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311
제 311화
97장. 종언(終焉) – 3화
“이게 무엇입니까?”
“받는 순간 알게 될 거야.”
해맑게 미소를 짓고 있는 라디우스의 표정으로 봐서는 뭔가 있기는 있는 듯했다.
영생이라도 얻게 되는 큐브인 걸까? 이름도 영원의 큐브라 그런지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단 받았다.
라디우스의 손을 떠난 ‘영원의 큐브’가 내 손 위에 놓이자, 녀석은 손 위에서 익살맞게 붕붕 움직이는 채로 오색영롱한 빛을 뽐냈다.
상태창을 확인했다.
[영원의 큐브] [당신이 생각하는 것에 영속성(永續性)을 부여합니다.] [영속성을 획득하면, 큐브가 가진 진실한 힘이 드러납니다.]“네겐 안젤루스의 가호가 있지. 누군가를 모두의 기억에서 영원히 잊힐 수 있게 하는 가호.”
“네, 그렇습니다.”
“그 큐브를 뒤집어서 움켜쥔 뒤, 안젤루스의 가호를 다시 한번 확인해라.”
라디우스의 지시대로 했다.
[가호 2 : 지정한 한 명의 대상에 대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기억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영원히 당신을 잊지 않습니다.]“아…….”
바뀌었다.
“이제는 세상의 그 누구도 너를 잊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 이 세계의 자레드든, 저 세계의 신태풍이든 말이야.”
“신기하네요. 이런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발상의 전환이란 그래서 무서운 법이지. 자, 영속성을 획득하면 큐브가 본 목적을 드러낼 것이다.”
“라디우스 님.”
“음?”
“이 큐브는 라디우스 님의 것입니까?”
“좋은 지적이군. 정확하게 말하면 내 것은 아니지. 신 중의 신, 아키테스 님께서 남기신 것이다.”
“신 중의…… 신이요?”
“그럼 우리가 끝이라고 생각했느냐?”
“네.”
“원래 모든 존재는 자신이 사는 세계만을 상식으로 두고 생각하기 마련이지. 나도 다를 것은 없다만. 후후.”
신 중의 신이라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것이었다.
그 존재는 애초부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신이 많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제 악신이 사라졌으니 라디우스가 모든 차원의 신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지극히 인간적인, 그래서 틀에 박힌 편견이었던 모양이다.
샤아아아.
나는 즉각 영속성을 획득했다.
어떻게 사용할지는 생각을 해 보고자 한다.
어쩌면 불로불사의 ‘영생’에 영속성을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나스 대륙 전역에 내릴 풍요로움에다가 영속성을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사용자인 내가 어떻게 선택하느냐의 문제가 될 듯했다.
이윽고 영속성 획득이 끝난 큐브가 이번에는 자줏빛 기운을 뿜어내더니, 새로운 툴팁을 보였다.
[큐브 – 차원의 힘] [당신이 위치한 차원과 다른 차원을 안정적으로 연결하는 일회성의 통로를 만듭니다.] [유지 시간은 30일입니다.] [당신이 연결할 수 있는 차원은 유일하게 거주 경험이 있는 ‘지구’입니다. 연결이 가능합니다.]“설명을 하나 더 해야겠군. 아까 네가 통과의례를 무사히 마쳤다고 내가 말했었지.”
“예, 라디우스 님.”
“그것은 아키테스 님께서 네게 남기신 숙제이자 문제였다. 무엇을 선택하든 네게는 적절한 보상이 주어졌을 테지만, 너는 가장 멋진 정답지를 선택해 냈다.”
“그 말씀은…….”
“이곳에서 다소 시간을 보내야 하기는 하겠지만, 아키테스 님께서 네가 나스 대륙으로 돌아갈 작은 빈틈을 마련해 주실 것이다.”
“그게 정말입니까?”
나도 모르게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환호에 앞서 무의식적으로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신이 농담을 하겠느냐?”
“그렇긴 합니다만…….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을 해 주셨으면 더 좋았을 것 아닙니까?”
나는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화가 난 것은 아니다.
귀여운 투정 같은 것이랄까?
마냥 기분 좋아하기는 너무 없어(?) 보여서, 짐짓 볼멘소리를 내는 체한 것이다.
“기다리거라. 아키테스 님께서 네게 직접 전하실 말씀이 있으신 듯하니…….”
“갑자기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라디우스의 모습이 한참 멀리, 저 먼 곳으로 빠르게 멀어지고.
내 앞에 새로운 존재가 나타났다.
태초의 백색이 있다면 이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하얗게 빛나는 하나의 ‘점’이었다.
“자레드 폰 유칼레스. 내가 바로 아키테스다.”
“아키테스 님을 뵙습니다.”
“네 덕분에 성마 대전의 모든 것이 시작과 끝을 맺게 되었다. 내가 만들어 낸 과오로 인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고, 그래서 모든 질서가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
나는 말을 아꼈다.
아키테스의 말을 좀 더 주의 깊게 경청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신 중의 신이라고 해도, 함부로 모든 질서에 관여할 수는 없다. 그것은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제게 신들의 세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균형추가 쥐어져 있었다는 말씀이신 겁니까?”
“신들이 직접 나설수록 차원의 균형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것이 인간들이 악신 혹은 선신이라 부르는 그 어떤 존재이건 말이다.”
신의 운명이 한낱 인간, 그것도 내 손에 달려 있었다는 아키테스의 말을 들으니 새로웠다.
아주 큰 균열도 시작은 작은 틈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이 세계의 질서가 보잘것없는 한 인간의 손에 달려 있었다는 것도…… 그리 비현실적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그렇군요.”
“그래서 네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우습지 않느냐? 신의 운명을 신이 결정짓지 못한다는 게.”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니니까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사는 존재이지 않습니까.”
“신의 모순이랄까……. 신도 완벽하지 못한 게지. 그래서 종종 의외성에 기대야 할 때도 있고.”
“그게 저군요.”
“네가 살아온 이 현생은 게임이 아니다. 또 다른 삶이다. 나는 네가 그것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길 바랐다.”
“그럼 저 이전에도 같은 사람들이 있었던 겁니까?”
내 질문은 좀 더 깊어졌다.
아까 라디우스가 했던 말 중 오랜만에 보는 특이한 선택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있었다. 대균열이 일어난 다른 차원에서 저마다 치열한 삶을 살았지. 하지만 그들은 단 한 번도, 자신이 사는 세계를 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꿈, 혹은 그저 잘 아는 게임으로의 전생(轉生) 같은…….”
“그렇지. 그들은 미련 없이 자신이 살던 세계로 돌아갔고, 균열은 매듭지어지지 못했다.”
“그렇군요.”
“영원의 큐브는 진정으로 마음을 내려놓은 존재에게만 건넬 수 있는 것이었다. 강제로 쥐어 주는 순간, 모든 차원의 균형이 모래성처럼 무너지기 때문이다.”
“참…… 복잡하네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인간이 신의 세계와 질서에 대해 어찌 알까요. 아는 만큼 보이는 듯합니다.”
“말이 복잡해졌군. 결론은 하나다. 너는 현재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던 다른 존재와 달랐다는 것이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성마 대전의 순간까지는 필연적으로 정해져 있었던 운명이었지만. 지금부터의 미래는 온전히 네 것이다. 네게 과거와 지금, 그리고 미래의 모든 운명의 굴레를 자유로이 흘러가도록 해 주겠다.”
그 순간, 나는 인지했다.
신태풍은 분명 죽었지만.
신태풍의 기억을 가진 자레드는 얼마든지 대한민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생긴 것이라고.
심지어 이 세계에서 자레드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도 말이다!
“그렇다면 차원의 힘을 이용하여 지구와 연결한 뒤, 큐브로 영속성을 부여해도 되는 것입니까?”
“네가 선택한 운명이기에 역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차원에도 영향을 주지 않으며, 질서를 무너뜨리지도 않는다.”
“와, 이건…….”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기뻤다.
이것이 신앙인들이 종종 말하는 ‘신의 선물’ 같은 것일까.
크리스마스에 깜짝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만큼이나 기분 좋은 소식에 나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네게 내린 모든 신의 가호는 네가 살아 있는 한 꾸준히 유지될 것이다.”
“그 책임감을 잊지 않고 살겠습니다. 또 다른 레크나트가 되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네가 또 다른 레크나트가 된다면, 너를 잡을 새로운 용사가 또 나타나겠지.”
덤덤하게 말하는 아키테스의 목소리에서는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여유가 묻어났다.
즉, 균형을 무너뜨린 존재는 다시 균형을 맞추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희생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시간은 제법 걸릴 것이다. 그때까지 여기서 외로울 수 있겠지만, 너만의 시간을 갖도록 해라.”
“혼자 지내는 건 익숙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네가 가진 큐브와 차원의 힘을 알맞게 잘 활용하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그럼…….”
“다시 이렇게 직접 인사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꼭 그래야만 하겠지.”
먼저 이카테스는 내 곁을 홀연히 떠났다.
지켜보던 라디우스는 내게 다시 가까이 와서 마지막 말을 전하고는 역시 한 줌의 연기로 사라졌다.
“하아.”
그 순간, 나는 모든 긴장이 쭉 풀리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것도 모두 정해진 운명이었을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인생의 모든 것이 선택의 연속이라고는 하지만, 내가 현명한 판단을 한 듯하여 기분이 좋았다.
아울러 지구와 연결된 차원문을 통해, 아버지와 여동생을 볼 수 있게 된 사실도 너무 행복했다!
“외형에 변화를 주기보다는 자레드 모습 그대로 찾아가는 게 좋겠지. 설명이 좀 길어지겠지만.”
나는 분명 신태풍이 아닌 ‘자레드’의 모습을 보고 놀랄 아버지와 여동생의 모습을 떠올렸다.
내가 아버지의 아들임을 증명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여동생 유희에게도 당연히 녀석의 비밀을 실컷 ‘까발리는’ 증명을 해야겠지.
생각만 해도 떨리고, 걱정되고, 얼떨떨할 것 같다.
그래도 어쨌든 만날 길이 열렸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나는 너무 행복했다.
“까짓것! 얼마든지 기다리겠습니다! 얼마든지!”
나는 환호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충분하다면, 그 시간을 알차게 보낼 방법은 머릿속에 차고 넘친다.
우선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마법. 그것부터 하나하나 차근차근 다시 연구하면 된다.
“그리고 아직 확정적이지는 않지만 언젠가 다가올지도 모르는…….”
바로 동방 대륙.
이 점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성마 대전으로 인해 베르하드의 연구가 중단됐지만, 분명 다른 차원과의 연결점이 존재했다.
다만 라디우스나 아키테스가 이 점에 대해서 중요하게 언급하지 않은 것을 보면.
예측 가능한 변수이거나, 나스 대륙인과 우리가 알아서 감당해야 할 부분인 듯했다.
즉, 신의 개입이 굳이 필요 없는 인간의 영역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헤이즈! 문이 열리는 날, 꼭 네 곁으로 돌아갈게! 울지 말고 기다려라. 모두들 슬퍼하지 말고 기다려 주길!”
들리지 않지만 꼭 외치고 싶은 말을 바람결에 날려 보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동료들은 무척이나 슬퍼하고 있겠지.
헤이즈는 안 봐도 뻔하다. 하루 종일 눈물이나 안 흘리고 있으면 다행이련만…….
그래도 그녀를 믿고, 모두를 믿는다.
분명히 슬퍼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꿋꿋이 버텨 내고 있을 것이다.
“그럼 뭐부터 연구를 해 볼까?”
시간은 한없이 넉넉하게 주어졌다.
나는 그 시간을 알차게, 지겹지 않게 보내기 위한 마법 연구에 들어갔다.
초심으로 돌아가 1클래스 마법부터 점검해 보는 참된 ‘수험생’의 마음가짐이었다.
그 이후.
시간은 유수와도 같이 빠르게 흘러, 몇 개월의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리고 따뜻한 봄바람과 꽃향기가 물씬 풍겨 오는 어느 날.
드디어 나스 대륙으로 돌아가는 차원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