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d Academy 1st Hit Instructor RAW novel - chapter 55
“마음대로.”
신하연이 듀얼 신청 버튼을 눌렀다.
[듀얼이 시작됩니다.]“내 턴. 드로우.”
지릿.
여한설은 카드를 뽑는 순간에 미세한 오한이 들었다. 방 안에 에어컨은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TV를 보다 이쪽의 듀얼을 구경하는 고양이뿐.
오한이 들게 만든 것은,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신하연’이 뿜어내는 기세였다.
‘표정이 완전히 변했군.’
1위가 걸린 듀얼에서도 저런 표정이었다.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나. 아니.
그렇다고 해도 크게 승률이 변화하지는 않을 터다. 그녀는 자신의 덱을 믿었으니까.
첫 판. 여한설은 템포를 천천히 가져갔다. 일거에 몰아치는 신하연의 필드를 클리어하지 못했다. 패배.
두 판째. 조금 더 빠르게 몰아쳤다. 교환비를 신경쓰지 못해 핸드가 일찍 말라버렸다. 「기적의 환영」을 제압할 카드가 없어졌다. 패배.
‘···이런 몇 판의 패배는 다소간의 편향일 뿐이다.’
결국 승률은 정직하다. 여한설은 그렇게 생각하며 평정심을 유지했다.
세 판째. 패배. 네 판째. 패배···.
패배가 계속 쌓여나갔다.
그리고 약속된 두 시간째가 됐을 때. 여한설은 단 한판도 이기지 못했다.
***
탑이 있는 역에 도착한 나는 공중화장실에서 슈트를 갈아입었다. 지난 번에 탑을 갈 때 슈트를 입은 채로 출발했다가 지하철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때의 일은 생각하지 말도록 하자.
수트를 제대로 갖춰 입은 나는 탑으로 향했다.
[두 번째 플로워로 진입합니다.]두 번째 플로워부터 시작하는군. 1층에서 10층까지가 무너져 내렸는데도 숫자는 그대로인 모양이다. 하긴, 그러지 않는 게 더 이상하긴 하다.
두 번째 플로워에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여러 인종의 사람들이다. 번역기를 들고 올 걸 그랬나. 아니, 굳이 번역기를 들고 올 필요까지는 없다.
“Hi noob. Are you looking for a···.”
“쏘리. 아이 캔트 스피크 잉글리씨. 바이.”
파티 사냥을 할 생각이 있었다면 파티원을 모집해야 하니 번역기가 필요했겠지만, 나한테는 해당 없는 일이다. 파티로 몰려 다니면 내가 얻은 보상을 나눠야 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파티 사냥이라고 해 봤자 사냥 중에 나온 몬스터와 1:1을 해야 하는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굳이 파티를 맺는 것은 몬스터 여러 마리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혼자서 처리해야 하는 몬스터의 수가 줄어든다는 것과, 덱이 말려서 졌을 때 백업(Backup)을 해 줄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파티원 한 명은 있는게 좋기는 하지만.”
아무리 나라도 덱이 말리거나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나는 혼자 있는 공략자들을 하나하나 돌아봤다. 금발벽안. 외국어 사용, 탈락. 은발적안, 외국어 사용, 탈락.
···쓸만한 사람이 한 명도 없네.
기본 영어 단어장이라도 들고 올 걸 그랬나 후회하려던 그때.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Hey, are you···.”
“Sorry. I just wanna play solo.”
남연철이다. 상황을 보아하니 혼자 온 모양이다. 온 이유는 크게 생각하지 않아도 됐다. 내가 낸 기말고사 대체 과제를 하러 온 거겠지.
남연철. 한국어 가능. 자존심이 있는 남연철의 성격을 생각하면 나오는 보상을 크게 나누지 않아도 될 터다. 게다가 뒷바라지를 해 줘야 할 만큼 약하지도 않고. 결정적으로 그녀의 덱은 「고철 로봇」덱. 사냥이 늦을 테니 내 보상을 엄청나게 가져가지도 않는다.
누가 낚아채가기 전에 내가 낚아야 한다.
“파티 없어?”
“파티 할 생각 없으니 꺼···.”
‘꺼져’라는 말을 내뱉으려던 남연철이 나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전익현 강사님이 왜 여기 있는 거죠?”
“···나인 줄 어떻게 알았냐?”
헬멧을 쓰고 있는데. 바로 나인 걸 알아보다니. 나는 헬멧의 선팅을 다시 확인했다. 딱히 칠이 벗겨진 곳은 없는데.
“···알아내는 방법이 있어요.”
뭐. 그녀가 그렇다니 그런 모양이지.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듀얼로그 뽑으러 왔어?”
“맞아요.”
“혼자서 왔어?”
말을 하고 보니 살짝 위험한 발언이다. 말 해 놓고 보니 헌팅 같아 보이잖아.
남연철의 키는 꽤 작은 편이다. 잘못 보면 초등학생처럼도 보인다.
그런 애한테 말을 걸어대고 있는 시꺼먼 수트의 신원불명의 남자.
···오해를 받아도 할 말 없는 상황이군.
주변의 외국인들이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외국어라고는 한마디도 모르지만 수근거리는 말에 위험한 단어들이 섞여 나온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식은땀이 등으로 흘러내린다. 그냥 튀어야 되나. 아니, 여기서 튀면 더 수상해 보이잖아.
“왓 유 루킹? 헤이! 겟 아우 히어! 돈 룩 미!”
나는 안면몰수하고 당당하게 나가기로 했다. 어차피 익명이 보장되는 헬멧을 쓰고 있다. 그러니 뻔뻔하게 나가도 괜찮을 거다. 아마도.
“영어 진짜 못하시네요.”
“괜찮아. 생활영어 정도 수준만 해도 대회 나가고 하는 덴 지장 없어.”
“···그게 생활영어인가요?”
“그래.”
불만 있냐. 외국어를 할 때 90%를 먹는 게 자신감이라고 영어선생님이 그랬다. 나는 자신감있게 말했으니 90점은 따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긴 해요. 말씀대로 저는 혼자 왔어요. 원래 같이 오려던 일행이 있었는데 떼어 놓고 왔어요.”
“파티는 할 생각 없고?”
“일단은요. 제 덱은 탑에 안 어울리니까요. 방해가 될 가능성이 커요.”
사냥도 느리고. 그럴 바에는 혼자 하는 게 낫죠. 욕도 안 먹고. 그녀는 우울하게 말했다.
나는 오히려 좋다. 말했듯 그녀의 사냥이 늦어지면 그만큼 내가 사냥할 기회가 많아진다는 뜻이었으니까.
“파티할래?”
내 말에 남연철은 내 눈-이 있을 법한 부분-을 빤히 노려봤다. 내 의중을 읽어내려는 모양이다.
뭐, 마음을 읽어 봤자 강사가 학생을 도우려는 따뜻한 마음으로 신청한다고 생각하겠지. 이런 점에서 강사란 건 좋은 직책이다.
“···제 사냥이 늦으니까. 강사님 사냥할 거리가 늘어나서 좋다는 생각이군요.”
뭐지.
어떻게 안 거야.
내 귀에 도청장치 심어놨니?
“어떻게 안 거냐?”
“쾌락살인마는 왜 살인을 하죠?”
“···재밌으니까?”
“그렇죠.”
그걸로 끝이었다. 아니. 제대로 된 설명을 하라고. 뭐가 ‘그렇죠’인데? 쾌락살인마랑 이 대화가 도대체 어디에 접점이 있는지 머리를 짜내고 있는데 남연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요. 파티할게요. 일방적인 동정이라면 받을 생각 없지만 상호호혜적인 상황이면 괜찮겠죠. 악어새랑 악어처럼. 테러리스트와 협상 전문가처럼.”
“뭔 비유가 그따위냐?”
“이것만큼 적절한 비유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지. 귀찮게 머리를 굴리기를 포기한 나는 플로어를 둘러봤다. 두 번째 플로어 구석에는 첫 번째 플로워처럼 신상 하나가 서 있었다.
“11층 처음 온 거지?”
“네.”
“그럼 무기를 골라야겠네. 물론 나도 골라야 하지만.”
나는 신상에게 다가갔다. 눈을 감고 있는 신상의 무수한 손은 손마다 제각각의 무기들이 달려 있었다.
[당신은 처음으로 두 번째 플로어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금속의 시련. 당신에게 걸맞는 무기를 선택해야 합니다.]1층부터 10층까지가 「숲」이 테마인 곳이었다면 11층부터 20층까지는 「금속」의 공간이다. 이곳의 메인 테마는 ‘무기의 강화’다. 물론 가지고 온 덱도 중요하지만 메인이 되는 건 매 게임의 시작마다 장착된 채 시작하는 무기다 이말이지.
[무기를 버린다면 시험은 처음부터 치러야 합니다.]사용하던 무기를 버릴 수도 있지만, 그러면 11층부터 다시 등반을 시작해야만 한다.
강화에 필요한 재료를 모으는 데 걸리는 시간을 생각하면 처음부터 무기를 제대로 고르지 못하면 시간이 많이 드는 장소라 이거지.
내 목표는 2주동안 19층까지 도착하는 것. 되도록이면 첫 시도에서 20층을 공략하는데 충분한 무기를 만드는거다.
무기가 구려서 리셋을 해야 하는 상황은 절대 사양이다.
[곧, 무기를 고를 장소로 이동합니다.]“추천할 만한 무기 있나요?”
“글쎄.”
남연철의 덱에 맞는 무기라. 떠오르는 게 몇 있기는 하지만··· 그리 추천할만한 무기들은 아니다. 죄다 리스크가 있거나, 운을 타거나, 많은 제약이 있는 무기들이다.
그도 그럴게 내 머릿속에 떠오른 무기들은 모조리 ‘20층 클리어’를 가정할 때에 고를 물건들이었으니까. 그냥 무난한 무기를 추천하는 게 좋겠다. 무난한 무기는···
“무난한 건 싫어요.”
내 마음속을 읽기라도 한 듯이 남연철이 말했다. 진심인 표정이다. 평범하고 무난한 길은 그만큼 간단한 길이다. 힘들지 않고, 힘들이지 않고 높이 오를 수 있는 크고 평탄한 길. 하지만 꼭대기에는 오를 수는 없는 길.
남연철의 확고한 두 눈은 그런 길을 추천해주길 바라지 않았다. 힘들고 거칠더라도 정상에 설 수 있는, 그런 길을 바라는 눈이다.
저런 눈을 보고도 무난하고 평범한 길을 추천해 준다면 악인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악인이 아니다.
“수정구.”
“네?”
“수정구를 찾아.”
[검림劍林으로 이동합니다.]여한설은 이를 악물었다. 잘못된 플레이는 없었다. 아니,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몇 번 이길 뻔했고.
하지만 결과는 어떤가. 전패라는 비참한 성적표를 받아들어야 했다.
“으아아. 머리 아파아. 역시 엄청 잘하네.”
신하연은 2시간이라는 제한시간이 울리자마자 바닥에 엎어져서 반쯤 죽어가고 있다.
“···왜 내가 진 거지?”
신하연은 여한설의 말에 몸을 뒤집고 상체를 일으켰다.
신하연의 성격이라면 ‘오늘은 내가 운이 좋았어.’라거나 ‘다음 번에는 내가 질 수도 있겠어.’같은 대답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부득탐승不得貪勝이라는 말. 알아?”
“몰라.”
“언제나 이기기를 탐하면, 이길 수 없다는 뜻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군.”
말도 안 되는 선문답 같은 소리나 하다니. 역시나 물어본 게 잘못이었다. 자신이 강해진 이유를 알려 줄 리가 없다.
“여한설. 너는 나를 얕잡아봤어.”
“부정하지는 않겠어.”
틀린 말은 아니다. 처음에 만만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전력을 다했어. 처음부터.”
애초에 얕잡아본다고 해서 쉽고 가벼운 수를 둘만큼 그녀는 허술한 듀얼리스트가 아니었다.
“전력이라···. 한판 한판에서는 전력을 다했겠지.”
“무슨 뜻이지?”
“2시간을 나한테 쓰고, 돌아가서 시험 준비를 하려고 했지?”
“맞아.”
“나라면, 강사님이 올 때까지 듀얼을 계속하자고 했을 거야.”
여한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나에게는 시간이 없어.”
“맞아. 그래서 진 거야. ‘모든 걸’ 다 잘하려고 하니까.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한 명도 만만한 사람이 없어. 뭔가를 잘하고 싶다면.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만 해.”
“말을 쉽게 하는군. 나는 필사적으로···.”
“아카데미에서 필사적인 사람은 한 학년에만 100명정도는 돼.”
신하연의 말에 여한설은 입을 다물었다.
“그 중 누군가는 필사적으로 몬스터를 잡는 데 열중하지, 누군가는 덱의 기원을 찾는데 필사적이 되고, 누군가는 앞으로의 메타 예측에 필사적이고, 누군가는 듀얼리스트로서의 강함을 얻는데 필사적이야.”
“······.”
“네 ‘필사적’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몰라도, 이 모든 사람들을 꺾을 만큼 대단한 것이라고는 나는 생각하지 않아. 총 점수로 1등을 하는 데에는 충분할지도 모르겠지만.”
“신하연. 당신이 강해진 것도 그러면···.”
“그래. 저렇게 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을 찾아냈···. 아니,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살짝 붉어진 얼굴로 신하연은 입을 다물었다.
“난 지켜야 할 게 많아. 청노두도 계승해야 하고, 사회적인 지위도 지켜야만 해. 사교계에서의 위치도 지켜야 하고, 총점 1위 자리도 지켜야 해. 이런 것들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
“있어. 그런 사람도.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탑을 공략하기 위해서 내려온 사람이라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