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127
제 127화
48장. 롱 리브 더 킹 – 2화
“뭘 이렇게 돌려서 말해. 결혼하고 싶다, 이런 얘기 아니야?”
“너무 그렇게 간단명료하게 정리를 해 버리시면…….”
“미안하지만 난 우리 영지와 결혼한 몸이라서 말이야! 헤이즈, 우리는 지금처럼 잘 지내자. 어때?”
“좋아요! 저는 지금 이대로도 좋아요! 정말이에요! 절대 서운하거나 삐지거나 그런 거 아녜요!”
“이유가 자세하게 붙는 것이 왠지 그런 것 같은데?”
“아니에요! 오늘 제게 선물로 주신 반지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열심히 훈련에 매진할 겁니다!”
“항상 고맙다.”
나는 헤이즈의 어깨를 무심히 툭툭 쳐 주었다.
“히힛.”
그래도 헤이즈는 싱글벙글했다.
나는 그녀가 진심으로 슬퍼 우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예전의 자레드’가 망나니짓을 일삼을 때는 무척 많이 울었다는데, 그것도 직접 본 적은 없다.
그래서 종종 걱정은 됐다.
늘 기쁘고 행복한 사람은 없다. 그런 ‘척’을 하는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나는 때때로 어두운 일면을 보이는 이자벨이나 항상 시크한 느낌의 클로이와 달리, 늘 웃고 있는 헤이즈가 더 걱정됐다.
의외로 그녀 같은 스타일이 한번 심적으로 크게 무너지면, 회복하기 힘든 타입이기도 하니까.
생각해 보니 헤이즈의 스탯을 본 지가 꽤 됐다.
심안으로 그녀를 스캔했다.
[헤이즈 – Lv. 158] [근력 : 43][체력 : 61] [마력 : 250][지혜 : 113] [민첩 : 48][매력 : 51] [물방 : 31][마방 : 85] [신성력 : 753] [특수 성향 : 헌신 SS / 치유술 S / 외사랑 S / 응원 S / 요리의 달인 A / 거룩한 희생 B / 과민 B] [일반 성향 : 안정, 평안] [아티팩트 ‘화이트 네클리스’를 보유 중입니다.] [아티팩트 ‘디바인 링’을 보유 중입니다.]‘화이트 네클리스의 신성력 3배 증폭 효과가 확실히 크네. 가파지스 레이드가 내게도 그렇고, 헤이즈에게도 정말 의미가 컸어!’
헤이즈의 성장은 눈부셨다.
물론 그녀로 하여금 롤 모델로 삼게 한 치유사 메디네에는 아직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치유사 메디네는 특수 성향이 헌신 SSS, 응원 SS, 거룩한 희생 A 등으로 헤이즈보다 한 단계씩 높은 위치에 있는 네임드였다.
‘그래도 예전에 비해서 헌신이나 응원이 한 단계씩 올랐고, 거룩한 희생은 새롭게 생겼어. 나름대로의 깨달음을 얻은 거지.’
특수 성향이 풍년이었다.
물론 한 가지 특이점도 있었다.
외사랑 S.
예전에는 A등급 판정이었는데, S로 한 단계 올랐다는 것은 짝사랑의 기간이 전보다 늘어났다는 뜻.
‘이러다가 설마 나중에 갑자기 흑화하는 건 아니겠지?’
문득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듯해서 잠시 움찔했다.
아니다. 절대 헤이즈는 그런 파국을 만들어 낼 사람이 아니다.
‘조만간 디바인 포는 어렵지 않게 달성하겠어. 2년 만에 디바인 포(Divine Four)의 치유사! 헤이즈도 보통 재능은 아니네.’
나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마법사로 따지면 아무것도 없던 무(無)에서 4클래스가 된 셈이었으니까. 무척 빠른 성장인 것이다.
‘A급 치유사의 능력은 돼.’
신성력이 700에서 1,000 사이쯤 되면 보통 A급 치유사의 스탯으로 불린다.
헤이즈는 현재 753.
이 정도면 성취는 충분하다.
화이트 네클리스만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그녀는 우리 영지의 든든한 치유사로서 언제든 활약할 수 있을 것이다.
헤이즈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에메랄드빛의 머리가 늘 볼 때마다 매력적이다.
가끔 나는 내 머리를 의심한다.
이렇게 예쁘고 착한 여자가 내 하녀로, 그것도 늘 나만 바라봐 주는 사람으로 있는 것이 현실인가 하고.
“헤이즈.”
“네?”
“고맙다.”
헤이즈를 껴안아 주려다가, 흠칫하고는 그녀와 악수를 나눴다.
“영주님…….”
“간다. 월례 회의가 있는 날이야.”
그렇게 그녀를 봄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오는 산책길 위에 둔 채, 나는 회의장으로 향했다.
* * *
회의는 빠르게 진행됐다.
가장 중요했던 새 영토에 대한 보고를 꼼꼼히 받았고, 문제없이 자리 잡았음을 확인했다.
게니츠와 루크에게 약속한 대로 크리비아 해군의 육성을 위한 공격적인 투자가 진행됐다.
앞으로 보누스, 말루스 왕국에서 받게 될 공물과 재화들은 모두 해군에 투자하기로 결정됐다.
이의 없는 만장일치의 결정이었다. 모두가 해군의 필요성에 적극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으로 중요했던 안건은 바로 교황 아르모니아 17세의 사나레 성지 방문 건이었다.
이 부분은 전에 대신관 네오드에게 부탁해 세부 조율은 율리안과 협의해 진행하도록 했었다.
그리고 오늘 결정된 최종 방문일을 들었는데, 3월 14일이었다.
방문하는 루트와 인원, 사절단 구성은 전부 비밀이라고 했다.
딱 한 가지 확정된 것은 교황이 온다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늘 그랬듯이 많은 안건과 보고가 월례 회의에서 나왔고, 나는 경청하며 내용을 정리했다.
발전적인 토론을 즐겼고, 다소 논쟁이 과열되더라도 적당히 조율하며 최고의 결론을 도출했다.
우리 영지는 다른 곳과 달리 나부터 상하 관계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 터라 표현이 자유로웠다.
그래서 가신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의 의견을 개진해 나갔다.
사소한 의견의 충돌은 있을지언정, 그것이 감정의 골이 깊어지며 격화되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렇게 평소보다 길었던 영지의 월례 회의를 마치고, 내가 폐회를 선언하려던 그때.
“영주님! 신 오브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브렌이 나섰다.
영지에서 가장 고령의 가신.
하지만 그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노익장의 산증인이기도 했다.
“말씀해 보세요.”
“저희 가신들 모두가 만장일치로 뜻을 모은 의견이 있습니다. 영주님에게 간곡히 청할 것이 있사오니, 부디 들어주십시오!”
“갑자기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방금 전까지 웃음기 가득한 모습을 보이던 가신들은 온데간데없고, 입을 굳게 다물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주 탄핵입니까? 하하하.”
내가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너무 분위기가 가라앉은 탓에 나름대로 반전을 주기 위해 던진 농담이었다.
하지만 오브렌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내 농담이 민망하게 느껴질 정도의 엄청난 내용이었다.
“저희 가신들과 크리비아 대영지의 모든 백성들에게! 하나의 태양으로 우뚝 솟으신 명군을 모실 수 있는 영광을 주십시오!”
“잠깐.”
손을 뻗었다.
뭔가 폭탄선언이 시원하게 나온 것 같아, 잠시 말의 호흡을 끊으려는 제스처였다.
하지만 오히려 이것이 도화선이 되었는지, 가신들이 모두 고개를 조아리며 외쳤다.
엘라, 라키스, 율리안, 발데스 할 것 없이 모두가 정말 일치단결하여 외치는 함성이었다.
“부디 왕위에 올라 대륙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 주십시오!”
“공작 각하를 이제는 감히 대왕 폐하라고 외치고 싶은, 신들의 꿈을 받아들여 주십시오!”
“간청 드립니다!”
“왕이라…….”
놀랐다. 그것도 많이.
왕의 자리가 싫어서 놀란 것은 아니었다.
가신들이 나도 모르는 새에 뜻을 하나로 모아 통일된 의견을 냈다는 것이 너무 신기해서였다.
분명 공작과 왕은 다르다.
대영지와 왕국이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기분도 매우 다르고.
왕이 되면, 가신들에게 왕의 이름으로 그들의 가치에 합당한 작위를 수여할 수 있다.
공작의 이름으로 행하는 수여와는 받아들이는 가신의 책임과 무게감이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군왕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늘 했었지. 에서도 최상위의 선택된 플레이어들에게만 주어진 엄청난 영광이었으니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왕이라니.
전생에서는 그저 말단 사원에 불과했던 내가 현생에서는 왕좌를 넘보는 자리에 있었다.
‘어쩌면 진(眞) 주인공의 후보들 중에는 왕이나 황제가 된 경우도 충분히 있겠지. 그러니 내가 왕이 된다고 해도, 남에 비해 앞서 나가는 것은 절대 아냐.’
냉정하게 생각했다.
왕이 끝이 아니다.
왕국도 그 크기와 위세에 따라 힘의 우열이 존재한다.
보누스 왕국이나 말루스 왕국처럼 주변 국가의 눈치를 보면서, 하루하루 마음을 졸이며 사는 왕도 있다.
나아가 황제라면 얘기는 더욱 달라진다.
대륙에 다섯밖에 없는 황제 중 하나로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는 것은 물론이고, 수많은 적국의 견제도 받는다.
그것은 어떤 한 나라가 독주하는 모습을 절대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는, 작금의 나스 대륙의 현실이었다.
‘내가 왕이 되어야 내 가신들에게도 그만큼의 지위와 명예를 내려줄 수 있어. 공작을 모시는 것과 왕을 모시는 것은 그 품격과 가치가 다르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가신들이 충동적으로 낸 의견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특히 오브렌은 생각이 깊은 사람이다. 분위기에 휩쓸려 의견을 낼 사람은 절대 아니다.
그는 비록 단순 스탯 평가 가치로 놓고 보면 B급에도 모자람이 있는 가신이지만, 경험과 노련함은 분명 S급 이상이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십시오!”
“저희의 하나 된 마음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 주소서!”
“공작 각하! 살펴 주십시오!”
연이은 가신들의 외침이 내 가슴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원하고, 가신들도 원하는 마당에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물론 왕이 된다는 것에 무조건 빛만 따르는 것은 아니다.
내가 왕이 된 것을 질투하거나 시기하는 다른 누군가의 견제, 어둠의 일면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어둠을 감수하더라도!
왕으로서 백성과 가신들에게 베풀 수 있는 혜택이 더 많다고 생각했다.
“칭왕이라……. 내가 과연 그럴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부디 성군(聖君)이 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바쳐 노력하도록 하겠소. 절대 부끄럼 없이.”
“대왕 폐하!”
“크리비아의 왕이시여!”
“대왕 만세!”
바로 그때.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칭호가 상태창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데 보이는 화면이 달랐다.
보통 나타나는 화면.
그러니까 투명한 하늘빛 배경에 반짝이는 흰 글자가 새겨진 상태창이 아니었다.
‘황금 칭호?’
금빛 배경에 검은 글자가 음각으로 깊게 새겨진 칭호였다.
칭호도 특수 성향 등급처럼 F등급의 칭호에서 SSS등급의 칭호까지 존재한다.
황금 칭호는 최소 S등급 이상의 칭호를 뜻하는 것으로, 얻기 힘든 칭호를 얻을 때 출력되는 형태였다.
“…….”
늘 무덤덤하게 칭호를 바라봤었던 내 표정이 처음으로 변했다.
놀라웠다!
에서 황금 칭호를 보는 일은 정말로 흔치 않았던 경험 중 하나였다.
드래곤을 최초로 사냥한 슬레이어라든가, 대륙을 통일한 대제국의 황제라든가…… 하는 정말 독보적인 업적을 세울 때만 나타나는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후.”
뜨거운 숨을 토해 낸 나는 조심스럽게 상태창에서 반짝이고 있는 칭호를 눌렀다.
아직은 미확인 상태.
하지만 손길이 닿자,
글자 위를 가리고 있던 검은 칠이 사라지며, 이내 칭호의 내용이 보란 듯이 모습을 드러냈다.
[Long live the king!]대왕 만세!
치열하게 살아온 나의 현생!
그리고 앞으로 더 화려해질 인생 제2막을 알리는 기분 좋은 칭호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