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aired oil tycoon RAW novel - Chapter 197
197 궤도에 올려놓다(1)
처음부터 왕이 될 운명으로 키워진 건 아니었다.
그런 자각 없이 살았고 열한 살이 되었을 무렵 궁에 들어와 왕이 되었다.
그렇기에 갇혀 지내는 삶이 고종 이형은 너무 답답했다.
‘그나마 낙이라면 밤에 전구 불빛을 보는 것이지만······. 아직 밤이 되려면 멀었구나.’
그다음 낙은 기회를 보아 감옥과도 같은 강녕전을 몰래 빠져나가서 궁인들의 삶을 엿보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잠깐만 나갔다가 오자. 저번처럼 김 내관만 잘 구슬리면 문제도 없어.’
···라고 생각했건만.
“전하, 아니 되옵니다. 혹여 대비마마께서 알게 되시면 제가 곤란해집니다.”
김 내관은 미안해하면서도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했다.
사실 세자 시절도 없이 어린 나이에 궁궐에 들어온 자신의 처지를 딱히 여겨서인지 이런저런 부탁을 김 내관은 웬만하면 들어주었다.
그럼에도 이리 확고하게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지난번 일 때문인 듯싶었다.
‘사실 별일도 아니었는데.’
그저 우연찮게 궁녀들의 이야기를 엿들은 것뿐이었다.
더구나 그 이야기가 왕의 위엄을 손상시키는지 모르겠으나 솔직히 자신은 궁녀들의 대화를 듣고도 딱히 신경이 쓰이거나 하지도 않았다.
-이야기 들었어? 박 나인 있잖아. 내소주방에 키 멀대 같이 이렇게 큰 애 말이야.
-들었어. 궁에서 나가게 되었다면서? 본가에 부모님이라도 아프신가?
-그게 아니라 영영 궁에서 나가는 거라던데.
-어머, 정말이야?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나? 그치만 얼마 전에 봤을 때는 표정이 개운해보였는데.
이쯤 들었을 때 김 내관은 어째서인지 안절부절 못하더니 속닥거렸다.
-전하, 궁녀의 말을 엿듣는 것은 군자로서 할 일이 아닐 것이옵니다. 가시지요.
-음, 그렇긴 하지만요······.
고종 이형은 이런 사람다운 대화가 정말로 반가웠다.
대신들을 만나 정치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가 난다.
하지만 피할 수 없겠지. 그렇다면 잠시의 일탈로 조금 더 들어도 되지 않을까. 자신은 왕이 아닌가.
그렇게 잠시 미적거리고 있으니 김 내관이 아까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게 실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내가 들었는데 외국인 기술자 분 있잖아. 전구 공사 총괄하시는?
-응, 예대순이라 했던가? 서양인은 발음도 어렵더라.
-아니, 애두순이래. 아무튼 박 나인이 그 애두순이란 서양인과 정분이 났대 뭐야.
-어머, 그럼 그렇고 그런? 남사스럽다. 얌전한 고양이 먼저 부뚜막 올라간더니······. 그런데 그러면 일이 쉽게 묻힐 건은 아니지 않아?
궁녀는 결혼할 수 없으며 관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로지 승은을 입는 것뿐.
그렇지 않으면 왕의 여자를 탐한 것이 되니 궁녀가 됐든 궁녀와 관계한 남자가 되었든 엄하게 죄를 묻는다.
···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번 건에서는 윗선에서 달리 결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참고로 엄연히 왕이 있거늘 윗선이라 함은, 보다 실질적인 권력자들이란 뜻이다.
-그 애두순이란 분이 창덕궁에도 그렇고 여기 경복궁도 그렇고 심지어 대원위 대감댁까지도 전구를 설치한 기술자시래.
-어머, 정말? 그런 분과 잘 돼서 나가다니 박 나인 그 애는 운도 좋아.
-내 말이! 게다가 그분의 주인이라는 우담 나리라는 분이 대원위 대감에게 이야기하고 대원위 대감은 또 대비마마께 이야기를 해서······.
-설마 그렇게 해서 대비마마께서 박 나인이 그냥 나갈 수 있도록 눈감아줬다고?
이 정도까지 들었을 때 김 내관이 하도 끌어당겨서 어쩔 수 없이 고종은 돌아오게 됐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고 아버지나 대비마마가 정국을 주도하는 거야 사실이잖아. 뭐 새삼스럽게 그런 이야기가 내 귀에 들어왔다고 김 내관은 저렇게 민감하게 구는 걸까.’
차라리 고종 이형은 밖에 나가지 못하게 된 것이 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뚱하게 있었더니 김 내관도 그런 눈치를 알아챘는지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전하, 비록 지금은 나이가 어려서 종친 어른과 대비마마가 정국을 도와주시지만 언젠가 전하께서 직접 하실 일이옵니다. 그 자각을 늘 마음에 품고 계셔야 하옵니다.”
“예, 명심하도록 하지요.”
대충 대답했다. 일부러 뚱한 표정을 지은 채 앉은 자세도 바르게 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김 내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냥 나가시는 건 곤란하나 정식으로 내관과 궁녀를 데리고 잠시 뜰을 거니는 외출은 어떠하시온지요. 그렇게라도 정무로 인해 지친 마음을 풀어보심은 어떠하신지요.”
왕의 일정은 빡빡하다. 사실 뜰을 거니는 것도 간단히 할 일은 아니지만 김 내관이 이 정도 풀어주는 것만 하더라도 역시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있다는 뜻이다.
더구나 기분 나쁘다고 이번 제안도 물리치면 정말로 정무에 짓눌려 죽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십니다. 금방 돌아올 테니 번거롭게 많이 데리고 나서지는 말고요.”
“예, 알겠사옵니다.”
이윽고 고종은 내관과 궁녀들을 데리고 강녕전을 나섰다.
부담이 덜 되도록 김 내관이 배려해줘서 인원을 최소한으로 꾸렸다.
그렇게 뒤에 뒷짐을 지고 거닐고 있는데 멀리 있어도 우뚝 서있는 가로등은 잘 보였다.
‘진짜 보기 좋은 것은 밤에 가로등이 켜진 것인데 함부로 나올 수도 없으니.’
그런 생각을 했는데 뜻밖에 가로등 불이 켜졌다.
“음?”
“왜 그러시는지요, 전하?”
“방금 가로등 불이 켜지지 않았습니까?”
“그러고 보니 요새 궁의 가로등과 전기 설비를 위해 자주 기술자가 오더군요.”
“그래요? 한번 가보십시다.”
김 내관은 내키지 않는 눈치였으나 일단 밖으로 나왔으니 어디로 발걸음을 향하는지는 왕의 결정이었다.
“박 내관, 먼저 가서 주상 전하께서 간다고 일러두게.”
어쩔 수 없이 내관 하나를 보내서 기별하고는 가로등 불빛이 켜진 곳으로 향했다.
“뜻밖에 주상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그곳에는 일곱, 여덟 사람이 있었는데 대부분 궁에 속한 기술자들로 보였다. 전기 기술을 배운 이들이리라.
그 외에 눈에 유독 띄는 두 사람이 또 있었다.
‘저 서양인이 그 박 나인과 정을 통했다는 에디슨이로군.’
김 내관의 반응을 보면 거의 확실한 듯싶었다.
‘박 나인 취향 참 특이하네. 하지만 뭐 사람 매력이 꼭 외모로만 결정되는 건 아니니 속단하지 말자.’
그보다 눈길이 가는 건 에디슨의 옆에 키 크고 서양식의 의복을 입은 남자였다.
에디슨은 그를 상전처럼 대했고 실제로 그가 이들을 대표해서 앞에 서서 인사를 건넸다.
순간 고종 이형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이름을 저도 모르게 입에 담았다.
“혹시 그대가 우담 김태선이 아닙니까?”
“그러하옵니다, 전하. 이름을 기억해주시다니 감사하옵니다.”
김태선의 이름을 듣자 이제 열일곱 살이 된 고종 이형의 얼굴 가득하게 무척 반가워하는 웃음이 걸렸다.
“오, 그대였구려. 안 그래도 한 번 만나고 싶었습니다. 조선사람으로서 서양에 가서 이 문물들을 가지고 왔다면서요? 더구나 아버지를 통해서 사진을 엮은 화책도 잘 보았습니다.”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고종 이형은 평범한 열일곱 살짜리와 다를 바 없었다.
물론 이제 왕이 된 지도 몇 해나 지났으나 평소에는 제법 그럴듯한 왕 시늉을 한다.
그럼에도 지금 리미트가 풀려버린 것은.
직접 만나지 못 하고 간접적으로 화책을 받아 보고 소식을 전해 들은 것뿐이지만,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받았기에 그럴 터였다.
“우담, 가로등 점검은 언제 끝납니까? 마침 만난 김에 여러 이야기도 듣고 싶어 묻고 싶은 것도 많아요.”
“안 그래도 거의 끝났습니다. 더구나 나머지 일은 여기 에디슨이 맡아도 괜찮고요.”
“오, 그래요? 그럼 같이 조금 걸으며 말동무나 해주세요.”
태선은 기꺼이 고종 이형의 말상대가 되어주었다.
“내 전구의 원리가 궁금해서 알아보니 전기란 걸로 불이 들어온다던데 대체 전기란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사물에 잠재되어 있는 기운이옵니다. 다만 평소에는 사람이 이용하기 어려우나 그걸 특정한 형태로······.
전기에 대해 묻기도 하고.
“우담은 서양의 다른 나라의 왕들도 만나봤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나라의 왕이나 관료들이나 정치는 어떻습니까?”
“그에 대해 묻다니 과연 훌륭하십니다. 모름지기 서양의 것이라도 도움 되는 건 배워야 하겠지요. 일단 서양도 여러 나라가 있는데 일단 미국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안 그래도 은근슬쩍 태선이 고종 이형의 머릿속에 넣어주려 생각하고 있던 정치 제도에 대해서도 먼저 묻기도 했다.
“아버지, 아니 대원위 대감에게 자동차란 것을 선물했다지요? 나도 한 번 타보고 싶은데 언제 가능하겠습니까?”
그 외에 태선이 친근하게 대답해주자 내적 친밀감이라도 생겼는지 자신이 바람을 솔직히 말하기도 했다.
“구해드리겠습니다. 사실 전하에게 먼저 진상함이 옳겠으나 자동차의 운행에는 나이 제한이 있습니다.”
“아, 자동차 운전에는 나이 제한이 있는 겁니까?”
“안전을 위해 그렇습니다. 하지만 열일곱 살이 되셨으니 충분하실 겁니다. 제가 다음 전하의 생신 때 진상하겠습니다.”
“오, 내 꼭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그 물음이나 부탁에 태선은 고종 이형의 눈높이에 맞춰서 친절하게 답했다.
“······.”
처음에는 고종 뒤에서 김 내관은 태선을 못마땅하게 봤다.
그도 그럴 것이 박 나인을 밖으로 데리고 나간 일은 태선이 주도했기에.
다만 지금 고종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즐거워 보이며 뭣보다 다른 신하들과는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그들은 고종을 임금으로 대하기는 하되 어린 왕이라 일견 은연중 무시하는 태도가 있었다. 흥선대원군에게 복종하되 임금 앞에서는 시늉만 할 따름.
“이거 오늘 우연히 우담을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다 하게 되다니 내가 운이 좋습니다, 하하.”
그래서인지 고종 이형은 자존심마저 낮아졌고 목소리고 점점 작아져만 갔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래, 주상의 말대로구나. 오늘 우연히 우담 김태선을 만난 건 운이 좋았음이야.’
다만 고종 이형은 물론 김 내관은 꿈에도 상상 못할 터였다.
다른 건 몰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태선을 마주한 건 우연이 아니었음을.
‘며칠 동안 강녕전에서 특히 잘 보이는 곳에서 가로등 껐다 켰다 한 보람이 있네.’
기실 태선은 수리 일정을 최대한 길게 잡고 그마저도 질질 늘려서 낚시하듯 노렸다.
그 미끼를 고종이 물었을 뿐이었고.
물론 잘 안 될 경우에는 차선책도 있었지만 어쨌든 가장 이상적으로 일이 풀렸다.
‘고종을 만나게 됐으니 코를 꿰어둘 차례네. 헛바람 좀 넣어주고 나중에 흥선대원군 하야하라고 한마디 하게 만들 씨앗을 마음에 심어줘야지.’
그런 동시에 자기가 혼자서 뭘 할 수 있다는 영웅심은 싹을 잘라야 한다.
“오늘은 우연히 만났지만 앞으로도 자주 제게 들러서 서구 국가의 이야기를 들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저야 반가운 일이지요. 사실 서구 국가의 경험을 듣는 것도 하나의 큰 공부가 되지 아니하겠습니까.”
“암요, 그것도 하나의 공부이지요. 즐거우려는 일이 아니라 공부를 위한 것이죠, 하하!”
훗날 고종이 손대는 일마다 병크를 터트리는 요인으로 크게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자기가 철인 군주인 마냥 제국의 황제처럼 전제 권력을 휘두르려고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하를 믿고 뭘 맡기는 듯했다가 의심병이 도져서는 다시 숙청해버리는 일을 반복하는 것.
그 두 가지가 환장의 컬래보래이션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뭐 사실 사람 바꿔쓰는 게 아니라는 말이 있듯 근본적인 자질은 바꿀 수 없겠지만 자기 분수를 깨닫고 나서지 않게 하는 것만 해도 충분하지.’
국제 정세에 밝고 믿을 수 있으며 유능한 신하들로 하여금 입헌군주제의 기반을 다지게 할 정도만 되도 된다.
그건 조선을 위해서도, 고종 본인을 위해서도 그랬다.
“전하를 위해 자주 찾아 뵙고 제가 아는 바를 최대한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지금 하는 대답은 거짓이 아니었다.
아울러 훗날 악수를 두어 줄줄이 일본과 청나라에 정국이 좌지우지되며 최악의 말로를 맞이하는 흥선대원군과 민비를 위해서도 그렇다.
무엇보다도 이 나라 백성들, 아니 훗날의 국민을 위해서도 그러했고.
***
태선이 처음 조선 땅을 밟은 때가 1866년 가을 무렵.
원래 역사에서는 그 시기에 병인양요가 일어났어야 했으나 바뀌었다.
오히려 태선이 영미프 삼국 대사를 데리고 와서 수교 맺고 근대화를 추진하며 2년 하고 몇 개월의 세월이 흘렀다.
“사장님,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것과 같은 해 1868년에 에디슨이 요란하게도 난리 치며 들이닥쳤다.
“에디슨, 이 짜식아. 내가 사장님한테 보고하겠다고 했는데 선수를 쳐?!”
이어서 웨스팅하우스도 얼굴을 들이밀었다.
원래는 조선에서 몇 달만 데리고 있다가 미국에 돌려보낼 예정이었다.
그런데 녀석이 조선에 눌러있어도 미국 현지에 잡아놓은 시스템이 워낙 견고해서 업무가 잘 돌아간다는 보고를 받았다.
‘뭐 애초에 자동차 사업이 규모의 경제가 어느 분야보다 잘 먹히고 더구나 이 시대에는 경쟁사도 없으니까.’
개발 업무는 경우가 좀 다르지만 것도 사실 미국으로 연락 업무가 활발했다.
본래 목적은 미국에서 여러 물자를 실어오기 위해서였지만 덕분에 한 달에만 두어 번씩 선박이 들락날락했다.
그런 와중 사업 방향과 사업 아이템 개발 방향 등의 지시 명령을 내리면 되니 개발 업무도 순조로웠다.
오히려 신경 쓸 건 이곳 조선에서 근대화의 기틀을 다지는 업무였는데 초반에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하기에 매우 중요했다.
“둘 다 소란 그만 떨고, 뭐가 다 됐다는 거냐?”
“아, 넵! 경인선을 깔기 위한 실사 조사까지 다 끝났습니다!”
웨스팅하우스가 보고했다. 이걸로 끝이 아닌지 선임인 웨스팅하우스에게 첫 마디를 양보한 에디슨도 뒤이어 말했다.
“경의선, 경부선, 경원선도 시시각각 정보가 들어오고 있는데 이번 주 안으로 정보 수합이 다 끝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두 녀석의 보고를 들어보니 지루하디 지루했던 이 뿌리 내리기 작업도 빛을 볼 모양이었다.
“그럼 그 동안 공사 개시를 위한 준비도 철저히 해왔었지? 운산 광산도?”
“두말하면 잔소리죠, 헤헷. 다른 노선은 다음 주 지나봐야 알겠지만 적어도 경인선은 바로 가능하고 공사 시작하면 1년 안으로 끝낼 수도 있어요.”
태선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어렸다.
지난 2년여 몸소 조선에 머물면서 정치적으로 여건을 만들어내면서 인프라를 갖추고 물량을 쏟아부은 과실을 드디어 수확할 시간이 왔다.
물론 그 실행을 위한 현지 조직은 단연 조선토목회사였다.
“그럼 경인선은 바로 공사 시작하고, 나머지 노선도 준비되는 대로 보고 올리고 따로 말 없어도 공사 시작할 준비는 바로 갖춰놓도록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