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357
제 356화
111장. 시련의 끝으로 – 2화
“하…….”
온몸의 힘이 빠질 대로 빠진 나는 장탄식을 터뜨리며, 차가운 지면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나마 겨우 힘겹게 손가락을 뻗어, 상태창에 추가된 조력자의 보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육체는 천근만근 무거운 수준을 넘어, 아예 땅속으로 뚫고 들어갈 정도로 지친 상태였다.
[조력자의 보상 – 예지 : 자신이 가진 깨달음만큼 대상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조력자의 보상 – 초월 : 단 한 차례에 불과하지만,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는 힘을 낼 수 있습니다.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찢고, 깨부수고, 박살 낼 수 있는 초월적인 힘으로, 바로 차원의 힘입니다.]
앞서 얻은 보상을 확인했다.
현재 내가 바로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은 바로 시련 10층으로 향하는 차원문이었다.
드디어 마지막의 시련을 코앞에 두게 된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어떻게 공략을 해 왔는지 모를 정도로 그저 앞만 보고 미친 듯이 달려왔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닿아 본 적 없다는 시련의 최상층에 드디어 도착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감개무량했다.
하지만 나를 더 기쁘게 한 것은 이제 마지막 시련을 넘어서면, 증강우를 다시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나스 대륙의 명운(命運)을 위협할 수도 있는 동방 대륙.
이 세계에 존재하는 악인을 처단하고, 그의 헛된 꿈을 확실하게 무너뜨리는 것!
그것만이 내가 동방 대륙에 넘어왔을 때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유일한 목표였다.
한편으론 이것이 끝이었으면 했다.
혹시 동방 대륙 외에 또 다른 세계가 나타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기억을 되짚어 보면.
에서 동방 대륙 외에 다른 대형 세계관을 예고한 적은 없었으니…….
큰 변수가 없는 한, 다른 세계와 또다시 충돌하는 일은 아마 없을 듯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열 번째 시련, 시간(時間)]“아이고, 친절도 하셔라.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차원문 앞에서 미리 안내를 띄워 주네.”
앞서와 다르게 시스템이 먼저 시련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시간.
이름만 들어도 결코, 절대 쉽지 않을, 최악의 난이도를 자랑할 듯했다.
시간을 다룰 수 있는 자가 세상의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얘기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만큼 시간은 모든 이의 운명을 관통하는 공통분모로서 가공할 만한 힘을 가졌다.
하물며 내가 조력자의 보상으로 얻은 ‘역가속’도 상대적인 시간의 이득으로 파괴력을 극대화했다.
그런데 만약 시간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적을 마주해야 한다면…….정말 생각만 해도 눈앞이 깜깜해졌다.
“한시가 급해.”
축 늘어질 것 같은 몸을 억지로 추스르며 일어섰다.
마음 같아서는 괜찮아질 때까지 푹 쉬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여유가 없었다.
일단 사용할 수 있는 모든 회복 계열의 마법과 능력을 활용했다.
대회복부터 시작해서 힐 마법까지 모든 수단을 사용했다.
“헤이즈가 보고 싶네. 이럴 때 곁에 있었으면 온몸을 깃털처럼 가볍게 만들어 줬을 텐데.”
지금도 마음을 졸이며 날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헤이즈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미안하기도 했다.
나 같은 남자를 만나서 매번 내가 떠날 때마다 혹시 잘못되지는 않을까 걱정을 해야만 했으니까.
“금방 돌아갈게, 헤이즈. 조금만 기다려 줘. 이제 거의 다 끝나 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차원문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끝에 닿기 위해서는 조금 더 힘을 내야 한다.
여기서 지친다고 주저앉기에는 지금까지 달려온 시간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후.”
이윽고 심호흡을 한 뒤.
쑤우욱!
나는 마지막 시련에 도전했다.
* * *
그로부터 5일 후.
‘……최악이야.’
체감상 분명 5시간밖에 흐르지 않았는데, 현실의 시간은 벌써 5일이나 흘러 있었다.
[‘시간’이 당신에게서 또 한 번 시간을 강탈했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합니다. 이제 시련에서의 1시간은 현실에서의 2일이 됩니다!]‘망할.’
나는 열 번째 시련으로 등장한 ‘시간’이 시간을 활용해서 상대를 공격하는 전투형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상대한 아홉 개의 시련 모두 싸우고 죽여야만 하는 그런 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내가 ‘시간’과 해야 하는 것은 전투가 아니라, 술래잡기였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번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시간을 ‘붙잡는’ 일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블링크, 텔레포트를 비롯한 다양한 공간 이동 마법과.
헤이스트 혹은 ‘바람길’ 능력과 같이 가속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써도 힘들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디멘션 도어를 이용해서 기습적으로 거리를 좁히거나 유인하는 방법도 써 봤지만, 허사였다.
오히려 내가 속도를 높일수록 ‘시간’은 나를 조롱하듯, 점점 더 내게서 멀어져 갔다.
키키키! 키키키!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인간형과 유사했던 앞서의 다른 시련과 달리, 이번 시련은 배구공만 한 크기의 구체였다.
그래서 어떻게든 손끝에 닿기만 하면 움켜쥐고 이 시련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것이 도무지 되지 않았다.
문제는 이로 인해 벌써 현실계에서 닷새의 시간이 흘러 버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간을 낭비해 버리면, 심판의 창이 완성되고 말아.’
나를 조급하게 만드는 부분은 바로 이 점이었다.
내가 시련에 묶여 있는 동안, 심판의 창이 완성되어 버리면 결국 결계가 뚫리기 때문이다.
즉, 나는 첨탑에 갇힌 상태에서 동방 대륙의 침공이 시작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48배 가속된 시간이 쏜살같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시간’에 닿을 길은 요원했다.
‘도대체 어떻게 저 녀석을 잡아야 하는 거야. 차라리 속 시원하게 싸우기라도 하면 좋겠는데!’
처음으로 평정심이 깨졌다.
시간이 더 이상 내 편이 아닌 상황. 이 상황을 어떻게 현명하게 헤쳐 나가야 하는 걸까?
지금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순간의 1초, 2초가 현실의 1분, 2분이 되어 흘러가는 중이었다.
* * *
[전군, 진군을 시작하라.] [심판의 창을 최대 출력으로 가동, 모든 결계를 깨부수고 무력화시켜라.] [서방 대륙의 모든 것을 무차별적으로 약탈하는 것을 허용하겠다. 손에 넣는 모든 것이 곧 영광스런 제군들의 전리품이 된다.]그렇게 디데이가 찾아왔다.
증강우는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는 시련 10층계의 푸른 불빛을 바라보며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후후. 역시 자레드, 네놈도 시련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냐?”
득의양양한 증강우의 표정에서는 한껏 여유가 묻어났다.
확보된 화면에서는 심판의 창이 기동하면서 엄청난 양의 레이저를 쏟아 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셀 수도 없이 많은 차원석을 원료로 삼아 폭발적으로 쏟아 내는 고화력의 광선이었다.
여기에는 그 어떤 것이 닿아도 녹아 없어진다고 자신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이 담겨 있었다.
콰가가가가!
지이잉! 지잉! 지이잉!
심판의 창이 쏘아 낸 광선에 피격되기 시작한 결계에서 거친 화학반응이 일어났다.
저항의 개념이라기보다는 기존의 특성이 해체되며 점점 무너져 가는 ‘쇠락’의 흔적이었다.
“하하하! 크하하하!”
증강우가 광소를 터뜨렸다.
바다 위로 끝없이 늘어선 함선들이 용맹하게 서진했다.
그 외에도 모든 무장을 마친 각성자들이 군함에 빼곡하게 탑승 중이었고.
슈아아아아!
하늘을 까맣게 메운 전투 드론 부대들이 전방을 꼼꼼히 정찰하면서 신속하게 나아갔다.
“최정예의 태반을 잃은 것이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주력은 건재하다.”
증강우는 첨탑 밖으로 보이는 허허벌판을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자레드만 없었다면 더욱 완벽한 화력이었을 자신의 군대.
하지만 자레드의 공격에 한 줌의 재가 되어 버린 탓에 화력이 생각보다 많이 줄었다.
특히 베테랑 군인들이 비명횡사하는 바람에 노련하게 전황을 이끌어 갈 전력이 부족한 상태.
뼈아픈 일격이었다.
그 누구도 재앙에 버금가는 운석 충돌에 대규모 인원이 떼죽음을 당하리라고는 예상하지도 못했으니까.
“자유의 날개와 가짜 자레드 행세를 하던 늙은이를 놓친 것이 아쉽군.”
증강우가 입맛을 다셨다.
방어선이 무너지기 직전, 자유의 날개는 자신들이 보유한 잠수정을 타고 서쪽 해안으로 탈출했다.
결계가 열리는 즉시, 서방 대륙으로 넘어갈 것이 확실해 보이는 상황.
군대 내부에서는 자유의 날개를 끝까지 추적해서 몰살시키자는 의견도 일부 개진되었지만.
증강우는 이미 본거지를 모조리 잃어버린 자유의 날개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이제 그들은 ‘서방 대륙’이 아니라면, 어디에도 발붙일 곳이 없는 떠돌이가 되었으니 말이다.
“자레드 놈, 명줄이 길군. 이놈의 목숨이 끊어진 것만 확인해도 바로 전장으로 향할 것이거늘.”
증강우가 시련의 최종 층계를 상징하는 불빛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든 결과를 봐야 마음 놓고 첨탑을 비우고 서방 대륙으로 향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자레드가 그의 앞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인 셈이었다.
“죽어라, 자레드. 그쯤 했으면 이제 첨탑의 뼛가루가 되어 사라져라. 제발!”
까득.
증강우는 이를 갈았다.
자레드를 후방에 남겨 놓고는 전장으로 향할 수 없었기에, 어쩌다 보니 발이 묶여 버린 셈이었다.
* * *
같은 시각.
결계를 넘어온 자유의 날개 소유의 잠수정들은 일제히 수면 위로 올라와 있었다.
아직까지 인류 통합 연맹의 해군은 대양을 항해하고 있었으며 결계를 넘지는 않은 상태였다.
다만 이미 심판의 창이 완성되었음을 확인하고 기다리던 자유의 날개가 먼저 넘어왔을 뿐이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자레드 님은 안전하신 걸까요? 저는 그게 가장 걱정됩니다.”
진선평의 표정은 어두웠다.
오랜 시간을 살아왔던 터전을 잃고, 전혀 다른 세계로 넘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스 대륙은 경험해 본 적도 없고, 상상 속에서조차 꿈꿔 본 적 없는 새로운 세계이기 때문이다.
“걱정할 필요는 없네. 자레드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면, 가장 먼저 증강우가 뛰쳐나왔겠지.”
“하긴…… 그렇습니다.”
“증강우가 안 보인다는 것은 자레드가 살아 있다는 뜻이기도 하네. 여전히 고군분투 중일 걸세.”
베르하드의 차분한 대답을 듣고 나니, 진선평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빠르게 뒷수습을 한 덕분에 추가 희생자 없이 안전하게 탈출했다는 사실이었다.
빠듯한 재정을 운용하는 와중에도 최후의 희망으로 준비해 두었던 잠수정의 덕을 보는 순간이었다.
“나스 대륙은 전쟁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완벽하진 않지만, 최대한 많은 준비를 하고는 있네. 이렇게 차원의 균열이 금방 무너질 줄은 나도 예상을 못 했거든.”
“저도 심판의 창이 생각보다 빨리 완성된 탓에 정말 많이 놀랐습니다.”
“나스 대륙 걱정은 말게. 그리 호락호락하게 당할 일은 없을 걸세.”
베르하드가 힘주어 말했다.
껄끄러운 사이이기는 하지만.
이번 전쟁에는 분명 드래곤들도 도움을 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떠나기 전에 나스 대륙의 모든 전력을 동부에 집중시켜 놓고 출발했던 만큼.
만반의 준비는 다 끝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