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Haired U.S. Army Marshal RAW novel - Chapter (207)
207_거인의 맥동 (1)
캘리포니아 교외.
샌―프랑코 에어로노틱스.
한때 항공기술실증팀으로 불리던 이곳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본격적으로 자금 지원을 받아 무럭무럭 자라났고, 어느새 독자적인 그룹의 일원으로 성장했다.
이곳에 설치된 실험기용 비행장에서, 항공기 한 대가 현란한 곡예비행을 하고 있었다.
“크, 잘하네. 잘해.”
“어… 잘하는 건가요? 빙글빙글 돌긴 하는데.”
“아차 하면 추락하기 딱 좋긴 하죠. 실력 좋은 겁니다. 어디 가서 파일럿 노릇해도 굶어 죽진 않을걸요?”
“쟤가 설마 파일럿을 할 일이 있겠어요?”
불안한 듯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젊은 여자의 말에, 엔지니어는 “하긴 그렇네요.”라고 중얼거렸다.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파일럿을 하겠나.
잠시 후 곡예를 마친 항공기가 착륙했고, 조종석에서 한 남자가 어슬렁어슬렁 나와 여자를 향해 다가왔다.
“어땠어?”
“어? 어… 잘하더라.”
“그게 끝이야? 막 또 반했다든가, 너무 잘났다든가, 뭐―”
“위험하다며 그거!”
“아니, 딱히 그렇진 않은데. 아저씨 대체 뭐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대답 안 해? 그거 위험한 거야 안전한 거야!”
“아저씨!!”
칭찬받으러 달려온 강아지처럼 팔딱대던 헨리 드와이트 킴은 칭찬 대신 받은 무수한 구박의 세례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여자친구에게 실컷 시달린 헨리가 집으로 돌아가려고 나올 무렵, 기다리고 있던 직원 한 명이 작은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실례합니다.”
“이게 뭐죠?”
“킴 사장님께서, 도련님께서 사적으로 비행기 타고 놀면 드리라고 한 메모입니다.”
메모를 펼치자, 익숙한 필체로 우아하게 쓰인 짧은 문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기름 채워놔라. 공짜 아니다.
“와! 와!! 내가 일했던 건 산학협력이라고 쨌으면서, 비행기 한 번 탄 건 공짜가 아니래! 우와!”
“네가 잘못한 거 아닐까?”
“아니, 어떻게 삼촌이 이럴 수가 있어! 내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월화수목금금금을 여기서 불태웠는데.”
“입사하시면 무료로 처리해드리겠다고―”
“안 해요. 절대.”
옛날엔 용돈 잘 주고 푸근한 줄로만 알았던 유신 삼촌의 정체는 사실 피도 눈물도 없는 스크루지, 악덕 자본가였다. 빨갱이들이 이 나라를 먹어 치운다면 아마 가장 먼저 단두대에 끌려갈 사람 중 한 명이겠지.
오늘은 완전히 망했다.
어디 가서 돈 주고도 보기 힘들 곡예를 단독 공연했는데도 플로렌스의 반응은 영 그저 그랬고, 오히려 머리에 뿔 달린 부르주아지 김유신에게 덜미만 잡혀버렸잖은가.
플로렌스를 데려다주고 집에 돌아오자,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 서둘러 응접실로 나갔다.
“오늘 무슨 일 있나? 왜 다들 우리 집에들 오고.”
“청춘사업 한다고 바쁘신 분, 이렇게 눌러앉아 있어야 얼굴 좀 보지 않겠나.”
“선배님은 거의 맨날 얼굴 봤잖습니까.”
이 선배, 전학삼(錢學森, 첸쉐썬)으로 말할 것 같으면 동양기금이 아니라 미국에서 만든 경자장학회 장학금을 받고 건너온 중국인으로 MIT에서 수학하다 지금은 캘리포니아로 건너와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나이는 4년 차가 나는데, 신기하게도 헨리와 생일이 같아 서로 형 아우 하며 지낸 지도 몇 년째였다.
하지만 지금은 얼굴만 보고 있어도 속이 메스껍다. 얼마 전까지 샌―프랑코에서 같이 갈려 나간 터라 보는 것만으로 그때의 악몽이 리플레이될 것 같은 걸 어쩌라고.
헨리가 속으로 이렇게 씹어대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전학삼은 웃으며 옆에 우거지상을 하고 있는 두 젊은이를 가리켰다.
“이 친구들이 자네랑 좀 만나고 싶어 하길래.”
“세상 참 신기하네. 굳이 전 선배 통하지 않고 저한테 다이렉트로 연락해도 되는데 말이지요.”
“아무래도 막 친하고 그 정도까진 아니잖나.”
중국인이 조선인에게 일본인을 데려오는 요지경.
사실 미합중국, 보다 정확하겐 이곳 캘리포니아에선 밥 먹듯이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래도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어쨌거나 두 사람을 가리키기 무섭게, 그들이 쭈뼛쭈뼛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오랜만일세, 하하.”
“어, 음, 몇 번 뵈었는데, 저 기억하고 계십니까?”
“물론이지. 몇 달 얼굴 좀 안 봤다고 왜 갑자기 공대하고 그래? 오랜만이야.”
도조 히데타카. 도조 히데키의 아들.
그리고 고노에 후미타카(近衛文隆). 현 일본 총리대신 고노에 후미마로의 장남.
도조는 전학삼과 동갑이고 고노에는 또 헨리와 동갑이며, 셋 다 동양기금 패거리니 당연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하지만 시국이 수상하니 어색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당장 가판대에서 아무 신문이나 꺼내고 망할 이름, 유진 킴이 있나 없나 팔랑팔랑 찾아보면 어딘가엔 그 이름이 박혀 있을 테니.
독일, 일본과 한 판 붙을 준비를 해야 한다고 밤낮없이 외칠 순 있으면서, 어째 집엔 전화 한 통 안 할 수가 있나. 도청? 암살? 만화랑 영화를 너무 많이 보셨나?
서로 영혼 없는 안부 인사를 이리저리 주고받은 후, 잠자코 기다리고 있자니 그들 쪽에서 먼저 용건을 슬며시 꺼내었다.
“헨리.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킨 장군께서 이제 일본과 연을 끊기로 작정하신 겐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내 부탁이니, 살짝 귀띔만 해주면―”
“맨날 하는 이야기지만, 내가 저 핏줄을 물려받긴 했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도통 모르겠다니까요?”
털썩하는 소리와 함께 도조가 냅다 무릎을 꿇었고, 그 모습을 보기가 무섭게 고노에 또한 점핑하듯 무릎을 퍽 소리 나게 꿇었다.
“진짜 왜들 이래! 저는 진짜 나랏일은 아무것도 모르고요, 만약 무슨 일이 터진다 하더라도 뭐 여러분께 해를 끼칠 생각도 없습니다! 왜 무릎을 꿇고 이래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이런 일밖에 없잖나!”
“황국과 합중국 사이의 우호를 위해 가교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양국이 전쟁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니 귀한 집 자식으로서 할 수 있는 도리라곤 이것뿐일세. 우리 마음을 조금….”
“제발 그만하세요. 제에발.”
헨리는 고개를 처박은 둘을 억지로 일으켜주고, 필사적으로 있는 말 없는 말을 다 동원해 가며 그들을 안심시켜줘야 했다.
“지금 서부 커뮤니티를 보세요. 어느 한 민족이든 떨어져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꽉 매듭을 지어 놨는데 절대! 절대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저도 나중에 아버지 만나면 잘 말씀드려 보고, 어떤 생각이신지 물어볼게요! 약속하지요!”
그렇게 몇 번이고 확언을 한 뒤에야 그들은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났다.
“헨리.”
“정말로 약속드린다니까―”
“그, 내가 전해 듣기로, 장군님께서 이걸 무척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
전학삼과 도조가 저 앞으로 걸어나간 것을 확인한 후, 고노에는 다시 한번 눈치를 보더니 품속에서 작은 상자 같은 걸 내밀었다.
“본토에서 지령받은 건 절대 아니고, 내가 좀 들은 게 있어서, 그, 뭐시냐, 나랑 내 친구들이 알음알음 모아서 그… 성의를 마련했네.”
“이게 뭡니까?”
“아무튼! 난 가보겠네! 잘 부탁하이!”
셋이 저 멀리 가버린 후, 멍하니 그 상자만 매만지던 헨리는 무신경하게 상자를 열었고.
기다렸다는 듯 영롱한 금빛의 두꺼비가 그 우아한 자태를 드러냈다.
“…아니 씨발, 미치겠네 진짜.”
우리 아버지가 뭐가 아쉽다고 코 묻은 돈으로 상납을 받겠어? 이미 코 묻은 돈으로 왕국을 세운 양반이. 그리고 금두꺼비, 원래 중국풍 아닌가?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찬장에 장식되어 있던 유진 킴 비장의 컬렉션 한 병을 꺼내와 자작을 하기 시작했다. 주인이 집을 비운 지도 한참이니, 한 병 정도 없어져도 눈치는 못 채겠지.
동생들은 학교 갔고, 어머니는 모임.
고용인들을 제외하고 이 드넓은 집에 혼자 있자니 알콜의 힘을 빌어 온갖 망상과 상념이 실타래처럼 풀려나왔다.
지금 내 연애질이 문제가 아닌가? 본격적으로 커뮤니티 사교 활동에 매진해야 하나?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일.
‘도대체 아빠는 무슨 생각이지.’
이걸 알아야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직 서른도 안 되고, 제대로 취직도 하지 않은 일개 학생이 ‘뭐라도 하자’라고 생각하는 것도 참 웃긴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 아니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다들 그가 무언가 하길 바라고 있었다.
추측을 해보고 싶어도 아는 게 그리 많지 않았다. 아버지는 자신의 계획에 대해 입 밖으로 잘 꺼내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아버지는 틀림없이 조선 독립을 원했다. 이건 확실하다. 이리저리 저 중국 땅의 임시정부에 막대한 후원을 하고 있었고, 중국인들이 세운 청년군관학교에도 개입한 게 확실하다.
하지만 이곳 미 서부의 아시아인들을 고의적으로 바짝 섞은 것도 아버지다.
제각기 폐쇄적이던 한인, 중국인, 일본인, 류큐인 커뮤니티는 대공황을 기점으로 거의 하나로 합쳐지다시피 했고, 흑인과 히스패닉 등 피부색 다른 이들도 최대한 융화시키고자 했다.
일본과 친하게 지내고 싶었나?
일본의 대지진 때 많은 사람들을 구했다고도 하고, 남의 나라 정치에 개입해 불필요한 일을 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지금은 또 그 누구보다 강경한 반일주의자가 되어 조만간 있을 태평양 전쟁을 경고하고 다닌다.
대체, 뭐가 하고 싶단 거야.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게 다 아빠라는 양반이 뭐 하나 속 시원하게 말을 안 해줘서다. 내 잘못이 아니다. 진짜다.
그렇게 마음을 굳힌 헨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2층 구석 편 굳게 닫힌 아버지의 서재로 향했다.
‘서재는 청소하지 마. 환기나 좀 하면 되고.’
‘내가 가끔 청소하는 정도는 괜찮지?’
‘나중에 불평하기 없기다.’
뭐가 그리 켕기는 게 많았는지, 이 서재에는 누구도 얼씬 못 하게 했다. 어머니가 몇 달에 한 번 청소하러 들어갈 뿐.
하지만 그렇게 출입을 금한다는 것 자체가, 뭔가 생각을 유추할 만한 실마리가 있다는 뜻 아닐까? 전화 통화 하나 못 하게 하는 양반이, 내가 서재에 들어갔는지 어떻게 알겠어.
그때 아래층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뭔가 또 심사가 배배 꼬였는지 앨리스가 뿔이 나선 집에 돌아왔다.
“아씨… 야, 너 서재 앞에서 뭐 해?”
“알아서 뭐 하게.”
“아빠가 서재 들어가지 말랬잖아! 거기서 왜 어슬렁대!”
“엄마 가끔 청소할 때마다 고생하잖아. 너도 괜히 쿵쿵대지 말고 빨리 와서 청소나 좀 도와.”
“미쳤나 봐. 시키지도 않은 걸 갑자기 왜 효자랍시고 하고 그래.”
“넌 아빠가 뭔 생각 하고 사는지 안 궁금하냐?”
앨리스는 잠시 고민했다. 한… 3초 정도.
“먼지떨이 가지고 올게.”
“걸레도 빨아서 오고.”
청소용품을 챙긴 남매가 문을 열자, 퀘퀘한 종이 내음과 꾸득꾸득한 먼지 냄새가 그들의 코를 확 찔렀다.
“우린 청소만 하는 거다. 뭐가 보이면… 청소하다 실수로 봐버린 거고.”
“나도 아니까 빨리 창문부터 열어 바보야.”
헨리는 창문을 재빨리 열고, 가장 궁금했던 책상 서랍으로 다가가 가장 윗단을 드르륵 열어젖혔다.
“…….”
이것저것 잔뜩 적혀 있는 서류더미 위에, 무슨 문진(文鎭)처럼 떡하니 올라와 있는 금괴가 ‘안녕? 나는 금괴야!’ 하고 헨리를 맞이했다. 어찌나 반질반질한지 얼굴이 다 비쳐 보인다.
얼른 닫았다.
“뭐 있어?”
“아니, 아무것도.”
“뭐 있어?!”
“없다니까!! 청소나 해!”
난 아무것도 못 봤다.
진짜로.
그렇게 한창 청소를 하고 있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올라오셔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도련님, 전화가 왔습니다.”
“누구 전화죠?”
“킴 장군님이세요.”
웬일? 도청당한다고 별 푸닥거리를 다 했으면서?
먼지떨이를 내팽개치고 전화기로 달려간 그는 낚아채듯 수화기를 잡았다.
“여보세요?”
― 어, 아들 집에 있네? 마침 아다리가 딱 맞네. 잘됐다.
“이건 도청당해도 괜찮아요?”
― 어쩌겠냐, 급한 일인데. 너 준비되는 대로 바로 D.C로 와줘야겠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몇 년 만에 아들한테 전화를 걸어놓고 지금 장난하나?
빈속에 술을 때려 넣었더니 용기가 마구 샘솟는다. 영웅이고 리더고 뭐고 간에, 가족들도 좀 신경 써달라고!
“제가 아빠가 부르면 가야 해요?”
― 헨리야.
“저도 할 일 있어요. 무슨 일인지 설명부터 해주셔야지, 그렇게 대뜸 오라 가라 하시면―”
― 그래. 미안하다. 아빠가 지금 좀 다급해서 경황없이 이야기했더니 네가 짜증이 났구나.
아니, 짜증 났다고 하면 꼭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불효자가 된 것 같잖아.
뭔가 심경이 굉장히 복잡한데, 수화기 너머로 아버지가 누구랑 무어라 떠드는 이야기가 들렸다.
― 아들 잠시만, 내가 지금―
― 여보세요.
“누구십니까?”
갑자기 수화기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청나게 깐깐하고 성격 더러운 노인네처럼 느껴지는데.
― 어니스트 조셉 킹.
“……혹시, 플로렌스 킹 양의.”
― 아비 된다. 언제쯤 두 사람을 내가 D.C에서 볼 수 있겠나?
“내일… 내일 찾아뵐 수 있도록 당장 채비하겠습니다.”
― 좋군. 둘이서 침대칸 타고 오면 죽여버린다.
“네, 넵.”
난 아버지랑 대화를 하고 싶어서 D.C에 가는 거다.
진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