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32
제 32화
12장. 귀하신 분이 이런 누추한 곳에? – 1화
30분 후.
나는 헤이즈에게 실컷 혼나고 있었다.
“영주님! 영주님, 미워요! 아무리 그래도 자해를 하시면 어떻게 해요? 이건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에요! 정말 끔찍하다고요!”
“어쨌든 성공했잖아? 어때, 헤이즈? 짜릿하지? 상대가 치유된다는 게 느껴지니까 묘한 쾌감이 있지 않아?”
“그렇긴 하지만……. 이런 경험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아요! 영주님이 아프거나 다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고요! 정말 싫어요!”
헤이즈가 눈물을 훔치며 돌아서서는 저택으로 향했다.
턱!
헤이즈의 손을 아슬아슬하게 붙잡았다.
그 순간, 헤이즈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마치 고민하는 듯이.
하지만 고개를 푹 숙인 헤이즈는 이내 내 손을 조심스럽게 뿌리치고는 멀리 가 버렸다.
화가 많이 난 모양이다.
그녀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내가 그녀였더라도 똑같이 그랬을 것 같았으니까.
일단 결과부터 말하자면.
헤이즈에게 치유술에 대한 절박함을 느끼게 하려 했던 자해 작전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드디어 헤이즈 고유의 치유 스킬이 생긴 것이다.
초급 치유 스킬의 회복량이 아직 미량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첫걸음을 확실하게 뗀 셈이 됐다.
한 번 깨닫기가 어려울 뿐, 몸이 익히고 나면 다시 반복하는 것은 쉽다.
오늘이야 내게 좀 삐져 있기는 하겠지만, 그녀의 성격상 곧 열심히 연습 삼매경에 빠질 것이다.
그러면 빠르게 성취도 올라갈 게 분명했다.
나를 어떻게든 치료하고자 했던 그 절실한 마음을 절대 잊지 않고 있을 테니 말이다.
시간은 흘러도, 기억은 남는다.
헤이즈는 누구보다 내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기에 열심히 수련을 하리라 믿었다.
“만족스럽군.”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얍! 얍! 히히, 재밌다! 영주님, 너무 재밌어요!”
미아는 1초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캐스팅을 연습 중이었고.
“후아! 하아아!”
레나 역시 바로 마법 장치를 가동해서는 방어술 수련에 들어갔다.
아까 레나의 스탯을 심안으로 살펴보니, 라키스가 가르칠 수 있는 수준은 확실히 넘어선 듯했다.
즉, 당분간은 라키스의 가르침보다 마법 장치를 이용한 수련이 어울릴 것이라는 얘기다.
‘좋은 스승이 필요한데……. 타이밍이 쉽게 잡히질 않네.’
라키스의 부탁대로 레나에게 스승이 될 만한 인재를 구해 주기로 약속한 지가 좀 지났다.
하지만 진전이 없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다수의 네임드는 우리 영지와 정반대인 나스 대륙 남쪽에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있다면 찾아가기도 어렵고, 초청해 오기는 더더욱 어렵다.
나는 이름 있는 대영지도 아니고, 지방에 있는 소영지의 이름 없는 영주가 아니던가?
이런 위상으로는 초청을 한다고 해도, 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성사를 시키려면 그야말로 금화 박치기를 해야 하는데, 그것도 한두 푼으로는 어림도 없다.
어쩌면 영지의 예산이 통째로 거덜 날지도 모른다.
‘용병단이라도 찾아볼까?’
생각의 폭을 넓혀 보기로 했다.
잘 알려진 검사가 아니더라도, 용병으로 꽤 이름을 알린 사람이면 어떨까 싶었던 것이다.
용병들은 국가나 종교, 신념 따위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에 확실한 보수만 제공하면 어떤 의뢰든지 응한다.
그뿐만 아니라, 의뢰비를 놓고 흥정할 여지도 충분하기에 다양한 협상이 가능한 점도 있다.
공증 받은 계약서만 있으면, 심지어 의뢰비의 할부도 가능하다!
‘레나, 내가 꼭 좋은 스승을 구해 줄게!’
나는 재차 다짐했다.
유망주에게 좋은 스승을 붙여 주지 못한다는 것은 달릴 준비가 끝나 있는 차에 연료를 넣어 주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반드시 조속한 시일 내에 레나에게 멋진 스승을 붙여 주고 싶었다.
“그러면 지금 가장 빠른 성취가 기대되는 것은 역시 이자벨인가? 이자벨은 3성 주술 일부도 무난하게 활용할 수 있으니까, 사실 당장 전장에 투입되어도 충분히 제 몫을 해 줄 거야.”
지금의 내게 확실하게 계산이 서는 것은 이자벨이었다.
그녀가 악령이 되기 전, 주술사의 삶을 살았던 것이 정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자벨, 이자벨…….”
나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리고 정면에서 조금 위쪽으로 보이는 그녀의 방으로 무심결에 시선을 돌렸다.
바로 그때.
촤륵!
창가에서 조용히 나를 지켜보고 있던 이자벨이 커튼을 확 쳐 버렸다.
나와 눈빛이 마주쳐서 커튼을 친 건지, 타이밍이 절묘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보인 그녀의 모습에 왠지 모를 수심(愁心)이 담겨 있었던 것 같았다.
‘뭐, 착각이겠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괜히 그녀를 귀찮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없었고.
* * *
그날 밤.
조용히 영지 시찰을 나온 나는 악몽의 숲 근처의 엘비라 마을에 있는 작은 술집에 들어갔다.
최근 활기를 띠고 돌아가는 마을의 분위기도 살필 겸, 우리 영지를 방문한 헌터들 사이에서 오가는 얘기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동행이 있었다.
술집이었기 때문에 어린 미아와 레나는 데려오지 않았고, 내 양옆에는 헤이즈와 이자벨이 앉아 있었다.
“영주님, 시원한 맥주부터 먼저 세 잔 주문할까요? 이자벨 님, 맥주 어떠세요?”
아침에 잔뜩 삐졌던 모습이 무색하게 헤이즈는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눈물까지 훔치며 돌아섰던 사람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좋아요. 한 잔 줘요. 생각해 보니 맥주를 마신 지 오래됐네요.”
헤이즈의 제안에 이자벨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럴 것이다.
그녀가 악령으로 살아왔던 지난 60년 동안은 맥주는커녕, 뭔가를 먹어 본 적도 없었을 테니까.
‘정말 완벽할 정도의 위장이네.’
나는 이자벨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분명 내 앞에서는 나를 괴롭히는 것이 취미인가 싶을 정도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막말을 뱉는데!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앞에서는 고고하고 도도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척’이다. 그녀의 성격은 내가 더 잘 안다.
주문은 순식간에 끝났고, 이윽고 주인이 시원한 맥주 세 잔을 가지고 왔다.
우리 영지의 장점은 워낙에 평균 기온이 낮다 보니, 냉동 보관이 무척 용이하다는 점이다.
좋게 말하면 시원한 음료를 만들기가 수월하다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더럽게 춥다는 것이다.
우리는 조용히 맥주를 마셨다.
애초부터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을 두 사람에게 말해 주었기 때문에, 사적인 대화를 아끼는 모습이었다.
그때, 마침 앞 테이블에 앉은 헌터 둘이 나누는 대화가 들렸다.
“크리비아 영지, 여기 완전 좋네! 자네, 봤나? 도로부터 싹 정비하면서 아주 깔끔하게 잘 만들어 놓은 거.”
“봤지! 그 아키라는 상단주가 아주 착실하더만. 자신이 먼저 솔선수범해서 주변 청결을 확실하게 유지하던데? 영주 칭찬을 그렇게 하더군. 영주 덕분에 앞으로 영지가 더 좋아질 거라고 말이야.”
“치료제도 치료제지만, 마력 포션도 다른 곳의 절반 가격으로 공급되고 있잖아.”
“그러게. 수지 타산이 맞나 싶더군.”
“던전의 고질병인 로넬라 병에 걸렸을 때 치료제도 있겠다, 포션도 있겠다, 영주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까지 있으면…… 앞으로 우리도 크리비아 영지에 알박기를 하는 게 좋지 싶은데?”
“다른 헌터들이 와서 텃세 부리기 전에 우리가 자리를 선점하자고. 우리 헌터 길드의 본부를 여기로 옮기는 것은 어떤가?”
들으면 들을수록 흡족한 헌터들의 대화였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착착 흘러가고 있었다.
특히 마지막에 나왔던 말.
길드의 본부를 옮기는 것에 대한 얘기는 정말 반가운 얘기였다.
헌터들은 길드를 만들어서 하나의 세력으로 움직인다.
보통 거점이 될 도시에 본부를 두는데, 당연히 본부에는 많은 헌터들이 몰렸다.
헌터들이 쓰는 돈은 일반적인 경제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그들은 첫 지출에는 매우 까다롭지만, 일단 마음에 든 부분에 대해서는 아낌없이 지출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들이 우리 크리비아 영지에 본부를 마련한다면, 주변 상권의 활성화는 시간문제일 것이다.
헌터 길드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파급 효과는 수직 상승할 것이고 말이다.
한데 바로 그때.
“와우! 여기 맥주 죽여주네! 아저씨, 한 잔 더 줘요!”
허스키하면서 중저음인 여자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확실히 흔한 목소리는 아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내 시선이 뒤로 돌아갔다.
‘어?’
그 순간, 나는 시야에 들어온 여자의 얼굴이 생각보다 익숙한 것을 느끼고는 기억을 되짚었다.
그녀는 무엇보다 특징적인 외모를 여럿 가지고 있었다.
170cm는 훌쩍 넘는 듯한 키.
스모키 스타일로 눈에 포인트를 강하게 준 화장.
얼굴 절반 크기의 잠자리 안경.
그리고 테이블 위에 손 대신에 올려놓은 압도적인 바스트까지.
‘엘라잖아?’
나는 그녀가 누군지 떠올릴 수 있었다.
괴짜 여검사, 엘라.
의 메인 스토리에서 위기에 처한 주인공을 항상 돈을 받고 도와주기로 유명했던 여검사다.
그녀는 신념이나 세력을 보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돈만 보고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돈만 받으면 어떤 일이든 도와줬다.
그것이 적대 세력인 마왕군의 부탁이라도 해도 척척(?) 도와주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사실 어느 세력에도 환영받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돈을 최우선으로 하는 황금만능주의가 그녀를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게 했지만, 반대로 그 누구의 신뢰도 얻지 못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안경을 잃어버리거나 벗게 되면 그야말로 눈뜬장님.’
이것 때문에 스토리 도중에 엘라는 죽었다. 그녀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남자에 의해서 말이다.
그녀에 관한 연애 스토리가 무척 많지만, 지금 하나하나 곱씹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니 일단 패스.
나는 엘라의 스탯을 심안으로 확인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문을 열고 한 사람이 더 들어왔다.
은발의 머리에 호박색 눈동자.
그리고 차갑다 못해 얼어붙은 것 같은 무미건조한 표정까지.
기억이 날 듯 말 듯 하다.
분명히 의 메인 스토리에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인데, 이름이 바로 기억나지 않았다.
물론 이런 경우에 적극 활용하려고 심안을 얻었던 것이긴 하지.
나는 엘라의 상태를 살피기에 앞서, 그녀의 정보부터 먼저 확인했다.
[클로이 – Lv. 15] [근력 : 23][체력 : 17] [마력 : 3][지혜 : 7] [민첩 : 43][매력 : 5] [물리 방어력 : 5] [마법 방어력 : 2] [특수 성향 : 절대 은신 S / 위장술 A] [일반 성향 : 분노, 증오]‘클로이, 너는 또 왜 여기서 나와?’
침묵의 여왕, 클로이.
에서는 스토리 진행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그레이 엘프의 여왕이다.
처음부터 여왕이었던 것은 아니고, 성마 대전이 발발한 시점에서 5년 뒤에 여왕의 자리에 오른다.
지금이 나스 대륙력 1414년이니까, 1429년에 왕위에 오르는 셈이다.
여왕에 오를 때가 38세였으니, 역산하면 현재 나이는 23세. 헤이즈와 동갑이 된다.
클로이는 의 개발진이 의도적으로 비하인드 스토리를 공개하지 않은 ‘시크릿 NPC’ 중의 한 명이었다.
즉, 나중에 추가될 대규모 패치 등에서 그녀의 진가가 드러날 부분이 있기에 일부러 숨긴 것이다. 일종의 예측 스포일러 방지인 셈이다.
그녀가 침묵의 여왕이라고 불린 데에는 중의적인 이유가 있다.
첫째, 실제로 말을 잘 하지 않는다.
둘째, 암살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특수 성향에 있는 절대 은신과 위장술이 그 증거였다.
절대 은신은 기척을 완벽하게 숨기는 것이 탁월함을 의미하고, 위장술은 말 그대로 적을 기만하는 위장에 능한 것을 말했다.
실제로 그녀는 태생인 그레이 엘프의 최대 적대 세력이었던 블랙 오크의 주요 지도층을 암살한 전력이 있던 것으로도 유명했다.
‘괴짜 여검사 엘라와 침묵의 여왕 클로이를 한자리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좋은 스승을 원했고, 또 더 많은 인재를 얻기를 원했던 내게는 천우신조의 기회였다.
‘귀인이 왔다!’
나는 두 사람을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