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86
제 86화
32장. 유랑민 대이동 – 2화
“콜록! 콜록콜록!”
“어때요? 먹어 보니 몸에 기운이 도는 것이 느껴지나요?”
“아아, 영주님……. 저 같은 평민에게 존대라니요…….”
“지금 존대나 반말을 따질 때가 아니잖아요. 말해 보세요. 괜찮습니까?”
“몸에 빠르게 기운이 돌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머리가 너무 어지럽습니다.”
“체력 부족이군! 헤이즈, 하급 치유술로 보조해 줘. 힐 마법을 함께 연계할 테니까 너는 마력 아껴. 갈 길이 멀다.”
“알겠어요, 영주님. 영주님은 마력 문제없으신 거죠? 갑자기 쓰러지시거나 그러면 안 돼요!”
“나는 365일 내내 힐 마법을 사용해도 거뜬하니까 걱정 마.”
“호호, 어리석은 질문을 했네요.”
나와 헤이즈는 난민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며, 긴급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을 돕고 있었다.
우선 여분으로 남겨 뒀던 마스터 포션을 전부 난민 지구인 이곳, 즉 사나레 지구로 가지고 왔다.
그리고 전염병에 걸린 것으로 보이는 환자들은 모두 격리 구역에 들어가게 하여 확산 가능성을 원천 차단했다.
격리 구역 주변은 내가 아예 최고급 마정석에다가 클린 마법진을 그려, 수십 개나 박아 두었다.
설령 전염 병균이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 하더라도, 마법진 구간을 지나게 되면 깨끗이 소멸되어 사라질 것이다. 그 정도로 화력을 대폭 높여 놨으니까.
마음이 급하다 보니 내가 귀족이고, 상대가 평민이라는 사실을 잊고 현대식 존댓말을 많이 썼다.
나는 딱히 개의치 않았지만.
이 세계를 사는 이들에게는 엄청난 파격이었기 때문인지, 모두 소스라치게 놀라는 모습이었다.
생사가 오갈 수도 있는 현장에서 허례허식이나 예절, 체면 같은 것을 따지고 싶지는 않았다.
병에 걸린 난민들을 살리고자 하는 내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들을 전략적인 이유를 가지고 사나레 지구에 받아들이고 있는 것도 진심이고.
나는 내 감정에 떳떳했고, 자부심이 있었다.
마음에도 없는 성자(聖者) 행세를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식으로 이들을 대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때.
내게 달려온 두 남녀가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영주님! 제가 영주님을 돕겠습니다! 격리 병동에서 일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제발 간곡히 부탁드려요! 영주님께 입은 은혜에 보답할 길을 마련해 주세요!”
마룬, 마리 남매였다.
내가 두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사나레 지구에서 가장 먼저 치료한 전염병 환자이기도 했거니와.
두 남매의 특수 성향이 각각 다음과 같았기 때문이다.
[특수 성향 : 종합 의학 A / 라디우스 신학 B / 치료 약초학 B] [특수 성향 : 심리학 A / 상담 치유술 B / 치료형 최면술 B]오빠인 마룬은 의술과 약제 제작에 조예가 깊었고, 여동생인 마리는 심리 치료에 능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왕국의 귀족이 아닌가 싶었지만, 확인해 보니 아니었다.
의학과 심리학은 전부 독학한 것이고, 마을에서 사람들을 치료하고 상대하며 익힌 것이라 했다.
‘가신’의 역할까지 하기는 부족한 점이 많지만, 지금 이 현장에서 충분히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기에 적합한 녀석들이었다.
“마룬, 마리. 좋아, 너희들의 뜻이 그렇다면 허락해 주겠다. 하지만 마음만 앞서는 것은 조심해라. 반드시 병동 하나를 들어갔다 나오면, 클린 마법진 위에서 확실하게 살균을 해야 해.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영주님. 모든 힘을 다해서 환자들의 회복을 돕겠습니다!”
“저 역시 사람들이 외롭지 않도록 그들의 말동무가 되어 주고, 지친 심신을 위로해 주겠어요!”
마룬과 마리는 열정적이었다.
마치 수련 병원에 들어와 수련의 과정을 준비하는 인턴을 보는 느낌이랄까? 의욕은 넘쳤고, 투지는 눈부셨다.
“마스터 포션은 판단에 따라 아낌없이 써도 좋다. 예산이나 재고 같은 것은 걱정하지 마. 필요하다면 선제적으로 사용해도 돼.”
나는 마룬과 마리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사실 요 며칠간 녀석들의 활약을 조용히 눈여겨보고 있었고, 이 정도는 맡겨도 충분하겠다는 계산이 섰기 때문이었다.
또한 내가 마냥 여기에만 매달려 있을 수 없다는 점도 크게 한몫을 했다.
그로부터 10분 후.
마룬과 마리에게 인수인계를 하고 나온 나는 헤이즈와 함께 격리 구역 외곽에서 목을 축였다.
격리 구역 중앙의 우물에서 길어온 물인데, 이곳에도 클린 마법진을 그려 넣은 마정석을 심어 놓았기 때문에 물은 아주 깨끗했고, 맛은 달달하니 좋았다.
“헤이즈, 고생했어. 병든 환자들을 치료하는 일에 네가 가진 신성력이 정말 큰 힘이 됐어. 네가 없었다면, 아마 세 배 이상의 시간이 걸렸을 거야.”
“제가 영주님에게 도움이 되었다니 기뻐요! 저도 정말 많이 놀랐어요. 신성력이 이렇게 사람들에게 큰 축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거든요!”
헤이즈가 신기한 표정으로 자신의 양손 위에 치유술 구체를 만들었다 없애기를 반복했다.
불과 19개월 전만 해도 그저 평범한 하녀 – 물론 잠재력은 가지고 있었지만 – 였던 헤이즈.
하지만 지금은 치유사를 직업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뛰어난 치유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은 마군의 피난처를 공략하고 헤이즈가 얻은 목걸이였다.
신성력 증폭 3배.
이것 덕분에 헤이즈는 마법사로 따지면 3클래스와 같은 ‘디바인 스리’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치유술의 위력은 디바인 식스(Divine Six)에 달할 정도였다.
마스터 포션 복용, 힐 마법 보조, 증폭된 중급 치유술 마무리.
이렇게 삼위일체의 치료법으로 최상의 효과를 도출하니, 전염병이 발병해도 한나절 만에 제압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앞으로 치유사로서 좀 더 네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끊임없이 한계에 도전하고, 이를 극복해 나가는 네 모습을 말이야.”
“맡겨 주세요! 영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어떤 노력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헤이즈가 앙증맞게 두 발을 동동 굴러가며, 양손의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딱, 헤이즈에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직 1차 각성도 하지 못했다는 것?
어찌 된 영문인지 헤이즈는 충성도가 오르는 이슈가 몇 번이나 발생했어도, 최대치를 달성하지 못했다.
항상 1이 남았다.
충성도는 99에서 늘 멈춰 있었고, 99에서 1을 올리는 이슈를 발생시켜도 여전히 99에 고정돼 있었다.
사실 내게 쏟는 무한 애정이나 그녀의 마음을 생각하면 지금쯤 1차 각성이 아니라, 10차 각성을 해도 모자랄 판이다.
‘내게는 보여 주지 않는 마음속의 방어기제가 있는 걸까?’
나는 분명히 헤이즈에게 해결되지 않은 어떤 응어리나 마음의 벽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게서 어떻게든 1의 마음을 반드시 덜어 내야만 하는, 그러기 위해서 발버둥쳐야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답은 간단할지도.’
상식적으로 생각하니, 답은 쉽게 떠올랐다.
헤이즈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문제는 하나뿐이다. 바로 나에 대한 애정이다.
한결같은 그녀의 사랑은 항상 일방통행이었고, 나는 그에 맞는 답을 해 준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헤이즈가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고 싶었다.
그것은 나에게도 이득이고, 치유사의 길을 걷게 된 그녀에게도 무조건 이득이다.
“흠흠.”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은 나는 헤이즈에게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헤이즈.”
“네?”
“이곳에 와서 헤이즈가 눈코 뜰 새 없이 고생한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감사를 표현하는 게 좋을지 계속 고민해 왔어.”
“앗…….”
제법 진지해진 분위기에 헤이즈가 두 손을 꼭 모아 쥐고, 나를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보았다.
거의 치트키 수준!
장화 신은 고양이가 올려다보는 눈빛 수준이라, 나도 헤이즈의 저 눈빛만 보면 정신이 아찔아찔하다.
“이게 적절한 보상인 건지, 아니면 영주로서 날로 먹으려는 심보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모르겠지만, 무조건 아니에요! 영주님이 하시는 일은 무조건 옳고, 품으신 마음은 항상 멋있으시니까요!”
“그렇다면 정말 진심을 담아서 감사 인사를 이렇게 해 볼까 해.”
다음 순간.
말을 끝마칠 무렵에 이미 내 얼굴은 헤이즈의 얼굴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쪼-오옥.
짧지 않은, 하지만 너무 깊지는 않게 그녀와 입맞춤을 했다.
예전에 악령이던 시절의 이자벨과 계약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던 키스와 달리.
이번은 그녀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애정을 담아 하는 진심 어린 키스였다.
“하아.”
입맞춤을 끝낸 헤이즈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녀의 양쪽 볼은 홍조를 띠었다.
바로 그때!
[헤이즈가 칭호 ‘백마 탄 왕자님의 키스’를 획득하였습니다! 내면을 강하게 억제하던 심리적 방어기제가 완전히 무너집니다!] [충성도의 최대치가 100에서 200, 200에서 400, 400에서 800으로 3단 상승합니다!] [충성도가 대폭 상승하여 즉시 800의 최대치를 달성했습니다!] [대상이 1차, 2차, 3차 각성 상태에 동시 돌입합니다!]‘뭐, 뭐야 이거! 획득한 칭호에 붙어 있는 이름은 뭐고, 3단 각성은 뭔데? 키스에도 칭호가 있었어? 이건 나도 몰랐는데?’
당연히 모를 수밖에.
현실에서도 솔로였던 내가 에서 이성 유저와 키스할 일이 당연히 있었겠는가?
아! 한 적이 있긴 했다.
쪼렙 시절에 사냥터에서 오크 녀석과 드잡이질을 하다가 공격이 빗나가서 얼떨결에 입을 맞춘 적은 있다.
갑자기 속이 안 좋아지려 한다.
“영주님……. 갑자기 온몸이 나른해져요.”
털썩.
내가 그녀의 위로 보인 시스템 메시지를 보며 놀라고 있는 찰나.
키스의 달콤함에 취해 있던 헤이즈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비틀거리더니, 이내 옆으로 쓰러졌다.
“키스 하나만으로 이렇게 엄청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거야?”
나는 황급히 헤이즈를 부축하고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입술의 힘!
그렇게 헤이즈는 내 키스와 함께, 엄청난 규모의 대각성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전생의 나도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무려 3단 각성이었다!
* * *
헤이즈는 치료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대각성 상태에 접어들면서 휴식이 필요해진 것이었기에 자레드는 그녀를 휴식 공간에 눕혀 두었다.
그리고 마리에게 그녀의 간호를 부탁했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곁에 있고 싶었지만, 오늘 하고자 마음먹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나레 지구를 라디우스 교단의 성지로 만들려면 반드시 이 녀석이 필요하니까.’
[라디우스의 백금 성배]라디우스 교단의 5대 성유물 중 하나로 불리는 백금 성배. 자레드는 이것을 노리고 있었다.
“후……. 처음 바다 건너로의 여행인가?”
자레드는 북쪽, 저 먼 곳을 바라보며 한숨을 토해 냈다.
목적지는 바로 다크 엘프의 땅.
바다를 건너야만 도착할 수 있는 타타르 아일랜드였다.
파아앗!
플라이 마법과 함께 자레드의 몸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상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사나레 지구 전역에서 정착 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는 난민들이 보였다.
또한 질서정연하게 지구 전체를 꼼꼼히 순찰하며, 치안 유지에 전력을 다하는 군대도 보였다.
‘좋아! 모든 것이 순조로워. 여기에 마지막 퍼즐만 끼워 넣으면 돼. 성물을 이용한 꼼수로 사나레 지구에 확실한 신의 축복을 내려 주는 거야.’
쿠와아아아!
이내 최대 속도로 돌입한 자레드의 몸이 북쪽으로, 북쪽으로, 더 먼 북쪽으로!
빠르게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