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183
제 183화
64장. 나스 대미궁 – 1화
촤아아악! 촤아악!
바다를 시원하게 가르며 트리스티스 아일랜드로 향하는 배의 갑판에서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클로이도 내 옆에 선 채, 바다 멀리의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함께 서 있었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시기적으로 나스 대미궁 공략 시점은 아주 좋아. 일단 공략 초회에 한정해서는 챙길 수 있는 특전이 꽤 되니까.’
에서 경험했던 것을 기반으로 예상되는 특전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첫 번째 공략 성공에 한정해서 한 층을 넘어갈 때마다 레벨이 1씩 오른다.
물론 레벨 300 이하라는 전제가 있는데, 나도 클로이도 모두 해당되니 혜택을 적용받는다.
그렇다면 25층에 진입할 경우, 누적 24의 레벨이 오른다.
둘째, 매 층계를 넘어갈 때마다 ‘나스 대미궁 XX층 공략자’라는 칭호를 얻는다.
각 층의 공략자 호칭을 얻을 때마다 근력, 지혜, 물리 방어력, 마법 방어력이 각각 10이 증가한다.
이를 의 플레이어들은 ‘개꿀 옵션’이라 불렀다.
이론상이지만, 마지막 층계인 100층까지 공략에 성공하면 모든 스탯이 천이나 오르기 때문이다.
물론 말이 쉬워서 100층이지, 가는 길은 무척이나 험난하다.
가능한 공략이었으면 진즉에 나스 대미궁 공략에 뼈를 묻었겠지.
지금 내 실력으로는 이번에 목표로 잡은 25층이 아슬아슬한 한계다.
그 이상의 목표를 노리려면, 제법 많은 수의 인원을 데려와야 할 것이다. 그것도 최정예로.
‘어쨌든 25층까지 무사히 잘 도착하면 챙길 수 있는 특전이 쏠쏠해. 스탯 하나에 목숨이 오가는 것이 전장이니까, 소홀하게 생각 말고 착실하게 챙기자.’
다시금 의지를 다졌다.
“음.”
옆을 돌아보자 은발을 휘날리고 있는 클로이가 보였다.
습관적으로 스텔라드 단검을 손 위에서 휘휘 돌리고 있는 클로이의 모습은 아슬아슬해 보였다.
저러다가 단검을 놓치면 망망대해의 한가운데로 떨어지고 말 텐데. 클로이는 그런 아슬아슬함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소영지를 운영했던 과거에서 벗어나 크리비아 왕국이라는 거대한 영토를 운영하게 되면서.
많이 신경을 쓰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동료 혹은 신하들과의 시간이 나는 매번 아쉬웠다.
‘메리도 한 번 본다, 본다 말만 실컷 해 놓고 보질 못했군. 이제 본격적으로 요리 쪽으로도 꼼수를 쓸 때가 됐는데.’
메리는 현재 왕궁 전체의 요리장을 맡고 있다. 내가 왕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뤄진 승진이다.
아울러 왕도에 주둔하고 있는 크리비아 군의 식단에 대해서도 관리를 하도록 명령해 놓은 상황.
그녀를 통해서 군인들의 전투력을 좀 더 증진시킬 수 있는 계획이 머릿속에 있었다.
그간 메리도 꾸준히 요리를 해 오며 성장했을 테니, 지금이면 충분히 꼼수 실행이 가능할 것이다.
바다 위에서 그저 배에 몸을 맡기고 생각에 잠기니, 잊었던 것들이 쏙쏙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행정장관이 되면서 업무량이 늘었을 율리안도 보고 싶고, 서신으로만 얘기를 주고받고 있는 발데스도 만난 지 좀 됐다.
‘큭, 바쁘구먼.’
괜히 웃음이 나왔다.
이래서 24시간도 모자라다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닐까 싶다.
“클로이.”
“네.”
“요즘 근황은 어때? 포르미도 님은 잘 지내고 계시고? 별장에서 도통 나오실 생각을 않는군.”
“정말 만족하면서 지내고 계세요. 별장 안에 있는 시설에서 꾸준히 운동을 하시고, 폐하께서 보내신 약재와 음식은 시간을 정해 놓고 꼭 챙겨 드시죠.”
“오? 내 명령으로 다녀왔던 하녀의 말에 따르면, 포르미도 님이 이런 것들은 잘 안 먹으니 절대 가져오지 말라고 했다던데? 귀찮아서 잘 먹지도 않는다고.”
“뻥이에요.”
“푸하하하!”
클로이가 뻥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왜 이리 웃기게 느껴지는지. 나도 모르게 폭소를 터뜨렸다.
“놓고 돌아가고 나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챙겨 두시고 시간마다 챙겨 드세요. 정말 칼같이.”
“그 정도야?”
“그리고 넘치는 체력을 제게 퍼부으시죠.”
“어쩐지……. 클로이 너는 예전에도 말랐었는데, 요즘은 훨씬 더 마른 느낌이 들었어.”
“스승님이 가만히 두지를 않으세요. 자는 시간 제외하면 먹는 시간도 훈련을 하고 있으니까요.”
“힘들진 않고?”
“제가 원했던 가르침의 과정이라 정말 만족하고 있어요. 아참.”
“응?”
“스승님께서 정말 매번 입이 마르도록 폐하 칭찬을 아끼지 않으세요. 그날의 대련이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으신가 봐요.”
클로이의 말에 포르미도와 벌였던 첫 대련을 떠올렸다.
그녀에게도 내가 목숨을 걸고 스승을 구해 주기 위해 벌였던 대련이라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멋진 승부였지. 극의에 도달한 어쌔신이 얼마나 강한 위력을 갖는지도 실감했고.”
“폐하의 특이한 마법을 매번 신기하다고 말씀하세요. 남들에게는 없는 초월적 마법의 경지라고. 꼭 다시 붙어서 우열을 겨뤄 보고 싶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다시 붙는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다만 내기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련은 언제나 환영이다.
실력 좋은 상대를 대상으로 전력을 다해 싸운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공격과 수비의 레퍼토리를 장착할 수 있다는 얘기도 되니까.
“언제 별장에 한번 오세요. 스승님이 정말 좋아하실 겁니다.”
“그래. 가야지. 거기서 네 훈련도 직접 참관하고, 포르미도 님과 함께 식사도 하자.”
“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나를 기다리겠다고 하는 클로이의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한편으로는 그만큼 클로이에게도 신경을 써 주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럴 때는 정말 나와 똑같은 생각과 판단을 해 줄 수 있는 분신이 20개쯤은 있었으면 싶다.
그러면 부족하지 않게 주변의 모든 사람을 돌봐줄 수 있을 텐데.
* * *
배는 거침없이 나아갔고, 어느덧 트리스티스 아일랜드가 보이는 위치까지 도착했다.
섬이 슬슬 보이자, 여기저기 퍼져서 쉬고 있던 헌터들이 일어나 재정비를 하기 시작했다.
나와 클로이는 딱히 준비할 것이 없었다.
마법이야 언제든 쓸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 나니까.
클로이도 언뜻 보기에는 아무 생각 없이 쉬는 것 같아 보여도, 손과 몸이 굳지 않게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애초에 이 배도 생각이 다른 각양각색의 헌터들이 모인 곳이다 보니, 언제 ‘전장’이 된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나와 클로이는 그런 부분에서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는 마음가짐이 같았다.
“아참, 폐하. 조만간에 오라버니가 올 것 같아요.”
“오라버니라고 하면…….”
“트란퀼루스. 저희 남매의 첫째이자, 아버님의 뒤를 이을…….”
트란퀼루스.
클로이가 트란퀼루스의 군화를 신게 되면서, 예전에 알게 된 이름이다.
의 역사에서는 성마 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죽는 엘프이기도 하다.
“오라버니가 제 근황을 궁금해해요. 그간 주고받은 편지로는 부족했는지 직접 찾아오겠다고 하더군요.”
“그래. 얼마든지 환영이야. 기회가 된다면, 나도 뵐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네. 오라버니가 좋아할 거예요. 폐하에 대해서 많이 궁금해하거든요.”
“도대체 편지에 무슨 얘기를 쓴 거야?”
“폐하에 대한…… 칭찬?”
공식적으로는 여동생의 근황 점검이겠지만, 나는 다른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봤다.
아마도 그레이 엘프의 대표자로서 인간계의 정세를 한번 살펴보기 위함도 있을 것이다.
그레이 엘프와의 관계는 앞으로 성마 대전을 대비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했다.
협력할 수 있는 관계가 되도록, 상호 간에 신뢰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할 과제였다.
그레이 엘프, 다크 엘프.
이렇게 두 엘프 종족들은 내게는 반드시 우군(友軍)이 되어야 할 존재들이기에.
‘속도가 점점 붙기 시작하네.’
나스 대륙 전체의 평온했던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재편되려고 하고 있다.
최근에 국외에서 들어온 보고에 따르면, 나스 대륙 남부 전체가 대규모 전쟁에 휘말릴 조짐이 보인다고도 했고.
“언제든 오시라고 해. 공식적인 만남이든, 비공개 만남이든 좋으니 깊은 대화를 나눠 보고 싶다.”
“네, 꼭 그렇게 전할게요.”
클로이의 대답을 끝으로 우리 둘 사이에는 다시 적막이 흘렀다.
익숙한 침묵.
그렇게 배는 어느덧 트리스티스 아일랜드의 외항에 닻을 내렸다.
* * *
십중팔구 헌터들은 메인 로드(Main Road)라고 불리는 길을 따라 대미궁 방향으로 움직였다.
트리스티스 아일랜드는 국가가 아닌 헌터의 자율에 의해 관리되는 곳이기에 치안이 썩 좋지 못했다.
그래서 좋게 말하면 자유 구역, 나쁘게 말하면 무법 지대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다만 메인 로드는 100m 간격을 두고 외부에서 고용해 온 용병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어 그나마 안심하고 이동할 수 있는 루트라 선호도가 높았다.
하지만 나는 메인 로드를 선택하지 않고, 중간에 샛길로 빠졌다.
어차피 나스 대미궁의 입구가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하 1층으로 향하는 입구는 에서 알려진 것으로도 100개가 넘었다.
그중 헌터 관리체가 직접적으로 관리하는 안전 입구는 다섯. 나머지는 마음대로 출입해도 되는 경로였다.
“괜찮을까요? 나스 대미궁은 안전 입구에서 검증된 색깔의 차원문으로 들어가는 게 안전하다고 들었어요.”
샛길로 빠지자, 살짝 불안한 느낌이 들었는지 클로이가 물었다.
초행이거나 사전 지식이 없다면 클로이의 말대로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내게는 트리스티스 아일랜드의 지도가 있다.
[트리스티스 아일랜드 지도] [미궁 층계별 날짜 및 차원문의 색깔과 미궁 타입의 상관관계]내가 가진 두 개의 지도 덕분에 나는 30층까지 가는 답안지를 갖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즉, 지도에 적힌 차원문 색깔과 오늘의 날짜, 그리고 원하는 미궁의 타입을 맞추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각층별로 A타입부터 Z타입까지 존재하는 거대 미궁이지만, 내가 원하는 타입으로 골라서 진입할 수 있다.
“지도가 있으니까 괜찮아. 나 믿지, 클로이?”
“저는 안 믿어도, 폐하는 무조건 믿습니다.”
“그 말, 엄청 기분 좋게 들리는데? 정말 고맙다.”
“다만…….”
“응. 알고 있어.”
우리는 평범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약 10초 전의 시점부터 무언가를 인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빼곡한 수풀과 나무 사이에 모습을 숨기고 있는 헌터의 은밀한 기척이었다.
제법 위장 능력이 뛰어난 녀석들이기는 했다.
육안이나 단순한 느낌으로는 전혀 감지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클로이는 포르미도를 통해 강화된 육감으로 불청객의 존재를 감지했고.
나는 주변에 넉넉하게 흩뿌려 놓은 마력을 통해서, 그 흐름이 엉키는 구간의 이질감을 잡아냈다.
바로 그때.
‘움직이는군.’
확실한 기척이 느껴졌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어둠 속에서 나와 클로이의 목숨을 노리는 살인마의 기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