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65
“각하, 알고 계시겠지만, 아크리치는 비행과 공간이동을 자유자재로 사용합니다. 그런 적을 상대로 대규모 원정군을 이끌고 쫓아가는 건 극히 비효율적인…….”
“원정군은 계속 남하한다. 아크리치를 보러 가는 건 나 혼자다.”
내 말에 야키치의 표정이 더욱 복잡해졌다. 이런 전개는 예상 못 한 모양이었다.
“각하께서 부대를 이탈하면 원정대는 누가 이끈단 말입니까?”
“애당초 원정대는 내가 이끄는 게 아니다. 테오도르 몬테파를로 경이 이끌고 있지. 내가 자리를 비우는 건 그에게 미리 말해 놓을 테니, 너는 내일 다시 와서 나를 아크리치가 지나갈 길목으로 데려가라.”
야키치는 잠시 고민했다. 예상하지 못한 제안에 그의 머릿속이 복잡해 보였다.
“각하, 이건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 같습니다. 장로들에게 지침을 받아야 할 듯하니, 오늘은 일단 물러가겠습니다.”
“그리해라.”
내가 허락하자, 야키치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 먹물처럼 그림자에 녹아들었다. 그의 기척이 빠르게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자벨라를 생각보다 빨리 만날 수도 있겠군.’
나는 곧장 테오도르와 라니에르, 그리고 아우레오를 천막으로 불렀다.
요한나는 부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스스로 찾아왔다.
“긴히 할 말이 있다.”
원정군 지휘부에 다크엘프의 방문과 그들의 제안을 공유했다. 그리고 나 혼자 원정군을 이탈해 아크리치가 지나갈 길목으로 가겠노라 선언했다.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테오도르는 내 뜻을 존중했고, 아우레오는 너무 위험하다며 일단 요정숲에 도착할 때까지 함께 남하하자고 했으며, 라니에르는 아예 원정군의 기수를 돌려 다 함께 아크리치를 치자고 했다.
“되었다. 모두가 회군하면 푸른 용의 의도대로 놀아나는 셈이지. 나 혼자 가는 게 상책이야.”
나후타야는 설마 내가 원정군을 이탈해 단독으로 아크리치를 요격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전에 야키치가 찾아와 알려 주지 않았다면, 나는 아크리치가 북상한다는 정보 자체를 얻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테온, 아크리치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닙니다. 테온이 단신으로 맞서다가 패하기라도 한다면…….”
“용을 두 마리나 베어 죽인 나다. 고작 그 하수인에 불과한 언데드에게 당할까.”
“용의 하수인이라고 반드시 용보다 약할 것이라 단정 지을 순 없습니다. 옛 성인의 기록에 따르면, 아크리치는 지옥의 악마와 버금가는 힘을 가졌거든요. 실제로 지옥마력을 사용하기도 하고요.”
“악마? 지옥마력?”
아우레오가 처음 듣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자신만만한 내 태도가 못내 불안한 듯했다.
“예. 악마는 지옥의 심연에서 태어난 존재입니다. 악마들은 마나가 아닌 지옥마력을 사용해요. 마나가 생명의 힘이라면, 지옥마력은 접촉하는 모든 것을 무(無)로 되돌리는 파멸의 힘이지요.”
지상의 마나가 선기(仙氣)라면, 지옥마력은 마기(魔氣)와 유사한 개념이었다.
아우레오가 말한 악마라는 존재는 지옥에 살면서 지옥마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쉽게 말해 저승 세계의 지배종이었다.
‘뭐, 그래 봤자 확인된 사실은 아니겠지만…….’
물어보나 마나,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악마를 실제로 본 적은 없을 터다. 분명 성경에 나온 내용만 보고 철석같이 믿고 있겠지.
‘악마라…….’
단어를 곱씹었다. 중원식으로 번역하자면, 야차(兇面)나 아수라(阿修羅)를 뜻하는 말이었다.
듣기에는 살벌하지만, 중원에서는 개나 소나 별호로 쓰는 단어이기도 했다.
‘옛 문헌에 적혀 있다고 저렇게 겁을 내나? 내 소싯적 별호도 흉면야차(兇面夜叉)였다, 이놈아.’
심지어 흉면야차라는 별호는 내가 화경에 오르기도 전, 절정과 초절정 사이의 애매한 경지에 머무를 때 붙은 것이다.
지금 기준으로 생각하면 별로 강하지도 않았던 시절이다.
‘아크리치가 악마에 버금가는 힘을 가졌다는 건 비유적인 표현일 테지. 강호의 호사가들이 과장하길 좋아하는 것처럼, 이 세계의 옛 성인이란 놈들도 하나같이 허풍선이들이야.’
내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아우레오가 쓰게 웃었다.
그는 오랜 시간 나와 함께했고, 이제는 내 표정만 보고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는 듯했다.
“테온의 표정을 보니, 이미 마음을 정했군요. 제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겠네요.”
“흐흐, 잘 아는구나. 너무 걱정 말거라. 요정숲에서 나온 적발의 리치가 진짜 아크리치인지도 확실치 않고, 설령 아크리치라고 해도 내 적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다크엘프들은 마법을 파훼할 수 있다고 하니, 충분히 승산이 있다.”
사실 승산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압도적인 승리를 예상했다.
언데드 마법사라고 해 봤자 오비데우스보다 강하진 않을 터. 다크엘프들이 스크롤 마법만 파훼해 주면 무난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잔말 말고 너희는 계속 남하해. 나는 다크엘프들과 함께 아크리치를 처단하고 곧장 원정대로 복귀할 테니.”
아우레오와 테오도르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라니에르는 자기 의견이 묵살당한 게 불만인지, 주둥이를 삐죽 내밀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약속대로 야키치가 원정대 야영지로 찾아왔다. 지난번과 달리 다크엘프 장로들과 함께였다.
나를 비롯해 원정군 수뇌부는 미리 천막에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인간 성직자 여러분. 저는 다크엘프를 이끄는 대장로, 나가타입니다.”
나가타를 비롯한 늙은 다크엘프들은 천막에 들어오고 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접선을 나후타야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저 잠행술은 꽤 쓸 만해 보이는군. 운잠홍보다 훨씬 나아.’
‘그림자 은신술’이라 불리는 다크엘프의 잠행술은 배우고 익히는 기술이라기보다 권능에 가까워 보였다.
내가 익힌 여러 무공 중 가장 부족한 분야가 바로 잠행술이다 보니, 다크엘프들의 그림자 은신술은 무척 탐이 났다.
“반갑소. 다크엘프의 수장이 직접 찾아와 주었으니, 이제 제대로 전술 논의를 할 수 있겠군.”
원정군 측에서는 테오도르가 대표로 나섰다.
다크엘프들이 나를 찾아오긴 했지만, 이미 원정군과 정보를 공유한 이상 지휘관인 테오도르를 전면에 내세우는 게 경우에 맞았다.
반면, 요한나는 이전과 달리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녀는 천막 구석에 얌전히 앉아서 회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럼, 다들 아크리치 요격에 동의한 것으로 알고, 내일부터 병력을 나누겠습니다.”
테오도르의 말에 장내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나 혼자 다크엘프들을 따라가려고 했지만, 긴 회의 끝에 결국 정예 성직자 몇 명이 함께 가기로 했다. 아우레오가 강력하게 동행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단, 원정군이 분리된 걸 나후타야가 눈치채면 곤란하니, 동행하는 인원은 최소한으로 제한하기로 했다.
‘마음 같아서는 나 혼자 가고 싶지만…… 사제들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
아크리치의 육신을 검강으로 토막 내면 이자벨라의 영혼은 지옥에 처박힐 것이다.
그런 결과는 바라지 않으니, 내가 아크리치를 처단하기 직전에 그녀의 영혼을 해방시켜 줄 고위 성직자를 여럿 대동해야 했다. 그것이 언데드가 된 이자벨라에게 안식을 주는 유일한 길이었다.
“다크엘프들과 함께 아크리치 요격에 나설 사람은 열 명 이내로 하겠습니다. 우선 크로우 경이 포함돼야 하고…….”
테오도르와 나가타가 열띤 논의를 벌이며 인원을 선발했다.
최종 선발된 인원은 열 명이었다.
나, 아우레오, 라니에르, 백장미 성기사 두 명, 은하수 성기사 두 명, 전투 사제 두 명. 마지막으로 성녀 요한나였다.
“은하께서 꼭 가셔야겠습니까?”
“꼭 가야겠어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는 게…….”
“전 돌머리라 두 번 생각 못 해요.”
“…….”
테오도르의 만류에도 요한나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테오도르는 나와 라니에르에게 요한나의 경호를 당부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경. 목숨을 다해 성녀 은하를 지키겠습니다.”
“최대한 신경을 써 볼게.”
라니에르는 콧김을 내뿜으며 결의를 다졌고,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테오도르는 영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낯빛이 어두웠다. 하지만 원정군 총대장인 그가 본대를 떠나 요격조를 따라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후에도 몇 가지 세부 논의가 오갔지만, 작전의 핵심은 간단했다.
첫째, 요격조는 다크엘프들과 함께 아크리치가 지날 길목에 매복한다.
둘째, 매복 장소에 아크리치가 나타나면 다크엘프들이 주문 파괴술로 격추한다.
셋, 추락한 아크리치를 요격조가 공격해 처치한다.
첫 번째는 딱히 변수가 생길 여지가 없지만, 두 번째부터가 문제였다.
“다크엘프들이 아크리치의 이동 마법을 파훼할 수 있느냐에 이번 작전의 성패가 달려 있군요.”
아우레오의 평가에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분명 아크리치의 비행이나 공간이동을 차단하는 게 이번 작전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늘 그렇듯, 상황은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사파에서 온 용사
운명
다음 날.
나를 비롯한 열 명의 고위 성직자는 다크엘프들과 함께 요격 지점으로 이동했다.
보안 유지를 위해 눈에 띄지 않는 경로로 이동했고, 말도 타지 않았다.
“과연 각하의 운명은 범상치 않군요……. 이런 경우는 처음 봅니다.”
내 옆에서 걷던 나가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앞서 이오안도 내 운명에 관해 언급한 적이 있었고, 요한나도 내 운명은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말했었다.
나는 운명론을 믿지 않는 사람이지만, 세 번이나 비슷한 말을 듣다 보니 궁금증이 도졌다.
“내 운명이 보이나?”
“아뇨. 각하의 운명은 보이지 않습니다.”
“……?”
순간 이 늙은 다크엘프가 말장난을 하는 건가 싶었다.
방금까지 내 운명이 어쩌고 이야기하더니, 정작 물어보니 보이지 않는다니?
하지만 이어지는 나가타의 설명을 듣고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각하의 운명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특별한 것입니다. 본래 엘프와 다크엘프의 대장로들은 타인의 운명을 어렴풋이 볼 수 있거든요.”
그의 설명에 따르면, 엘프와 다크엘프의 지도자들은 조상신으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몇 가지 부여받았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운명안(運命眼)’. 이름 그대로 운명을 보는 눈이다.
“운명은 끝이 정해진 책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각과 행동, 선택에 따라 수시로 바뀌지요. 저는 그 변화하는 운명의 방향을 어느 정도 볼 수 있고요.”
‘운명을 본다기보다는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군.’
운명안은 사주팔자 따위가 아니라, 아주 먼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 능력에 가까웠다.
“물론 운명이란 것이 호수에 비친 풍경처럼 또렷하진 않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대략적인 방향만 느낄 수 있는 정도이지요.”
“대략적이란 게 어느 정도냐?”
“예를 들면, ‘이 사람은 젊은 나이에 요절하겠구나.’라거나, ‘저 사람은 말년에 큰 부자가 되겠구나.’ 하는 정도입니다.”
“그리 대단한 예측도 아니군. 그 정도는 운명안이란 게 없어도 연륜을 가진 사람이면 할 수 있는 예측 아닌가?”
“흘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요.”
나가타는 허허롭게 웃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그의 표정에서는 운명안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운명은 사람의 단편적인 태도를 보고 장래를 넘겨짚는 게 아닙니다. 비록 흐릿하지만, 진정으로 미래를 보는 것이지요. 하지만 각하의 운명은 흐릿한 미래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내 미래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나 보군.”
“그런 뜻이 아닙니다. 각하는 운명이 흐릿한 게 아니라, 운명이랄 게 아예 없습니다.”
“운명이랄 게 없다…….”
참 듣기 좋은 말이다.
나는 본래 운명이란 개념을 좋아하지 않는다.
치열하게 싸워 온 나의 삶이 알고 보면 누군가가 정해 놓은 순서대로 따라가는 것이었다면, 그보다 억울한 일이 또 있을까?
“한데, 넌 나에게서 영웅의 운명을 보았다고 하지 않았나? 아까랑 말이 다른데?”
“각하의 운명을 보지 않아도, 각하께서 영웅의 길을 걷게 될 걸 예상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각하의 검을 보면 알지요.”
나가타의 손끝이 운철묵검을 가리켰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라 귀를 쫑긋 세우고 그의 말을 경청했다.
“각하의 검은 특별합니다. 마치 사람처럼 검의 운명이 보여요. 각하의 검은 용사의 검이 될 운명입니다. 겉보기에는 거무튀튀한 쇠붙이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눈부신 사명을 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