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Haired U.S. Army Marshal RAW novel - Chapter (444)
445_마지막 가을 (4)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공산 쿠데타 소식이 전해지면서, 지구 반대편 한국과 일본 양국 또한 소란스러워졌다.
신문 제일 뒤편 국제란에 쓰인 한 꼭지 기사만 본 대중들이야 저런 나라가 있었구나, 하는 감상이 끝이겠으나 정치에 관심 있는 이들에겐 너무나도 막중한 문제.
“소련의 사주로 유럽의 한 나라가 하루아침에 적화되었습니다.”
“당신들도 혹시 저런 무력 정변을 꿈꾸고 있소?”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자문위원회 또한 날로 그 분위기가 험악해져 가는 것은 실로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예외.
“이왕(李王) 이은이 이왕가를 대표해 귀국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하하하하!!”
“오라고 합시다. 와서 나라를 팔아먹고 왜놈의 따뜻한 대변을 받아먹고 산 죄를 심판받으라 합시다!”
“육시를 해도 모자랄 놈들이 돌아온다니, 당연히 잡아 죽여야지.”
간청하다 못해 비굴하기까지 한 편지가 낭독되자 좌우를 막론하고 화기애애, 대동단결의 기미가 보였다.
이 자리에 모인 자문위원 대부분이 옥고와 고문 감수하며 독립운동에 나선 이들일진대, 이제 와서 고향이 그립다는 둥 어쩌는 둥 해봐야 소귀에 경 읽는 격.
이왕가의 재산을 모조리 국고로 환수해야 한다는 덴 반대하는 이 아무도 없어 정식 의결까지는 1분도 채 걸리지 않았지만, 잡음은 그다음부터였다.
“조선 또한 이제 문명국으로 나아가야 하고, 세계의 문명국가 중 연좌제를 적용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이명복이 망국의 죄 짊어진 죄인이라곤 하나 그 자손들에게 연좌를 물어 처벌해야 합니까? 이미 한평생 왜놈들의 볼모로 지낸 이들입니다.”
“어마어마한 부귀영화와 함께 말이지요.”
여운형은 저들 일족의 목을 따봐야 괜히 야만스럽단 소리나 들을지 모른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냈고.
“망국의 왕족에게 고국 땅을 밟게 해주는 것 자체가 사치입니다. 나라를 잃었는데도 멸문당하긴커녕 그들 스스로 왜놈과 교배하여 호사를 누리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조선인이 아닌 왜인이니 우리가 처벌할 이유도 없습니다!”
“암요. 일본제국 왕공족을 어찌 조선의 법정이 처벌하겠습니까? 스스로 나라를 가져다 바친 자들이니 당연히 일본 시민이지요.”
김규식, 그리고 조만식의 말에 또 그런가 하고 고개 끄덕이는 자들도 있었다.
“거, 왜 다들 그리 어렵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그려. 여우도 죽을 때면 고향으로 대가리를 돌린다는데, 좀 받아주면 어디가 덧납니까?”
도대체 누가 저런 말을 하나 좌중의 시선이 집중되는데, 그 장본인이 김원봉이니 다들 점심을 뭐 잘못 먹었나 하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그럼, 그냥 저대로 내버려 두잔 말입니까?”
“아니. 뭐. 이 땅에 애국충정 가득한 의인 하나 없겠습니까.”
“오면 죽여버리겠단 소리요? 당신 미쳤소?”
“내가 죽이겠다고 말했습니까. 그냥 거, 왜놈 쏴 죽이고픈 협객 한둘쯤 없진 않겠구나 싶은 거지.”
“하하하! 약산 선생님의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조선에 기개 있는 남아 하나 없겠습니까?”
재판이고 나발이고 그냥 저승의 제 애비 곁으로 돌려보내겠다고 이를 박박 가는 이들까지.
다들 대놓고 언급하는 이들은 없었지만, 자문위원회에 참석한 이들은 전부 비슷한 생각을 속으로 품고 있었다.
‘비록 독립운동가 중 복벽파는 소멸했다고 하지만, 옛 왕족들이 돌아온다면 백성들이 자연스레 공경하는 마음을 품을지도 모른다.’
‘이왕가는 지금 자신들을 지지해줄 뒷배가 없다. 그러니 엉뚱한 잡놈들이 근왕이랍시고 파리처럼 꼬이면 신생 대한의 골칫거리가 될 수도 있을 터.’
‘아직 공화정과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지도 못했는데.’
수지가 맞지 않는다.
리스크는 크고, 이득은 적다.
그리고 하나 더.
“…어르신께선 혹시 의견 없으신지?”
“응? 나 말인가?”
구석에 앉아 졸고 있던 김상준은 하품을 쩍쩍 하며 눈을 비볐다.
조선 땅에 도착하기 직전만 하더라도 이제 슬슬 갈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며 본인 입을 수의(壽衣)까지 마련한 김상준이건만, 정작 도착한 뒤로는 갑자기 호랑이 기운이라도 솟아났는지 하루에 밥 다섯 공기를 비우고 온 나라를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배운 게 없어서 잘 모르겠구먼. 여기 계신 분들은 다들 훌륭한 분들이시니 좋은 결론을 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다.
김유진을 왕으로 섬겨야 한다고 믿는 이들, 혹은 이미 왕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조선 팔도 천지사방에 깔려 있지 않은가.
이왕가가 온다면, 그들에게 선양(禪讓)하는 예를 취하게 하여 김가가 정말 다 해먹는 그림이 연출되지 말라는 보장 또한 없다.
“노인의 지혜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들 하지요. 죽헌 선생 같은 분께서 배운 게 없다니 너무 겸양이 심하십니다.”
“허허… 제가 함부로 입을 열면 아들에게 폐가 될 것만 같아서 말입니다.”
“여기의 그 누구도 김 장군과 죽헌 선생을 연결 짓지 않을 겁니다. 부디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더라도, 다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 중 아주 일부라도 김유진의 의중이 섞여 있지 않을까 믿는 상황.
결국 한창 실랑이를 한 이후에야 그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늙은이가 얼마 전에 증손주가 태어났단 이야길 들었습니다. 사진으로만 접했는데도 어찌나 똘똘하고 귀엽게 생겼는지 실로 하늘이 복을 내려준 모양입니다.”
“그렇군요… 축하드립니다.”
“그러고 나니 문득 생각이 듭디다. 내 손에 묻힌 핏자국이 그 갓난쟁이 아기한테까지 이어지진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내가 여태 살면서 누군가의 눈에서 눈물 흐르게 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떳떳할 수가 없는데, 어찌 남의 집 자식에게 그 애비의 죄를 따지자고 하겠습니까.”
“그러면 그들을 품어주잔 말씀이십니까?”
“망국의 왕족으로 호의호식한 죄는 법정이 아닌 30여 년간 노예로 신음한 백성들 앞에 고해야 할 죄 아니겠습니까? 진심 어린 참회와 함께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들을 새 나라의 일개 시민으로 품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노인의 말에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또 누군가는 불만을 품었으며, 어떤 이는 늙어서 기가 약해졌다고 혀를 찼다.
결국 각자 의견을 정리해 내일 다시 논하기로 하고 이날의 회의는 파하였다.
각자 제 당색에 따라 뭉치고 흩어져 하나둘 자리를 뜨는 가운데, 특별히 입당한 정당 없는 상준은 느릿느릿 지팡이 짚고 자리에서 일어난 후 자문위 건물 근방에 새로 세워진 목욕탕으로 향했다.
전후 압류된 기존 일본식 목욕탕을 김유진 대원수의 취향에 맞게 처음부터 끝까지 리모델링한 이 대중목욕탕은 당초에는 그 취지를 ‘사람은 씻고 살아야 건강해지니, 저렴하게 끓는 물에 몸을 담글 수 있는 시설을 지어 시민 건강에 이바지하겠다’라 하였다.
그러나 위치가 문제라면 문제.
심심하면 자문위 회의 끝나고 온갖 거물들이 탈의하여 벌거벗은 채 몸 담그고, 그들 밑의 사람들과 자문위 출석하는 온갖 고관들까지 심심하면 찾아오는 이곳에 얼굴 내비칠 배짱 두둑한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아무리 뱃심 좋은 놈이라도 대원수가 맥주 홀짝이며 온탕 물에 몸 지지고 있는 옆에서 제 때를 밀자니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얼씬도 안 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
이 꼴을 보고 혀를 찬 동생 김유인이 목욕탕 간판을 이라 붙이니, 기어이 경성 한복판에 우보크 뉴 지점이 세워진 연유였다.
텅텅 빈 목욕탕.
휘휘 옷 벗어 접어 두고, 술병과 잔 두 개 챙겨 들어와 탕에 몸을 푹 담그니 시조 한 곡조가 절로 입에서 나오고 신선이 부럽지 않다.
“여기 계셨군요.”
“아이고, 우남 선생님 오셨습니까. 물건이 참 실하십니다그려.”
인상을 콱 쓰던 이승만도 펄펄 끓는 열탕에 몸 푹 담그니 절로 얼굴이 흐물흐물해지고 근육에 준 힘이 싹 다 풀리고 말았다.
“이왕가 놈들을 받아들이자고요?”
“거, 때 밀고 광내는 여기서 또 구정물 가득한 얘길 하자고?”
“급하니까요. 그놈들이 돌아오면 또 시끄러워질 게 뻔하단 걸 잘 아시는 분이 왜 그러셨습니까. 약산을 따르는 애새끼들이 이왕 이마에 납탄 박아넣기라도 해보십쇼. 영락없는 순교자 아닙니까?!”
“그래서?”
“그래서라니… 이 시국에 전혀 좋을 일이 아니다 싶은 게지요.”
“빨갱이들이 총 들고 헛짓거리하면, 자네에겐 이득인가 손해인가?”
우남은 대답하는 대신 허리를 펴고 목 끝까지 푸욱 뜨거운 물에 몸을 집어넣었다.
“처먹을 게 없어서 이왕가 꿀을 처먹으려 드는 놈들, 그리고 이 시국에 품에 권총 껴안고 다니는 놈들. 개중 멀쩡한 새끼가 얼마나 있겠어. 그렇지 않나?”
“누구 하나 칼 맞고 뒈지기라도 하면 합법적으로 몽둥이를 휘두를 수 있을 테고 말입니다.”
“빨갱이들이 하루아침에 체코를 무너뜨리고, 저 남미에선 군인들이 총 들고 정부를 무너뜨리는 세상이야. 아직 어수선한 조선이 그리되지 않는다는 보장 있나? 명분만 준다면 상대가 누구든 아주 요절을 내 놔야지.”
송골송골 물방울 가득 맺힌 술병을 딴 그는 잔 하나를 옆 사람에게 내주었다.
“내 아들놈의 그림자가 하도 커서 이 나라를 통째로 품고도 남지. 그런데 그 녀석이 언제까지 이 극동에 있겠나? 차라리 나나 유진이 있을 적에 뭐라도 터지는 게 낫지.”
“음흉한 늙은이 같으니.”
“가는데 순서 있을 손 싶은가? 나나 자네나 내일 눈 못 떠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야.”
“남들 앞에서 제 증손자 팔아 가면서 인자한 척해놓고, 뒤에선 쓰레기 담는 오물통으로 쓸 작정이야. 애비나 아들이나 속 시꺼멓고 뻔뻔하기로는 조선 제일이지 아주.”
“어허. 남들이 들으면 오해하겠구먼. 이왕가로 말할 것 같으면 안동 김씨 이래로 항시 주인님이 있어야 하는 도구였는데, 이제 마지막 주인인 히로히토가 사라졌으니 자못 불안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주인이 되어주면 그들의 마음이 평안해질 테니 이는 상법을 따져도 아무 문제 없는 공정 거래일세.”
상준은 실로 악당 같은 웃음을 터뜨렸고, 그에 질세라 승만 또한 박장대소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양심의 가책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 * *
주권민주당의 등장으로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해진 1944년 미국 대선.
“젠장. 이러다 내가 죽지, 죽어.”
김유신은 이 한복판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한때 ‘달러 찍는 윤전기’라는 별명까지 붙었던 샌―프랑코의 카드 게임 장사는 2차 대전의 폭풍 속에서 그 막을 내렸다. 종이가 군수 물자로 지정되며 딱지를 못 찍게 되었으니 어쩌겠는가.
비록 전쟁은 끝났지만, 유행도 끝나버렸다.
시장엔 경쟁자들이 즐비했고, 하나의 브랜드이자 업계의 거성이 된 ‘미스터 뱅’ 방정환은 공식적으로 모든 자리에서 사임한 후 귀국을 위해 가산을 정리하고 있었다.
전투기, 탱크 등 전쟁 내내 돈을 갈퀴처럼 긁어모으던 사업들도 이제 좋은 시절이 끝났으니, 유신과 샌―프랑코의 다음 고민은 바로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무엇을 하느냐였다.
그리고 돈 냄새 맡는 장인 김유진은 늘 그랬듯 또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더 썬이 얼마나 짭짤했는지 알잖아. 우리도 언론사 하나 좀 먹어 보자고.’
‘너무 문어발인데.’
‘어차피 그룹 분사도 해야 하니까. 공장 돌리는 제조업이랑 별개로 미디어 그룹 하나 차려서 형제끼리 갈라 먹자고.’
창설에 개입한 경력도 있는 형인 만큼 이번엔 한번 걸어볼 만하지 않겠나.
그는 곧장 방송국 매입을 타진했고, 때마침 독점 문제로 회사를 쪼개야 했던 NBC(National Broadcasting Company)가 회사 일부를 매물로 내놓았다.
집요한 경쟁, 협상, 컨소시엄 결성, 돈지랄 등 다종다양한 경쟁 끝에 마침내 그들은 전직 상무부 차관 에드워드 노블(Edward John Noble)과 손잡고 NBC 블루 네트워크를 매입, ABC(American Broadcasting Company)를 창설했다.
하지만 이 바닥이 그리 녹록하진 않았다.
돈이 많으면 뭐 하는가. 결국 사람과 경험은 돈이 있어도 쉽게 사들일 수 없는데.
악전고투하던 이들 ABC 방송국을 위해 새로운 비단 주머니 계책을 던진 것은 일을 벌이기만 할 뿐 태평양 건너편에서 노닐기만 하는 6성 장군님.
‘대선 토론.’
‘뭐?’
‘맥아더와 월레스를 설득해서 우리 라디오 방송에서 대선 토론을 붙게 하는 거야. 성공만 하면 떡상한다 진짜.’
‘아잇 시발. 지금 장난해?’
몇 달간의 기나긴 네고시에이션 끝에, 기어이 해냈다. 못난 형이지만 이럴 땐 그 형의 위광이 참으로 쓸만하지 않은가.
공화당은 라디오 대선 토론 한 방으로 월레스의 친소 용공 기질을 폭로하면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라고 설득했다. 맥아더 또한 결코 언론을 사양하는 부류가 아니었으니, 유신은 맥아더를 만난 지 10분 만에 승낙을 따낼 수 있었다.
반면 민주당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주권민주당이 궐기하며 상황이 바뀌었다.
― 주권민주당을 배제하고 오직 공화당과 민주당, 두 후보 간의 대결로 토론을 방송한다.
딕시크랫당의 존재감을 완전히 박탈할 수 있다는 이 설득은 적중했고.
“방송 시작 10분 전.”
“똑바로 준비해!”
“대통령 각하. 마이크 테스트하겠습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니 참으로 반갑군요, 맥아더 의원.”
“잘해 보십시다.”
마침내 이 경이로운 토론이 성립되었다.
“광고 판매 상황은?”
“당연히 매진입니다!”
“좋아. 아주 좋아.”
입이 바싹바싹 말라온다.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던 유신은 두 대선 후보에게도 물병을 가져다주라고 지시한 후 뒤로 물러나 스튜디오를 응시했다.
새로운 시대.
어느 쪽이 당선되건, 돈방석은 확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