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126
제 126화
48장. 롱 리브 더 킹 – 1화
나스 대륙력 1416년 2월 14일.
본래대로면 크리비아 대영지의 월례 회의는 늘 말일에 열리지만, 이번에는 시기가 당겨졌다.
리라키, 프라시노, 밀라니아, 아르노.
이렇게 네 개의 해안 도시를 점령하고, 두 왕국과 강화조약을 체결하면서 영지의 위세가 수직 상승했기 때문이다.
더욱 이슈가 된 것은 자세하게 ‘까발려진’ 조약의 내용이었다.
누가 봐도 보누스 왕국과 말루스 왕국에 손가락질을 할 정도로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조약에서 자레드가 지킬 의무는 조약의 휴전 또는 정전의 의무에 충실할 것밖에는 없었다.
반면에 두 왕국은 크리비아 영지에 화친의 의미로 공물을 바치는 것은 물론이고, 양국의 평화 무드 조성이라는 명분 아래 잉여 자원과 곡물을 구매해야 했다.
조약서에 매월 정해진 금액만큼의 곡물과 자원을 반드시 구매해야만 하는 강제 조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새가 찍힌 것은 자레드와 영지군이 보여 준 켈디아 무기의 위용 때문이었다.
두 왕국의 공포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척 컸다.
생환한 병사들의 생생한 증언은 두려움을 더욱 부채질했다.
다섯 합을 채 겨루지 못하고 박살이 나 버린 철검의 흔적들은 증언에 신빙성을 더했다.
당장에 호시탐탐 렌투스 제국과 신데르스 왕국이 옆과 뒤를 노릴 것 같은, 기분 나쁜 상황이었다.
지레 겁을 집어먹고, 제대로 된 사리 판단을 할 수 없었던 양국의 국왕은 ‘시원하게’ 도장을 찍어 버렸다.
까짓것 ‘앞으로 다시 실수하지 않으면 되지’라는 안일한 생각은 물론이고.
공물로 사라질 재물의 결손은 백성들로부터 짜내어 벌충하겠다는 악랄한 계산이 뒷받침된 결론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두 왕국은 그렇게 희대의 부끄러운 불평등조약을 맺고는 전쟁을 서둘러 매듭지어 버렸다.
난민 버리기 사태로 말미암아 백성도, 민심도, 도시도, 해군도, 함대도 모두 잃은 최악의 결과물이었다.
* * *
“회의는 저녁 6시인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브렌 경께서 별도로 서신을 보내 주셔서 이리 일찍 오게 되었군요.”
“저도 그렇습니다.”
회의장에는 가신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들의 말대로 오브렌의 서신에 따라, 모두가 예정보다 이른 시간에 모인 상태였다.
오브렌, 아빌라, 율리안, 발데스, 라키스, 엘라를 비롯한 휘하의 가신들이 다수 참여했다.
다만 이번 전쟁으로 새로이 합류한 두 제독은 현지 정비에 집중하도록 자레드가 참여를 말렸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합류한 나오미의 경우에는 본인이 불참 의사를 밝혔다.
원치 않아서는 아니었다.
다만 아직 월례 회의에 정식으로 참여할 만큼 다른 가신들의 신임을 받지 못했다는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양해를 구하고 불참한 것이다.
현재 그녀는 디미오스 마법사단에 소속된 마법사들을 하나하나 면담하며, 그들에 대한 상세한 프로필을 작성하는 중이었다.
자레드가 원했던 모습이자, 프로페셔널한 그녀에게 기본으로 탑재되어 있는 본모습이기도 했다.
한편 모두 빠짐없이 모인 것을 확인한 오브렌이 운을 뗐다.
“우선 일찍 자리를 채워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드리오. 이 늙은이가 주제넘게 나서게 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소이다.”
오브렌의 굽은 허리에서 칠순이 넘은 나이의 무게가 느껴졌다.
하지만 목소리만큼은 젊은이처럼, 장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오브렌 님의 고견을 들려주세요. 모두가 말씀을 기다리고 있어요.”
엘라가 오브렌의 말을 받았다.
그녀는 분명 한 성격 하는, 직설적이고 외향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웃어른에게는 깍듯했고, 늘 예의를 갖췄다.
그래서 오브렌과 아빌라는 그런 엘라를 바른생활 여기사라며, 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영주님이 오시기 전에 모두의 의견을 한데 모아 결론을 낼 필요가 있다고 여겨서 말이오.”
“……?”
엘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율리안이나 발데스는 오브렌의 속내를 짐작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촤륵!
오브렌이 일찌감치 준비해 와서 고정시켜 뒀던 지도를 펼쳤다.
나스 대륙의 북부 지도였다.
“사실 신데르스 왕국 내전에 개입할 때만 해도, 우리 영지는 크지 않았소. 이제 막 대영지를 꿈꿔 볼 수 있는 수준이었지.”
“그랬지요. 정말 그러했습니다.”
라키스가 맞장구를 쳤다.
영지의 변천사를 알고 있고, 직접 전장에서 자레드와 함께한 라키스이기에 감회가 더 새로웠다.
“하지만 황무지나 다름없던 사나레 지역이 본격적으로 개발이 이뤄지면서 영지의 규모가 급성장했소이다. 게다가 성지까지 되면서 개발에 급물살을 탔고.”
“맞습니다.”
“다들 무척 고생했지. 기존의 영지민만큼에 해당하는 인원이 유입되었으니, 사실 거기서 난민들의 봉기가 일어나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소.”
“모두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지만 기적은 현실이 되었지. 사나레 성지는 난민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영주님의 업적으로서 사람들의 입에 쉴 새 없이 오르내리고 있소.”
“크리비아 만세!”
발데스가 거수경례(擧手敬禮)를 하며, 자신만의 방법으로 자레드와 영지를 향해 경의를 표했다.
오브렌도 감격에 찬 듯, 발데스의 거수경례를 따라 하고는 말을 이어 갔다.
“사실 이 시점부터 우리 영지는 대영지라는 이름으로 담기에는 너무 큰물이 되어 버렸소. 그리고 이번 대첩(大捷)으로 말미암아 영지의 규모가 더욱 커졌소. 자, 지도를 봅시다.”
오브렌이 지시봉을 이용해 지도를 가리켰다.
크리비아 영지의 영토는 푸른색이 칠해져 있었고, 인접한 신데르스 왕국은 녹색이었다.
“영토의 규모를 보면, 이제 신데르스 왕국에 비교해도 꿀릴 것이 없는 규모가 됐소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설마 왕국으로 선포하고 독자 세력으로서의 발걸음을?”
가신 중 누군가가 말했다.
어쩌다 보니 대표하듯이 말하게 되긴 했지만, 사실 대다수의 생각이 그러했다.
오브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자레드 공작 각하를 왕으로 추대하고, 당당한 독자 세력으로서 이번 기회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요!”
묵묵히 오브렌의 얘기를 듣던 아빌라가 바로 의견을 보탰다.
망설임이 없는 것으로 봐서는 오래된 생각을 털어놓는 듯했다.
“2년 전, 공작 각하께서 본격적으로 영지 관리를 시작한 이후로 우리 영지는 눈부시게 달라졌습니다. 대격변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말입니다.”
모두가 수긍했다.
이의를 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든 영지민이 자레드 공작 각하를 찬양하며 칭송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하늘이 내린 구원자라며, 몰래 신사를 지어 모시는 자들도 있다고 하더이다.”
“사실 이런 표현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공작 각하에게는 ‘신’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하늘이 내린 왕재(王才)임은 확실합니다.”
라키스가 의견을 보탰다.
군에서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는 그의 발언은 가신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발언에 적극 찬동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오브렌이 다시 말을 이었다.
“자레드 지뢰, 마정석 조명등, 영상 장치, 마스터 포션, 로넬라 병 치료제……. 업적을 나열하자면 정말 한도 끝도 없소. 이런 분이 왕이 되지 않으면 누가 왕이 되어야 한단 말이오? 보누스 왕국과 말루스 왕국을 보시오. 수준 미달의 작자가 왕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국왕 노릇을 하고 있소이다. 참으로 같잖지 않느냔 말이오!”
“옳습니다!”
분위기가 빠르게 고조됐다.
사실 모두의 생각은 같았다.
단지 계기를 만들 기회가 없었는데, 오브렌이 총대를 메고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공작 각하께서 본인의 입으로 칭왕을 하시게 하는 것은 가신으로서 부끄러운 일이오. 그러니 우리의 의견을 하나로 모아 공작 각하를 왕으로 추대합시다. 어떻소? 이 늙은이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자신 있게 말씀해 보시오!”
“적극 찬성합니다!”
“크리비아를 위하여! 자레드 공작 각하를 위하여!”
오브렌의 외침에 고개를 젓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유일하게 표정이 떨떠름한 사람은 엘라 한 사람뿐이었다.
그것도 오브렌의 뜻에 반대해서가 아니라, 이런 분위기가 처음이라 어색했던 탓이었다.
그간 대륙 전역을 유랑하며 떠도는 생활을 해 왔던 그녀다. 어딘가에 정착을 한 것은 이곳, 크리비아 영지가 처음이었다.
유랑 시절에 종종 만났던 인연이 서열도 알기 힘든 말단 ‘왕족’이었던 적은 있었지만.
‘왕’이 된 사람은 없었다.
자신과 가까이 연을 맺고 있는 사람이 국왕이 되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그 기분이 쉽게 상상되지 않아, 애매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영주님이 오시기 전까지 우리의 생각을 확실하게 통일하도록 합시다. 어떤 말이든 좋으니, 시원하게 의견을 개진해 보시오!”
오브렌이 목소리를 높였다.
월례 회의를 앞둔 사전 회의는 그렇게 자레드를 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열띤 논의의 장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 * *
그 시각.
헤이즈의 생일을 기념해서 조촐한 축하 식사의 자리를 가진 뒤.
나는 헤이즈와 함께 영주 성 주변을 산책하고 있었다.
마침 막 선물로 초콜릿 속에 디바인 링을 숨겨서 건네줬던 차였다.
다행히 초콜릿을 씹기 전에 발견해서, 이가 부러지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다.
“영주님, 맛있는 초콜릿을 선물해 주신 것만으로도 기쁜데…… 이런 반지까지 주실 줄 몰랐어요!”
“네게 잘 맞을 것 같더라. 신성력 반지야. 껴 보면 왜 내가 안 끼고 네게 줬는지 알 거야.”
“어디……. 와아! 순식간에 몸 전체에 신성력이 충만해지는 것이 느껴져요!”
“확실히 다르지?”
“네! 도대체 이런 반지를 어디서 얻으신 거예요?”
“뭐, 길 가다 주웠지.”
나는 능청스럽게 헤이즈의 말을 받아넘겼다.
“제가 이런 반지를 함부로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영주님.”
“생일이잖아. 생일 선물이라고 생각해 둬. 생일 축하해, 헤이즈.”
“영주님…….”
“늘 함께해 줘서 고마워. 내가 꼼꼼히 챙기지 못하는 이자벨이나 클로이, 미아와 레나까지도 네가 챙겨 줘서 정말 고마울 따름이다.”
“고맙긴요! 영주님의 영원한 하녀로서 제가 평생 해야 할 일인 걸요. 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
“평생…… 인가?”
“그렇죠! 한번 하녀는 영원한 하녀 아니겠어요?”
“헤이즈는 작위를 수여 받아 최상류 계층의 귀족이 되고 싶다거나 하는, 그런 욕심은 없어?”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돼요?”
“당연하지. 그럼 내 앞에서 거짓말할 거야?”
“아앗! 그건 아니에요!”
“말해 봐.”
“가끔 이런 상상을 해요! 조금, 아니, 사실은 많이 부끄럽지만!”
“부끄러우면 말 안 해도 되고.”
“앗!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이힝, 그러니까, 음, 어……. 저는요! 영주님의 곁에서 함께 잠들고, 함께 일어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