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37
상대가 이계의 마법을 익힌 종족이라 해도, 용의 관점에서는 미개한 원시 문명에 불과했다.
“취익, 물어볼 게 있으면 말로 하면 될 일이지, 취익, 다짜고짜 불덩이를 던지는 건 무슨 경우요?!”
반면, 평화로운 오덴세섬에서 한동안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으며 살던 오크들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상황이었다.
갑자기 등장한 적발 적안의 사내가 일언반구도 없이 일족을 태워 죽였으니, 오크들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턱이 없었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인데.”
오비데우스가 검지를 들어 오크 족장을 가리켰다.
사소한 동작이지만, 오크 족장은 그 손가락 끝에서 설명할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다.
“아악! 내 눈!”
오크 족장이 보호의 토템을 꺼내려 했지만, 오비데우스의 마법이 훨씬 빨랐다.
오크 족장의 두 눈에서 시뻘건 불길이 치솟았고, 고통에 찬 비명이 분지에 울려 퍼졌다.
“나는 미물과 대화하는 걸 즐기지 않는다. 너희는 그저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면 돼.”
오비데우스의 목소리가 오크들의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
적발 적안의 사내는 등장하자마자 동족을 몇 명이나 태워 죽이고, 심지어 대화에 나선 일족의 지도자마저 두 눈을 불로 지져 버렸으면서, 목소리는 평온하기만 했다. 아니, 일견 장난기마저 느껴지는 말투였다.
“…….”
오크들이 이를 악물고 주먹을 떨었다. 하지만 차마 오비데우스에게 맞서 싸울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오비데우스가 보여 준 힘의 차이가 너무나 거대했기 때문이다.
“이제 좀 고분고분해졌군. 그래, 그래야지.”
오비데우스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요즘 성질 뻗치는 일이 많았는데, 모처럼 힘의 논리가 잘 통하는 녀석들을 만나니 반갑기까지 했다.
그는 궁금한 걸 하나씩 물었고, 오크들은 마지못해 대답하기 시작했다.
“……호오, 그럼 네놈들도 차원 관문이 왜 열린 건지, 왜 하필 여기로 연결된 건지는 모른다는 말이렷다?”
“취익, 그렇다. 취익, 우리도 우연히 이곳으로 온 거다.”
대략적인 심문을 마친 오비데우스가 턱을 쓰다듬었다.
그에게 오덴세섬의 차원 관문은 아주 매력적인 발견이었다.
오비데우스는 천성적으로 화염 마법에 미쳐 있는 붉은 용이지만, 화염 마법 못지않게 관심을 갖는 분야가 바로 이동 마법이었다.
‘완성된 차원 관문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다니. 이보다 큰 행운이 어디에 있을까?’
심지어 바닥에는 차원 관문의 바탕이 되는 마법진까지 고스란히 깔려 있었다.
오비데우스는 일정한 규칙을 갖고 배치된 비석을 한번 쓱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이 마법진에 담긴 학술 가치를 알아봤다.
‘섬을 불태우기 전에 이것들을 서부로 옮겨야겠군.’
감히 서부로 찾아와 드레이크의 정신지배를 풀어 버린 테온 크로우에게는 반드시 징벌을 내려야 한다.
여기까지 와서 오덴세섬을 불태우지 않을 수는 없으니, 오비데우스는 마법진과 오크들까지 몽땅 서부로 가져갈 마음을 먹었다.
“듣거라. 너희는 이제 나의 수족이 되어 이계의 마법과 차원이동을 연구해라. 나의 땅으로 너희를 데려갈 테니, 서둘러 준비해라.”
일방적인 통보였다. 오크들의 의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오비데우스였다.
일족이 살해당하고, 힘에 굴복해 묻는 말에 고분고분 대답한 데다 졸지에 강제 이주까지 하게 된 오크들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특히, 고집 센 늙은 오크 주술사들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우리가 왜, 취익, 당신을 따라가야 하나?”
“내가 그러라고 했으니까.”
“취익, 우리는 크로우 백작에게, 취익, 이곳에서 거주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큭큭, 별 같잖은 소리를 다 하는구나. 그놈은 곧 내 손에 통구이가 될 테니, 너희는 새로운 주인을 잘 모실 생각이나 하거라.”
“취익, 새로운…… 주인?”
오비데우스의 언행은 오크들의 자존심을 철저히 짓밟았다.
오크들은 테온에게 빌붙어 오덴세섬에서 살아가고 있었지만, 테온을 주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그들은 누구에게도 예속되는 종족이 아니었다.
지금이야 팔자에도 없는 객지 생활을 하며 초라한 삶을 이어 가고 있지만, 원래 살던 차원에서는 그들 역시 당당한 지배종이었다.
“우리는 너를 따르지 않는다. 취익,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건방 떨지 말고 떠날 준비를 해라. 말대꾸를 참아 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다.”
“취익, 너에게는 존중이 없다. 취익, 통치의 자질이 없다는 말이지. 취익, 너를 따라가느니 테온 크로우를 따르겠다.”
“……뭐라고?”
오크 주술사의 마지막 말이 오비데우스의 역린을 건드렸다.
안 그래도 테온 크로우에게 한 방 먹은 상황인데, 웬 미개한 녹색 아인종 놈들이 그의 이름을 들먹이며 성질을 긁어 대는 것이다.
“굳이 벌주를 마시겠다면야……”
억지로 입꼬리를 말아 올린 오비데우스가 공중으로 둥실 떠올랐다. 그의 이마에 한 줄기 혈관이 불거져 나왔다.
“하찮은 미물로 태어난 주제에 감히 용을 평가해? 건방진 놈들에게 어울리는 벌을 주마.”
오비데우스가 새로운 마법을 시전했다. ‘교만의 씨앗’이라 불리는 정신계 마법이었다.
“후후, 너희가 죽어도, 씨앗은 자식을 통해 대대로 이어진다. 오늘의 무례를 영원히 후회하며 살아가라……. 음?”
그 순간 이변이 생겼다.
시종일관 여유 만만하던 오비데우스의 입에서 다급한 숨소리가 터졌다.
“칵!”
오비데우스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움직임을 딱 멈췄다. 그뿐 아니라 제자리에서 몸을 벌벌 떨고 식은땀을 비 오듯 흘렸다.
“으억! 허억……!”
새빨간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잠시 후,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오비데우스의 분신이 땅으로 추락했다.
“취익, 뭐, 뭐지……?”
“갑자기 왜……?”
오크들은 어찌 된 일인지 영문을 몰라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한참이 지나도 적발 적안의 사내는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 * *
‘실패다!’
나는 태허도룡검강으로 오비데우스의 목을 내려치는 순간 실패를 직감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검강이 비늘에 닿는 순간 오비데우스의 비늘이 활짝 펼쳐지며 온갖 방어 마법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쿠르르르르-!
용암이 소용돌이처럼 회전하며 참격을 밀어 냈다. 보호막이 겹겹이 생겨나고 수십 가지 치유 마법이 용의 몸을 똘똘 휘감았다.
오비데우스의 목덜미를 반쯤 가르고 들어갔던 칼날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밀려 났다.
‘칫, 접근할 수 없다면 격산타우(擊山打牛)의 수법으로 심장을 으깨 주마!’
내가 곤륜의 맹장공, 옥청인을 원거리에서 펼치려 할 때, 오비데우스의 본체가 나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가늘게 뜬 두 눈에 날카로운 세로 동공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본체가 공격받는 걸 알아챈 오비데우스가 분신을 버리고 즉시 본체로 돌아온 것이다.
사파에서 온 용사
용언마법에는 대가가 따른다
눈을 뜬 오비데우스는 의외로 반격하지 않았다. 그는 짧은 시간 나를 노려보더니, 목을 감싸고 용암 호수 깊숙한 곳으로 재빨리 도망쳤다.
‘이런 씨팔, 도망을 가?’
가장 강한 용이라는 둥, 하나의 용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라는 둥 온갖 유세를 떨더니, 정작 목이 떨어질 위기에 처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헤엄치는 오비데우스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황당하면서도 당혹스러웠다.
오비데우스가 치명상을 입은 지금 끝까지 몰아붙여 목에서 대가리를 떼어 줘야 하는데, 일말의 고민도 없이 도망쳐 버리니 끝장을 낼 수가 없었다.
‘큰일이다. 놈이 도망쳐서 상처를 회복하면 감당이 안 돼!’
나는 전력을 다해 오비데우스의 뒤를 쫓았다.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 헤엄을 치고, 등 뒤로 진각을 구르고 장력까지 뿜어 가며 그를 따라잡으려 애썼다.
하지만 오비데우스는 꼬물꼬물 잘도 도망쳤다. 뱀이 물살을 가르듯 용암을 가르며 속절없이 멀어져 갔다.
‘더럽게 빠르네. 물도 부족한 서부에 사는 주제에 수영을 왜 이렇게 잘하는 거야?!’
용암 속에서 도망치는 화룡과 추격전을 벌이는 이 상황이 문득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지만,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오비데우스는 허둥지둥 도망치는 와중에도 치유 마법을 반복해서 사용했다.
내가 보브찬친에게 받아서 사용했던 치유 스크롤보다 훨씬 강력한 치유 마법을 연달아 시전했다.
“파!”
고민할 것 없이 창룡후를 터뜨렸다.
최대 출력의 호신강기, 태허도룡검강에 더해 창룡후까지 쏟아 내니, 단전에서 내공이 뭉텅이로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미리 적혈을 사냥하며 백오십 년 내공을 준비해 두지 않았다면 진작에 내력이 고갈되어 용암 안에서 생을 마감했을 터다.
파사사삭!
오비데우스 주변으로 생성되던 보호 마법과 치유 마법이 우수수 깨졌다. 그는 키르케네스와 마찬가지로 주문이나 시동어도 없이 마법을 마구 쏟아 냈다.
나 역시 그 정도는 이미 예상했던바, 오비데우스가 마나를 끌어모으기만 하면 덮어 놓고 창룡후부터 터뜨렸다.
‘그런데 창룡후가 이전보다 훨씬 강해진 느낌이네. 이유가 뭐지?’
내공이 강해졌다고 이전보다 창룡후에 내공을 더 담지는 않는다.
나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상대의 마법을 파훼하기 위한 최소한의 내공만 담아서 창룡후를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창룡후는 이전보다 몇 배나, 아니 몇십 배나 강한 파동을 일으키며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혹시 용암 때문인가?’
문득 어린 시절 즐겨 했던 물고기 사냥을 떠올렸다.
큰 연못 가운데에 바위를 심어 놓고, 큰 돌로 바위를 내리치면 주변의 물고기들이 기절해 떠오르곤 했다.
‘그래, 충격파는 공기 중보다 수중에서 더 강한 힘을 발휘하지. 음공은 일종의 파장이니, 용암에 잠수한 상태에서는 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로군.’
생각해 본 적 없는 효과였다. 갑자기 찾아온 깨달음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 정도의 증폭 효과라면, 굳이 내공이 많이 드는 창룡후를 펼치지 않고, 붕권(崩拳)으로 용암을 때려서 수중 진동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초식이 순식간에 탄생했다. 머릿속에서 조각난 그림이 맞춰지듯 차곡차곡 무공의 원리가 정립됐다.
강파용왕권(剛波龍王拳)의 탄생이었다.
‘하앗!’
시험 삼아 내지른 권격에 오비데우스의 마법이 와르르 무너졌다.
창룡후보다 내공은 덜 들고, 더 멀리, 더 정밀하게 마법을 파훼할 수 있는 무공이었다.
‘다만, 수중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는 한계가 있지만…….’
깨달음의 끝자락을 조금만 더 물고 늘어지면 강파용왕권을 물 밖에서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쉽게도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오비데우스는 점점 멀어지고 있고, 호신강기를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내공만 해도 장난이 아닌지라, 벌써 눈에 띄게 방어가 약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용암의 열기가 조금씩 느껴진다. 어쩔 수 없지.’
어차피 당장 오비데우스의 목을 벨 수 없다면, 차라리 용암 밖에서 땅을 딛고 놈과 맞서는 게 상책이었다.
나는 결국 추격을 포기하고 답허성실을 펼쳐 용암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순간,
용암을 박차고 나오는데, 발밑을 스쳐 가는 이질적인 마법의 기운이 느껴졌다.
오비데우스가 이전과 약간 다른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고, 완성된 공격 마법이 내가 있던 자리를 덮쳤다.
‘어떻게 전조도 없이 마법을 성공시켰지?’
절묘한 우연이였다.
오비데우스의 마법은 내가 답허성실을 펼치는 순간 시전되어 허무하게 빗나가 버렸다.
나는 이미 지나간 마법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일행이 있는 쪽으로 이동했다.
용암 밖에는 언제 왔는지 모를 드레이크 두 마리가 성직자들을 향해 흉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 * *
‘이런 빌어먹을, 이게 무슨 꼴이야!’
테온이 용암 밖으로 나가기 직전, 오비데우스는 치미는 욕설을 간신히 삼키며 필사적으로 꼬리를 젓고 있었다.
오비데우스를 추격하는 테온의 마음도 급했지만, 치명상을 입은 채 쫓기는 오비데우스는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목에 난 상처는 거칠게 움직일 때마다 살이 점점 벌어졌고, 용암보다 뜨거운 화룡혈(火龍血)이 줄줄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