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culus of Joseon RAW novel - Chapter 169
169화 개심(改心)
“방금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 명련이 너…… 말을 가려 하라.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고.”
“전하는! 전하는 틀렸습니다!”
말을 가려 하라는 내 진심어린 충고에도 불구하고, 한명련은 더더욱 큰 소리로 지랄한다. 한명련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잘해봐야 나와 여대세, 최윤, 이희춘 뿐이다. 우리는 현대에서 온 사람들이고, 현대였으면 한명련의 이야기를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모욕적인 발언은 물론이거니와, 태생적인 신분제도와 비인간적인 대우까지. 사람을 사고파는 저급한 사회 인식 속에서 한명련이 겪었을 갖은 고초와 수모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이다.
이 시대의 관점으로 본다면 노비란 사고파는 ‘재화’ 정도에 불과했다. 재화라서 가격 변동이 있을 수는 있지만, 대충 말 한 필의 가격이면 노비 세 명을 살 수 있었다. 그러니까 사람이 말보다 저렴하다는 소리다. 지금같이 전란에 휩싸인 시기면 말이 귀해진다. 그러면 당연히 노비의 가격은 상대적으로 더 싸질 수밖에 없다.
여기 조선으로 온지 한참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놈의 신분제도는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만약 내가 정기룡이 아니라 이 나라 왕 선조로 환생했다면, 제일 먼저 신분제도부터 박살냈을 것이다. 밑에서부터 하나하나 기어 올라가야만 하는 지금 내 상황이 아쉽고 원망스럽다.
나나 여대세, 최윤, 이희춘.
현대에서 넘어왔기에 그런대로 한명련의 이야기를 받아주고 이해해줄 수는 있다. 하지만…… 김사종은 다르다. 그는 토종 조선인이고, 양반이었다. 아무리 그가 우리의 비밀을 알고 있고, 미래의 한국에 대해 들은 바가 많다지만, 이해해줄 수 있는 선이 있는 법이다. 특히 임금의 목을 치겠다는 한명련의 마지막 발언을 김사종이 너그럽게 들을 리가 없었다.
안 그래도 김사종은 주먹을 불끈 쥐며, 눈에 힘을 팍 주고 있다. 상황을 눈치 챈 여대세가 김사종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 한명련이 나를 해칠 마음이 없고, 원망의 화살을 선조에게로 돌린 만큼, 적당히 유야무야 넘어갈 생각인 모양이다.
“전하는 이 나라 온 백성들의 왕이 아니라, 오로지 양반 놈들의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왕이었단 말입니까?”
“…….”
“왜 꼬투리를 잡아가면서 도원수님을 미워하는 건가요? 왜 도원수님을 죽이라고 하는 건가요? 아무 잘못도 없는 도원수님께?”
“…….”
“도원수님이 왜놈들을 끌어와서 이 난리를 만들었나요? 정작 왜놈들을 끌어온 자들은 정승이니 장군이니 하면서 여전히 떵떵거리며 살고 있잖아요. 나가서 싸우다 제일 먼저 뒈지는 건 저 같이 미천한 것들 아니겠습니까? 왜 저같이 미천한 자들만 앞세워 싸우게 하나요? 개같이 대할 때는 언제고?”
“…….”
“제일 먼저 달아난 건 양반 놈들과 이 나라 임금 아닌가요? 그런 인간이 어떻게 이 나라 주인인가요? 제가 못 배워 처먹어서 대그빡이 돌입니다. 분별할 능력이 전혀 없어요. 그렇더라도 이 나라의 왕이란 놈이 난리의 책임을 도원수님께 덮어씌우려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보여! 그게 왕인가요? 전하는 틀려 처먹었습니다.”
한명련이 임금의 밀명을 이실직고하려는 줄 알았다. 그러던 것이 자기 삶에 대한 고백과 신세한탄으로 이어지는가 싶더니, 어느덧 세상에 대한 분노로 바뀌었다.
이야기는 충분히 들을 만큼 들어줬다. 딱한 사정이야 알겠고, 억울한 심정이야 이해한다. 하고말고. 헌데 지금 당장 뭘 어떻게 해줄 수 있단 말인가.
한명련의 말이 맞긴 맞다. 전쟁의 책임이든, 반역을 도모한 혐의든, 명령 불복종이든, 선조는 뭐든 한 가지를 내게 덮어씌우려고 슬슬 시동을 걸고 있다. 아무리 봐도 선조는 나를 써먹고 버릴 인간으로 생각하나 보다. 아무튼 한명련이 나를 해칠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이 확실하니, 이제 슬슬 이쯤에서 마무리할 필요가 있다.
가장 걱정되는 사람은 역시 김사종이다. 일단 녀석부터 잘 설득해서 이해해달라고…… 어라? 뭐지? 김사종은 다시 제자리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다. 마치 이해하고 동의하는데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냐는 투였다.
그리고.
“거참 맞는 말만 쏙쏙 빼서 해주네, 그려. 말 한 번 잘 해줬다. 아주 속이 다 시원하구먼. 엉? 계속해봐.”
최윤이 자세를 제대로 고쳐 잡으며 말했다. 최윤에 이어 여대세까지 나서면 곤란해진다. 여기서 그만 끝내야만 한다.
“너희들…… 말조심…….”
쾅―!
모두에게 주의를 주고 이야기를 적당히 마무리하려 했다. 그런데 엉뚱한 곳에서 상황을 중단시켰다. 방문을 통째로 저만큼 날려버린 곳에서 한 사람이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거, 씨발 진짜, 존나 쫑알대네. 닝기미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원. 힘들어 뒈지겠는데, 휴식 보장 안 해줍니까? 엉?”
순간 김세빈이라도 튀어나온 줄 알았다. 헌데 아니었다. 늘 점잖기만 하던 윤업이 거기에 서 있었다. 이 녀석이 욕하고 막말하는 건 정말 처음 본다. 의외의 모습에 다들 당황한 모양이다. 동영상의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듯, 모든 행동을 멈추고 윤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한명련 별장님. 뭐가 어쩌고 어째요? 누가 죽으면 뭘 어쩐다고요? 하…… 진짜…… 사람 좆도 무시하네.”
한명련은 윤업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눈을 크게 뜨고, 입만 뻐끔뻐끔 벌려댔다.
“자, 한번 보십시오. 멀쩡히 살아 있는데 죽긴 누가 죽습니까? 진짜 저 무시합니까? 예? 제게도 자존심이 있습니다. 의원이 칼을 쥐고 집도했는데 설마 숨통이 붙어 있는 사람을 죽이겠습니까? 예?”
윤업은 손가락으로 방 안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온몸을 천으로 칭칭 동여맨 정범례가 누워 있었다. 우리야 저 상태를 보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길이 없지만, 윤업이 그렇다니까 그런 거다.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저, 정 교위님은…… 살아있습니까?”
한명련은 울먹이는 목소리를 윤업에게 재차 확인했다. 정범례가 살아 있다는 말을 반드시 윤업의 입으로 듣고 싶은 모양이다.
“멀쩡히 살아 있습니다. 치료받다가 기절해서 자고 있습니다. 정 의심스러우면 가서 확인해보시죠.”
그 말에 한명련은 마룻바닥에 엎드려 엉엉 울기 시작했다. 얼굴을 바닥에 파묻고 주먹을 꽉 쥔 채였다.
“아우……, 방 따습고, 궁뎅이가 뜨끈뜨끈 해지니까, 하도 잠이 와서 자려고 했더니, 뭔 시궁창 같은 소리들만 합니까? 할 수 있는 다 했고, 환자도 그냥 자고 있을 뿐이었는데, 좀 자게 내버려두면 안 됩니까? 귀가 아파서 잘 수가 있어야지.”
여대세와 이희춘, 김사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최윤은 한명련의 어깨를 토닥였다. 난 마루 위로 올라가 방 안을 눈으로 살폈다. 과연 윤업 말대로 정범례는 편안한 얼굴로 누워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윤업을 돕던 사람들이 누워 자다가 시끄러운 소리에 주섬주섬 반쯤 일어나있었다.
“범례의 상태는 어떠한가? 앞으로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겠나?”
“다테 마사무네인가 뭔가 하는 애꾸눈 새끼가 심하게 긁어놨습니다. 뼈까지 심각하게 파버려 놓으면 어쩌자는 건지 원……. 헌데 그 애꾸눈 새끼가 자기 칼을 무슨 쇳덩어리에 쳐댔었나 봅니다. 녹이 잔뜩 끼어 있었나 보더라고요. 그걸 제거한다고 살을 많이 도려냈습니다.”
“눈은? 앞은 볼 수 있겠는가?”
“아니요. 안구가 터져서 더는 회복 불능입니다.”
“한쪽 눈으로만 살아야 된다는 말이구나……. 다른 곳은? 다테 마사무네랑 싸우기 전부터 입은 상처가 장난 아니게 많던데.”
“말도 마십시오. 칼 맞은 곳이야 말도 안 되게 많고, 총상까지 입었던데요?”
“총상을?”
“허리 윗부분에 총을 맞았습니다. 다행히 스치고 지나간 것 같지만, 조금만 놔뒀으면 위험했습니다. 장기를 최대한 건드리지 않으면서 총 맞은 부위를 도려내느라 저도 진땀 뺐습니다.”
“그 부분은 앞으로 이상이 없겠는가?”
“지켜봐야죠. 푹 쉬게 해주면 낫게 될 겁니다.”
“고생했다.”
윤업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한 별장님!”
그런데 윤업이 한명련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 소리에 한명련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저는 말이죠, 한 별장님. 양반으로 태어나 궂은일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부모 잘 만나서 글이나 파먹으면서 살았고, 운동한답시고 활이며 창, 말 타기를 배운 놈입니다. 지금 이 빌어먹을 세상……, 아니 ‘먼 훗날’까지도 이 나라의 ‘지배 계층’이 될 집안에서 나고 자란 놈이라 이 말입니다.”
“…….”
“헌데 별장님.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저는 별장님이 천민이라고 무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지금도 존칭을 꼬박꼬박 써가면서 대하지 않습니까?”
“…….”
“그래요. 세상엔 나쁜 놈들이 정말 많습니다. 많고말고요. 허나 나쁜 놈들이 많다고 세상 모두가 나쁘겠습니까? 하나하나 삐딱하게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선도 많은 법입니다.”
“…….”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꿔보고 싶으세요? 그럼 그만 징징거리십시오. 그따위 태도로는 자기 자신도 못 바꾼다고요. 예?”
윤업의 큰 목소리로 소리치자, 한명련은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이고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
“이, 이분이 그, 그 정, 정범례 교위시라고요?”
“그래. 정범례다.”
“…….”
누워 있는 정범례를 바라보며 탁사흠은 아무 말이 없었다.
“범례가 더는 몸이 상하게 놔둘 순 없구나. 하여 지리산으로 보내니, 사흠이 너도 따라가거라.”
“네…….”
“사흠아. 앞으로 네가 범례의 수족이 되어 잘 보좌하도록 하라. 무뚝뚝하긴 하지만, 범례는 참으로 인간적인 녀석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나으리.”
탁사흠이 수행군관들과 함께 내 명령을 김면에게 전달하고 복귀한 건 저녁때가 다 되어서였다. 난 수행군관들과 탁사흠에게 정범례를 후방 지리산으로 운반하게 했다. 윤업의 말에 따르면 정범례는 몇 달 이상은 요양해야 간신히 걸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태라고 했다.
정범례가 중요한 전력이긴 했지만, 어쩌겠나. 죽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지. 정범례를 배웅하면서 다들 고개를 숙였다. 나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였다.
***
정개룡과 김덕령이 진중을 나선지 만 하루가 다 되어갔다. 헌데도 아직 소식이 없다. 그들이 올 때까지 휴식을 취했으나, 지휘관들은 불안해 제대로 쉬지 못했다. 난 그런 그들을 죄다 불러 모았다.
임시 막부에는 나와 이희춘, 여대세, 최윤, 김사종, 한명련, 손인갑과 여러 군관들이 모였다.
“김덕령에게 감사군 중에서 아직 힘이 남은 자들을 선별하라 했었다. 그들과 보졸만으로 올라간다. 정개룡과 김덕령이 무슨 소식을 들고 오든, 이 앞은 산이 많아 기병이 불리하니 어쩔 수 없다.”
그때 최윤이 나섰다.
“형님, 아니 도원수님. 앞으로 총기병은 빼죠.”
“총기병을 빼자고?”
“네, 솔직히 의미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유럽에서 총기병이 망했으면 망한……, 아니, 망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녀석이 진짜……. 자나 깨나 말조심 하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건만. 하여간 방심하면 곧바로 현대 용어가 튀어나와요. 다행히 ‘유럽’이란 말에 반응하는 사람은 여대세와 이희춘, 최윤이었다. 김사종을 제외하고 다른 이들은 그저 멀뚱멀뚱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유가 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