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Haired U.S. Army Marshal RAW novel - Chapter (325)
325_교향곡 제10번 (5)
잠시 쓰러졌다가 눈을 뜬 루즈벨트의 행동은 신속했다.
민주당의 중진들.
부통령 헨리 월레스(Henry Agard Wallace).
전쟁부 장관과 해군부 장관, 국무부 차관. 그리고 조지 마셜.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이들과 밀도 있는 이야기를 나눈 그는, 잠을 자는 대신 펜을 들었다.
[조금 전 의식을 잃었다 회복했네. 의사는 아직 희망 같은 낱말을 늘어놓고 있지만, 내 몸은 내가 잘 아는 법이지. 마지막 인사를 남기도록 하지.]대통령이 야전군인의 정점에 있는 자에게 남길 마지막 말.
머리는 깨질 것만 같고 가슴은 돌멩이를 집어넣기라도 한 듯 갑갑하지만, 이 작은 종이에 쓸 단어들이야말로 가장 정치적으로, 마지막 온점 하나까지 정제해 적어야만 한다.
유진 킴.
압력을 받으면 스프링처럼 튀어나오지만, 직업이 군인 맞는지 의아할 정도로 이상한 부분에서 여린 모습을 보이던 사람.
그러니 당연히, 최대한 친근하게 적는다. 되도 않은 유머도 좀 섞어서.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가 만든 그 운빨망겜이 범인이야. 그딴 걸 10년 넘게 했으니 속병이 들고도 남지. 축하하네, 프레지던트 슬레이어.]아. 실수. 진심이 조금 섞여버렸다.
고쳐 쓰기엔 이미 팔에 힘이 썩 넉넉하지 않다.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다음 대통령, 월레스를 잘 부탁하네.월레스 집안은 자네의 장인어른과 연이 깊지. 헨리도 대단한 인물이니 자네도 한번 만나보면 무척 마음에 들 거야.
그는 나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고, 내 뜻을 계승해주겠다고 조금 전 약속했네. 휠체어를 타지도 않았으니 아무리 봐도 나보다 더 낫군.
대통령직을 선거가 아닌 승계받았다는 약점을 숨길 순 없네. 그러니 더더욱 성과가 필요하고. 웰즈 차관과 자네가 국무부와 군부에서 잘 보좌해준다면 큰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하네. 다시 한번, 그를 잘 부탁하네.]
펜이 잠시 멈췄다.
손이 덜덜 떨리고, 철자가 제대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지금 놓을 순 없었다.
[예전에 나와 나눈 이야기는 모두 잊어버리게. 그때의 나는 내가 10년, 20년은 더 살 줄 알았으니까.배의 선장이 바뀌면 항로도 바뀌어야지. 정치인과 군인의 공통점이 있다면, 상황이 변했는데도 기존 계획을 그대로 실천하려 들었다간 큰일 나기 십상이라는 점 아니겠나.
자세한 건 웰즈에게 전해 듣게. 자네와 직접 대화하지 못한 것은 참 슬프지만 어쩌겠나. 이런 게 세상이지.]
아직.
아직 더 전해야 할 말이 많은데.
월레스가 당을 휘어잡을 수 있을까?
맥아더를 막고, 자신의 뜻을 계승할 수 있을까?
처칠과 스탈린은? 전후 세계 재편은?
죽어가는 사람은 그 무엇도 약속해줄 수 없다.
그저 친분과 옛정에 호소하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부탁이네, 진.이 나라가, 이 세상이 더 나아질 수 있도록 도와주게.
샌프란시스코에 전설의 카드쟁이 FDR 조각상을 만들고 나를 기리는 대회를 열어주면 약간 더 고맙겠지만, 구태여 그런 걸 벌이지 않더라도 이 소중한 나라에 다시 평화가 찾아온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네.
길게 적지는 않겠네.
내가 죽지 않았다면, 이 종이쪼가리를 들고 백악관에 찾아와 날 실컷 비웃도록 하게. 내 너그러이 대통령을 비웃을 권리를 제공해 줄 테니.
귀하와 귀하가 이끄는 군대에 승리와 영광, 그리고 정의가 함께하길 바라며.
프랭ㅋ.]
잉크병이 엎어졌다.
* * *
나는 몇 줄 되지 않는 이 쪽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글자는 온통 떨리고 이리저리 번져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 탓에 오히려 루즈벨트가 어떤 몸 상태에서 쓴 글인지 확신할 수 있었다.
조용히 쪽지를 접어 내 안주머니에 찔러 넣고 웰즈를 가만히 바라보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각하께서는 저희 두 사람에게 많은 걸 기대하고 계십니다.”
“조금, 당황스럽군요. 무엇보다 제 위로 상급자가 있는데―”
“특수한 상황에 특수한 시국이잖습니까.”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혹시 헨리 월레스 부통령님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전혀 모릅니다.”
월레스 집안이 장인어른과 연이 깊다니. 나는 정치 잘 모른다고.
“월레스가(家)는 아이오와의 이름난 농업인 집안이자 농축산업 계열의 언론을 보유한 곳이었습니다. 부통령님의 부친께서는 하딩 행정부, 그리고 쿨리지 행정부에서 농무부 장관을 지내셨고요.”
오랜만에 듣는 이름들.
거기에 농업인 집안.
우리 장인어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건 확실해 보였다.
“오래전부터 월레스가는 농업 정책과 관련해 허버트 후버 전 대통령과 대립하고 있었고, 당연히 커티스 계파의 중진으로 후버와 맞서왔습니다. 부친께서 작고하지 않고 계속 커티스 의원을 지지했더라면 어쩌면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르지요.”
“그렇습니까.”
“다만 아시다시피 후버는 결국 승리해서 대통령이 되었고, 커티스 계파는 철저하게 보복당했습니다. 우유 원정대 사건으로 후버가 무너지긴 했지만 결국 농민들의 삶이 딱히 나아지진 않았고, 오히려 커티스 의원이 은퇴했지요.”
그래서 우리 맥 의원이 화려하게 등장한 것 아닌가.
물론 맥아더의 전문 분야는 당연히 농업이 아니었고, 대공황에 겹쳐서 초유의 자연재해까지 벌어지고 있던 미국 농업은 하느님이 케어해주지 않는 이상 어떻게 손 쓸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부통령께선 커티스 의원의 영향력을 이어받은 맥아더를 지지하는 대신, 대통령 각하의 러브콜을 받아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기고 농무부 장관직을 받으셨습니다.”
“아아. 그렇게 됐군요.”
맥아더와의 관계는 최악이겠구만.
중간에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굳이 안 들어도 알 것 같다. 항상 자신감으로 빵빵 차 있는 맥아더가 자신을 떠나 당까지 갈아버리는 사람을 호의적으로 볼 일은 없겠지.
대통령은 당연히 장관을 갈아버릴 수 있지만, 지금은 전시 거국 내각이다. 공화당의 협조를 얻기 위해 공화당의 실질적 수장을 전쟁부 장관으로 앉혀 놓은 건데, 자르긴 힘들다.
“부통령님에 대한 소개는 잘 들었습니다. 그럼 이제 각하께서 제게 남겼다는 말을 듣고 싶군요.”
“먼저, 각하께서는 드골의 행보를 용인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지요.”
“드골이 파리에 입성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나는 대답 대신 입에 담배 한 개비를 물었다.
씁쓸하구만.
“국무부를 대표해 제가 말씀드리자면, 애초에 대통령 각하의 전략은 너무 무모했습니다. 놀렛 장군이 작고한 시점에서 프랑스를 정상화할 수 있는 인물은 애초에 드골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렇긴 합니다만, 대통령께선 그래도 할 만하다고 여긴 것 아니었습니까?”
“그랬지요. 하지만 후임자가 그걸 능숙히 해낼 수 있으리란 법은 없잖습니까.”
정치 만렙, 썩은물 중의 썩은물인 루즈벨트는 드골을 치워버리고 개판이 된 프랑스에서 달달한 꿀을 빨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경황도 없이 승계받아 대통령이 될 월레스가 그 섬세한 컨트롤이 가능할까?
어렵지. 당장 국내 휘어잡기도 바쁠 테니까. 능력도 능력이지만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다.
“그래서, 드골 꼴리는 대로 하기로 봐준다… 가 끝입니까?”
“그럴 리가요. 대통령 각하께선 드골에게 몇 가지 약조를 받아냈고, 그놈은 각서까지 썼습니다. 우리가 프랑스에서 받아내야겠다고 작심한 것들은 드골이 제 손으로 직접 제공해 줄 겁니다.”
“그 ‘받아낼 것’이 어떤 건지 제가 들을 수 있겠습니까?”
“군사적인 부문을 말씀드리자면, 드골은 최단시일 내에 프랑스군을 재조직하여 연합군에 최소 백만 명 이상을 제공하기로 하였습니다.”
그거면 됐어.
그냥 감정적으로 그 꺽다리가 불편하긴 하지만, 귀찮은 일을 그놈에게 다 짬시킬 수 있다면 그 정도 불편함은 참아줄 수 있다.
백만이라, 백만.
독일 본토로 들어가면 어마어마한 피해가 예상되는데, 미국인의 피 대신 프랑스인의 피를 흘릴 수 있다면 그깟 파리쯤이야 얼마든지 줄 수 있다. 기왕이면 파리에 대가리 헤딩하는 것도 프랑스 놈들끼리 했으면 좋겠는데.
파리에 깃발을 날려서 무엇 하겠나.
수도 탈환의 기쁨을 누릴 프랑스인들을 빼고 생각하자면, 그깟 깃발을 높은 곳에 꽂아서 좋아할 사람들은 패튼 같은 변태나 몬티 같은 나르시시스트뿐이다.
평범한 민간인이 고통받고 있으니 당연히 되찾아야 하지만, 나로서는 외국의 민간인보다는 내게 목숨을 맡긴 내 병사들이 더 귀하다.
“다른 이야기는 더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각하께서 회복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는 뒷말을 흐리다가, 결국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마저 내뱉고 말았다.
“새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앞으로의 일에 대해 더욱 긴밀한 이야기를 나누셔야 할 듯합니다.”
다시 한번 실감이 났다.
천년만년 영원히 옥좌에 있을 것만 같던 인물은.
이제 세상을 뜰 예정이다.
* * *
같은 시각.
워싱턴 D.C.
“어째서 절 부르신 겁니까.”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우리 둘이 만나는 게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문제가 많지요. 다른 사람들이 보면 뭐라고 떠들겠습니까.”
코델 헐 국무장관의 물음에, 맥아더는 부드럽게 웃음을 지었다.
“그게 그렇게 걱정되셨다면 여기에 걸음 하지 않으셨겠죠. 자, 앉으시죠.”
“용건만 빨리 듣고 가겠습니다.”
맥아더가 군복 대신 정장을 입은 지도 10년째.
이제 이 D.C에서 돌아다니는 인간들이 표정을 짓는다는 건 전부 그 표정을 상대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의미라는 걸 깨달은 지도 한참 되었다.
그러니 저 썩어 문드러진 토마토 같은 면상도, 자신의 심기를 이 맥아더에게 전달하고 싶다는 뜻.
“우리의 믿음직한 프랭크가 이 나라의 핵심 인사들을 만났습니다.”
“그랬지요. 저도 참석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민주당 의원들을 부른 자리였지요. 정작 국무부, 그리고 외교에 대한 안건은 웰즈 차관과 떠들지 않았습니까.”
헐은 민주당 내 루즈벨트 반대파들의 추천으로 국무부 장관 자리에 앉았고, 루즈벨트는 임기 내내 헐을 패싱했다.
하지만.
설마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 패싱할 줄은 몰랐다.
뻔히 알면서도, 앙금이 남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루즈벨트는 죽는 그 순간까지, 빨갱이들과 사이좋게 지내라고 신신당부를 했다더군요.”
“소련과의 외교는 확실히 중요합니다. 특히나―”
“허허. 본인도 안 믿을 이야기는 하는 게 아닙니다. 월레스가 빨갱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마침내 이 나라의 백악관에 빨갱이가 앉은 겁니다. 빨갱이가!”
“월레스 부통령이 분명 부의 재분배와 빈곤층 보호를 주장하긴 했습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뉴딜의 핵심이고요. 공화당 분들이 뉴딜을 빨갱이놀음으로 간주하는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라지만, 적어도 대통령이 서거하려는 이 시점에서 떠들기엔 좀 불편한 주제군요.”
맥아더는 여전히 얼굴 가득 덕지덕지 붙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나는 당신들 편입니다.”
“그게 무슨 뜬금없는―”
“오랫동안 여러분들은 루즈벨트에게 탄압받지 않았습니까. 야당 의원인 제가 봐도 참 소름 끼칠 만큼 잘근잘근 짓밟던데, 그 루즈벨트를 계승한 월레스는 얼마나 더 여러분을 밟아놓겠습니까? 여러분들을 정리한 후엔 당연히 공화당 차례겠죠.”
루즈벨트는 미합중국의 성스러운 민주주의를 파괴했다.
민주당 내 보수파들을 보호해주던 각종 제도를 폐지하고 보수파의 입을 틀어막았다.
전통으로 내려져오던 재선 후 불출마를 깨고 3선에 당선했다.
대법원이 뉴딜에 반대하자 대법관 수를 늘려버려 사법부 독립을 무너뜨렸다.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빨갱이들에게 돈과 물자를 헌납하고,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을 이용해 밀실에서 제 뜻을 따르는 웰즈와 마셜과 쑥덕거리며 온갖 대소사를 날치기로 처리했다.
FDR은 괴물이었기에 이 모든 일을 하고도 무사했었다.
하지만 그 후계자는 사람이다.
아주 작고 연약한.
“빨갱이 대통령이 이 나라를 모스크바에 팔아먹는 꼴을 두고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여야가 협력해 이 나라를 바로잡아야겠습니까?”
“이보시오.”
“딱 3년이면 됩니다. 민주당 여러분은 여당으로서 국내 내정을 뜻대로 하십시오.”
비상한 시국에는 비상한 방법을 써야 하는 법.
대통령을 식물로 만들어버리면.
전쟁은 누가 지휘하겠는가.
“다들 요즘 깜빡 잊은 것 같지만, 전쟁은 원래 내 전공이었습니다.”
당연히 전쟁부 장관이 해야지.
이게 올바른 문민통제 아닌가.
헐이 고민하던 그 순간, 누군가 문을 퉁퉁 두들기더니 다급히 들어왔다.
“장관님?”
“무슨 일인가.”
“대통령 각하께서 조금 전 서거하셨습니다.”
마침내.
이 맥아더의 시대가 왔다.
그는 이 순간 하나님의 가호를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