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26
“하지만 마녀의 배후에 또 다른 존재가 있다는 건 확실해졌습니다. 추상적이지만 단서도 얻었고요.”
내가 보기에는 별다른 성과가 없어 보이는데, 옐란치노 주교와 이단심문관은 충분히 만족한 모습이었다.
“마지막에 보인 독특한 문양은 무엇일까요? 언뜻 보기에는 마법진의 형태와 비슷한데.”
“저는 그보다 마녀의 마지막 예언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얼어붙은 땅이라면 북부를 말하는 것 같은데…….”
“불멸의 씨앗이라면 역시 악마를 뜻하는 걸까요?”
주교와 이단심문관, 사제들이 두런두런 의견을 나누었다. 아우레오도 심각한 얼굴로 마녀의 유언을 되뇌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따로 성직자 회의를 열어서 나누도록 하지. 다음은 테온 차례네.”
“자, 잠깐.”
옐란치노 주교의 말에 다가오는 이단심문관.
“나도 저런 의식을 받게 되는 건가?”
“뭐? 하하하. 당연히 아니지.”
이단심문관은 가볍게 웃으며 성수가 담긴 그릇에 손을 넣었다. 짧은 기도문을 읊조리자 성수에 옅은 백광이 흘렀다.
그는 물장난을 치듯 내 머리 위에 물방울을 탁탁 튕겼다.
“……?”
당연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의식은 그걸로 끝이었다.
* * *
심문이 끝나자, 옐란치노 주교의 눈빛에 호감이 뚝뚝 흘렀다.
‘왜 저래?’
평소 아우레오가 나를 향해 보여 주던, 선망과 애정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제가 큰 결례를 범했군요.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테온.”
“뭐, 살다 보면 그럴 수 있지.”
사실 별것 아닌 오해로 칼부림하는 건 강호에서 흔한 일이었다. 알두르처럼 비무하다 힘 조절을 못 해서 살초를 쓰는 경우도 왕왕 일어났다.
하지만 옐란치노 주교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아닙니다. 저의 경솔함으로 테온에게 마법사란 누명을 씌울 뻔했어요.”
“확인해 보아야 한다고 한 거지, 누명을 씌운 건 아니잖아?”
“판결을 주장한 것만으로도 그대의 신성을 더럽힌 셈이지요. 저는 응당한 보상을 지불해야 합니다.”
‘신성을 더럽혀? 이럴 땐 명예를 더럽혔다는 게 옳은 표현 아닌가?’
주교가 무언가 오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대가를 지불하겠다는데 굳이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심문실을 벗어나 응접실로 향하는데, 아우레오가 다가와 속삭였다.
“광휘의 검을 막은 게 마법이 아니라고 밝혀졌으니, 이제 교회에 종사하는 모든 이가 테온의 내면에 깃든 빛을 인정할 것입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성질을 죽이고 심문받은 보람이 있었다.
교회는 이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이다. 종교가 기반이지만, 세속적인 권력도 어마어마했다.
물방울 좀 맞고 교회의 비호를 받게 된 셈이니, 수지맞는 장사였다.
“다만, 광휘의 검을 막아 낸 것이 ‘기적’이었는지는 교단의 심사가 필요합니다. 기적으로 인정받으면 좋겠지만, 쉽지는 않을 거예요.”
교회에서 말하는 기적이란 내가 흔히 생각하는 기적과 그 의미가 달랐다.
신성을 드러낼 만한 불가사의가 일어나면 교단에서는 심사를 통해 기적으로 인정한다.
기적을 일으킨 자는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는다고 했다.
‘분위기를 보니 기적으로 인정받기는 어렵겠군.’
어차피 몰랐던 사실이니 기대도 하지 않았고, 아쉬움도 없다. 옐란치노 주교의 호의를 얻은 것만 해도 큰 성과였다.
‘지역 교구의 주교라면 강호 명문대파의 장문인이나 마찬가지. 그런 자가 내 신분을 보장해 준다면, 앞으로의 여정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들뜬 마음으로 응접실에 도착했다. 옐란치노 주교는 선물을 가져오겠다며 주교실로 들어갔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다른 성기사와 사제 들은 내게 사과와 칭송을 전했다.
“오해해서 미안하오, 테온.”
“그대는 신실함으로 광휘의 검을 막아 냈군. 그런 기적을 지켜보게 되어 영광이오.”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특히 알두르는 거의 추종에 가까운 호의를 드러냈다.
“그대가 만에 하나 광휘의 검을 막아 내지 못했더라면, 나는 일평생 후회 속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경황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무고한 사람과 대련 중에 광휘의 검까지 꺼내 휘둘렀으니, 그 미안함과 고마움, 아찔함이 뒤섞여 일종의 동료애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듯했다.
심문을 하는 동안 다른 곳으로 불려 갔던 에릭과 토마스도 응접실로 돌아왔다.
그들은 급변한 상황에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에릭, 이게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처음에는 손님 대접을 해 주다가, 갑자기 사람을 밀실에 가두더니, 이제 다시 대접을 해 주네?”
“쉿, 입조심해. 우리가 모르는 사연이 있겠지. 나중에 아우레오 사제님께 듣자고.”
에릭이 눈치껏 토마스를 말렸다.
그때 문밖에서 분위기를 깨는 소리가 들렸다.
“교회는 백작 각하의 서신을 받으시오!”
사파에서 온 용사
영주의 속셈
교회를 찾아온 사람은 오르샤바의 영주가 보낸 전령이었다. 그는 오연하게 턱을 쳐들고 나오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불손한 모습에 몇몇 사제와 성기사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이것 봐라?’
전령의 태도와 성직자들의 반응만 보아도 이곳의 영주가 교회에 호의적이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세계에서 오직 교회만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줄 알았던 나에게는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하긴, 지금껏 대부분의 정보를 아우레오를 통해 얻었으니, 교회에 편향된 시각이 생겼겠지.’
그때 선물을 가지러 갔던 옐란치노 주교가 손님을 맞기 위해 나왔다.
“영주 성에서 보낸 서신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주교 예하가 오셨으니 낭독을 시작하겠습니다.”
“잠깐, 그 전에 테온에게 줄 게 있습니다.”
옐란치노 주교는 큼직한 목함을 건넸다. 뚜껑을 열어 보니 은빛으로 반짝이는 옷감과 장신구가 들어 있었다.
“오르샤바 교구에서 소장한 망토와 교구를 상징하는 브로치예요. 망토에는 여러 축복이 담겨 있는데,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할게요. 브로치는 가슴에 달고 다니세요. 아도나이의 가르침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 브로치로 신원을 증명할 수 있으니, 오늘 같은 곤란은 겪지 않을 겁니다.”
“오, 고마워.”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장신구는 이방인인 나에게 가장 필요한 물건이었다. 선물을 고른 옐란치노 주교의 마음 씀씀이가 느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전령은 눈을 빛냈다. 콧대 높은 주교가 웬 외국인에게 호의를 베푸는 모습이 신선하게 보인 것이다.
“이제 서신을 읽어도 되겠습니까?”
“그러세요.”
전령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서신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귀족의 서신답게 온갖 장황한 수사가 대부분이었지만, 중요한 내용도 몇 가지 담겨 있었다.
“……전략…… 그리하여, 본인은 기수를 소집하고 병사를 모아 동쪽 숲을 토벌하고자 하니, 교회는 종군 사제를 지원하라.”
“이런 무례한!”
“이토록 일방적인 통보라니!”
몇몇 성직자가 발끈했지만, 전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신을 끝까지 낭독했다.
불필요한 내용을 생략하면 용건은 두 가지였다.
첫째, 오르샤바 동쪽 숲에서 사람이 실종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으니 군사를 동원해 정찰하고 원흉을 토벌하겠다.
둘째, 영주 성에서 이런 위험한 일에 발 벗고 나섰으니, 너희 교회도 잔말 말고 도와라.
‘핵심은 두 번째겠지.’
영주는 치안 유지를 명분으로 교회에 인원 차출을 요구한 것이다.
꼴을 보아하니 영주와 주교가 기 싸움을 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아주 재미있는 시점에 방문했군.’
내가 두 권력자의 샅바 싸움을 보며 킬킬거리고 있을 때, 옐란치노 주교는 전령이 가지고 온 서신을 넘겨받았다.
“내용은 잘 들었어요. 부제는 먼 길을 달려온 전령에게 마실 것을 내드리세요.”
영주의 도발에도 옐란치노 주교는 평정을 잃지 않았다.
“두 시간 뒤 성직자 총회를 열겠습니다. 교구의 모든 사제와 성기사는 대회의실로 모여 주세요.”
옐란치노 주교는 짧게 말하고 먼저 회의실로 향했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몸을 돌렸지만, 마지막 순간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테온, 우리도 미리 회의장으로 가죠.”
“우리? 우리가 저기에 왜 끼어?”
“성직자 총회는 지역 내 모든 성직자가 참여합니다. 교구가 다르지만, 지금은 저도 오르샤바에 와 있으니 참여해야지요.”
“넌 그렇다고 치고, 나는 왜 데리고 가?”
“테온은 제 순례의 수호자이니까요. 전에 말씀드렸지요? 순례가 끝날 때까지 수호자는 사제에 준하는 대우를 받습니다. 그러니 성직자 회의에도 참석할 수 있어요.”
“참석할 수 있는 거지 꼭 참석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난 별로 끼고 싶지 않은데? 늙은이들 회의하는 게 뭐 재미난 볼거리도 아니고.”
“그러지 말고 같이 가요. 이런 기회는 흔치 않다고요.”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지만, 생각해 보니 아우레오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지역 교구의 성직자 총회란 무림방파의 장로 회의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거대한 조직의 수뇌부 회의를 구경하는 건 보통 사람이 하기 힘든 경험일 터였다.
‘어쩌면 귀한 정보를 얻게 될지도 모르고.’
금방 마음을 바꾼 나는 아우레오를 따라 대회의실로 향했다.
토마스는 그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지켜보다 에릭에게 이끌려 응접실로 돌아갔다.
* * *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영주의 오만함이 도를 넘었어요!”
“울리노 사제의 말이 맞습니다. 가야르도 백작은 신앙보다 권력을 믿는 자입니다. 이대로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성직자 총회는 열띤 분위기로 진행됐다. 늙다리 사제들의 점잔 빼는 회의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격렬하게 성토하는 모습에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대뜸 종군 사제를 차출해서 보내라니? 그런 예민한 문제를 이따위로 통보하는 영주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백작이 아니라 왕이라도 주교 예하께 이런 식으로 행동할 순 없습니다.”
꼬장꼬장한 사제들은 신명 나게 영주를 씹어 댔다. 오르샤바의 영주는 진작부터 교회를 무시해 온 모양이었다.
‘영주가 이교도 출신이라는 게 사실이었군.’
두란이 말한 대로였다.
오르샤바의 영주는 아도나이가 아닌 다른 신을 믿던 서부의 소수민족 출신으로, 농경지를 찾아 떠돌던 개척자라고 했다.
칼 한 자루로 지금의 오르샤바를 일구어 낸 초대 백작으로,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귀족이었다.
‘이렇게 큰 도시를 고작 한 세대 만에 만들었다고? 그게 사실이라면 이곳의 영주는 왕재(王才)를 타고난 인물이겠어.’
성직자들은 헐뜯고 있지만, 제삼자인 내가 듣기에 가야르도 백작은 비범한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