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ch the ghost munchkin! RAW novel - Chapter 285
285화
덕팔과 신모를 태운 벤은 강남을 빠져나와 경기도 초입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청계산은 명산입니다. 산세가 험하지는 않지만 좋은 기운을 품고 있죠.”
“호호, 그렇군요.”
“청계산에 볼일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저는 그저 조용한 곳에서 차를 한잔 하는 줄 알았습니다만?”
“저를 끌어내신 것은 검사님이세요. 본래 저는 다른 이를 만나기 위해 한국에 온 것이지만 검사님께선 그 대신 검사님을 선택해 달라고 하셨죠. 저는 검사님께서 그 자격이 되는지 시험해볼 의무가 있답니다.”
“하하, 제가 신모님께 단단히 얕보인 모양입니다. 그에게도 이런 무례를 범했을까요?”
일순 신모의 표정이 굳어졌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환한 얼굴이 되었다.
“그라면 그러지 않았겠죠. 그는 이미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하였으니까요.”
“하하하, 설마요. 그는 십 년째 비 맞은 강아지마냥 꼬리를 말고 처마 밑에서 부들부들 떨고만 있을 뿐이죠.”
“호호호, 검사님은 역시 재미있는 분이군요. 천하의 신안의 능력자에게 비 맞은 강아지라니요. 호호호, 그에 합당한 능력이 있길 바랄게요.”
신모의 전신에서 신력이 풀려나왔다. 조금 전 덕팔을 압박했던 신력은 그저 장난에 불과한 듯 보였다. 과거의 덕팔이라면 신모가 품어내는 신력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신력을 전혀 쓸 수 없는 덕팔이었기에 지금 신모가 품어내는 신력은 몹시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덕팔의 표정은 여유만만이었다.
‘얘들아, 특식 왔다. 맘껏 먹으려무나.’
덕팔이 히죽이죽 웃었다. 덕팔의 말에 반응이라도 하듯 덕팔 안에 꽈리를 틀고 있던 요괴의 생기들이 신모가 내 품은 신력을 잡아먹으며 덩치를 키웠다.
**
“이…이 무슨 해괴한… 타인이 신력을 빨아들인 다는 말은 들어본.. 설마… 흡성대법?”
신모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앵? 잘 나가다가 웬 무협지?”
덕팔이 황당하다는 얼굴이 되었지만, 신모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힘을 거두시면 더 이상 신력을 빼앗기지 않으실 겁니다.”
신모가 신력을 거두더니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곤 덕팔에게 한 발 더 다가왔다.
“검사님은 대단한 분이시군요. 중원을 두려움에 떨게 한 그와는 다른 이유로…”
“그렇습니까? 그보다 의외네요. 폐인이 되어 은처에 숨어 있는 그를 중원에서 어찌 알고..”
“무슨 말이죠? 최근에 만났을 때, 그는 몹시 건강한 몸이었어요. 무얼 먹고 있는지 점점 더 건강해 지고 있더군요?”
신모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덕팔의 아미가 좁아 들었다.
“진짜 차 한잔하시겠습니까?”
**
청계산 인근 커피숍.
“고는 죽은 사람을 움직이게 할 힘까지는 없습니다. 그저 사람을 조종하고 위협하는 정도죠.”
“맞아요. 하지만 신력을 머금은 고는 일반 고와는 차원이 다르죠.”
덕팔이 고개를 주억였다. 비로소 미심쩍었던 마지막 조각 하나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누굽니까?”
“말할 수 없어요. 자신에 대해서는 죽음까지도, 아니 죽어서도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거든요.”
“당신의 목숨보다 그 약속이 더 소중합니까?”
덕팔이 생기를 일으키자 신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모로서는 덕팔이 뭔가 한 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큰.. 아니 이렇게 이질적인 기운을 몸 안에 품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하였었다. 덕팔의 기운이 몸에 닿자 몸 안에 있던 생기들이 요동을 쳤다. 마치 포식자를 만난 피식자와 같은 공포가 몸 곳곳에게 스믈스믈 피어올랐다.
“….대단하군요. 그와 대등.. 아니 그 이상의 힘이… 아니, 이런 힘은 처음 느껴봐요.”
신모가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음에도 새로운 힘을 본 경이에 감싸여 있었다.
“허어.. 도대체가…”
덕팔이 허탈한 한숨을 내쉬며 힘을 풀어버리자 신모가 안도의 깊은숨을 내쉬었다.
“대단해요. 정말.. 검사님 같은 분이 계신 줄 알았다면 우리는 그에게 그런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고에 신력을 담는 비법을 얻지 않았을 거예요.”
“왜 그런 겁니까?”
지금껏 상기된 얼굴로 잘도 떠들어대던 신모의 입이 덕팔의 물음에 굳게 닫혔다. 그리곤 덕팔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덕팔도 신모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그저 신모의 눈만을 응시했다.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눈만을 바라보던 두 사람 중 신모의 얼굴에 먼저 균열이 생겼다.
“저희 일족은 고래로부터 고를 키워 왔어요. 고는 맹세의 상징! 저희는 하나의 혈족이면서 동시에 같은 신을 모시는 신도들이었죠. 당연히 우리 일족의 수장은 신을 모시는 신녀! 아주 오래전부터 그렇게 약속되었어요.”
“그럼 신모님이 바로 그 신녀인 겁니까?”
덕팔의 물음에 신모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신녀님을 모시는 4명의 신모 중 한 명에 불과해요.”
“언 듯 신모가 신녀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듯 보입니다만?”
“호호, 고래로부터 신녀는 신모들이 잉태한 딸 중에서 선택되어 왔어요. 그래서 우리는 신녀를 잉태하는 어머니, 즉 신모가 되었고 우리의 딸 중 누군가는 신녀가 되어 우리 일족을 지배하였죠.”
“그렇군요.”
“그런데, 우리 4 신모는 신녀를 잉태하지 못했어요. 정확히 말하면 저희가 낳은 딸 중 신녀로 선택된 이가 없었죠.”
“흐음… 그럼 새로운 신모를 들이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덕팔의 물음에 신모가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신모는 신녀 후보 중 신녀로 선택받지 못한 이들이에요. 누구나 신모가 될 수는 없지요.”
“난감했겠군요. 그런데 신녀는 어떻게 선택되는 겁니까?”
“고요. 암컷 고를 품을 수 있는 이만이 신녀가 될 수 있어요.”
“암컷 고라…. 그럼 나머지 이들은 모두 숫컷 고를 몸 안에 품습니까?”
“맞아요.”
알려진 정보와 달랐다.
“암컷고는 숫컷고와 한 쌍이 되어 숫컷고를 조종한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이 아닌가요?”
“틀리지 않은 말이에요. 하지만 우리가 품는 숫컷고는 암컷 고, 정확히 말하면 여왕 고의 자식들이죠.”
“아….”
생략된 정보! 덕팔의 머릿속에서 마지막 남아 있던 진짜 퍼즐 한 조각이 점점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특수5부.
덕팔이 책상에 앉아 준민과 은정을 바라보며 생글거리고 있었다. 오전 내내 덕팔의 시선을 받던 준민이 참지 못하고 덕팔의 자리로 걸어왔다.
“검사님? 오전 내내 저만 바라보시는데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하하.. 그냥요.”
“이러시면 업무방해입니다.”
“제가 뭘 어쨌다구요?”
덕팔이 빙그레 웃으며 두 손을 가슴 위로 처들며 죄 없음을 어필하였다.
“하아.. 덕팔아! 심심해서 그래? 그 사건 아직 못 풀었잖아.”
“그 사건? 워킹데드? 그건 다 풀었어. 형!”
“응? 다 풀었다고?”
“응, 박근수가 어떻게 죽었는지, 왜 죽었는지 그 방법도 이유도 모두 알아냈죠.”
“사건 종결이네? 그럼 뭐 하고 있는 거야? 범인 잡고 기소를 하든가 해야지.”
“훗, 근데 증명할 방법이 없네?”
“앵?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암튼 그런 게 있어. 문제는 그게 아니거든.”
“그럼 뭐가 문젠데?”
“이 세상!”
“뭐래는 거야?”
덕팔이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자 준민이 답답하였는지 가슴을 두드리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따리리링 띠리리링
덕팔이 휴대폰을 들어보더니 아미를 좁혔다.
“여보세요?”
[나야.]“몸은… 좀 괜찮아?”
[아니, 죽을 뻔했어. 네가 준 약을 먹고]“앵?”
덕팔이 놀란 눈이 되었다.
**
검찰청 인근 커피숍.
은혜의 말대로 은혜는 며칠 사이에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말 그대로야. 네가 준 약을 먹고 영혼이 진탕되는 경험을 했어.”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히 전에도…”
덕팔의 입이 다물어졌다.
‘전에? 언제?’
덕팔의 눈에 혼란의 빛이 일자 은혜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전에도 그랬어. 분명히. 하지만 넌 기억하지 못하지.”
“내가.. 기억을 못 한다고?”
“난 네게 회귀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그럴 리가 없었다. 덕팔이 회귀를 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중 은혜에게 그런 말을 할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놀란 모양이지? 너의 비밀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내게 발설을 했을까 봐?”
덕팔의 얼굴이 굳어지자 은혜가 승리의 미소를 머금었다.
“날 힘들게 한 걸 생각하면 널 더 힘들게 하고 싶지만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좀 봐줄게. 나는 기억을 찾은 거야.”
“기억을 찾았다고? 무슨 기억을?”
“회귀는 너만한 게 아니야.”
“그럼 설마? 너도? 하지만 나는 기억에…”
“나도 내 기억에 너는 없었어. 그렇지만… 그렇지만… 자존심 상하지만 널 처음 보았을 때 가슴이 뛰었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널 사랑해버린 거야.”
“하지만…”
“회귀하기 전에 네가 사랑했던 사람이 누구지?”
“내가.. 사랑했던 사람? 난.. 누구도.. 어쩌면 한유리?”
덕팔의 대답에 은혜가 인상을 구겼다. 은혜가 원했던 답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아직 인건가? 하긴 나도 네 약이 아니었다면 평생 이렇게 살았겠지.”
“무슨 말이야. 정확히 말을 해줘야지.”
“넌 회귀를 했고 나도 회귀를 했어. 아마도 너의 비밀을 알고 있는 분들은 너의 기억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다들 짐작하고 계실 거야. 그러니까 그분들과 상의를 해.”
“너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야. 단지 나는…”
“방!”
은혜의 작은 외침에 덕팔과 은혜 주변으로 두 사람만 볼 수 있은 은빛 은은한 막이 생겼다.
“기억하지? 김혁성 어르신으로부터 받은 술법이야.”
“….그래.”
“넌 그걸 누구에게 전수했을까?”
“나는 그걸….. 모르겠다.”
“기억을 찾으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 어쩌면 내가 너에게 사랑을 강요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이번에는..”
은혜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망설이고 있는 듯했다.
“네가 날 찾아. 너의 감정을… 날 사랑했다면 그 감정을 찾아 나에게로 와.”
은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덕팔이 손을 뻗어 은혜의 팔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은혜의 처연한 미소에 더 이상 은혜를 잡을 수 없었다.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속이 아려왔고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뭐야…”
“늦으면…”
은혜가 마지막 말을 하지 않고 뒤돌아 커피숍을 나섰다.
“늦으면 뭐? 널 영원히 볼 수 없다고?”
덕팔의 목소리가 커피숍을 쩌렁쩌렁 울렸다.
**
인신의 집.
“크음.. 어린 녀석이 우리를 불러놓고 무슨 짓이냐.”
덕팔이 주말을 이용해 인신, 김향숙, 김혁성까지 모두 인산의 집으로 불러 모았다. 미끼는 각자가 좋아하는 음식을 대접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약속된 시간에 도착해보니 덕팔은 팔짱을 낀 채로 쇼파에 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김혁성의 집에 머물고 있던 인신이 덕팔의 부름에 달려왔건만 음식은커녕 냄새조차 없자 한 마디를 쏘아낸 것이었다.
“제가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뭘 말이냐?”
“뭐가 문제일까?”
“이놈이.. 선문답을 하는 게냐?”
“아뇨. 할아버지. 선문답이 아니라 피의자 신문을 하고 있는 겁니다.”
“뭬야?”
인신의 표정이 사나워지자 향숙이 웃으며 인신을 진정시켰다.
“참으세요. 어르신, 덕팔씨가 검사놀이를 하고 싶은 모양이에요.”
“에잉~! 그래 말해보거라. 뭐가 문제라는 거냐?”
“제 기억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변호사님? 제 기억에 문제가 없나요?”
덕팔이 향숙을 지목하자 향숙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나 보지?”
“아뇨. 지적을 받았습니다.”
“오호.. 그래? 결론만 말하면 덕팔씨가 원하는 대답은 해줄 수 없어. 사실 나도 확신이 없거든. 하지만 이것 하나는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아. 덕팔씨의 기억에는 오류가 있어. 하지만 그게 뭔지는 나도 몰라.”
덕팔의 시선이 인신에게 향하자 인신이 콧방귀를 뀌었다.
“여자 문제겠지 뭘..”
덕팔의 눈에 이체가 드리워졌다.
“네놈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그 은혜라는 아이일 것이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시는 거죠?”
인신이 대답 대신 향숙을 바라보자 향숙이 인신 대신 입을 열었다.
“덕팔씨는 대한그룹에 대해서 잘 알아. 그 내부자들의 성격, 인물 됨됨이까지 내부인이 아니라면 절대 알 수 없는 정보까지.. 그런데 은혜에 대해서만 모르고 있어. 그렇다는 것은…”
“제가 은혜를 통해서 대한그룹 중요인사들에 대한 정보를 알았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아니, 덕팔씨의 성격상 그러지는 않았을 거야. 단지 은혜와의 문제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들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어.”
“그렇군요.”
덕팔의 시선이 김혁성으로 향하자 김혁성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였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구나.”
“그렇습니까? 안타깝군요. 그럼 어르신께는 다른 질문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하거라.”
“신력을 머금은 암컷 고에 대해서 왜 말씀을 하지 않으신 겁니까?”
웃고 있던 김혁성의 입가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구나.”
“박춘금 신모를 만났습니다.”
“그가 누구냐?”
“어르신께 비법을 받아 간 사람! 그런데 그녀는 어르신을 이XX라고 알고 있더군요. 이현성 어르신의 혼외자이자 할아버지의 제자!”
덕팔의 말에 향숙, 인신은 사라지고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
**
[왜 그랬지?]푸른 하늘, 오직 하얀 구름만이 그곳에 존재하였다. 아래에는 인간들이 세운 많은 것들이 존재하였지만 정작 인간들은.. 살아있는 모든 것은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그과 덕팔만이 그 세상을 내려다볼 뿐..
“당신은 왜 그런 거지?”
[흐음… 이 세상에는 그가 없었다. 너는 행복할 수 있었다.]“알고 있어. 하지만 이곳엔 어머니도 없었어. 그리고 진실도 없지.”
[이제 그만 나오시겠소?]하얀 구름 속에서 그녀가 모습을 보였다.
“엄마…?”
[미안해, 아들!]수사관 이은정이 안타까운 얼굴로 덕팔을 바라보았다.
“그랬군요. 처음 보았을 때 익숙한 얼굴이라고 생각했어요.”
이은정의 모습이 다시 변했다. 덕팔이 아는 어머니의 얼굴이 되었다.
“제가 묻고 싶어요. 왜 그러셨어요?”
[나는 네가… 그가 없는 세상에서 살길 바랬어. 네가 지키지 못해 아쉬워했던 사람들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길 바랬어. 그저 그것뿐이야.]“그 안에 엄마가 있었다면 어쩌면.. 어쩌면 진실을 외면하고 눈을 감았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덕팔이 슬며시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한 번도 잡아보지 못했던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어머니가 덕팔이 잡은 손을 쓸어주었다. 안타까운 얼굴이 되어…
[나는 약속을 지켰고 당신의 부탁은 저 녀석에 의해 깨졌소. 그러니 당신이 당신의 공덕으로 만든 세상인 이제 사라질 것이오.]“잠깐! 그러기 전에 일단 내 기억을 돌려줘”
그의 손짓 한 번에 덕팔의 머리가 개운해지는 느낌이 되었다. 은혜에 대한 기억이 모두 돌아옴으로써 그간 막혀 있었던 모든 기억이 돌아왔다.
“기다려.”
[뭐지?]“길동은? 그 아이도 가짜인가?”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그럼 은혜는? 은혜는 어디 있지? 그녀는 나와 함께 있어야 했는데?”
[네가 준 약의 부작용으로 영혼이 뒤틀렸다. 그래서… 네가 가야 할 세상으로 먼저 보냈다.]“뒤틀려? 왜?”
[영혼은 짝이 맞는 육신 안에 깃 들어야 만이 안정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이 이 세상의 법칙! 뒤틀린 그녀의 영혼을 안정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무사한 거지?”
그가 얄미웠다. 그러나 모든 키는 그가 쥐고 있었으니 지금으로써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네 어미는 환생 기간 내내 모은 모든 공덕을 모아 너를 위한 세상을 만들었다. 오직 너만을 위한, 너의 행복을 위한.. 그러나 모든 것에는 댓가가 필요한 법. 그것은 너와 은혜라는 아이의 기억이었다. 헌데 너로 인해 은혜가 기억을 되찾았고 너 역시 기억의 파편을 건드렸으니 급부와 반대급부의 균형이 무너지고 말았다. 하여 그 세상도 함께 무너졌다. 이제 너는 네가 본디 가야 할 세상으로 가게 될 것이다.]“기다려줘.”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덕팔이 몸을 돌려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엄마, 이제 제 곁을 떠나세요. 엄마는 좀 더 행복한 삶을 사셔야 해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어요.”
[진우야…]“엄마의 아들이어서 너무 행복했어요.”
[미안해.. 미안해. 진우야.]덕팔이 어머니를 안아주곤 이내 그를 바라보았다.
[너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덕팔이 고개를 주억이자 그가 손짓하였다. 그러자 덕팔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텅빈 공간에 남은 그와 어머니.
[왜 진실을 말하지 않았소?] [그것이 그 아이에게 도움이 될까요?] [적어도 당신은 위안을 받았겠지.]그가 동정 어린 시선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그저 작은 미소만을 머금었다.
[진우가 제 아이인 것만으로 저는 위안이 된답니다.] [그렇소? 그렇다면 당신도 이제 머나먼 여행을 떠나야겠구려.] [그곳은 몹시 먼 곳이겠죠?] [누군가에게는 찰나에 도착할 수 있는 곳이고, 누군가에게는 억겁의 시간이 걸려도 도달할 수 없는 곳이라고. 그들의 뜻을 누가 알까?]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다시금 손짓을 하였다. 텅 빈 세상에 다시 그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사라졌던 덕팔이 다시 모습을 보였다.
“당신이지?”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당신이 은혜에게 기억을 되돌려 준 것이지?”
[후후.. 그걸 묻기 위해 발버둥을 친 것이더냐?]“알아야겠어.”
[어차피 남지 않을 기억이다.]“그래도.. 그 이유까지..”
[말해줄 수 없구나. 하지만.. 그 답은 너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얻을 수 있을 것이다.]“그거면 됐어. 내가 알아보지. 은혜가 내가 찾고. 그리고 한 가지만 명심해. 우리의 관계가 늘 지금과 같지는 않을 거라는 거.”
[네가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그가 웃으며 손짓을 하자 덕팔이 사라져갔다. 사라지는 덕팔의 입가에 고소가 머금어졌음은 착각이었을까?
덕팔에 의해 잠시 방해를 받았던 그가 어머니가 서 있던 방향으로 마지막 인사를 하였다.
[미안하오. 나는 동의하였지만, 그들은 동의하지 않았소. 그들은 이 세상의 끝을 보길 바라고 있소. 그리고 그 아이만이 그 끝에 설 수 있고…]어쩌면 덕팔이 원했던 답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쩌면 그 아이가 세상의 작은 비밀 하나를 얻은 듯하니 어쩌면 당신의 고행도 금방 끝이 날 수도 있겠소]그의 손짓에 모든 것이 사라지고 검은 빛이 가득한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도 작은 빛이 되어 사라졌다.
-2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