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55
제 55화
21장. 저는 왕국의 신하가 아닙니다 – 3화
그로부터 30분 후.
“자레드 영주, 제스 형님을 대신해서 사과드릴게요. 워낙에 성격이 불같은 형님이시라…….”
“괜찮습니다. 뭐, 몰랐던 것도 아니고요. 하하.”
나와 이즈엘은 연회장 밖에 마련된 정원을 따라 걸으면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제스가 ‘깽판’을 치기는 했지만, 날이 날인지라 연회의 분위기가 다시 무르익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국왕 데커드 9세는 연회의 진행을 프탈린에게 맡기고는 처소로 돌아갔다.
다만 왕후가 아닌 후궁의 손을 잡고 발길을 돌린 것으로 봐서는 어른의 사정이 있겠거니 싶었다.
어쨌든 국왕이 자리를 비우자, 본격적으로 판이 바뀌었다.
프탈린과 제스를 중심으로 연회의 분위기가 흘러가기 시작한 것이다.
두 왕자는 서로 드러내 놓고 경쟁이라도 하듯, 큰 소리로 흥을 돋우며 분위기를 주도했다.
양쪽 진영의 신하들도 이에 장단을 맞추며 불타올랐고, 덕분에 이즈엘을 향했던 시선은 자연스럽게 거두어졌다.
애초에 제4 왕자를 후계 경쟁 구도에서 우선순위로 보는 귀족들은 거의 없는 듯했다.
“자레드 영주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귀하 같은 영주가 우리 왕국의 신하라면, 참 좋을 텐데 말이에요.”
그때, 이즈엘과 다섯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조용히 뒤를 따르던 여인이 내게 말을 걸었다.
“다들 같은 말씀을 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지방의 일개 소영주일 뿐입니다.”
나는 겸손하게 말을 받았다.
마이라 공주.
데커드 9세의 4남 1녀 중 막내이자, 유일한 공주다.
왕성에 왔을 때부터 계속 이즈엘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기에 이유가 무엇인가 싶었는데, 그의 호위 무사 역할을 그녀가 하고 있었다.
스탯도 제법 높았다.
엘라의 하위 호환의 느낌?
하지만 ‘일도양단 S’로 특수 성향을 잘 가다듬은 상태라 일격필살의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정도 검술이면 왕자의 호위 무사 역할을 능히 해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오라버니에게 자레드 영주의 힘을 보태 주세요.”
“마이라, 말을 아껴라.”
“죄송해요, 오라버니. 철저하게 오라버니를 외면하는 신하들이 야속해서…….”
이즈엘이 급히 마이라를 입단속 시켰다. 그도 의식하고 있는 듯했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언제든 적 – 제2 왕자, 제3 왕자 – 에게 트집을 잡힐 수도 있음을.
나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봤다.
멀찍이서 우리의 뒤를 호위하듯 걷고 있는 근왕병이 있었다.
왕자가 있으니 당연한 호위이기는 하다. 그때, 마침 근왕병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뮤트 마법을 전개했다.
그러자 투명한 반구의 역장이 생겨나며, 이내 나와 이즈엘 그리고 마이라를 감쌌다.
“왕자님.”
“편히 말해 보세요. 내게 뭔가 할 말이 있군요. 뮤트 마법까지 사용하는 것을 보면.”
이즈엘의 눈빛이 반짝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갔다.
“프탈린, 제스 왕자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글쎄……. 형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것은 아니라서 말이에요. 하지만 알아야 할 것들은 알고 있죠.”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왕자님이 움브라 교를 믿고 계시다는 사실은 아십니까?”
그 순간.
이즈엘이 걷던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마치 얼음이 된 것처럼 모든 표정과 움직임이 굳어 버렸다.
당황한 것은 마이라도 마찬가지라서 다급히 뒤를 돌아보며, 근왕병의 눈치를 볼 정도였다.
뮤트 마법으로 모든 소리가 통제되고 있음에도, 놀란 가슴에 이성적인 생각이 무너진 것이다.
이즈엘이 뒤늦게 말했다.
“그럴 리가요. 뜬소문이에요.”
형제에게 아직 남아 있는 우애나 동정의 감정 같은 걸까? 이즈엘이 고개를 저었다.
“왕자님의 이름을 걸고, 제게 장담하실 수 있으십니까?”
내가 날카롭게 되묻자, 이즈엘의 표정이 더욱 흔들렸다.
알아서는 안 될 사실을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놀람이 분명해 보였다.
“도대체, 그걸 어떻게? 그 부분은 나와 마이라가 아니면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즈엘이 말끝을 흐리면서도 고개는 끄덕였다. 긍정이었다.
알면서도 숨겼던 모양이다.
이해는 충분히 갔다. 의혹을 잘못 제기했다가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역풍에 휘말려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 테니까.
“아마도 알게 모르게 비밀스러운 회합(會合)이나 의식 같은 것이 벌어지고 있을 겁니다. 왕자님,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는 법입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예. 왕자님, 지금부터 두 왕자님의 모든 이단 행위에 대해서 은밀하게 조사하여 정보를 수집하십시오. 이 장치가 요긴하게 쓰일 때가 있을 겁니다.”
“장치?”
나는 승부수를 던졌다.
제4 왕자의 편에 선 것은 물론이거니와, 제2 왕자와 제3 왕자의 허를 찌를 계책을 낸 것이다.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져 있는 두 왕자의 잘못된 행보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나만이 선택할 수 있는 작전이기도 했다.
나는 아공간에서 영상 장치를 꺼냈다.
1시간 정도의 분량을 녹화할 수 있으며, 100m 정도의 거리에서도 선명한 영상을 담을 수 있는 장치였다.
“이 마도구를 이용하시면, 회합이나 비밀 의식 같은 것을 영상으로 담을 수 있습니다.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증거가 될 겁니다.”
“자레드 영주, 나를 돕는 것인가요?”
“저는 왕국의 신하가 아닙니다. 그저 주변인으로서 왕국이 옳은 방향으로 흘러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나는 적당히 거리를 뒀다.
이즈엘은 총명하니, 이렇게 말해도 속뜻을 알아들을 것이다.
내 말은 나를 무조건 믿고 신뢰하지는 말라는 뜻이었다.
칼을 뽑는 그 순간까지, 아무도 칼을 벼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라야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있다.
“명심하십시오. 신데르스 왕국은 오래전부터 라디우스의 신성을 추구해 왔던 나라입니다. 그리고 움브라 교는 완벽한 대척점에 있는 교단이죠.”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 왕자님. 겉으로 보이는 세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경우에 따라 언제든 모래성처럼 무너질 수도 있는 인맥들입니다.”
그러자 이즈엘이 깨달은 것이 있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종교를 딱히 믿는 편은 아니지만, 태생부터 함께한 종교가 삶에 얼마나 중요한 지표가 되는지는 잘 안다.
아버지와 여동생이 독실한 신자였으니까.
나는 이즈엘이 큰 무기를 가지고 있음을 인지하게 함과 동시에, 형제의 약점을 찌를 수단으로 이용하라는 충고까지 남긴 것이었다.
왕위 계승 싸움이란 감성이나 동정, 연민 따위가 있어서는 절대 안 될 문제니까.
“다시 뵙게 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언제든 부담 없이 제게 서신을 보내 주십시오. 마이라 공주님도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고개를 숙여 이즈엘과 마이라에게 인사를 올렸다.
분명 직접적인 말은 하나도 오간 것이 없었지만, 우리는 분명 서로 확실하게 교감하고 있었다.
* * *
다음 날.
나와 헤이즈는 아키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왕성의 대로를 따라 걷고 있었다.
“상단주를 기다리는 영주님이라니, 뭔가 이상해요. 호호.”
“그러게 말이다. 보통은 영주가 돌아오길 기다려야 하는데, 일감이 없으니 개점휴업 할 수밖에?”
“그럼에도 유쾌하게 웃으시는 영주님의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아요!”
헤이즈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웃음이 정말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곁에 있기만 해도 그녀의 넘치는 밝은 에너지가 꾸준히 전달되는 기분이랄까?
“헤이즈, 왕성까지 온 김에 옷이나 한 벌 사 줄까?”
계속 그녀를 보고 있자니, 입고 있는 옷이 마음에 걸렸다.
물론 본인이 원해서 수수한 평복 차림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검소해 보였던 것이다.
검소함을 멀리할 필요는 없겠지만, 어쨌든 그녀는 나를 가까이서 수행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동시에 내가 전략적으로 키우는 치유사(힐러) 유망주이기도 했고.
“네? 옷이요? 아니에요, 영주님! 지금 옷으로도 전혀 불편함이 없고 좋은 걸요?”
“옷이 날개잖아. 그리고 수행원의 복장이 어떤가에 따라 수행하는 대상의 가치가 오르내리기도 하고.”
사치를 일삼는 영주가 되고 싶진 않았지만, 그래도 주변 사람의 가치를 높여 주는 영주는 되고 싶었다.
“괜찮아요, 영주님. 신경 쓰지 마세요!”
“아냐, 아냐. 가자. 내가 새 옷 한 벌 뽑아 줄게.”
겸손한 거절이 늘 패시브 스킬처럼 탑재되어 있는 헤이즈를 설득하는 것은 어렵다. 이성적인 설득이 잘 안 먹힌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리고.
“아앗! 영주님!”
성큼성큼 눈앞에 보이는 의류 상점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옷은 확실히 날개다.
그리고 나는 헤이즈에게 꼭 날개를 달아 주고 싶었다.
그녀의 뽀얀 피부와 영롱한 눈빛을 생각하면, 새 옷을 입으면 천사처럼 예쁠 것 같았다.
* * *
“영주님, 이 옷은 어떠세요?”
“괜찮은 것 같은데?”
“흐음, 하나만 더 입어 볼게요! 약간 마감이 아쉬운 것 같아요!”
“마음에 들 때까지 입어 봐. 그러라고 온 거니까.”
‘여자의 쇼핑에 따라오는 기본 옵션이 기다림이라는 것을 내가 간과했군.’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새삼 전생에 나와는 인연이 ‘없었던’ 연애 경험담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여자친구가 있거나 결혼한 친구들이 왜 쇼핑을 함께 가자고 하면 질색을 하는지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직접 경험해 보니 알 것 같았다.
들어올 때는 가격 생각하지 말고 마음에 드는 옷을 고르라고 했는데, 자꾸 주인에게 가격을 묻는다! 심지어 생각보다 비싸면, 선택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흐뭇한 마음으로 헤이즈의 패션쇼를 지켜보는 동안, 나는 문득 잊고 있었던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그간 영지 공무에 너무 바빴던 탓에 어느 순간부터 머릿속에서 지워졌던 이슈에 대한 건이었다.
나는 크리비아 영지에 연결되어 있는 영지창을 확인했다.
[특수 상황 1 : 크리비아 영지는 악몽의 숲과 인접해 있습니다.매년 7월 1일, 주성(主星) 데우스와 객성(客星) 벤델라가 천공에서 일직선상에 놓이는 날.
크리비아 영지를 향한 마수들의 대규모 침공이 일어납니다.]
‘오늘이 6월 9일이니 3주 정도 남았네. 대응 방법을 생각해 두긴 했지만, 막상 디데이가 다가오니 괜히 신경이 쓰이는군.’
마수들의 대규모 침공.
이것을 에서는 몬스터 아웃브레이크라고 불렀다.
대책 없이 맞이하게 되면 재난이 되지만, 준비된 상태로 맞이하면 경험치 풍년이 되는 이슈다.
‘다수의 병사와 헌터를 동원하는 정공 대응은 싸우는 재미가 없잖아? 무엇보다 내가 경험치를 독점할 수 없어. 차원문 버그를 잘 활용하면 1인 디펜스도 가능할 것 같은데.’
머릿속이 분주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왕이면 일반 병사나 인연이 없는 헌터들보다는 내가 성장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 집중이 될 테니 말이다.
‘어디 보자…….’
그렇게 생각에 골몰하려던 바로 그때.
“짜잔! 영주님, 어때요? 이걸로 정했어요!”
드디어 헤이즈가 마음의 결정을 내렸는지, 힘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탈의실에서 나오며 소리쳤다.
“와! 정말 예쁘다. 천사 같아.”
“헤, 정말요? 영주님이 그렇게 봐주시니 기뻐요!”
그 순간.
나는 디펜스에 대한 생각을 접고, 그녀의 모습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에메랄드색의 긴 머리. 붉게 반짝이는 입술.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내려오는 아찔한 어깨에 뽀얀 우유빛 피부까지.
하늘거리는 원피스는 아슬아슬하게 허벅지 절반 정도를 겨우 가리고 있었고, 그 아래로 쭉 뻗은 그녀의 곧은 각선미가 드러났다.
누가 그녀를 보고 예쁘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단언컨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여기에 치유술까지!”
헤이즈가 양손 가득 진한 백색의 구체를 만들어 냈다. 치유를 상징하는 구체였다.
“어때요, 제가 정말 천사 같아 보이세요?”
그 말에 나는 대답 대신.
척!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