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aired oil tycoon RAW novel - Chapter 5
005 미국으로(1)
1861년 봄, 청나라 정국은 지극히 혼란스러웠다.
2차 아편 전쟁의 결과로 상하이의 노른자땅에 영국, 프랑스, 미국에 조차지를 내주게 되었고 그에 불복한 움직임이 있었으나 그로 인해 되돌아온 건 베이징 조약이었으니.
막대한 전비 배상.
미국, 영국, 프랑스 외교관의 베이징 주재.
10개 주요 항구의 개방.
거기에 소위 화공(華工)이라 불리는 청나라 노동자의 유출과 서구 자본주의 침식까지.
심지어 열강의 군대가 무력으로써 밀고 들어와 북경 땅을 밟았으나 오죽했을까.
아니, 오히려 강북 지방은 차라리 나았을지 모른다.
상하이, 난징 등이 있는 강남에서는 태평천국운동이라는 큰 민란이 진압되기는커녕 계속 번져갔기에.
그런 정보를 접하며 태선은 먼저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이때 황제가 함풍제였나. 이 정도면 진짜 울고 싶었겠다. 실제로 아궁이 작살나서 열하로 피신한 상황이고.’
그나마 다행인 점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이 역사라고, 큼직한 사건의 덩어리들을 보고 듣게 되자 태선의 머릿속에서도 기존 지식들이 더 세세하게 정리된다는 점이었다.
기실 조선에서 연행사신을 보내게 된 명목도 바로 함풍제의 위문이었다.
황제가 전쟁도 지고 열하로 도망까지 쳤는데, 힘내시라고 사대의 예를 보여야 하지 않겠나.
“황제께서 친견을 허하지 않으셨다는 통보가 왔네.”
다만 정사 조휘림과 부사 박규수를 비롯한 조선 사신들은 함풍제를 만나지 못한다. 사실 이 흐름은 태선은 이미 알고 있는 대로였다.
불과 몇 달 뒤의 일이지만 서태후와 공친왕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 북경 정세가 또 발칵 뒤집힌다는 것도.
하지만 다른 때와 달리 이번 연행은 청나라 정세를 살피기 위해서가 아니라 청나라를 통해서 급변하는 국제 정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려는 것.
황제를 만나지 못한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었다.
못해도 몇 개월은 머물러 있는데 남는 시간만큼 더 국제 정세를 파악할 수 있을 테니까.
‘잘 됐어. 이건 나한테도 이득이야. 박규수나 오경석을 따라다니면서 미국으로 갈 배편을 알아봐야지.’
처음에는 살짝 우려했으나 물리적으로 미국으로 가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난징 조약과 베이징 조약의 더블 크리티컬로 노동자 유출이 있는 상황.
그러고 보니 그제야 태선은 다큐멘터리 만들 때 본 자료가 새록새록 기억이 났다.
‘아, 맞다. 1860년쯤쯤이면 미국 본토의 광산에서 일하는 청나라 화공들이 이미 4만 명이나 된다고 그랬지.’
이때 비행기도 없었을 거고, 바다를 걸어서 갔을 리 없으니 당연히 배를 타고 갔을 터.
실제로 항구에 나가면 영국, 프랑스, 미국 깃발을 단 배가 수두룩하게 보였다.
그래, 좋다. 몸만 달랑 건너간다면 일은 쉬워진다.
하지만 그건 플랜B도 아니고 플랜C나 D 정도로 감안할 방안이었다.
‘그냥 막무가내로 사라져서 건너가면 박규수나 오경석이 뭐라고 생각할까.’
처음부터 조선을 탈출하려고 작정하고 자신들에게 들러붙어 혓바닥만 번지르르하게 굴린 탈주자···라고 생각할 터. 뭐 사실 그게 맞긴 했지만.
다만 동생 태경이는 같이 데려왔어도 아직 의주에 남겨놓은 누나와 매형이 있었다.
‘갈 때 가더라도 박규수와 오경석도 납득할 수 있도록 말을 해둬야 해.’
하물며 찬찬히 생각해보면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배경은 지금 당장 보면 페널티만 있는 것 같지만, 미국으로 건너가면 그게 꼭 그렇지도 않았다.
미국은 18세기 말 영국에서 독립했다.
그리고 19세기 초부터 이미 동아시아 정책을 구상하고 있었으며, 훗날 태평양 함대가 되는 동인도 함대로 40여 척을 지금 벌써 굴리고 있었다.
1853년 일본을 강제로 개항시킨 페리 제독이 동인도 함대 사령관이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일본도 이미 개항했겠네. 여기서 배를 타면 요코하마를 경유해서 미국으로 가겠군.’
아무튼 미국은 동아시아에 관심이 없지 않았다.
다만 하필이면 1861년 남북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외부에 신경을 쓰지 못했을 따름.
거기에 조선에서는 오페르트 도굴 사건이 터지고 쇄국령이 내려지면서 역사의 큰 물줄기는 틀어진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충분히 바꿀 수 있어.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위치는 말할 것도 없이 매력적이지. 미국에서 내가 조선인이라는 걸 잘 어필해서 관계를 연결할 수 있다면 무기가 된다.’
그냥 미국 시민권을 얻은 동양인A가 아니라 캐릭터를 갖게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당대의 정치인, 군인, 상인이 태선을 만나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건 당연히 장차 태선이 꿈꾸는 석유왕이 되는 것이나 여러 사업을 하는데도 유리할 터.
그러기 위해서는 박규수나 오경석과의 인연을 섣불리 정리하면 안된다.
‘뭐 어차피 시간이 있으니까. 몇 개월은 머물 예정이니 좀 더 기회를 알아보자고.’
그렇게 연경에 도착한 2월 말부터 태선은 열심히 움직이고 박규수나 오경석이 어디서 누구를 만난다고 하면 바늘에 실 가듯 따라다녔다.
그리고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였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도 있다지만.
“예? 돌아간다고요?”
일이 그리 간단히 풀리지는 않았다.
“그렇지. 이제 5월이 아닌가. 어언 2개월이나 머물렀고 이제 출발해도 8월은 되야 한성에 돌아갈 테니 말이야.”
“그, 그렇군요. 하루하루가 정세가 달라지는데 떠나야 한다니 아쉽습네다.”
“나도 같은 생각이라네.”
2개월 살짝 넘는 기간 동안 뻔질나게 움직인 덕분에 정세는 파악했다.
솔직히 공인인 박규수나 오경석에 비해 자신은 짐꾼이기에 보다 적나라한 정세를 엿보기도 했다.
다만 그 무엇보다 앞서는 결정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다.
‘···곤란하네. 아직 박규수나 오경석에게 미국 가겠다고 말할 계기를 못 잡았는데.’
뭐라고 말할지 논리는 구상해뒀거늘.
그렇다고 그걸 그냥 툭 말해버려서야 맥락이 없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계기가 있어야 이야기 꺼내기 자연스럽거늘.
막상 찾으려니 그런 사건이 보이지 않아서 시간이 흘렀다.
‘이제 더 미루기는 힘들어. 우물쭈물하다간 조선으로 돌아가거나 탈주하듯 미국행이다. 승부수를 띄워야 해.’
태선은 같은 자리에 앉은 이들의 면면을 슥 훑었다.
일행은 식사 중이고 동석한 사람은 셋.
박규수와 오경석이 있으며 오경석의 청나라 친구 우웬리라는 자가 또 있었다.
‘지금까지는 주로 우웬리의 안내를 따라 돌아다녔지.’
우웬리는 결코 나쁜 이가 아니었다.
청나라 부호 우빙젠의 먼 친척이라는 자부심을 품은 상인이었는데 나름 성심성의껏 일행을 안내해주었다.
덕분에 몇 개월 동안 청나라 관리, 상인을 비롯해서 영국인, 프랑스인, 미국인 등 서구인도 더러 소개받았다.
‘···문제는 하필 이 인간은 아니라도, 이 인간이 소개해주는 것들은 속이 시커멓다는 거지.’
사실 당연한 일이다. 무조건 나쁜 사람만 있는 건 아니지만 시대적인 바탕이 그렇다.
군인이든 상인이든 애초에 이곳에 있는 자원을 쓸어 본국에 가져가는 것이 미덕으로 여기는 이들이니까.
특히 이 시기 중국에서 활동하는 미국 상인은 러셀 상회란 곳이 주도권을 꽉 쥐고 있었다.
이 러셀 상회의 힘이 어느 정도냐면 심지어 상인 영사라 하여 공사 업무를 대행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이곳과 연줄을 트면 미국에 건너갈 수도 있겠지만···이들은 하필이면 몰래 아편을 취급하는 작자들이었다.
‘하아, 가급적 러셀 상회와는 관련되고 싶지 않았는데 달리 뾰족한 수가 없네.’
더구나 러셀 상회가 지금 벌이는 사업의 현장을 보여주면 자신의 미국행을 박규수와 오경석에게 납득시키기도 일도 한층 수월해질 터.
쓰고 싶지 않은 비장의 수였지만, 결국 태선은 숨겨왔던 카드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오래 고민했는데 이제 돌아간다고 하니 송구하오나 한마디 올려도 되갔습네까.”
태선이 짐짓 말을 꺼내자 박규수와 오경석이 봤다.
“여기 북경 인근에 실은 두 분에게 보여드리고 싶은 곳이 있습네다.”
“자네가?”
박규수와 오경석뿐 아니라 우웬리도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납득했는지 그가 웃으며 말했다.
“하긴, 여기 두 분 나리는 내 안내를 따라 다녔지만 자네는 혼자서도 여러 장소를 다녔다고 들었네. 나도 모르는 재미난 곳이라도 발견한 모양이지?”
오경석 친구 아니랄까봐 우웬리는 청나라 사람임에도 유창한 조선어로 말했다.
사실 태선으로서는 엄연히 현지에서 협력해주는 우웬리가 있는데, 괜히 자기가 나서면 그를 무시하는 걸로 보일 수 있기에 염려했었다.
중국사람들은 뭣보다 체면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던가.
다행히 우웬리도 별로 괘념치 않는 듯하자 태선은 말을 이었다.
“두 분 나리에 비해 제가 신분적으로 자유로운 면이 있기에 이곳저곳을 보았습네다. 그 중 특별히 눈여겨볼 곳이 있다고 사료되어 고민 끝에 청을 올리는 것이디요.”
“허허,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면 더 궁금하지 않은가.”
박규수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오경석으로서는 반대할 수 없었다.
“예, 참으로 그러합니다. 이 사람아. 그런 곳이 있다면 뭘 고민을 했던가, 진작 말하지. 나나 부사 나리나 많은 것을 보고 들으려 왔거늘 가당찮은 일이라며 꾸중이라도 할 줄 알았던가.”
애초에 반대할 것도 없이 오경석도 흥미를 느꼈는지 가보고 싶어 하는 눈치.
태선은 얼른 낙장불입이라 선언이라도 하듯 말했다.
“그럼 식사가 끝나면 곧장 안내하갔습네다.”
***
중국말로 톈진이라 불리는 도시는 북경의 외항.
청나라는 명조에 이어서 초기에는 해금령을 유지하기도 했었지만 말기에 들어서는 유명무실해졌다.
거기에 서구 열강이 막 들어오고 있는 터다.
이 시기에 배가 들어오면 ‘이랏샤이마세!’ 하고 문이 열린다고 봐도 무방하다.
‘거기에 영국과 프랑스 조차지가 톈진에도 있지.’
더구나 몇 년 뒤에는 미국 톈진령도 생기는데 애초에 영국이 있으면 십중팔구는 미국도 같이 들락날락한다.
나중에 되면 상하이 조계는 아예 영국과 미국 합쳐 같이 관리할 정도이니 말이다.
“역시 배가 많구먼. 헌데 톈진항에는 저번에도 두어 번은 왔었거늘 못 보고 지나친 것이라도 있었던가.”
그런 곳이니 당연히 사신 일행도 와서 봤었다.
다만 아무리 몇 달이나 머무르고 우웬리가 안내해줬다고는 해도 이들이 볼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나름 성심껏 안내해줬더라도 자기 나라의 치부를 보여주는 건 꺼려졌겠지.’
즉 여기서 그걸 보여주면 우웬리가 성격이 좋더라도 고깝지 않을 것이다.
“······.”
저봐라. 실제로 태선이 항구 외진 곳으로 안내해가자 표정이 썩어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박규수나 오경석과 관계는 나중을 생각해서 함부로 가져가면 안 되겠지만.
우웬리는? 솔직히 오경석 지인이지, 자신의 친구는 아니다. 막말로 다시 안 봐도 아무 상관이 없잖나.
태선은 그런 생각으로 기왕 하는 김에 확실하게 했다.
“두 분, 이제 다 왔습네다.”
점점 가까워지자 태선은 더 빠르게 걸음을 옮겨 마침내 그 현장에 다다랐다.
자신의 미국행에 박규수와 오경석으로 하여금 기꺼이 손수건 흔들며 배웅하게 만들어줄 마스터피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