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149
제 149화
54장. 5대 성유물 – 1화
“20대 중반이면 결혼을 생각할 나이는 아니오. 아직까지는 생각해 본 바가 없소.”
대수롭지 않게 답하기는 했지만, 나는 순간적으로 내가 ‘전생’에 기준을 맞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
전생의 신태풍이 살았던 시대에는 30대 중반을 넘어서서 결혼을 하더라도 적령기의 결혼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결혼은 내게 아직 먼 일이라고 생각했다. 전생에 스물일곱이면 한창 연애를 즐길 나이이기 때문이다.
어쩌다 여건이 좋아 결혼을 하는 일이야 있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전생은 그렇다고 쳐도, 현생의 결혼관은 확실히 다르긴 달랐다.
필요하면 10대 중후반에도 결혼하는 경우가 많고, 늦어도 20대 중후반을 넘기지는 않았다.
하물며 나는 왕이다.
왕자와 같은 후사는 물론이거니와 왕실의 기본적인 기틀이 다져지길 바라는 신하들에게 ‘왕후’에 대한 얘기는 당연한 숙명과도 같았다.
“폐하, 하지만 왕후 폐하의 자리는 마냥 비워 둘 수 없는 자리이기에…….”
“일단 다음에 얘기합시다. 갑자기 피곤하군.”
나는 어색하게 하품을 하는 시늉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당분간은 일단 이렇게 빠져나가야지 싶었다.
“폐하, 송구하옵니다.”
“아니오. 좋은 얘기를 해 주었소. 내 깊이 고민해 볼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예, 폐하. 그럼 신은 이만 물러가 보겠사옵니다.”
“그리하시오. 가는 길에 나오미 단장을 좀 불러 주면 좋을 듯한데.”
“예, 폐하. 그리하겠습니다.”
라키스가 빠르게 물러갔다.
나는 나오미를 기다리는 동안 창밖을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왕후(王后).
이제는 정말 이 단어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시점이 되기는 했다.
문득 마이라가 떠올랐다.
사실 가장 이상적인 결혼은 마이라와 하는 것이기는 하다.
정략결혼이기는 하나, 신데르스 왕국과 그야말로 공고한 협력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 없는 결혼은 내가 원치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해도 살면서 삐걱거리는 판에 사랑 없는 결혼이라면…… 그야말로 지옥이겠지.
안면이 있는 마이라에 대한 생각이 그럴진대, 얼굴도 모르는 고위 귀족가의 영애 중에 후보를 뽑아 간택하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이건 논할 가치도 없다.
머릿속에서 많은 여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어쩌다 보니 내 곁에 있는 가신들 중 제법 많은 수가 여자다.
남자라고 생각했던 아키부터 시작해서 이자벨, 헤이즈, 클로이.
좀 더 넓게 보면 엘라와 나오미 등등……. 특히 헤이즈와 이자벨은 내게 수시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 왔으니, 더욱 생각이 날 수밖에 없고.
“아, 그냥 모태솔로로 살던 시절이 나았던 것 같다. 내 팔자에 무슨 결혼! 혼자 사는 게 편……!”
“폐하?”
“앗.”
지끈거리는 머릿속을 정돈하기 위해 큰 소리를 내지르고 있는데, 나오미가 도착했다.
“나중에 다시 올까요?”
“아니, 그런 것 아니오. 이렇게 단둘이 보는 것은 오랜만인 것 같군. 어서 오시오.”
반갑게 나오미를 맞이했다.
그녀가 우리 왕국으로 합류한 지도 벌써 몇 개월이 흘렀다.
처음에 나오미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심을 품었다.
다른 왕국의 출신이기에 배신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그녀를 신뢰했다.
무엇보다 그녀가 디미오스 마법사단 전체를 통솔하며, 전력을 눈부시게 성장시키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녀를 따라 우리 왕국으로 귀순하거나, 정치적 망명 의사를 타진한 마법사의 수가 적지 않았다.
나오미라는 ‘리더’ 하나 덕분에 상당히 많은 수의 인재들이 우리 왕국으로 넘어온 것이다.
나오미는 나라는 인물보다 우리 왕국의 미래에 더 주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실제로 어전회의에서 나오미는 내가 추진하고 있는 모든 정책에 거의 무조건적인 찬사를 보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부터 열까지 백성들의 복지와 편리, 그리고 생업에 집중된 민생 우선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정석 조명등 제작 사업의 경우에는 나오미가 직접 참여하여, 생산을 돕기도 했다.
그녀도 제법 준수한 세공 기술을 가지고 있어, 큰 도움이 됐다.
“폐하, 마침 신을 이렇게 불러 주셨으니……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이 있사온데.”
나오미가 슬쩍 운을 뗐다.
나는 그녀가 저렇게 운을 떼는 말이 가장 기대가 된다.
항상 뼈 있는, 그리고 내게 도움이 될 만한 포인트만 선택해서 말을 꺼내기 때문이다.
“말해 보시오.”
“내년 1월 1일이면 보누스, 말루스 왕국과의 협정이 종료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일괄 종료.”
“공격하실 것입니까?”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군의 도서 정복 전쟁도 그렇고, 현재 우리 왕국의 군대의 모든 훈련과 준비의 집중은 오로지 두 왕국에 맞춰져 있었다.
일부러 숨기지 않았다.
대놓고 접경지대에 주둔군도 늘리고 있었으며, 신데르스 왕국과도 연계하여 압박을 높이고 있었다.
의도적으로 두 왕국의 국왕과 신하, 그리고 모든 군인의 불안감을 조장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두 왕국이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기를 바라고 있다.
이티마 제국이 라스티스 왕국을 공격할 때, 안팎으로 상황을 발생시켰던 것처럼 말이다.
“내년 우리 왕국의 첫 번째 숙원(宿願) 사업은 바로 두 왕국의 공략이 될 것이고 그때, 경과 디미오스 마법사단이 선봉에 서 주었으면 하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주받은 옛 땅에 그저 크리비아 왕국의 광영이 가득해지길 바랄 뿐입니다.”
“경의 옛 고향 땅을 다시 밟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 멋진 아카데미를 지어 주겠소. 현판이 삐걱거리던 과거의 아카데미가 아니라.”
“감사합니다, 폐하.”
“좀 더 고생해 주시오. 디미오스 마법사단의 미래는 오로지 경에게 달렸소. 그만큼 나오미 경을 신뢰하고 있기도 하고.”
“맡겨 주십시오.”
나오미의 각오는 간결하면서 힘이 있었다. 그것이 나오미의 매력이기도 하다.
‘나중에 나오미에게서 물 계열 마법에 대한 특강을 받아야겠군.’
그녀를 보니, 주특기인 아쿠아 스톰이 떠올랐다.
아직 내 마법 수련은 갈 길이 멀다.
화염만 겨우 Ex를 달성했을 뿐, 특히 흙이나 기타 계열의 마법은 여전히 판정이 C다.
최소한 올 Ex에 9클래스는 달성해야, 성마 대전에서 마왕을 상대로 일대일 승부를 벌여 볼 만할 것이다.
“나오미 경.”
“예?”
“자주 봅시다. 부를 때만 오지 말고, 언제든 만나러 오시오.”
“……예, 폐하. 자주 알현하겠나이다.”
“어려워 말고, 자주. 알겠소?”
“예, 폐하.”
나오미가 얼굴을 붉히며 물러섰다. 부끄러워서일 것이다.
마법사단의 마법사 앞에서는 호랑이처럼 엄한 단장이지만, 내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된다.
그것은 나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벌였던 일전에서, 손도 못 쓰고 당했던 기억 때문일 것이다.
트라우마는…… 원래 생각보다 오래가는 법이다.
* * *
한편, 그날 밤.
나는 별궁을 떠나, 크리비아 왕국의 북동쪽에 위치한 이스트 석재 광산으로 향했다.
평소 같았으면 전혀 발걸음을 할 일이 없는 장소지만, 오늘의 야행(夜行)에는 이유가 있었다.
‘5대 성유물의 조합.’
라디우스 교단의 5대 성유물을 모으기 위함이었다.
에서도 교단의 성유물은 하나하나가 갖는 파급효과가 매우 컸다.
현재 사나레 성지의 마르가리타 호(湖)에 있는 ‘라디우스 백금 성배’가 바로 그것이다.
단지 물속 깊은 곳에 백금 성배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호수는 치유의 샘이 되었다.
나머지 성유물에도 그와 유사하게 신성이 깃든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승천의 돌.
백지 성서.
심판의 지팡이.
축복의 토양.
남은 성유물은 바로 이렇게 네 가지였다.
‘원래는 필요할 때, 천천히 하나씩 수집하려고 했지만 이제는 늦출 수 없겠어.’
계획을 바꿨다.
내년에 있을 정복 전쟁을 앞두고 왕국 전체와 사나레 성지의 생산력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다.
내게는 아직 롱 리브 더 킹에 있는 칭호 효과가 남아 있었다.
바로 사용하지 않고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1회에 한정해서 영지, 성지의 모든 내정 수치를 최고치로 상승시킵니다. 즉시 모든 지역에서 황금기가 도래합니다.] [최고치를 찍은 내정 수치는 이후 3개월간, 원래의 수치로 천천히 하락합니다.]‘이것과 시너지를 최대치로 낼 수 있는 효과는 5대 성유물을 모두 모았을 때 얻는 칭호니까.’
5대 성유물을 모두 모으면, ‘라디우스의 편애’라는 특별한 칭호를 얻는다.
자신의 영지(영토)와 성지 전체에 내려진 버프나 특혜의 기간이 4배 강화된다는 점에서 절대 포기할 수 없는 특전이기도 했다.
즉, 롱 리브 더 킹에 라디우스의 편애를 더하면?
왕국은 1년 내내 황금기를 오롯이 누리면서, 동시에 내정 최대치를 달성할 수 있다.
‘간만에 또 소유권 리셋 버그를 써야겠네.’
나는 피식 웃었다.
네 개의 성유물은 새롭게 얻는다고 하더라도, 기존에 얻은 백금 성배가 치유의 샘에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 녀석을 얻은 시기와 나머지 성유물을 얻은 시기의 간격이 있기에 그냥 성유물을 얻어서는 칭호가 발동되지 않는다.
그래서 치유의 샘에서 백금 성배를 꺼낸 뒤, 잠시 소유권 이전을 다른 사람에게 했다가 내게로 돌려야 한다.
이 은밀한 ‘불장난’을 해 줄 사람은 이미 머릿속에 있다.
나와의 비밀이라면 평생을 가져가 줄 수 있는 여자, 헤이즈다.
‘라디우스의 편애가 있으면 왕국 영토 전체의 내정 수치에 대한 최소값 보정도 있으니까, 이젠 정말 필요해.’
정말 결정적 실책을 하지 않는 이상, 라디우스의 편애는 내정치 30% 이상을 늘 유지하게 해 준다.
그래서 내 왕국에 더 필요했다.
내정의 기본값을 보장해 주는 것만큼 든든한 보험은 없으니 말이다.
그로부터 몇 분 후.
“후우.”
석재 광산의 초입에 안착한 나는 여전히 싸늘한 북부의 밤공기에 한숨을 토해 냈다.
계절은 여름을 향해 가고 있는데, 북부는 여전히 추웠다.
그래서인지 처음 눈을 떴던 그날, 무척이나 추웠던 연병장의 밤공기가 생각났다.
‘그땐 정말 북부 한지의 이름 없는 엑스트라 영주로 살다가 죽을 줄 알았는데.’
옛 생각에 감회가 새로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파아아앗!
모든 인부가 자리를 비우고 없는 조용한 광산 위를 플라이 마법으로 누비고 다니며, 나는 승천의 돌이 있는 위치를 찾았다.
에서는 좌표로 위치를 기억했는데, 지금의 상태창에는 좌표가 표시되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 구조물의 모양이라든가 몇 번 채석장인지는 알고 있기에, 위치를 특정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뭉뚝하기는 해도 꼭 사람을 형상화한 것처럼 보이는 돌.
채석장을 뒤지다 보니, 과연 그런 모습의 돌이 있었다.
[승천의 돌]“찾았다!”
보였다.
모두 하나같이 [돌]이라는 표시를 하고 있을 때, 유일하게 내게 긴 이름을 보여 주는 녀석이!
드디어 시작이었다.
우리 왕국 전체를 살아 숨 쉬는 신성의 땅으로 만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5대 성유물이 모두 모인,
찬양과 축복의 땅으로 만들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