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aired oil tycoon RAW novel - Chapter 6
006 미국으로(2)
화공이란 중국인 노동자를 일컫는다.
지금 톈진항 외곽에서는 꾀죄죄한 몰골에 다 떨어진 남루한 옷차림의 화공 수십 명이 배에 오르고 있었다.
조금만 돌아보면 보이는 여기저기 비슷한 행렬들.
“랑 워뭔쭈언 헌뚜어 티엔!”
“션머 싀허 샹 미판?”
그리고 언어적인 특성도 그렇거니와 이쪽에 흘러드는 사람들 성향 자체가 왁자지껄한 탓으로 분위기는 자못 어수선했다.
“콰이어트! 무브! 이이둥! 이이둥! 셔럽!”
거기에 영어와 다소 어눌한 중국말을 섞어가며 화공을 통제하는 서양인 감독관의 외침이 더해졌다.
“···음, 여기는?”
이 분위기에서는 누구라도 불편했겠으나 양반인 박규수야 어련했을까.
‘하지만 내가 여기로 데려온 것에 대한 불쾌함은 아냐. 그냥 본능적인 그런 불편함이지.’
동시에 태선은 왜 여기로 데려와 저런 걸 보여주냐며 보는 박규수의 시선에서 그런 생각도 동시에 읽었다.
역시 이 사람은 양반이기는 해도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이다.
“확실히 우리만 오면 보기 힘들었을 광경이구먼.”
오경석 역시 마찬가지.
“청나라 사람들이 서구로 유출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래, 들어봤네만 이게 그 상황이란 말인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군.”
박규수가 자못 탄식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국가의 근본은 백성이거늘 이것은···허! 하물며 강제로 끌고 가는 것도 아니고 전부 자발적으로 나가고 있다는 것이라 들었는데 그게 정말인가?”
“그렇다네.”
오경석의 물음에 우웬리는 이렇게 된 마당에 숨길 생각은 없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하필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차이니즈! 돈 츄 리슨?!”
미국인 감독관이 한 청나라 노동자를 마구 다그치더니 이내 매질을 시작했다.
항구에는 청나라 병사들도 있었지만 청나라 노동자를 도와주기는커녕 모른 척하고 질서 유지에만 힘썼다.
아니, 사실 진정으로 그렇다기보다는 매 맞는 걸 외면하려 그러는 것 같기도 했다.
“······.”
그 광경을 보며 박규수나 오경석은 말을 잇지 못했다.
우웬리야 말할 것도 없었다. 국권을 침탈 당한 국가 실상을 그야말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광경이기에.
하물며 같은 청나라 동포가 여기에 많지 않은가.
같은 처지의 노동자인데도 그들은 누구 하나 나서서 매질을 말리지 않았다.
아니, 못한다고 봐야 했다. 외국인 고용주에게 잘못 보였다간 배를 탈 수 없을 테니.
“헤이헤이, 스톱! 컴 다운!”
급히 달려와 매질을 말린 건 오히려 노란머리 푸른 눈의 서양인이었다.
매질 하던 이가 얼굵이 붉으락푸르락해서 비키라는 듯 손짓했으나 끼어든 서양인은 오히려 사이에 버티고 서서는 그를 타이르듯 말했다.
“매를 치는 건 서양인이거늘 그걸 말려주는 건 같은 동포가 아니라 역시 서양인인가.”
그 모습을 보며 박규수가 또 다시 한숨을 토했다.
비록 영어를 못 알아들어도 그가 노동자를 항변해주고 있는 정황은 자명했다.
다만 태선은 영어를 할 줄 알았다. 그렇기에 두 서양인의 대화를 거의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매질하던 놈은 때려야 말을 듣는다는 식이고 말리러 온 서양인은···어라? 이런 이권 침탈은 옳지 않고 공정한 외교 활동과 무역을 해야 한다고?’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서 태선은 말을 되새겨봤다.
그렇지만 방금 전에 똑똑히 그렇게 들었다.
‘뭐지? 선교사라도 되나? 교과서 같은 이야기를 하네.’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사실 허상 같은 말이었다.
21세기에는 겉으로나마 그런 기조가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면에서 각국이 저마다 이익을 우선했다.
그러하거늘 무려 지금은 19세기였다. 그것도 열강이 가장 득세하는 시절이다.
그러니 저 외국인이 말하는 공정한 외교와 무역이란 이 시절에서는 그야말로 농담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무척 진지했다. 심지어 그의 열변에 결국 매질 하던 외국인이 물러나며 이제 알겠으나 그만 귀찮게 굴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 과정에 태선은 어떤 이름 하나를 들었다.
‘제이크···벌링게임이라고?’
분명히 그렇게 들었다. 벌링게임이랬는지 벌링에임이랬는지 조금 헷갈리지만 영어 발음이니 그렇다 치고.
어째 낯설지 않은 성씨. 틀림없이 이 이름 들어봤었는데.
‘어, 잠깐. 설마?!’
태선은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이내 기억해냈다.
‘그래, 앤슨 벌링게임이었어.’
이 사람은 이 시대의 나름 네임드였다.
1861년까지 미국은 청나라 공사관으로 12명을 임명했는데 사실 명예직이었다.
실제로는 러셀 상회가 상인 영사라는 명목으로 그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다 1860년 선거에서 승리하여 이듬해 대통령에 취임한 링컨에 의해 13대째는 마침내 진정한 의미의 주청미국공사가 임명된다.
그가 바로 앤슨 벌링게임.
‘1861년 6월 14일이었나? 그쯤인데 아직 오지는 않았지만 지금쯤이면 사실상 내정되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그리고 뭣보다 1854년에는 노예제 폐지를 두고 휘그당에서 진보적 일파가 공화당으로 갈라져나온다.
21세기 미국에 있는 바로 그 공화당이 맞다.
앤슨 벌링게임은 바로 이 공화당의 초기 멤버 중 한 명이었다.
‘혹시 앤슨 벌링게임이랑 친척일 수도 있으려나.’
만약 친척이 맞다면 이건 그야말로 대박이다.
‘그러고보니 아까 매질을 말리던 외국인이 한 말이 앤슨 벌링게임의 지론과 똑같잖아.’
앤슨 벌링게임은 열강들의 청나라 침탈을 비판하며 공정한 외교와 무역를 논했다.
둘이 친척이 맞으면 집안 사람의 영향을 받는 건 있을법한 일이었다.
아울러 본인이 공사로 오기 전에 청나라 동향을 미리 파악하려고 친척을 보낼 수도 있는 일 아니겠는가.
‘정말로 친척이면 해볼 만해. 어차피 밑져야 본전!’
태선의 머릿속에서 시나리오가 새로이 쓰여졌다.
박규수와 오경석에게 화공이 유출되는 광경을 보여주는 건 차선잭이었거늘.
이 순간 플랜A로 거듭났다.
***
그날 저녁 태선은 다시 박규수와 오경석을 찾아갔다.
두 사람은 당연히 태선이 오리라고 예상했다는 듯 기다리고 있었다.
“왔구먼. 앉게나.”
하기야 이들로서는 오늘 충격적인 걸 봤고 그걸 보여준 건 다름 아닌 태선이었다.
하고픈 말이 있겠으나 우선 태선이 뜻이 있어 보여줬으니 담론을 한번 나누고 싶었으리라.
“내 나름대로 눈이 뜨인 줄 알았거늘 오늘 그곳을 보고서 얼마나 안일했는지 깨달았네.”
“아닙네다. 결코 그렇지는 않습네다.”
우선 태선은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본론은 이게 아니다.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다만 조선에 위험한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디요. 그나마 청나라는 대국이니 이 망정이지 조선이라면 이만큼 버티기가 힘들지 않갓습네까.”
“주상 전하께 불충한 말이 되겠으나···필시 그러하겠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더 해보게나. 경첨함세.”
태선은 고개를 살짝 숙여 예의를 표하고는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해온 이야기의 첫 단계부터 뽑아냈다.
“저들의 화포나 증기선이나 여러 문물은 우리가 잘 받아들인다면 힘이 되겠으나 저들에게 사악한 저의가 있다면 말할 것도 없이 위협이옵네다.”
“그래, 작년 연행도 충격이었지만 오늘 참상을 보니 참으로 비참하더군.”
“조선의 경우 더 큰 문제가 있습네다. 서구인들은 청나라를 통하여 우리 조선에 대해 속속 알게 될 것이옵네다. 그에 비해 우리는 저들을 전혀 모릅네다.”
박규수와 오경석의 표정은 암울해졌다.
“통감하네. 대외 정세에 관해 우리는 장님과 다름없으이.”
“하오나 이대로 손을 놓고 있다가 종묘사직과 나라와 백성을 내어줄 수는 없지 않갓습네까. 저들을 살펴야 합네다.”
태선의 어조에 앞서와 달리 힘이 들어가는가 싶더니 눈에도 이채가 흘렀다.
“좋은 방책이라도 있는가?”
태선은 짐짓 고심하며 큰 결심을 한 척 어렵게 말을 꺼냈다.
“소인이 감히 조선의 눈이 되갔습네다.”
“눈이 되겠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이제 그동안 숨겨왔던 카드를 마침내 꺼냈다. 이제는 내빼거나 돌이키면 악수가 되리라.
태선은 조선의 눈이 되기 위해서 바다 건너로 넘어가겠다는 주장을 본격적으로 펼치고는 박규수의 반응을 살폈다.
솔직히 조금 긴장되는데.
“허어···자네 마음이 참으로 가상하구먼. 자네의 능력이라면 적당히 살 수도 있을 터이거늘 자처해서 이역만리로 가서 고생하겠다니.”
그때 박규수는 덥석 태선의 손을 잡았다.
다만 미간에 세로 주름이 몇 개나 잡힌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는 오경석.
혹시 오경석에게는 자신의 속셈이 탄로났나 싶었으나.
“서구도 여러 나라가 있는데 어디로 가려나? 가는 방법은 어떻게 하려는 겐가? 혹 아까 본 화공 무리에 섞여서 가려는 것이라면 정말 고역 아니겠는가?”
아니었다. 머리가 좋은 만큼 오경석은 구체적으로 앞날을 걱정해주고 있었다.
됐다. 박규수와 오경석의 마음은 얻었다.
“그 일은 생각한 바가 있습네다만 아직 두 분 나리의 허락을 구하지 못했기에 움직이지 않았더랬습니다. 답을 구한 뒤 다시 말씀드리디요.”
그렇게 말한 뒤 태선은 자리에서 나왔다.
‘후, 어찌 보면 이제부터가 본 게임이야.’
태선은 둘에게 인사를 고하고서 수소문 끝에 제이크 벌링게임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우웬리의 도움으로 그와의 약속까지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벌링게임의 집무실 앞에서, 태선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오세요.”
자,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