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00
“각하, 섬에 남아 있던 식량이 다 떨어졌습니다. 멧돼지 고기도 다 먹었고, 저희가 가지고 온 식량도 금방 바닥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주민들이 섬 곳곳에 밭농사를 짓고 있었잖아?”
“알아보니, 그건 사람이 먹는 작물이 아니라고 합니다.”
주민들이 가꾸던 밭작물은 ‘땅사슴풀’이라는 잡초였다. 사람이 먹으면 복통과 설사에 시달리는 탓에 가축에게 여물로 먹이는 풀이었다.
“사슴고기를 즐겨 먹는 녹인들이 섬의 주민들에게 땅돼지풀 농사를 시킨 거라더군요. 오덴세섬의 사슴은 녹인들이 하도 잡아먹어서 거의 남지 않은 것 같고요.”
“당장 농사를 지어 먹을 순 없으니, 다른 짐승을 잡아 그 고기를 먹어야겠군. 혹시 사자갈기 용병단에 사냥꾼 출신이 있나?”
“없습니다. 저희는 대부분 퇴역 군인이나 노예 검투사 출신이라…….”
사자갈기 용병단은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인 집단이 아니라, 전투에 특화된 전문 용병단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그게 오히려 단점이었다.
“구출한 주민 중에 어부 출신이 여럿 있겠지. 고기잡이 경험이 있는 주민을 추려서 어획에 투입해라.”
“하지만 어선과 어구가 없지 않습니까?”
“멧돼지를 묶었던 밧줄을 가져다가 올을 풀어서 그물을 짜라. 갯바위에서 그물과 통발로 고기를 잡으면 당장 주린 배를 채울 정도는 될 것이다.”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곧장 다른 문제가 생겼다.
이번에는 마을 재건을 감독하는 카심이 찾아와 보고했다.
“건축 자재가 턱없이 부족하네. 오덴세섬에 있는 나무는 강한 해풍 탓에 하나같이 키가 작고 구부러져 있어. 간혹 곧은 나무가 있어도 톱이나 망치 같은 도구가 부족한 실정이야.”
“목재는 섬 곳곳에 흩어진 다른 마을에서 건물을 해체하고 수거해. 어차피 사람이 살지 않으니 자재를 한군데로 모으는 게 상책이야.”
“목재는 그런 식으로 확보한다 치고, 건설 장비와 각종 공구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이런 빌어먹을, 여기도 사람이 살던 곳인데, 그런 기본적인 게 왜 없는 거야?”
“주민들 말에 따르면, 녹색 괴물들이 섬의 쇠붙이를 전부 수거해서 자기들 무기로 만들었다고 하는군.”
“……몬스터 주제에 알뜰하게도 뽑아먹었군.”
이것만큼은 당장 떠오르는 해결책이 없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대책을 내놓았다.
“임시 움막을 지어 당분간 집단 거주하게 하고, 자연 동굴이 있다면 그것도 활용해. 공구, 특히 철물은 자급자족할 방법이 없으니, 아무래도 해안 마을에 급히 다녀와야겠군.”
오덴세섬에 있는 물자만으로는 마을 재건에 애로가 많았다.
지금 오덴세섬은 갖춰진 여건에 비해 인구가 비정상적으로 많은 상태였다.
집도 절도 없이 짐승처럼 살아갈 때는 상관없었겠지만, 일천 명의 주민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필요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는 즉시 카라예프를 불렀다.
“사자갈기 용병단원 중 일부가 섬 밖으로 나가서 식량과 종자, 농기구, 건축자재 등 필요한 물자를 사 와야겠다. 무게가 상당할 테니 서른 명 정도는 보내야겠어. 네가 인원을 선발해라.”
“예, 각하.”
섬 밖으로 나간다니 지원자가 넘쳐 났다.
벌써 며칠째 아무것도 없는, 아니 일천 명의 거지들이 바글거리는 섬에서 고생하고 있었으니, 너 나 할 것 없이 이 기회에 해안 마을에 가서 술 한잔 걸치고 오려는 것이다.
“제가 갈게요, 대장! 제 음식 솜씨 아시죠? 식자재를 사려면 제 눈썰미가 필요할 겁니다.”
“전 상단 호위를 십 년 동안 했다고요. 어깨너머로 배운 흥정 기술이 있으니, 건축자재를 구매할 때 은화를 아낄 수 있을 겁니다.”
들뜬 용병들이 각자 자기 특기를 내세우며 밖으로 내보내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그때 한 용병이 근본적인 질문을 했다.
“한데, 섬 밖으로 어떻게 나가지? 올 때 타고 온 배는 전부 해안 마을로 돌아가 버렸잖아?”
“그건 걱정하지 마라. 백작 각하께서 조르가드를 불러 주신다고 하셨다.”
“……수룡왕을 타고 가란 말이오?”
카라예프의 말에 용병들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동료끼리 어깨를 밀쳐 가며 서로 나가겠다고 다투던 자들이 갑자기 카라예프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각하도 없이 우리끼리 수룡왕을 타는 건 좀…….”
“섬으로 올 때 기억나지? 그때 분명 조르가드는 우리를 태우기 싫은 기색이었어. 백작 각하께서 야단을 쳐서 꾹 참은 것이지.”
아무도 지원하지 않자, 결국 카라예프가 섬 밖으로 심부름 갈 사람을 일방적으로 지정했다.
차출당한 서른 명의 용병은 당장 죽을 사람처럼 울상을 한 채 해변으로 향했다.
* * *
용병들을 이끌고 해안에 도착했다.
선발된 운송단은 하나같이 죽상을 짓고 서 있었다.
“사내놈들이 왜 이리 겁이 많아? 내가 조르가드한테 이야기를 해 놓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니까?”
“예, 각하…….”
풀 죽은 용병들을 보며 피식 웃고, 혜광심어로 조르가드를 불렀다.
정확한 위치를 모르니 바다를 향해 광범위하게 혜광심어를 던졌는데, 다행히 조르가드는 즉각 반응해 내가 있는 곳으로 헤엄쳐 왔다.
그르르르-.
지난 며칠 동안 먼바다에서 물고기를 잔뜩 먹어서인지, 조르가드의 몸통이 이전보다 두꺼워 보였다. 그 압도적인 위용에 용병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여기 비 맞은 병아리처럼 오들오들 떨고 있는 놈들을 해안 마을까지 태워 주어라. 혹시라도 물에 빠지면 꼭 건져 주고. 돌아올 때는 알아서 배편을 구해 돌아올 게다.]조르가드는 잠깐 싫은 기색을 내비치더니, 이내 대가리를 낮춰 용병들이 올라탈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용병들은 머뭇머뭇하면서 조르가드에 오르지 못했다.
“각하, 저, 정말 안전한 겁니까?”
“그래. 너희를 잡아먹거나 바다에 버리면 갈치처럼 열두 토막을 내 버리겠다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내 확언에 용병들은 겨우 한시름 놓은 듯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서른 명의 용병이 모두 탑승하자, 조르가드는 한시라도 빨리 용병들을 떨치고 싶은 듯 빠르게 몸을 돌려 헤엄치기 시작했다.
‘뭐, 별 탈 없겠지.’
용병들에게 했던 말과 달리, 나는 조르가드에게 열두 토막이니 어쩌니 하는 협박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런 유치한 엄포가 없어도 조르가드가 용병들을 해안 마을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줄 걸 알 수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독심술처럼, 나는 아룡족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이 능력은 뭐라고 부를까. 독용심술(讀龍心術)?’
데스나이트의 마력을 흡수하고 망령을 보는 능력을 얻은 것처럼, 용의 마력을 흡수한 뒤 아룡족과 소통이 가능해진 것이다.
‘흡성대법에 이런 공능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고금을 통틀어 나 하나뿐일 것이다.’
이걸 알아내려면 인간이 아닌 대상에게서 내공을 흡수해야 한다.
결국, 이세계로 넘어온 내가 아니면 누구도 알 수 없는 비밀인 셈이다. 아마 흡성대법을 창안한 사람도 이런 건 예상하지 못했겠지.
“자, 그럼 용병들이 돌아올 때까지 섬에 남은 짐승을 사냥해 볼까?”
한시도 쉴 틈이 없다. 나는 파도 소리를 뒤로하고 섬 중심부로 걸음을 옮겼다.
조르가드를 보겠다며 함께 온 카심이 날 따라 걸으며 의미심장한 눈길을 던졌다.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
“자네한테 이런 면모가 있었나 싶어서. 그저 힘에 미친 검귀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면모? 무슨 면모를 말하는 건데?”
카심은 내가 영지를 재건하는 모습에 놀라고 있었다.
마법사를 잡아먹는 무서운 성기사 정도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통치에 진심이었던 것이다.
“기사들은 하나같이 명예에 미쳐 있지. 영주들은 세금밖에 모르고, 성직자는 신앙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이상하지 않나? 지금 인간 문명을 이끄는 족속 중 누구도 민생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게 제일 이상한데. 넌 흡혈귀잖아.”
카심이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사실 이기적인 걸로 따지면 카심도 어디 가서 꿀리지 않았다.
“자네는 내가 겪어 본 인간 중 가장 유능한 영주야. 지방 소영지의 영주는 죄다 똥 같은 놈들 뿐이라고.”
카심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 *
조르가드는 테온의 지시를 성실하게 이행했다. 종종 용병들을 한입에 삼켜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지만, 테온의 당부를 떠올리며 꾹 참고 해안에 도착했다.
그르르르-.
“도착이다!”
“내려, 빨리!”
용병들이 상륙한 곳은 과거 조르가드를 유인했던 해안 절벽 위였다. 그들은 육지에 발을 디디자마자 후다닥 달려서 조르가드로부터 멀어졌다.
조르가드는 그 모습을 한심하게 지켜보다 이내 몸을 돌려 바닷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휴, 살아서 도착했다.”
“수룡왕을 타고 바다를 건너다니, 인생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용병들은 저마다의 소회를 밝히며 숨을 고르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두드렸다.
이번 임무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이 지나갔다. 이제 백작 각하에게 받은 금화로 필요한 물자만 구입해서 돌아가면 임무 완수였다.
돌아갈 때는 배를 타고 갈 테니, 나올 때처럼 가슴 졸일 필요도 없었다.
“자, 이제 일하러 가 볼까?”
“부장, 나온 김에 술도 마시고 계집질도 하면서 며칠 쉬다 가는 거죠?”
용병들이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한 거구의 용병이 묵직한 목소리로 답했다. 심부름 나온 용병들을 이끄는 부단장 아흐멧이었다.
“술 좋지. 여자도 좋다. 하지만 금화를 들고 튀자는 제안 따위는 하지 마. 오랜 시간 함께 싸운 너희를 백작 각하의 손에 죽게 만들기는 싫으니까.”
별도 임무를 나올 때면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지만, 정작 용병들은 아흐멧을 놀렸다.
“우리가 미쳤소? 다른 사람도 아닌 크로우 백작의 뒤통수를 치게. 용살기사를 배신하면 우리 용병단의 신용은 시궁창에 처박힐 거요.”
“신용이 문제가 아니라, 전 대륙의 교회로부터 추적당할 걸 걱정해야지.”
“게다가 평생 바닷가에도 가지 못하겠지. 불시에 조르가드에게 공격받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용병들은 킬킬대며 한마디씩 던졌다. 하지만 그 농담을 통해 새삼 자기들 고용주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다시 깨닫기도 했다.
아흐멧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잘 알고 있다니 걱정할 필요 없겠군. 출발하자. 심부름도 심부름이지만, 일단 술부터?”
“역시 부장은 말이 통한다니까.”
마을을 향해 걷는 사내들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사파에서 온 용사
발 넓은 영주
사자갈기 용병단은 해안 마을에 도착한 뒤 며칠 동안 술을 퍼마시며 오덴세섬의 사연을 알렸다.
“사악한 몬스터 떼가 오덴세섬을 장악하고 있었다고요?”
“그렇다니까! 크로우 백작 각하께서 놈들을 쓸어버리고 섬을 구원하셨어!”
“세상에나!”
해안 마을 사람들은 그 소식에 놀라면서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단순히 불길한 섬이라고 생각했는데 미지의 몬스터가 떼를 지어 살고 있었다니, 괴물들이 해안 마을까지 진출하기 전에 쓸어버린 게 천만다행이었다.
“너희도 원한다면 오덴세섬으로 이주하라고. 지금 오덴세섬은 더 많은 개척민이 필요하거든. 백작 각하께서는 이주민이 아무 곳에나 집을 지으면 거기서 살게 해 주신다. 황폐화된 섬을 재건하는 동안에만 허락된 특별한 혜택이지.”
“그게 사실입니까?”
“사실이고 말고. 그뿐인 줄 알아? 앞으로 일 년 동안 네가 논밭을 개간한 넓이만큼 소작을 주신다. 일한 만큼 버는 거야!”
“그럴 수가! 우리 집은 딸만 다섯인데, 이참에 어부 노릇을 그만두고 오덴세섬에서 농사나 짓는 게 낫겠군.”
해안 마을 주민들 중 이주에 관심을 보이는 자가 여럿 있었다.
평민에게 한평생 나고 자란 고향을 떠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오덴세섬이라면 해안 마을 사람들에게 그리 낯선 곳도 아니었다.
게다가 자기가 개간한 넓이만큼 경작지를 준다는 건 파격적인 제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