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121
제 121화
45장. 무혈입성 – 2화
밤새 짙게 끼었던 먹구름이 걷히고, 틈새를 비집고 나온 햇살이 세상을 따사롭게 비출 즈음.
게니츠가 돌아왔다.
그의 뒤에는 자레드가 호위로 붙인, 올라가 함께하고 있었다.
자레드가 직접 파일럿으로 참여하지 않을 때는 외형을 좀 더 여성화 시키는데, 그 때문인지 멀리서 보면 정말 여자처럼 느껴졌다.
“오!”
다가오는 게니츠의 옆에 있는 사람의 이름을 확인한 자레드가 탄성을 터뜨렸다.
루크였다.
게니츠처럼 말루스 왕국의 해안 도시 프라시노의 전반을 담당하고 있는 사령관이자 제독이었다.
“아앗, 영주님!”
“정말 못 말린다니까.”
가신들이 말릴 새도 없이 자레드가 한달음에 루크를 향해 달려갔다.
달리던 와중에 신발도 한 짝 벗겨졌지만, 자레드는 신경도 쓰지 않고 맨발로 루크를 반겼다.
“루크 제독! 어서 오세요!”
과연 게니츠의 40년 지기라는 말이 걸맞을 정도로 루크의 성격은 게니츠와 비슷했다.
올곧고, 예의를 무섭게 차렸다.
자레드가 두 손을 잡고 반갑게 자신을 맞이하자, 루크는 즉시 무릎을 꿇으며 정중히 예를 올렸다.
“루크, 새로운 주군이 되실 영주님께 인사드립니다.”
“아…… 주군이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차오르는 말이군. 일어나세요. 두 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독의 인장과 프라시노의 모든 정보가 담긴 지도와 정리본을 드립니다. 게니츠에게도 약속해 주셨듯, 부디 부하와 백성들에게도 온정을 베풀어 주십시오.”
“당연히 그래야지요. 모든 이들 앞에서 직접, 약속할 것입니다.”
자레드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크는 다시 한번 허리를 숙이며, 재차 당부를 전했다.
“프라시노의 모든 병사들을 포함한 제 가족의 터전은 이곳입니다. 더 이상 왕국의 말도 안 되는 차별과 모함, 공작에 놀아나지 않도록…… 소중한 터전을 지켜 주시고 해군에 힘을 실어 주십시오.”
“재차 약속하겠습니다. 같은 비극과 슬픔을 절대 반복하지 않게 하겠노라고. 라디우스 신 앞에서 내 심장을 걸고 맹세하지요.”
자레드는 반갑게 게니츠와 루크의 손을 맞잡았다.
사실 루크에 대해서는 게니츠만큼은 잘 알지 못했다. 그는 에서는 등장한 적이 없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짧은 스토리로도 전혀 나온 적이 없는 인물이었는데, 아마도 그전에 숙청당했거나 자연사했을 가능성이 커 보였다.
하지만 게니츠의 친구라는 것만으로 가치 검증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영웅은 영웅을 가까이 두고, 악당은 악당을 가까이 두는 법이다.
게니츠 같은 유능한 무장이면, 응당 그런 지기지우(知己之友)를 곁에 뒀을 것이다.
무혈입성.
그렇게 자레드는 말루스 왕국의 일부 영토까지 손쉽게 손에 넣었다.
자신의 공언이 말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즉시 영지 내의 기술자를 대거 소집했다.
재정은 더할 나위 없이 충분했기에, 오래된 함선들을 꼼꼼히 수리를 시작하도록 지시했다.
아울러 크리비아 대영지에 편입된 두 도시에 대해서 향후 일 년간, 세금 50%를 감면하는 특별 명령을 내렸다.
그다음.
나오미 그레이스를 만나러 가기에 앞서, 자레드는 급히 군사 회의를 열었다.
이후 영지군의 진격 여부를 놓고 가신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리고 있는 탓이었다.
* * *
“지금만큼 절호의 기회는 없다고 봅니다. 영주님, 이참에 병력을 더 빠르게 진군시켜서 인근 도시까지 모조리 장악해야 합니다.”
“하루 만에 두 도시를 손에 넣었어요.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어요? 켈디아라는 세대를 앞선 금속까지 선점한 판국에 무서울 게 없죠!”
엘라를 비롯한 아그레시오 기사단 소속의 가신들은 추가 진격에 목소리를 높였고.
“저도 진격에는 동의하나, 며칠 정도의 기반 다지기는 필요합니다. 게니츠와 루크의 진심과 관계없이, 그들의 동향을 살필 필요도 있습니다.”
“저도 라키스 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신중해야 합니다.”
라키스를 비롯한 영지군 소속의 가신들은 한차례 정비에 힘을 실었다.
양쪽 다 일리가 있는 의견이었기에 나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발전적인 논의는 언제든 좋다.
의견의 대립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정답에 가깝게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이므로, 나는 건전한 토론이라 생각했다.
단, 결론이 올바르게 나오려면 이를 듣고 받아들일 리더의 자질이 매우 중요하다.
지금 그 역할을 할 사람이 바로 나이기도 하고.
“선전포고도 받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도시 하나를 잃은 마당이오. 아무리 두 왕국의 국왕이 멍청하다고 해도, 손 놓고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오.”
나는 미래를 얼추 예상했다.
설령 국왕이 아무 생각이 없다고 하더라도, 군 장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상대는 제국도 왕국도 아닌 영지의 군대다. 무척 자존심이 상해 있을 것은 틀림없었다.
“확신하오. 반드시 그들은 병력을 움직일 것이오. 기습으로 본때를 보여 주겠다며 이를 갈고 오겠지. 하지만 핵심 전력이 모두 오진 않을 것이오. 왜냐? 뒤로도, 옆으로도 그들의 적국이 있으니까.”
렌투스 제국과 신데르스 왕국은 두 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사실상의 적국이다.
그들은 내가 일으킨 전쟁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지지 의사를 밝힐 테니 더욱 경계할 수밖에.
한데 그 상황에서 무턱대고 변방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한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신데르스 왕국은 마음 놓고 국경을 넘어 공격을 개시해도 된다.
그만큼 두 왕국의 옆구리가 허전하게 빌 테니 말이다.
난 확신한다.
보누스, 말루스 왕국의 국왕 모두 선택의 딜레마에 빠져 이도 저도 아닌 선택을 할 것이라고.
작정하고 우리가 방어전을 치른다면, 절대 그들은 방어선을 넘어올 수 없다.
수많은 자레드 지뢰가 매설된 견고한 방어선을 인해전술로 뛰어넘을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바로 그때.
“보고 드립니다!”
막사 밖에서 정찰병 하나가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말하라.”
“보누스 왕국군이 중북부의 병력을 급히 소집하여, 진군을 시작했습니다!”
“규모는?”
“4만입니다. 왕도에서 급파된 일부 마법사단과 기사단이 합류했으나, 수는 이백에 불과합니다!”
“보누스 기사단장이나 마법사단장이 직접 움직였느냐?”
“아닙니다. 부단장급의 인사입니다.”
“카슨과 센트인가. 역시 핵심은 안 보내는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라키스가 감탄하며 말했다.
“역시 영주님은 그들의 수를 내다보고 계셨군요!”
엘라도 놀란 반응을 보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수가 충분히 예측이 되는 건가요?”
“원래 수 싸움이라는 게 똑똑한 쪽이 좀 더 유리한 법이라.”
나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내가 엄청 똑똑하다는 말은 아니고, 그만큼 국왕이 멍청하다는 말을 돌려서 한 셈이었다.
애초에 도시를 탈환할 의지 자체가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왕국의 영토를 잃고도 가만히 있는 것은 앞뒤가 안 맞으니, 대응하는 시늉이라도 하는 거겠지. 쉽게 말해서 남에게 보이기 위한 쇼란 얘기다.
“보고 드립니다!”
연이어 정찰병이 달려왔다.
이번에는 말루스 왕국 쪽에 보냈던 정찰병이었다.
“말하라.”
“말루스 왕국군 3만이 진군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북진하는 도중에 방향을 틀어, 애매하게 동진(東進) 중입니다!”
“동쪽이라면 신데르스 왕국 쪽이 아니냐?”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신데르스 왕국군 일부가 모습을 드러낸 모양입니다!”
‘이즈엘, 날 도와주는 거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직접 논의하지는 않았지만, 이건 누가 봐도 이즈엘이 날 도와주는 모양새였다.
이것이 내가 예전부터 원하던 우리 영지와 신데르스 왕국의 시너지효과라는 것이다.
서로 마음만 맞는다면, 전략적으로 적국에게 심리전을 걸 수 있는 요소가 대폭 늘어난다.
그 효과를 지금 톡톡히 보고 있었다.
두 왕국의 대응에 엇박자가 생기면, 그만큼 내 입장에서는 대응하기 좋다.
대규모 전면전보다는 각개격파가 훨씬 피해를 최소화하기에 좋고.
나는 즉시 명령했다.
“확보한 두 도시의 외곽 지대에 전진 기지를 구축하고, 산 능선을 따라 방어선을 짤 것이오. 주요 이동 경로에는 자레드 지뢰를 설치한 뒤, 부설도를 그려 제출하도록 하시오. 방어전을 준비하겠소.”
“예! 명 받들겠습니다!”
빠른 의견의 일치가 이뤄졌다.
그만큼 모두가 내 안목과 판단을 믿었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른 의견을 냈던 엘라도 바로 수긍을 하고는 반대 의견을 내지 않았다.
방어전 준비가 시작됐다.
* * *
준비는 분주하게 계속됐다.
갑자기 축지법이라도 쓰지 않는 이상, 당장 전투가 벌어질 일은 없기에.
나는 정말 엎어지면 코 닿을 가까운 거리에 있는 나오미를 즉시 찾아가기로 했다.
혹시라도 지금보다 더 늦은 시기에 그녀를 만나러 가면, 아예 만나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물론 마법계의 파벌 싸움에서 비주류로 밀려난 그녀가 일선에 복귀하는 것은 쉽지 않을 터.
하지만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면 왕국에서 직접 손을 뻗을 가능성도 있는 만큼, 서둘러 그녀까지 얻고 싶었다.
‘나오미만 있다면, 디미오스 마법사단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빠르게 성장할 거고, 영지의 핵심이 될 전력으로 자리 잡게 될 거야.’
나는 타넥스를 착용하고 움직일까 하다가, 이내 생각을 접었다.
지금은 초월체를 전투용보다는 전방 정찰 및 경계용으로 쓰는 것이 좋아 보였다.
타넥스가 없어도, 내 전투 능력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타넥스를 이용해서 전방 경계를 확실히 해 두면, 만약에라도 생길 수 있는 변수 차단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방어전은 착실히 준비 중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게다가 지시할 것도 모두 지시해 두었고.
파아아앗!
바로 결심을 한 나는 하늘 높이 날아올라서는 남쪽으로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나오미 그레이스.
그녀를 만나야 할 시간이다.
* * *
쏴아아아아.
리라키가 크리비아 영지군에게 함락되었다는 갑작스러운 소식처럼, 뜻하지 않게 찾아온 먹구름이 장대비를 쏟아 냈다.
탁!
나오미가 조용히 읽던 마법서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끼익. 끼익. 끼익.
‘나오미 아카데미’라는 이름이 적힌 현판(懸板)이 비바람에 볼썽사납게 흔들리고 있었다.
달리 재물 욕심도 내지 않았던 데다가, 아카데미도 무상으로 운영했기에 수리비를 마련할 돈이 없었던 탓이다.
“음…….”
빗줄기가 거칠게 들이치고 있는 깨진 창문을 바라보며, 나오미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 땅에서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국왕 말자리스 8세의 폭정을 두고 거침없이 직언을 했다가 왕명에 의해 변방으로 쫓겨난 이후, 그녀는 말도 안 되는 일에 휘말렸다.
그녀를 시기하고 질투하던 신하들이 없는 사실을 만들어 내어, 모함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졸지에 그녀는 하지도 않은 불륜과 뇌물 수수 따위를 했다는 스캔들에 휘말려 주홍 글씨가 찍혔고, 그것은 지금까지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 되어 있었다.
마법사의 명예도, 자부심도, 재물도 모두 잃었다.
왕국의 어두운 미래를 예전부터 걱정해 왔지만, 애석하게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바로 그때.
지이이잉!
몸에서 일정량 이상의 마나를 뿜어내는 마법사가 있다면 반드시 울리도록 설계해 둔 알람 마법진.
그것이 격렬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방향은 북쪽.
그렇다면 크리비아 영지군에게 함락된 영토에서 온 마법사일 가능성이 컸다.
“자레드인가?”
까득.
그녀가 이를 갈았다.
가뜩이나 비바람이 부는 날.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날씨라서 마음도 예민해져 있던 차다.
차라리 잘됐지 싶었다.
마침 울적하고 심통이 잔뜩 난 멍든 가슴을 달랠 시원한 샌드백이 필요했는데!
알아서 희생양이 될 놈이 죽을 자리를 찾아와 준 느낌이었다.
위이이잉!
이내 그녀의 몸은 아카데미에서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는 상공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보인다.’
나오미는 볼 수 있었다.
자신의 등장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열심히 남하하고 있는 자레드의 뒷모습을 말이다.
쿠아아아아…….
아주 조용히, 그리고 은밀하게.
나오미가 양손을 합친 뒤, 6클래스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쿠아 스톰(Aqua Storm).
그녀의 장기인 물의 힘을 거친 비바람을 빌려서 마음껏 부릴!
일격필살 노림수의 장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