.”
“예, 저하.”
잠시 후, 향의 집무실로 들어선 한명회는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부르셨사옵니까?”
“왜국에 가야겠다.”
“왜국 말씀이옵니까?”
“그래.”
향의 짧은 대답에 한명회는 왜국에 가야 할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한참 고민하던 한명회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구를 생각하시는 것이옵니까?”
“맞아.”
“대내씨가 쉽게 응하겠사옵니까?”
“그도 골치 아픈 이들을 정리할 최고의 기회라는 것을 알아챌 거다.”
“좀 더 미끼가 필요할 것 같사옵니다.”
“가는 동안은 확실하게 호위해주겠지만, 돌아올 때는 미리 말해야만 한다고 전하면 될 거야. 더 필요한가?”
향의 물음에 한명회는 이리저리 셈을 해보고 대답했다.
“그 정도면 가능할 것 같사옵니다.”
“내일 바로 출발하도록.”
“예, 저하.”
* * *
다음 날 아침, 허후는 명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승화당을 찾아 인사를 올렸다.
“부디 목숨을 중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결사의 각오로 임하겠지만, 필사는 피해 보도록 하겠사옵니다.”
담담히 대답한 허후는 승화당을 나왔다. 향과 함께 따라 나온 대신들은 돌아가며 허후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부디 무사히 다녀오시오.”
“무사히 다녀오시오.”
그렇게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인사를 나누고 허후는 궁을 빠져나갔다. 궁을 나가는 허후의 모습을 바라보던 향과 대신들은 몸을 돌려 승화당으로 향했다.
그때, 조말생에게 국방부 관리가 다가와 보고서를 건넸다.
“뭔가?”
“새벽에 인산진에서 장계가 도착했습니다.”
“필사해서 올리도록.”
“이미 필사중입니다.”
“그럼 이것은 뭔가?”
“지난 전투에서 소모한 물자에 관한 보고서입니다.”
관리의 말에 후다닥 보고서를 펼친 조말생은 제일 끝부분에 적힌 총합을 보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김점 대감이 나를 잡아먹으려 들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