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262
제 262화
83장. 악마를 죽여라 – 5화
나탈리의 내면세계.
모든 자유의지를 빼앗긴 자신의 몸은 단 하나의 움직임도 컨트롤 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돌아가는 상황은 볼 수 있었다. 즉, 시각으로 전달되는 정보만큼은 그대로였다.
‘아버지…….’
그래서 알고 있었다.
아버지 디그론 4세가 이카젤라에 의해 백치가 되었고, 이룡이 죽었으며, 데스먼드 제국의 병사들이 사지에 내던져졌다는 것을.
모든 것은 너무 갑작스럽게 이뤄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황제의 더할 나위 없는 충신이라 믿었던 이카젤라의 배신은 정말 예상 밖이었다.
순식간에 당했다.
자신도 모르는 내면에 잠들어 있던 악마적 자아가 눈을 뜨는 순간.
나탈리는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그것이 지금이었다.
자신의 몸은 전보다 강해졌지만, 이를 통제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나탈리’였다.
‘애초부터 자레드를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어. 그는 괴물이야.’
그리고 전투 내내, 나탈리는 느끼고 있었다.
자레드는 정말 괴물이었다.
특히 집요한 거리 재기로 나탈리를 괴롭히면서, 반대로 자신은 집중 견제를 피해 냈다.
전환점을 만들어 낸 것은 마나 번으로 대폭발이 일어난 후였다.
그 뒤로 나탈리의 몸은 전보다 눈에 띄게 반응 속도가 느려졌다.
때문에 나탈리의 ‘자아’는 자레드에게 좀 더 가깝게 붙으려고 했다.
그것은 당연한 공격 전제였다.
근거리로 접근할수록 공격의 파괴력을 배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오러라면 더더욱.
하지만 여기서 자레드가 역수를 던졌다.
그것은 바로 양쪽 주먹을 강화하는 마법으로 근접 난타전을 치르는 공격이었다.
나탈리도 오랫동안 이카젤라를 비롯한 다양한 마법사들의 마법을 봐 왔건만…….
주먹을 강화하는 마법은 의외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먹을 중심으로 마력을 응축하는 것이지만 어쨌든 공격법이 주먹을 이용한 권격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여기에 나탈리의 자아가 꼼짝도 못 하고 당하기 시작했다.
원거리 견제에 익숙해져 있다가 갑자기 근접전으로 전환하자, 대응이 늦어진 것이다.
보통의 전투는 상대가 공격 스타일을 바꿔도 어느 정도 버텨 내며 시간을 벌고.
이를 토대로 다시 적응할 시간을 갖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자레드와의 전투는 달랐다.
자레드는 아예 뒤가 없는 것처럼 맹공을 퍼부었다.
그 일례로 나탈리의 자아가 쥐고 있던 검을 기어이 떨어뜨렸을 정도였다.
검사가 검을 잃는다는 것은 마법사가 마력을 잃는 것과 같다. 궁수가 활을 잃는 것과 같고.
여기서 균형의 추가 완전히 자레드에게로 기울었다.
오러의 구현 수단을 잃은 자아는 품속에 갖고 있던 단도를 이용해 역습을 노렸지만.
그 공격은 아예 자레드의 주먹, 그러니까 크러싱 피스트에 의해 차단당했다.
오러가 아닌 적당히 마력을 머금은 단도 공격은 강화된 주먹의 힘으로도 막을 수 있어서다.
퍼억! 퍼억! 퍼억!
‘…….’
불행 중 다행인지 고통은 오롯이 자아의 몫이었다. 내면의 나탈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지축이 뒤흔들리는 느낌뿐이었다.
그 말인즉슨 그녀 자신의 육신이 엄청난 고통에 노출되어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게 마법사라고……?’
나탈리는 믿을 수 없었다.
자레드의 공격은 차라리 전문적인 체술과 권법 훈련을 받은 권사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현란했다.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마법사는 이런 훈련을 받을 이유가 없다.
설령 받는다고 해도, 지금의 경지가 되려면 마법을 전부 포기하고 오로지 훈련에만 시간을 투자해야 옳았다.
하지만 자레드는 마법‘뿐’만 아니라, 근접전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결점이 없는 건가.’
검사에게 원거리 견제 전투가 짜증 날 정도의 약점으로 불리듯, 마법사에게는 근거리 전투가 약점으로 불린다.
하지만 자력으로 그 불리함을 극복할 수단이 있다면…….
자레드의 약점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 된다.
“유감스럽지만! 우리의 운명은 처음부터 갈라설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어. 마왕의 개가 아니라! 성스러운 깃발을 치켜들 동료가 되었어야 했는데!”
자레드가 말 한마디를 할 때마다 나탈리의 몸이 위아래로 몇 번을 들썩거렸다.
몇 번이고 나탈리의 자아가 반격의 기회를 노리기 위해서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그때마다 주먹의 강도는 더 세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처음에는 트랜센던스가 아닌 일반 크러싱 피스트 마법을 쓰던 자레드가 종국에 이르러서는.
트랜센던스를 이용한 초월 마법 형태로 크러싱 피스트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까의 공격이 강철 주먹으로 내리찍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아예 거대한 강철구로 내리찍는 느낌이었다.
나탈리의 자아가 온 힘을 끌어올려 극단적으로 ‘방어’만 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몸의 뼈 여기저기가 가루가 되어 으스러졌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거겠지.’
그녀는 단념했다.
이미 몸을 잠식한 자아는 육신이 죽어가기 직전에 놓여 있음에도 끝까지 발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장에 살아남는다고 한들…… 어디서, 무엇을 바로잡아야 할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
적군인 자레드가 자신을 살려 줄지도 의문이었고,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 정도의 전쟁이 될 줄은.’
입맛이 씁쓸했다.
아버지의 속뜻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나탈리는 암흑 기를 흡수한 뒤 이를 토대로 데스먼드 제국을 지킬 억제력을 가진 존재가 될 생각이었다.
즉, 지금처럼 제단을 이용해서 크리비아 제국과 사생결단의 전투를 벌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아마도 아버지인 디그론 4세가 의도적으로 말을 아꼈던 것일 터다.
오래전부터 신성 제국 연합과의 대치는 몰라도, 본격적인 전쟁은 반대했던 것이 나탈리였으니까.
마왕의 현신에 대해서도 그녀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현신과 함께 마도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의 백성과 인재들을 죽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현신한 존재의 이름이 ‘마왕’일 뿐, 사실은 구원자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즉, 마왕에게 확실한 충성만 다짐할 수 있다면!
주신 라디우스를 믿는 신성 제국의 백성이라 하더라도, 자애로운 마왕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마왕의 본질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 주지 않은 디그론 4세와 이카젤라의 문제였다.
그렇기에 자신을 보좌하고 있는 세 명의 신도 악신이 아니라, 선한 의도를 가진 신이라고 믿었다.
실제로 가장 먼저 자신을 찾아와 준 초월적 존재인 ‘헤레시스’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말동무였다.
감히 범접할 수조차 없을 것 같은 신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그는 외로운 자신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 줬었다.
-힘들겠군.
‘미안해요.’
-미안할 이유가 있나. 난 내 나름대로의 신념으로 네 가능성을 보고 내 운명을 걸었을 뿐이다.
‘하지만…….’
-다만 동족상잔이 되어 씁쓸할 뿐이군. 뭐, 이카젤라라는 놈을 후원하는 신들에게 나는 잔챙이일 뿐이니까.
‘…….’
-짧지만 즐거운 동행이었다. 인간들이 그토록 말하는 내세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
‘네?’
그 말을 끝으로 나탈리와 계속 대화를 나누던 헤레시스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뻐억! 뻐억! 뻐억!
거칠게 내려치는 자레드의 공격도 거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나탈리의 육신이 감당해 내지 못하고, 연신 피를 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드 마스터에 가까운 몸을……. 물론 마법 중 하나이긴 하지만 주먹으로 제압하는 마법사라니.’
나탈리는 일방적으로 털려 버린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모르긴 몰라도 이카젤라가 자레드를 상대하게 된다면, 그놈도 나름대로의 참교육을 받게 될 듯했다.
그만큼 자레드의 경지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높았고, 생각지 못한 변수를 많이 갖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더 이상 시야에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암전의 상태가 되었을 때.
나탈리는 비로소 해방될 수 있었다. 자신을 옥죄고 있던 자아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대신.
“크으윽!”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물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 * *
“후우, 후우, 후우.”
전신으로 전력을 다한 전투를 치른 탓인지 몸 전체가 망치로 두드려 맞은 것처럼 아팠다.
그도 그럴 것이 마법에 사용하는 몸의 근육은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생에서 눈을 뜬 이후 거의 처음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격렬하게 몸을 썼으니.
지금의 이 뻐근함과 고통스러움은 사실 이상할 것이 전혀 없었다.
바로 그때.
쉬이이이.
한 줄기 연기와 함께 나탈리에게서 빠져나온 검은빛 형상이 내 앞에 섰다.
일전에 악신 퀴라티오를 만났을 때도 유사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기에 나는 형상을 응시했다.
그러자 그가 말을 건넸다.
-나는 나탈리를 수호하던 헤레시스라고 한다. 너희들은 나를 악신이라 부른다지.
“헤레시스.”
-내가 깃들어 있던 육신은 곧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아울러 네가 가진 힘이 내 존재조차 소멸시키겠지.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저런 구구절절한 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어쨌든 녀석은 악신이 맞으니까.
-부탁이 하나 있다. 그녀가 가진 모든 능력을 빼앗고, 그 업보도 내가 가지고 갈 테니…….
“갈 테니?”
-그녀의 목숨만은 살려 다오. 신으로서 인간인 네게 자비를 구하고 싶다.
“자비라…….”
뭔가 이질적이었다.
신이 인간에게 자비를 요청하고 있었다. 그것도 자기 자신이 아니라, 가호를 내렸던 인간의 목숨을 대신해서 빌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그녀가 가진 모든 능력마저 빼앗겠다고 한다. 즉, 평범한 사람을 만들겠다는 얘기다.
그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는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내게는 심안이 있으니까.
-순수한 악의 화신은 그녀가 아닌 이카젤라에게 모두 집중되어 있다. 그녀는 또 다른 선량한 피해자일 뿐이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분명 그녀에게 소명할 기회는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목숨, 그것 하나면 충분한가?”
-그렇다. 어차피 따분하기 그지없었던 신의 영생……. 이젠 필요 없다. 생각보다 재미없거든.
아무 능력도 없는 나탈리라면 굳이 죽여야 할 필요가 없다.
물론 그녀를 칭찬하거나 치하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다.
하지만 살려 두면, 그녀를 통해 이카젤라를 위시한 암흑 교단의 정보를 수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나중에 그녀 나름대로의 죗값을 치르게 할 수도 있다.
어쨌든 데스먼드 제국은 암흑 교단을 알게 모르게 후원했고, 암흑 교단은 많은 말썽을 일으켰다.
그 죄는 말 몇 마디와 참회 따위로 씻어질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럼 목숨만은 살려 주지.”
-그럼 됐다. 나탈리의 몸에 깃든 악마는 내가 함께 데려가도록 하지.
“다른 신은?”
-내 알 바 아니다. 뒈지든가 하겠지. 클클.
무심하게 웃어넘기는 헤레시스의 목소리에 미련은 없었다.
후회 없이 모든 것을 다해 봤다는 느낌이랄까.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키에에에엑!
피를 토하던 나탈리의 몸에서 끄집어진 악마의 형상이 헤레시스를 따라 저 멀리 사라졌다.
얼마 후.
퍼어어어엉!
상공의 한복판에서 헤레시스와 악마의 모습이 한데 뒤섞이더니, 폭죽처럼 터지며 사라졌다.
소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