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25
“차앗!”
알두르는 그 대단한 광휘의 검을 꺼내 들고 또 수직 베기나 하고 있었다.
한심한 모습에 냉큼 피하고 승부를 내 버릴까 하다가, 문득 위력을 한번 느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모든 걸 건너뛰고 피육만 베는 건가?’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정면을 막았다. 알두르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갔다.
광휘의 검은 내 검을 통과해 코앞까지 다가왔다. 칼끼리 부딪히는 충격은 아예 없었다.
환검(幻劍)도 아니었다. 광휘에 둘러싸인 검은 내 검을 그냥 연기처럼 통과해 버린 것이다.
“피, 피해!”
알두르가 참격을 거두지 못하고 급히 소리쳤다.
경황이 없는 와중에 본의 아니게 살초를 펼친 모양. 강호에서 일류고수만 되어도 범하지 않을 실수였다.
정신없는 알두르와 달리 나에게는 여유가 있었다.
뻗었던 검을 재빨리 비홍선회(飛鴻旋回)의 초식으로 회수하고 수세를 유지했다.
‘내공으로 막으면 어떻게 될까.’
십 년 내공이 있으니, 정면으로 받지 못해도 비껴 내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터.
단전에 잠들어 있던 옥심귀일공의 내력이 검병으로 흘러 들어갔다.
카카칵-.
쇠를 찢는 듯한 파열음과 함께 알두르의 검이 내 검 위를 미끄러져 내려왔다. 쇠를 건너뛰는 광휘의 검이라지만, 십 년 내공이 집약된 어기충검은 통과하지 못했다.
그의 검은 허무하게 땅바닥에 박혔고, 내 칼끝은 알두르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좋은 대결이었어.”
우당탕!
의자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옐란치노 주교가 앉아 있던 의자였다.
“말도 안 돼!”
벌떡 일어선 노사제의 눈알이 튀어나올 듯했다.
옐란치노 주교뿐만 아니라 다른 성기사와 사제, 부제 들까지 하나같이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뭘 저렇게까지 놀라? 알두르가 엄청 강한 편인가?’
하긴, 아우레오도 성기사가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검객일 것이라 했으니, 저들의 자부심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놀라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막, 막았어……! 광휘의 검을……!”
‘그거 한 번 막은 것 때문에 저 호들갑인가.’
황당했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이곳은 내공이 없는 세계다. 어기충검의 개념이 없으니, 침투경(浸透經)의 일종인 광휘의 검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기술이었을 터.
그중에서도 가장 놀란 사람은 역시 알두르였다. 그는 당황한 나머지 광휘의 검을 꺼냈지만, 일단 휘두른 이상 내 몸이 두 쪽 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테, 테온, 어떻게 광휘의 검을 막아 낼 수 있지요?”
“막은 건 아니고, 그냥 비껴 낸 거야.”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가능하냔 말일세!”
얼렁뚱땅 둘러대는 말에 옐란치노 주교가 성큼성큼 걸어오며 외쳤다.
노사제의 표정이 복잡했다.
“피한다면 모를까, 막다니? 광휘의 검은 천사의 권능 그 자체인데 어떻게……?”
어째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옐란치노 주교의 눈동자에 의심이 일렁이고, 다른 성기사들의 손이 칼자루 쪽으로 슬금슬금 이동했다.
나 역시 그런 기미를 느끼고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비했다.
사파에서 온 용사
결백 증명
팽팽하게 당겨진 실처럼 일촉즉발의 상황에 아우레오가 끼어들었다.
“주교 예하, 보셨나요? 테온이 알두르 경의 검을 막아 냈습니다!”
“보았네. 뭉툭한 철검으로 광휘의 검을 막아 냈지.”
“그런데 왜 그렇게 경계하는 모습이십니까? 놀랍지 않으신가요?”
그 태평한 모습에 옐란치노 주교도 결국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일단 당장 위험한 상황은 넘겼다고 판단하고 칼을 내렸다. 다른 성기사들도 칼자루에서 천천히 손을 뗐다.
“아우레오 사제, 테온을 이단심문관에게 보내야겠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우레오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옐란치노 주교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자네도 알잖나. 광휘의 검은 사람이 막아 낼 수 있는 것이 아닐세. 천사의 권능을 막는 것은 같은 빛의 힘이거나, 아니면…….”
“설마 테온이 사악한 마법이라도 쓴다는 말씀이십니까?”
“혹시 모르지.”
옐란치노 주교의 표정은 단호했다. 다른 성기사들도 당연한 조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방금까지 함께 웃고 떠들던 놈들이, 이제는 안면몰수하고 나를 마법사로 몰아갔다.
‘상종 못 할 놈들이군.’
옐란치노의 턱짓에 성기사들이 나를 포위했다.
“마침 마녀 심판을 위해 이단심문관이 와 있으니, 시간 끌 것 없지 않나? 스스로 당당하다면 함께 가지, 테온.”
나를 둘러싼 성기사는 알두르를 포함해 여섯 명. 이들 모두가 광휘의 검을 사용한다면 내가 당해 낼 수 있을까?
‘따로 합격술을 익힌 게 아니라면 빠져나가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문제는 그 이후다.’
이 자리에서 성기사를 모두 죽이거나 도망친다 한들, 결국 과거처럼 쫓기는 삶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때 아우레오가 다가와 내 소매를 잡았다.
“테온, 미안하지만 함께 가 주세요. 제가 함께 가서 이단심문관이 감히 테온을 고문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제 신앙을 걸고 맹세하지요.”
“고문 없이 어떻게 나를 심문하지?”
“순례자가 길을 잃지 않는 것처럼, 이단심문관도 고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테온이 마법을 쓰지 않았다면, 분명 결백을 밝혀 줄 거예요.”
아우레오의 설명을 들어 보니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내가 마법을 익히지 않은 건 명백한 사실이니, 이참에 결백을 증명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여차하면 그때 다 죽여 버리고 튀면 되지.’
일부분이지만 내공을 되찾았으니, 나름대로 믿는 구석도 있었다.
* * *
성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심문 장소에 도착했다.
이단심문을 하는 곳이라길래 어둡고 축축한 지하 감옥 같은 곳을 생각했는데, 그냥 평범한 건물이었다.
‘중원의 어지간한 관묘보다 더 멋진데?’
이단심문실은 교회 본건물과 마찬가지로 백색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 건물의 목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내부는 넓게 트여 있었는데, 한쪽에 철창이 있고 그 안에 내가 잡아 온 마녀들이 발가벗은 채 갇혀 있었다.
반대쪽 벽에는 온갖 흉악한 도구가 걸려 있어 누가 봐도 고문을 위한 장소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거의 걸레가 됐군.’
마녀의 제자들은 죄다 상처투성이였다. 마녀 본인은 더 심했는데, 십자가에 매달린 그녀의 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얼마나 고문을 당했는지, 상처에서는 더 이상 피도 흐르지 않았다.
“주교 예하, 오셨습니까.”
“고생이 많네, 심문관.”
마녀를 고문하던 이단심문관이 주교를 맞이했다.
그는 다른 사제와 달리 검은색 예복을 입었고, 작은 구멍이 촘촘하게 뚫린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성과는 좀 있나?”
“송구합니다. 물리적인 방법으로는 도무지 입을 열지 않는 걸 보니, 중부 사제의 의견대로 금제가 걸려 있는 듯합니다.”
“역시 그렇군.”
주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단심문관은 고문 도구를 정리하고 맑은 물에 손을 씻으며 말했다.
“고문은 이쯤에서 그만하려고 합니다. 금제가 걸려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의식을 통해 금제를 풀 생각입니다.”
“내가 딱 알맞은 시간에 왔군. 의식을 치르는 김에 한 사람 더 확인해 주어야겠어.”
주교의 말에 성기사들이 나를 앞으로 밀었다.
이단심문관은 나를 보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독특한 외모군요. 혹시 중부 사제와 함께 왔다는 그 소문의 수호자입니까?”
“바로 맞혔네. 이자가 마법사가 아닌지 확인해 주게.”
“고문은 절대 안 됩니다. 오직 의식을 통해서만 확인해 주십시오!”
아우레오가 끼어들어 외쳤다.
“테온은 광휘의 검을 막았다는 이유로 이곳에 온 것입니다. 마법이 아니라면, 그 역시 빛의 힘을 사용한 것이지요. 고문은 절대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우선 마녀들 먼저 확인하고, 수호자 테온은 그다음 심문해도 될까요?”
주교와 아우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보기에도 그게 순서였다. 마녀들은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았으니까.
“그럼.”
이단심문관은 휙 돌아서서 의식을 준비했다. 감정 없는 목소리에 어울리는 기계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는 마녀들을 철창에서 꺼내 일렬로 꿇어앉혔다. 마녀들의 머리 위로 성수와 포도주를 뿌리고, 빵가루 같은 것과 정체 모를 반짝이는 가루도 뿌려 댔다.
“밝은 눈으로 진리를 보시옵고. 열린 귀로 진실을 듣고 계신 분…….”
이단심문관은 의식을 준비하는 내내 기도문을 중얼거렸다. 다른 사제와 성기사 들도 함께 눈을 감고 기도문을 따라 읊었다.
오직 나만 눈을 똑바로 뜨고 모든 의식을 지켜보았다.
덜덜덜…….
마녀들이 사시나무 떨듯 떨기 시작했다. 바닥과 십자가도 진동하고 있었다.
“아으윽!”
마녀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터졌다. 꿇어앉은 제자들은 피부를 뚫고 혈액이 실처럼 뽑혀 나왔다.
‘이런 씨팔, 의식이란 것도 고문 못지않게 고통스러워 보이는데.’
허공에 떠오른 핏줄기는 마녀의 몸을 관통하더니 그녀의 양쪽 눈으로 빠져나왔다.
마녀는 이미 눈알을 적출당한 탓에 구멍만 뻥 뚫려 있었는데, 피가 뭉쳐 잠시 눈알과 비슷한 형상을 이루더니 다시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지금이라도 다 죽이고 튈까?’
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만약 나에게도 저런 대법을 시행한다면 순순히 당하고 있을 수 없었다.
그때 사제들의 기도가 멈추고, 마녀들의 몸이 폭사하며 사방으로 피를 튀겼다.
툭.
몸통이 사라진 마녀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데굴데굴 구르던 머리통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고함을 질렀다.
“얼어붙은 대지에 불멸의 씨앗이 자라고 있으니! 교만한 두 발 짐승은 피에 잠겨 죽으리라!”
그 말을 끝으로 마녀의 머리도 퍽 터져 버렸다. 흩어진 핏줄기는 다시 공중으로 모여 허공에 독특한 도형을 그렸다.
‘저건 뭐지?’
둥근 원 안에 여러 선과 글자가 겹친 도형.
잠깐 형상을 이룬 핏줄기는 이내 힘을 잃고 바닥에 쏟아졌다.
“배후를 밝히는 건 실패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