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45
나는 오비데우스의 수급을 들고 파라쿨라 성채를 벗어났다.
내 뒤로 사제와 성기사 들이 오비데우스의 몸뚱이를 챙겨 뒤따랐다.
* * *
성채를 나와 얼마나 걸었을까, 황무지에서 아우레오와 테오도르를 발견했다.
그들 역시 이쪽을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엘프는 어디 갔지?’
샬릿과 샬린느는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달려오는 건 두 사람뿐이었다.
“테온! 무사했군요!”
“테온 경, 그대와 성직자들이 이렇게 멀쩡히 돌아다닌다는 건, 오비데우스를 처치했다는 뜻이겠지?”
테오도르가 드물게 흥분하며 물었다.
그 모습에 다른 성직자들이 웃으며 싸움의 결과를 말해 줬다.
나도 자루에 넣어 둔 오비데우스의 수급을 꺼내 아우레오에게 보여 주었다.
“오오, 아도나이시여, 테온이 해냈습니다!”
“지상에 경보다 큰 위업을 세운 이가 또 있을까!”
아우레오와 테오도르는 감격하며 나의 업적을 칭송했다. 곁에서 지켜보던 성직자들도 다시 한번 뿌듯한 표정으로 가슴을 부풀렸다.
그렇게 얼마간 덕담이 오가고, 아우레오가 성채 밖에서 겪은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테온의 직감이 맞았습니다. 황무지에 혼자 있던 엘프 샬루가 뱀파이어에게 피살되었어요.”
“샬루가 죽어? 뱀파이어한테?”
고혼이 된 샬루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녀의 부고를 접하고 처음 느낀 감정은 슬픔이 아니라 의아함이었다.
‘내가 느낀 지독한 불길함의 결과가 고작 샬루의 죽음이라고?’
샬루를 비롯한 엘프들에게 도움을 받긴 했지만, 그녀의 죽음이 나에게 큰 비통으로 다가올 일은 아니었다.
면식도 별로 없고, 엘프들은 어딘가 기계적인 면모가 있었기 때문에 깊은 정이 들지도 않았으니까.
게다가 샬루의 죽음에는 맥락이 없었다. 뱀파이어들이 할 일 없이 왜 가만히 있는 엘프를 습격한단 말인가?
“샬루를 피습한 뱀파이어는 잡았나?”
“아뇨. 이미 도주한 상태였습니다. 흉수는 두 명인데, 한 명을 제물로 쓰고, 나머지 한 명은 도망쳤더군요. 동족을 제물로 바치는 뱀파이어 혈마법사라니, 입에 담기도 끔찍한 존재이지요.”
“뱀파이어가 동족을 제물로 바쳤다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했다.
최소한 내가 겪어 본 바에 의하면, 뱀파이어들은 동족 간 유대가 매우 강한 족속이다.
암혈의 복수를 하겠다며 일생을 내던진 이자벨라의 사례도 있고, 적혈 전체가 자기네 왕을 따라 오비데우스와 옥쇄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적혈에도 카심 같은 놈이 있나?’
카심은 이자벨라를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렸지만, 한때는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놈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뱀파이어가 동족을 제물로 쓰는 게 영 불가능한 일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좀 이상한데…….’
샬루의 죽음, 뱀파이어의 엘프 습격, 동족을 죽이는 뱀파이어까지.
모든 것이 조금씩 아귀가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잊고 있었던 불안감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사파에서 온 용사
다시 둥지로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듣기 위해 아우레오에게 물었다.
“엘프들은 어디로 갔지? 샬루를 살해한 뱀파이어를 뒤쫓아 갔나?”
“샬린느는 시신을 수습해 요정숲으로 돌아갔고, 샬릿 혼자 뱀파이어를 쫓고 있어요. 처음에는 우리에게 추적을 도와 달라고 하더니, 나중에는 자기 혼자 앞질러 가겠다고 하더군요.”
“하긴, 너희는 발이 느리니까.”
비행 마법과 공간이동이 가능한 엘프들과 달리 인간 성직자들은 두 발로 뛰어야 한다.
게다가 아우레오는 보통 사람보다도 체력이 약하니, 추격에 방해가 될 터다.
“피의 길잡이 메달로 방향만 확인해 달라더니, 서둘러 가더라고요. 테오도르 경과 저는 어차피 샬릿을 따라잡지 못할 것 같아서 파라쿨라 성채 쪽으로 돌아온 거예요.”
대강의 사정을 들었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았다.
파라쿨라 성채 근처를 배회하던 적혈의 뱀파이어가 왜 엘프를 습격했을까?
그 시각 자기네 일족과 오비데우스는 건곤일척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당장 성채로 뛰어가도 모자랄 판국이었는데 아무 상관 없는 엘프를 습격하다니?
“샬루의 시신은 샬린느가 가지고 갔어도, 뱀파이어의 사체는 황무지에 그대로 있겠군. 그걸 좀 살펴봐야겠다.”
사체를 면밀히 살펴보면 당시 상황을 좀 더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어떤 마법을 사용했는지도 알 수 있을 터다.
“아, 뱀파이어의 사체도 샬린느가 가지고 갔습니다. 늪의 조언자가 요정숲으로 가져오라고 한 모양이에요.”
“……왜?”
“글쎄요? 저도 그게 의문인데, 따로 이유를 물어보지는 않았습니다.”
찝찝하다.
아우레오가 전해 주는 모든 이야기가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아귀가 맞지 않는다.
파라쿨라 성채에 진입하기 직전에 느꼈던 불안감이 다시 피어오른다.
‘늪의 조언자가 왜 뱀파이어의 사체를 가져가지? 분풀이로 참시(斬屍)라도 할 셈인가?’
고작 그런 이유로 머나먼 서부에서 남부의 요정숲까지 뱀파이어 사체를 가져오라고 했을까?
아닐 것이다. 그렇게 화가 났다면 차라리 두 엘프 모두 추격에 투입해 도망친 뱀파이어를 잡으려 했을 터. 분명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이럴 때 이오안이 있었더라면…….’
이오안이 곁에 있었다면 내 의문에 답해 줬을 터다. 그리고 이자벨라도 함께 있었겠지.
‘내가 미쳤나? 말라깽이 계집애가 자꾸 생각나네.’
아까부터 자꾸만 이자벨라가 떠오른다.
나는 다시 한번 머리를 털고 마라고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허허벌판에 서서 고민한다고 답이 나올 문제가 아니니, 일단 도시로 돌아가 여정을 마무리 지을 셈이었다.
* * *
성직자들과 함께 마라고사로 돌아왔다.
용의 목을 베고 돌아왔지만, 개선식 따위는 없었다.
애초에 마라고사의 주민들은 내가 붉은 용과 싸웠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으니까.
성직자들은 이 위대한 업적을 널리 알려야 한다며 방방 뛰었지만, 나는 당분간 비밀로 할 것을 명했다.
“내가 오비데우스의 목을 벤 것은 너희가 중부에 도착한 뒤 세상에 알려라. 당장 소문을 내 버리면, 내가 마라고사에서 활동하는 데 불편한 게 많다.”
용 두 마리를 사냥한 용살기사가 마라고사에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뒷골목에서 맥주 한잔 마시기도 어려워질 터다.
보는 눈이 많으면 그만큼 운신에 제약이 생긴다. 당장 중부로 돌아가려는 성직자들과 달리, 나는 아직 서부에서 할 일이 남은 입장이었다.
‘그리고 계집질도 좀 해야지.’
어제부터 자꾸만 이자벨라의 얼굴이 머릿속을 아른거리는 게, 아무래도 회포를 한번 풀어야 할 것 같았다.
‘나 참, 아무리 쌓였어도 그 비쩍 마른 흡혈귀 계집이 떠오르다니, 창피해서 말도 못 하겠군.’
“테온, 테온?”
“음?”
“하하, 테온은 요즘도 종종 그래요?”
“뭐가 말이냐?”
“혼자 생각에 잠겨서 피식피식 웃는 거 말이에요.”
“……내가 그랬나?”
아우레오가 나를 흉내 내며 웃었다. 그걸 본 주변의 다른 성직자들도 웃었다.
‘그나저나 마라고사로 돌아온 지 하루가 지났는데 아직도 샬릿이 돌아오지 않는군.’
본래 추격이란 시간이 흐를수록 성공 확률이 낮아지는 법이다.
하루가 넘게 덜미를 잡지 못했다면 추적이 장기전으로 돌입했다는 뜻이고, 이런 경우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엘프들은 샬루의 시신을 수습할 게 아니라, 처음부터 전력으로 흉수를 따라가 초장에 붙잡았어야 했다.
“테온, 저희는 이만 중부로 출발하겠습니다.”
아우레오를 비롯한 성직자들은 중부 대교구로 복귀를 서둘렀다.
그들은 용살의 업적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밤사이 출발 준비도 마쳤고, 마차까지 구해서 오비데우스의 사체를 실어 놓았다. 물론,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두꺼운 천으로 가려 두었지만 말이다.
“이것도 가지고 가라.”
나는 개척 교회 앞에서 그들을 배웅하며, 아우레오에게 자루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자루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아우레오의 눈이 커졌다.
“테온, 이건……!”
“오비데우스의 수급이다. 몸뚱이만 가져가도 놈이 죽었다는 증거로는 충분하겠지만, 역시 머리통이 있어야 모양이 살지.”
“이 귀한 걸 박제로 만들지 않고 교회에 헌납하다니, 테온의 신앙이 태양처럼 눈부시네요!”
아우레오가 호들갑을 떨고, 옆에 있던 테오도르도 감탄했다.
이 세계에서는 흉포한 몬스터를 사냥한 뒤 박제로 만들어 장원에 전시한다. 대부분의 기사나 귀족이 그렇게 했다.
종종 신앙심이 투철한 자들은 토벌한 몬스터를 교회에 헌납하기도 했지만, 대가리는 따로 떼어 내 자기가 보관하는 게 보통이었다.
한데 다른 몬스터도 아니고 용의 사체를 수급까지 내주다니, 성직자들이 보기에는 보석을 상자째 바치는 것보다 더 큰 헌금이었다.
‘박제? 쯧,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이지.’
성직자들의 생각과 달리, 나는 몬스터 박제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내가 용 두 마리를 사냥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입 다물고 있어도 머지않아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될 터다.
번거롭게 오비데우스의 대가리를 들고 다닐 이유가 없는 것이다.
도마뱀과 인간이 섞인 것 같은 흉물을 박제로 만들어 전시해 봤자, 장원의 경관만 망칠 뿐이다.
‘간밤에 살펴보니 딱히 쓸모도 없겠던데, 괜히 들고 다녀 봤자 피 냄새만 풍기지.’
결정적으로, 오비데우스의 사체는 마땅히 활용할 곳이 없었다.
키르케네스의 사체는 고대룡의 거체이니, 그 비늘이나 뼈, 힘줄 등이 인세에 다시 없을 보물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오비데우스는 퇴화한 용인의 몸이었다.
간밤에 비늘의 강도와 특성을 시험해 본 결과, 현재 사용하는 백룡갑에 한참 못 미치는 재료라고 판단했다.
‘차라리 중부 대교구에 쾌척하는 게 낫다. 이놈들에게 용의 수급은 대단한 보물이자 영광일 테니, 언젠가 이걸 빌미로 큰 힘을 빌릴 수 있겠지.’
오비데우스까지 죽여 버린 마당에 내가 중부 대교구의 힘을 빌릴 일이 있을까 싶긴 하지만, 빚을 지게 해 나쁠 게 없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세계에서 인간의 구심점은 아도나이 교회고, 교회를 대표하는 곳이 바로 중부 대교구니까.
게다가 교구는 ‘성물’이라 부르는 다양한 신병이기(神兵異器)를 보유한 듯하니, 수급을 받은 대가로 유용한 물건을 내줄지도 모른다.
“각하,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아예 저희와 함께 중부로 가시죠.”
“맞습니다, 각하. 각하께서 대교구에 입성하면, 대주교께서 각하를 위해 성대한 연회를 여실 겁니다.”
“큰 상도 내리시겠지요. 각하께서는 격에 맞는 대접을 즐기다 천천히 북해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성직자들이 침을 튀겨 가며 설득했다. 나를 어지간히 중부 대교구로 데려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실제로 지금 내가 대교구에 방문하면 극진한 대접과 함께 큰 포상을 받을 것 같았다. 하지만…….
“되었다. 신의 뜻을 받들어 악을 처단하는 것은 기사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이지, 연회나 포상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다.”
“가, 각하……!”
“흑흑, 각하, 이렇게 저희를 일깨워 주시다니……!”
그럴싸한 말로 거절하니 성직자들이 감동했다. 특히, 성기사들은 격동하는 감정을 숨기지 못해 눈물까지 보이며 반성했다.
‘빨리 집에 가라, 이 새끼들아. 너희가 얼른 사라져 줘야 용의 둥지로 돌아가서 연구 자료를 빼돌릴 수 있단 말이다.’
연회나 포상을 바라고 오비데우스 처단한 게 아니라는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신의 뜻을 받들어 벌인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나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될 존재를 제거하고, 차원이동에 관한 연구 자료도 확보할 생각으로 벌인 일이다.
‘겸사겸사 암혈의 복수도 해 주고 말이지.’
마지막 생각은 떠오르는 즉시 머리에서 지워 버렸다. 어쩐지 이자벨라 그년에게 말려드는 것 같아 짜증이 났다.
좌우지간, 내가 단호히 거절하자 성직자들도 더 이상 중부 방문을 권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