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Haired U.S. Army Marshal RAW novel - Chapter (72)
72_합중국의 검 (2)
쾅! 콰아앙! 쾅!
“쏴! 계속 쏴! 제리 새끼들이 방독면 못 벗게 해!”
사단장이 몸소 갈궈댄 탓일까. 93사단 예하 포병여단 병사들은 기어이 새로 점령한 고지에 포대를 방열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명령에 그들은 절망했다.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지만 당장 포탄을 날려야만 했다.
“다들 탈진 상태입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신다면-”
“그래서? 힘들어? 지금 저 친구들한테 힘들다고 투덜대 봐!”
지휘관은 냉혹할 정도로 말했지만, ‘저 친구들’을 바라본 포병들은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아직 채 수습되지 못한 불쌍한 미군 보병들의 시신이 곳곳에 널려있었기에.
“우리가 힘들다고 한 발 덜 쏘면 또 다른 전우가 제리의 손에 죽는다. 투덜대지 마라. 힘들어 죽을 것 같다고 해봐야 어차피 진짜 죽지는 않잖아! 당장 장전해! 미래를 열려면 우리가 죽을힘을 다해야 한다!!”
하도 이를 꽉 깨물어 피가 흐를 지경이었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포대가 다시금 포효하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발버둥치던 독일군도 이제 슬슬 현실을 깨달을 시간이었다.
그 깨달음이 늦어진다면, 더 많은 병사를 잃어야지.
통신대를 더욱 닦달해서 빨리 전화선을 깔고 싶었지만, 물리적으로 어려운 일을 계속 요청하는 것도 무리다. 게다가 부하 병사들은 부하지만 통신대는 아저씨 아닌가.
“전령 준비하게.”
“알겠습니다.”
늘 그렇듯, 포병은 항상 후방에서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로 포탄을 던져야 한다.
그 말인즉슨 아차 하는 순간에 전혀 전략적으로 무의미한 허공에 탄을 쏴 갈기거나, 반대로 아군의 머리 위에 불벼락을 떨어트려 욕을 먹는 일이 허다하다는 뜻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아군을 쐈다간 최악이다. 단순히 살상의 문제가 아니라, 한번 아군의 대포를 맞은 부대는 사기가 바닥을 쳐 도저히 전투에 투입할 수가 없게 된다.
여태까지 잘해왔는데, 이 지긋지긋한 뫼즈-아르곤의 전세를 판가름할 결정적인 싸움에서 역적으로 지목받을 수는 없다. 따라서 그는 사전에 고지받은 일부 좌표에 대한 포격을 끝내고 침묵하기로 결정했다.
무엇보다 더 포격을 지시했다간 병사들이 자신을 살려둘 것 같지도 않았고.
하지만 그가 전령을 보내기도 전에, 오토바이를 타고 사단의 전령이 먼저 도착했다.
“새 명령입니다.”
“알겠네.”
명령서를 빠르게 훑어 내려가던 그의 안색이 점점 일그러졌다.
“조졌군.”
또 새로운 고지를 점령했으니 연대 하나를 그리로 옮기라고?
누굴 보내든 어마어마한 원망을 들을 게 뻔하다. 방금 전까지 사력을 다해 쏴댔는데.
그나마 약간의 자비심으로 시간을 넉넉하게 주기는 했지만, 골치 아픈 건 매한가지였다.
“알겠네. 여기 적힌 대로 372연대가 이 고지를 인수하는 대로 즉각 이동하지. 그렇게 전해주게.”
“알겠습니다!”
부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전령이 다시 바람처럼 달려 사라졌다.
전쟁은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
93사단이 가진 모든 것을 끌어모아 돌파를 시도할 무렵.
이웃한 무지개부대, 42사단 역시 어마어마한 피를 흘리고 있었다.
“83여단… 전멸했다고 합니다.”
“대체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42사단장 메노허 소장의 눈이 한 바퀴 홱 돌더니, 신경질적으로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단장! 대체 무슨 소린가!”
– 죄송합니다. 적의 반격이 너무 거셉니다. 전선은 무너지고 있고 아군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습니다.
“당장 할 수 있는 만큼 전선 유지시키게. 그게 자네의 마지막 임무야.”
쾅!!
여단장의 해임을 선언하며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냅다 던져버린 메노허는 잠시 씨근덕거리며 다시 교환원을 불렀다.
– 예, 장군님.
“84여단 연결해주게. 최우선으로!”
잠시 후, 믿음직한 목소리가 그의 귀를 간질였다.
– 84여단장 맥아더입니다.
“83여단이 무너졌네.”
–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합니다. 지금 저희 84여단을 밀어넣는다 해도 독일놈들을 도로 밀어내기는 역부족입니다.
맥아더는 얼마 전까지 사단의 대소사를 모두 떠맡았던 참모장이었다. 그가 기억하기로도 그의 입에서 못 하겠다는 소리가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정도인가.”
– 죄송합니다만, 죽으라고 명령하시면 죽겠습니다. 하지만 이기라고 명령하고자 하신다면 더 많은 화력 지원을 요청드립니다.
“군단에 요청해서 추가적인 포병화력을 지원하겠네.”
– 항공 지원도 더 필요합니다. 현재 독일군이 우리 머리 위의 하늘을 장악했습니다. 싹 걷어내야 합니다.
“좋아. 전부 해주지. 약속함세. 그러니 내일 1800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악마의 아가리 같은 고지에 성조기를 휘날리게. 이게 내 명령이야.”
– 킴 준장이 2만 8천 장의 시체 포대를 요청했었지요? 저희 부대를 위한 6천 장도 주문해주십시오. 성조기는 저 고지에 꽂히거나, 제가 들어갈 포대자루에 감아놓겠습니다.
그렇게 사단장에게 고한 맥아더는 전화를 끊은 즉시 참모부를 소집했다.
“이 전투의 향방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 83여단은 무너졌고 적은 저 징글징글한 고지를 탈환했네. 이제 우리가 제리를 쫓아내든가, 아니면 죽든가. 둘 중 하나가 남아있을 뿐이지.”
“그동안 숨죽이고 오직 단 한 번의 반격만 준비하던 독일군의 기세가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그걸 정면으로 받아내면 우리라고 멀쩡하겠습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요청은 다 했네. 만약 하나라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나도 빼야지.”
그렇게 말하기가 무섭게 군단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그가 요청했던 모든 지원을 받아냈다는 답변이었다.
역시 메노허. 이러니저러니 툴툴거리긴 해도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해주는 훌륭한 상관이다.
“좋아. 그러면 이제 이렇게 하면 되겠군.”
그는 지도상에 시원스럽게 직선 한 줄을 주우욱 그어나갔다.
군단급 화력이 모든 것을 불태울 지점들. 저 밑에 있을 제리들에겐 아마겟돈이 따로 없겠지만, 이 정도는 되어야 놈들에게 현실을 각인시켜줄 수 있으리라.
“이러면 단순히 저희만 영향을 받는 게 아닐 텐데요?”
“그렇지. 우리만 나아가선 큰 재미 보기 어려워. 그리고 옆 부대 친구도 이 사실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을 거야.”
이번엔 맥아더가 전화기를 들었다.
“93사단 본부 연결해주게.”
– 예, 선배님. 유진입니다.
“상황은 대충 알고 있겠지? 죽기 딱 좋은 날이야. 84여단은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스당으로 가는 길을 뚫을걸세.”
– 그거 잘 됐군요. 실은 저도 시체 포대를 좀 많이 주문했거든요.
“하하하하!!!”
– 하하하핫! 지금 여기는 최고입니다. 왼쪽도 오른쪽도 앞도 사방이 적이니 장님도 만발 찍을 것 같습니다. 저도 전방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데 참 아쉽네요.
“자네는 목숨 좀 아까운 줄 알아야 해. 사단장씩이나 돼서 경망스럽게 그게 무슨 행동인가? 당장 자네가 또 최전방으로 튀어나갔으면 내 전화도 못 받았지 않았겠나.”
– 그거야 그렇지만, 저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도무지 연락이 안 되니 답답해 죽을 것 같단 말입니다. 무전기는 대체 언제쯤 써먹을 만해질지. 하.
옆에서 통화를 듣고 있던 참모들이 순 미친놈들을 바라보는 듯했지만 상관없었다. 범인(凡人)들이 천재들을 바라볼 때 경계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니까.
“군단의 화력지원을 있는 대로 이끌어냈네. 내가 지금 좌표 불러줄 테니 잘 들으라고.”
– 크으. 딱 가장 절실한 구역이군요. 불의 전차(Chariots of Fire)가 한 바퀴 순회에 나서면 독일놈들이 노릇노릇해지겠습니다.
“표현 한번 시적이군. 나중에 내가 자서전을 쓰면 꼭 그 말을 써먹겠네. 이 정도로 화끈하게 화력지원을 받는데, 93사단의 진격로는 평탄해지겠지?”
– 이렇게까지 밀어주셨는데도 못 뚫으면 계급장 떼야죠. 지금 당장 새 명령서 뿌릴 준비부터 갖추겠습니다. 건투를 빌겠습니다, 선배님!
탁.
맥아더의 두 눈에 불씨가 붙었다.
믿음직한 후배가 측면을 청소해주면 적의 압력은 한결 꺾일 것이다.
42사단, 93사단, 1사단이 각기 ∧ 자를 이루어 돌파에 성공하면 지금 제리들이 꾸미고 있을 원대한 역공 시나리오는 한낱 코미디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가 아는 후배는 가장 합리적으로, 가장 완벽하게 제리의 방어선을 도려낼 수 있는 ‘공격정신 왕성한’ 인물이었고.
그놈의 공격정신 타령.
거기에 생각이 미친 맥아더는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차라리 프랑스군이랑 같이 싸울 때가 훨씬 속 편했다. 이 뫼즈-아르곤 전투가 시작된 이래, 윗선이 얼마나 대가리가 딱딱하게 굳었는지 알게 된 맥아더는 치가 다 떨릴 지경이었다.
그는 전훈 연구 사례집이랍시고 쇼몽에서 나눠준 팸플릿을 보고 경악했었다.
[일선 지휘관들이 적 기관총좌를 너무 두려워한다. 이는 곧 사상자가 발생하는 것을 지나치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합중국의 지휘관이라면 아군 포격만 기다리지 말고, 보병의 소총 화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더욱 진격해 나가야 한다. 기동과 공세야말로 대부분 옳다.]시대가 언젯적 시대인데 아직도 이딴 미친 소릴 하고 있단 말인가.
저 ‘가르침’을 충실히 받아들여 그 잘난 볼트액션 소총으로 기관총 토치카에 들이댔던 부대는 거의 대부분 녹아내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상급부대의 포격을 기다린 후 달려간 부대는 적이 넝마가 될 정도로 충분한 화력 지원을 받지 못해 팔팔하게 살아있는 기관총에 맞고 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런 꼬락서니를 빤히 보고 장병들의 생목숨을 아끼던 지휘관들은 대부분 ‘공격정신이 부족’하다며 해임당했다.
그럴 바엔 그냥 나도 시체 포대에 들어가고 말지.
맥아더는 솟구치는 짜증을 애써 억누르며 말했다.
“이번 공격엔 내가 선두에 서겠네.”
“미치셨습니까?”
“전에도 그러다가 가스 한번 들이켜지 않으셨습니까. 자제하시지요.”
“병사들에겐 내가 필요해. 천날만날 포격만 떨어지면 뚝뚝 끊어지는 전화통만 붙들고 있다간 우리 애들 다 죽고 난 뒤에야 명령을 내릴 수 있겠지. 내가 직접 가겠네.”
그렇게 주변의 우려를 싹 무시한 채 그는 다시 자신의 차량에 탑승했다.
“와아아아아!!”
“맥아더! 맥아더!!”
철모 대신 45도로 비스듬히 쓴 모자.
멋지게 둘러멘 짙은 보랏빛 목도리.
도금되어 금빛 번쩍이는 담뱃갑과 입에 꽉 문 파이프.
군복 대신 웨스트포인트 야구팀 스웨터, 승마 바지와 장화. 손에는 권총 대신 말채찍까지.
온몸으로 군인 정신에 뻐큐를 날리는 듯한 이 젊은 여단장을 보며 병사들은 언제나 그랬듯 열렬히 환호했다.
“168연대! 나의 자랑스러운 연대여!”
“맥아더! 맥아더! 맥아더!”
“그래! 우리 아버지도 맥아더도 나도 맥아더지! 아버지가 그대들과 함께 필리핀에서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웠듯, 나 역시 그대들에게 내 목숨을 맡기겠다! 준비됐나, 전우들이여?!”
“YES, SIR!”
“가자! 우리야말로 최고의 부대, 합중국을 상징하는 부대라는 걸 제리놈들에게 알려주자!”
3일간 42사단이 벌인 대혈투의 종막.
이날 맥아더와 84여단은 마침내 고지를 함락시켰다.
맥아더는 인생 두 번째로 독가스에 중독되었으며, 42사단은 3일간 3천 명의 전사통지서를 작성해야 했고 세 명의 명예 훈장 수훈자를 얻었다.
피와 시체로 포장된 스당행 도로가 마침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