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culus of Joseon RAW novel - Chapter 149
149화 중심에 서다
이수광이 김덕령과 여러 장사(壯士)들을 물린 채 이근영과의 만남을 주선하겠다고 했지만, 과연 그랬을까?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이수광은 김덕령과 장사들을 시켜 감영을 겹겹이 에워싸게 했을 것이 뻔했다.
이근영과 이수광.
그들은 여러 사람의 목숨을 날린 희대의 사건, 기축옥사의 주요 인물들이라고 스스로 고백했다. 대놓고 나라에서 정한 죄인이라 말했는데, 차후 대책을 마련해놓지 않았을 리가 없잖은가. 어쩌면 나와 말이 통하지 않으면 곧장 김덕령을 이용해 나를 암살하려 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나도 한명련과 심계산에게 신호를 보냈었다. 그들에게 준 임무는 ‘칼을 벼려갖고 오라.’는 것이었다. 한명련이 상주에 온 뒤로 나는 늘 심계산에게 칼을 갈아오라고 시켰다.
심계산은 일전에 나와 조경 덕분에 목숨을 건진 일이 있다. 그래서인지 그날 이후로 심계산은 철저하게 내 심복이 되었다. 심계산이라면 칼을 믿고 맡길 수 있으리라 판단했던 것이다. 물론 칼을 갈게 시킨 이유가 따로 있었다.
‘갈아올 칼이 없는데 칼을 갈아오라는 속뜻은 여, 김, 윤을 부름이라. 늘 잊지 말거라. 그리고 절대로 함구하도록 하라.’
내 칼에 써놓은 글귀다. 온 사방에서 나를 감시한다고 느껴지자, 여차하면 써먹을 요량으로 칼에 글귀를 써놓았었다. 심계산은 수차례나 내 칼을 보면서 그 글귀를 읽고 또 읽었을 것이다. 칼에 글자를 써놓을 당시에는 현대에서 넘어온 사람이 오로지 여대세와 김세빈, 윤업뿐이었기에, 그들 셋만 칼에 이름을 적어놓았던 것이다.
그들 세 사람에게 지시할 지령을 영어로 작성하여 칼집에 넣어놓을까도 고민했다. 하지만 작성할 틈도 없었을 뿐더러,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여대세, 김세빈, 윤업. 이들이 어떤 녀석들이었는가. 어디를 가도 뒤처지지 않는 수재들이 아니었던가. 모든 것은 녀석들의 판단에 맡기기로 했다.
한명련은 지난 사천 임시 수영에서의 일 이후로 완전히 우리 무리에 합류했다. 무엇보다도 대련으로 친해진 정범례의 영향이 가장 컸다. 용맹에 비해 순진한 한명련이 무뚝뚝하고 사교성이 부족한 정범례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느꼈다는 사실이 놀랍다.
한명련이 우리 무리에 합류하는데 최윤의 역할도 상당했다. 진주를 거쳐 상주로 오는 동안 최윤은 한명련에게 스스럼없이 대해줬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한명련도 우리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던 것이다.
김덕령과 그가 부리는 장사들의 존재가 심히 부담되긴 했다. 그들은 3년 전부터 모든 관아에서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녔지만, 끝내 관의 수사망을 교묘하게 벗어나던 신출귀몰한 자들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근영과 이수광에게 김덕령과 장사들이 있다면, 내게는 감사군 부장들이 있다. 앞서 들어오는 여대세, 김세빈, 윤업, 최윤, 한명련 뒤로 김덕령과 그가 부리는 장사 6명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 뒤에서 정범례, 김사종, 정개룡, 정수린, 양업손이 서 있었다. 김덕령이 제아무리 용력이 강하다 한들, 이들 모두를 상대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나도 있다. 분명 저 뒤에도, 저저 뒤에도 이근영과 이수광, 김덕령의 수하들이 겹겹이 이곳을 에워싸고 있겠지만,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들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을 것이다.
이근영과 이수광이 모아온 의병은 모두 5천 명이었다. 이들 중에는 지난 시간 이근영과 이수광, 김덕령과 함께한 사람도 있었겠지만, 이번에 모은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몇 개월 군을 지휘하다보니 병졸들의 눈만 봐도 그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군생활’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하여 그들의 군사 구성 상태가 어떤지 대강 파악해두었다. 이들은 한꺼번에 군사를 움직이면 상주성 내의 모든 지휘관들의 이목을 끌 것이라 생각하고 김덕령과 소수의 정예만 움직였을 것이다.
순간 이근영과 이수광의 낯빛이 살짝 굳어졌다. 김덕령을 대기시켜두기는 했지만, 이수광은 나를 끌어들이는데 80퍼센트는 성공하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그간 나는 위험과 안전 사이에 아슬아슬한 선을 놓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때문에 이수광은 더욱 성공을 예측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 준비와 대비에 적잖게 놀란 것이 분명했다.
난 애초에 김덕령을 데리고 왔을 때부터 행동을 준비했다. 실체가 모호한 자일 수록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여론전을 펼친 이들이 누구인지,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확실해 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랬건만…… 설마 길삼봉이란 이름이 튀어나올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난 감사군 부장들에게 물었다.
“다시 한 번 묻겠네. 자네들은 어찌 생각하는가?”
그러자 의외로 정범례와 김사종, 정개룡이 앞으로 나섰다.
“형님이 생각하고 형님이 결정하십시오. 저는 늘 형님의 결정에 따를 겁니다. 명련이에게 들었습니다. 조정에서는 형님을 베려 한다면서요? 말이나 되는 소리랍니까?”
“저도 범례 형님의 뜻과 같습니다. 이러면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싸워야 한단 말이오? 허나 저치들의 말도 그냥 넘길 수 없군요. 맞는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묘합니다.”
“전투가 시작되자 도주한 이일 장군을 봐서 알고 있습니다. 쓸데없이 위에 선 자들을 쳐내는 일은 지금껏 도원수님이 하신 일 아니겠습니까? 저자들도 도원수님과 같은 일을 한 듯도 합니다. 하지만…… 쳐내야 하는 앞대가리가 어디 선까지인지는 모호하군요.”
난 다시 이근영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근영은 역시 강한 사람이었다. 당황한 기색은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평온한 상태로 돌아왔다. 그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듣던 대로 준비가 철저하신 분이시군요. 어차피 저도 이곳에 올 적에는 목숨을 걸고 오지 않았겠소? 무너져가던 세상이 왜놈들 덕에 더욱 무너져가고 있소이다. 그러니 내 무엇을 두려워하겠소이까? 기댈만한 사람은 오직 도원수님뿐이라 생각했소. 내 판단이 그러했던 바이니만큼 후회도 없소이다. 내 목을 베시오.”
“…….”
“허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지금 이대로 저를 벤다 해도 소용없습니다. ‘삼봉계’는 전국 팔도에 퍼져 있습니다. 도원수님이 상상도 못한 인물이 다수 포함되어 있을 지도 모르지요. 제 목이 평양에 당도하는 즉시 안 그래도 난리인 판국에 또 한 번 조선 사람들끼리 서로가 서로의 목을 베는 사태가 일어나겠군요. 허허허.”
“…….”
“어찌되든 제가 죽으면 다음 ‘세 개의 봉우리’가 나설 겁니다. 그리되면 정신을 이어 받은 그자가…….”
“잠시 걷지요.”
나는 이근영의 말을 잘랐다.
그런 다음 칼을 시렁 위에 올려놓고, 나부터 밖을 나섰다.
나는 이근영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고 있다. 내가 의도해서 ‘길삼봉’ 이근영을 추포한 것은 아니지만, 이대로 이근영을 잡아 참수하면, 또 한 번 대규모 사화(士禍)나 옥사(獄事)가 일어날 수도 있다. 전쟁 통에 그런 일이 발생하면 곧바로 각지에서 대놓고 역모가 일어나게 될 것이 뻔하다. 그리되면 더더욱 난세 수습이 힘들어지게 된다.
물론 전국 팔도가 각자 하고 싶은 대로 놔둬도 상관없다. 알아서 지지고 볶다보면, 시간이 지나 누군가가 다 정리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래봐야 인의(仁義)와 실리(實理)보다는 패도(霸道)가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 그러니 얻는 것보다는 오히려 잃는 것이 더 많아지게 된다.
이근영…….
그는 천하의 기재라 불리는 이수광과 무시무시한 용력을 지녔다는 김덕령을 마음대로 부리는 자다. 더군다나 순식간에 의병 5천 명을 끌어 모을 능력도 지녔다. 뒤에 누가 있는지 도무지 알 수는 없지만, 이수광이나 김덕령을 부릴 수 있고, 수많은 군졸을 모아온 것만 봐도 그가 말하는 ‘삼봉계’가 얼마나 거대한지 짐작이 간다. 이근영은 그런 조직의 수장이다.
가장 나를 두렵게 만드는 것은 최광호의 기억에서도, 정기룡의 기억에서도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정말이지 완전히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그만큼 이근영은 철저하게 자신을 숨긴 자라는 소리였다. 또 반대로 말하면 지금껏 그를 배신하고 밀고한 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소리기도 했다.
그만한 능력과 재능과 인덕을 갖춘 이근영을 베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은 일이었다.
나는 모든 병졸들을 성에 놔두고 이근영, 이수광, 여대세, 김세빈, 윤업, 최윤, 정범례, 김사종, 정개룡, 한명련, 정수린, 양업손, 김덕령만을 데리고 북천까지 나갔다.
북천에 도착한 후, 모두들 물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대기시켰다. 그런 다음 이근영만을 데리고 강가 바로 앞까지 걸어갔다.
“앉으시오.”
난 이근영에게 그리 권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이근영은 주저 없이 내 옆에 앉았다. 우리는 한동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사실 북천은 강이라 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다. 그렇다고 냇가라 부르기에 애매할 정도로 폭이 조금 컸다. ‘천(川)’이라는 글자가 아주 적절하다고 해야 할까.
내 눈은 그런 북천을 향했다. 그리고 시선을 고정한 채, 이근영에게 말을 걸었다.
“이 처사.”
“……?”
“저 흐르는 물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오?”
“무슨 말씀이신지요?”
“작다고 생각해 강폭을 넓힐 거요? 아니면 크다고 생각해 흙으로 메울 거요?”
“그거야 보는 사람 입장에 따라 다르지 않겠소?”
“허면 많은 사람들이 합의해 강폭을 넓히든 좁히든 했다고 칩시다. 공사를 할 당시만 해도 사람들이 마구 칭찬했다고도 쳐요. 그러면 시간이 한참 지나도 사람들이 잘 했다고 칭찬하리라 장담할 수 있겠소? 이 처사는 어찌 보시오?”
“그야 알 수 없는 노릇이지요.”
“좋소. 그러면 공사를 해놓은 강은 시간이 지나도 그 모습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겠소?”
“…… 그건 인간이 정할 일이 아니외다. 하늘과 땅이 정하는 것이 아니겠소? 해와 물과 바람의 이치를 한낱 인간이 어찌 안단 말이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입니다.”
“바로 그거요. 인위적으로 강둑을 막든 넓히든 물은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흘러가는 물을 사람이 어찌할 수는 없는 게지요.”
나는 슬그머니 이근영을 바라보았다. 그 바람에 이근영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현 시점에서 당신들의 눈으로 볼 때는 제게 철학이 있고 대책이 있고 옳다고 여기실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잘못되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단 말이오.”
“후세의 평가가 두려운 게요? 변화가 두려워 기존의 체제를 그대로 수용하겠다. 뭐 그런 말 아닙니까?”
이근영의 말에 난 살며시 비소를 내뱉었다.
“설마요. 그럴 리가 있겠소?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무너져 내린다고 하는데, 무너지는 것만큼은 막아야지요.”
“그럼 도원수님은 무슨 뜻으로 그리 말씀하신 건가요?”
“저 흐르는 물은 이 나라 백성들의 의지와 평가라고 말하고 싶은 게요.”
“……?”
“또한 나와 당신들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뜻이오. 만약 누군가 틀렸다고 지적하면 당신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자신이 있소?”
“…….”
나는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일 내가 당신네들의 ‘중심’에 선다면, 아래부터 위까지 모두의 생각을 수용하려 노력하겠소?”
“그것이 도원수님의 뜻이라면 따라야겠지요.”
“좋소. 그럼 당신네들의 ‘중심’에 서겠소.”
그 말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이근영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럼 첫 번째 명을 내리겠소.”
“무엇이든 따르겠습니다.”
“오늘부로 ‘삼봉계’를 해산하고, 당신도 길삼봉이라는 이름을 버리시오. 이 순간부터 당신은 인간 이근영으로 살아가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