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culus of Joseon RAW novel - Chapter 187
187화 충청수영(忠淸水營)
정기룡으로부터 임금을 보위하란 명령을 받은 김천남과 황치원은 당장 다음 날 함께 갈 인원을 차출했다. 무려 임금에게 보내는 지원군이었다. 이토록 중대한 임무에 아무나 데리고 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하여 김천남과 황치원 두 사람은 감사군과 보졸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자들로 각기 500명씩 선발하였다.
군사 선발에 소요된 시간이 반나절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는 모두 정기룡과 김사종 덕분이었다. 정기룡은 상주성에 머물기 시작하면서 김사종에게 모든 군사의 개별 능력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김사종은 나름 분명한 기준을 갖고 군사들을 조사하고 평가했다. 그러면 정기룡이 그를 토대로 각종 분석을 실시했다. 그 분석을 기초로 모든 병력들은 능력에 따라 각 부대에 골고루 재배치되었다. 또한 그런 식으로 하여 모든 부대의 전력은 균등하게 일정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개별 능력이 약간 부족한 자들에게는 보강 훈련을 실시했고, 전투 수행이 아예 힘든 자들에게는 병역 대신 다른 군사지원 업무를 할당했다.
아무튼 정기룡의 분석이 더해진 김사종의 평가 자료가 있었기에 김천남과 황치원은 우수한 군사를 그토록 빨리 선별할 수 있던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참 순조로웠다. 이때까지만 해도.
“허…….”
충청도 보령의 자리한 충청수영(忠淸水營)에 이르렀을 때부터 김천남과 황치원의 인상은 심하게 구겨지기 시작했다.
“이거 참 민망하구먼…….”
충청수사(忠淸水使) 정걸은 멋쩍은 듯 그들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려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저기 보수한 흔적이 역력해보이긴 하나 그래도 썩 좋아 보이지 않은 배의 상태하며, 턱없이 부족한 화포와 총통은 물론이고, 그마저도 제대로 운용할 수 있는 숙련된 화포수가 보이지 않았다. 또한 각 배에 배정된 격군의 수가 일정치 않았고, 그들의 부대배치와 훈련 상태도 아주 엉망이었으며, 노를 젓는 호흡마저 전혀 맞지를 않았다.
“이게 어찌 된 건가요? 수사님!”
그동안 상주에 주둔하며 수준 높은 부대와 군사만 봐와서 그런지, 김천남의 눈에는 충청수군이 아예 군인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에휴……. 자네가 뭘 말하고 싶은지 알겠는데……. 나라고 별 수 없는 일이잖은가. 그저 한숨만 나오는 일일세, 그려.”
수십 년간 군졸을 부려온 노장(老將) 정걸. 그의 깊은 한숨 속에 그간의 애로사항이 모조리 스며들어 있었다.
뚜렷한 ‘적’이 있기에 군(軍)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고,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국가 방비에 있었다. 이 당시의 ‘적’은 북쪽의 여진족과 남쪽의 일본이었다. 그렇기에 국가 전력의 대부분은 북쪽의 압록강과 두만강 주변, 그리고 남쪽해안에 골고루 포진되어 있었다.
적의 위치와 방향을 따져보자면, 충청수군은 지정학적으로 상당히 애매한 위치였다. 북쪽의 여진족과 맞닿은 것도 아니었고, 남쪽의 일본과 맞닿아 있지도 않았다.
충청수군의 임무는 충청도 인근까지 접근한 일본 해적을 격퇴시키거나 남해안을 지원하는 일이 전부였다. 허나 일본 해적만 하더라도 대부분 남해안을 넘지 못하고 경상수군과 전라수군에게 박살나기 일쑤였다.
설령 일본 해적이 서해안까지 들어온다 하더라도, 그들이 무슨 담력이 있어 일부러 뱃길을 빙 돌아 서해안까지 올 수 있을까. 서해안까지 온 일본 해적들은 거의 남해안에서 깨져 도망친 잔당일 뿐이었다.
결국 충청수군의 주요임무란 사실상 없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뱃길을 이용한 세선(稅船)과 상선(商船)의 관리를 주로 하긴 했지만, 남해안에 비해 상대적으로 업무가 가벼웠을 뿐만 아니라 군인이 투입될 만큼 문제되는 일도 딱히 없었다.
임무는 많지 않았고, 서해안은 지나칠 정도로 오랫동안 평화로웠다. 그런 날이 지속될수록 수군의 배는 허술해져만 갔다. 게다가 화기와 화약 보급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병적서류도 개판인 경우가 허다했다. 충청수군엔 군인으로서 그 임무를 다할 수 없는 자가 많았고, 당연히 그들의 훈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렇다보니 충청수군은 그 전문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고, 수군은 육지의 국가사업에 부역으로 동원되는 경우가 많았다.
충청수사란 자리만 해도 그렇다. 일의 강도가 그다지 높지 않아 대개는 사직을 앞둔 노장(老將)이나 노신(老臣)에게 주어지는 ‘예우’ 차원의 관직이 바로 충청수사였다.
당장 정걸만 해도 그렇다. 정걸은 무려 산수(傘壽, 80세)를 바라보는 나이였다. 그는 장수로서 오랫동안 군에 몸담고 있던 만큼 그 누구보다도 군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정걸이라고 충청수군에 문제점이 많다는 사실을 왜 몰랐을까.
그렇지만 군인으로 살아온 세월이 길다는 것은 그만큼 타성과 관성에 젖어있다는 말과 동치였다. 정걸에겐 군의 문제점이 보이긴 하나, 그걸 개선할만한 묘책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나라고 이 난리가 벌어질 줄 알았겠는가?”
정걸은 연신 혀를 찼다.
“군사라도 더 모으실 수 있었잖습니까?”
“그러고 싶었지. 헌데 병적서류를 관리하던 지방고을 수령들이 죄다 도망치고 없는데 무슨 수로? 그나마 탈영하지 않고 버텨준 수졸들이 고마울 뿐이야.”
“그러면 훈련은요?”
“믿기진 않겠지만, 이게 그래도 훈련을 많이 한 거라네.”
정걸은 아주 트인 사람이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꼬치꼬치 따져 묻는 김천남이 버르장머리 없다며 장을 치거나 목을 벴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걸은 그런 김천남에게 결코 성내지 않고 하나하나 대답해준다. 사태가 사태다보니 실제 전투를 경험한 김천남의 의견을 귀담아 듣고 싶어서였다.
정걸은 김천남으로부터 그간의 전투소식과 정기룡의 전략복안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김천남과의 대화 끝에 그는 드디어 결심을 내린다.
“지금 당장 배를 띄워 전라수영으로 가겠네. 인근 고을을 뒤져 수군을 더 모으도록 할 터이고, 배는 전라수영에 들어가서 손보도록 하겠네.”
“아직 전하의 허락을 받지 않았잖습니까?”
“전하의 허락을 받고 어쩌고 하면 늦네. 안 그래도 훈련도 미진하고 배도 멀쩡하지 않은데 언제 기다리겠나? 어차피 전하께서 허락하실 일일 텐데, 미적거리면 지체한 손해는 수군이 온통 뒤집어쓰게 될 게야. 그리할 순 없네.”
정걸은 노련했다. 김천남의 대략적인 설명만 듣고도 정기룡이 전체적으로 군을 어떻게 운용하고 싶은지 대번에 알아챈 것이다.
문제는 시기의 적절성이었다.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에 시기를 점칠 수 없음을 정걸은 ‘선조치후보고’를 택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럼 최소한 충청도 병권을 쥐고 계신 진충병마절도사 이일 장군께는 보고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 이일?”
이일 이야기가 나오자, 정걸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이일의 성격이 어떠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예상되는 잡음을 생각하자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려온 것이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겠네.”
그는 그 한마디로 일축해버리고 말았다.
김천남과 황치원은 정걸과 상의한 끝에 딱 한 척의 배만 사용하기로 했다. 전력을 낭비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같은 이유에서 감사군과 보졸을 격군으로 운용하여 자체적으로 평양성까지 가기로 했다. 그리하여 배에는 배를 지휘할 수군 장수와 최소한의 수졸을 제외하면 전부 감사군과 보졸로만 채워졌다.
문제는 말과 사람이 많아 한꺼번에 수송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들을 태운 배는 보령에서 평양까지 두 번이나 왕복해야만 했다.
***
김천남과 황치원은 충청수군의 상태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평양성에 당도하자 여기는 여기 나름대로 문제가 많음을 깨달았다.
사실 김천남과 황치원은 평양성에 당도하면 모든 문무관들이 성 밖까지 달려 나와 환영해주리라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경상수군과 경상좌도의 육군이 전부 쓸려나가는 판국에 경상우군을 중심으로 한 정기룡의 군사만이 연속적으로 승전했었고, 그로 인해 일본군은 경상도에서 더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김천남과 황치원은 모든 벼슬아치는 물론이고 병졸들에게까지 전투 경험담을 들려줄 생각에 가슴이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잠시 쉬도록 하게.”
그들을 맞이한 사람은 기껏해야 유도대장(留都大將) 이양원(李陽元)뿐이었다.
임금은 김천남과 황치원이 정3품 상계인 통정대부 이상의 당상관이 아니란 이유로 만나주지 않았다. 임금을 보위하란 명을 받고 기껏 여기 평양성까지 달려왔건만. 정작 임금은 김천남과 황치원의 직급과 품계가 낮아 만나줄 수 없다고 했다.
다른 대신들과 장군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임금과 마찬가지로 김천남과 황치원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김천남과 황치원을 애써 만나려 하질 않았고, 전략과 전술 토의에 불러주지도 않았다.
딱 한 사람.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자가 있었다.
“형님은 무사한가?”
그는 함경도병사 신할이었다. 형인 신립의 안부가 궁금했던 신할은 일부러 김천남과 황치원을 찾아왔다. 그들에게서 신립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자 신할은 안도의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이후로 신할이 김천남과 황치원을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후…….”
김천남이 장탄식을 했다.
“후…….”
이번에는 평양성에 모인 군사를 둘러보며 황치원이 탄식했다.
이때까지 평양성에 모인 군사의 수는 자그마치 2만 명이었다. 평양성엔 조선이 내세울 만한 행정 전문가란 전문가가 다 모여 있었다. 임금이 달달 볶아대고 주요 대신들이 끊임없이 채찍질을 하는데, 모이는 군사가 적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들 군사들은 그 수만 많았지 충청수군과 마찬가지로 오합지졸 그 자체였다.
아니, 오히려 충청수군이 더 낫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충청수군은 수사 정걸이 수군의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었고, 어떻게든 그를 극복해보려 노력하고 있었다. 정걸은 노련미 넘치는 노장답게 빠른 판단력과 신속한 행동력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반면 평양성에는 정걸만큼 결단력을 지닌 자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 중에 김천남과 황치원이 데려온 군사가 엄선된 정예부대임을 알아보는 자도 거의 없었다.
게다가 실질적인 전술에 관한 경험을 가진 자도, 군사를 훈련시키는 일에 능한 자도, 무기나 화기에 정통한 자도 없었다. 다 입으로만 일을 하는 형국이랄까.
“아……. 지금 뭐하고 있는 거람.”
“…… 희춘 형님이 미래엔 조선 왕조가 무너진다고 했는데……. 왜인지 알 것도 같다. 에휴…….”
직접 노를 저어가며 간신히 도착한 평양성. 이곳은 그저 실망뿐인 곳이었다.
지금껏 본 것만 해도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김천남과 황치원은 그들의 사기를 완전히 떨어뜨릴 만한 사실을 하나 알게 된다.
“자네들이 정기룡이 보낸 군관들인가?”
평양성에 도착한지 사흘이 지난 다음에야 그들 앞에 여러 군관을 거느린 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병조판서 김응남(金應南)과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그리고 부원수 신각(申恪)이었다.
김천남과 황치원은 이들을 만나보고 나서야 눈치챘다. 지금껏 평양성에 있던 문무관들이 왜 김천남과 황치원을 냉대했었는지를. 그리고 이제껏 평양성에 있던 문무관들이 고의로 그들에게 관심을 두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김천남과 황치원은 깨닫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