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27
미개척 지역의 모든 범죄 조직과 몬스터를 소탕하고 대도시를 세운 사나이.
난세에 태어났다면 능히 패왕의 자리에 앉았을 인물 같았다.
하지만 내 평가가 무슨 소용이랴? 성직자들은 침을 튀기며 반대 의견을 개진하고, 주교는 눈을 감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이제 진정이 좀 되셨습니까?”
옐란치노 주교의 입이 열렸다.
“여러분의 마음은 십분 이해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영주의 부덕을 성토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요. 영주의 요청에 어떻게 대응할지 서둘러 결정해야 합니다.”
“예하,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손을 들고 나선 사람은 아까부터 열성적으로 소리치던 울리노 사제였다.
그는 붉은 혈색에 눈도 부리부리한 것이, 한눈에 보기에도 한 성깔 하는 위인 같았다.
“말씀하세요, 울리노 사제.”
주교의 허락에 울리노 사제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저는 우리 교구가 영주의 요청을 묵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요?”
“동쪽 숲을 장악한 자들은 보나 마나 놀 떼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겠지요. 아우레오 사제도 여기로 오는 길에 놀의 습격을 겪었다고 하고.”
“그런 하등 몬스터 토벌은 교회의 도움이 없어도 도시 병력만으로 가능합니다. 굳이 성직자가 나서서 전투를 도울 이유가 없지요. 게다가 애초에 놀이 그렇게 늘어난 게 누구 탓입니까? 작년 겨울, 교구에서 몬스터 사전 토벌을 건의했을 때 영주가 묵살한 탓 아닙니까.”
울리노 사제의 말을 끝까지 듣고 난 옐란치노 주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영주의 요청을 거절할 수는 없습니다.”
“예? 주교 예하, 울리노 사제의 주장은 다 옳은 말인데요.”
다른 사제들이 의문을 제기했다.
옐란치노 주교는 답답한 표정으로 나직하게 말했다.
“울리노 사제의 말은 옳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영주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어요. 왜일까요?”
“그게 무슨……?”
‘민심을 잃을 테니까.’
뻔한 수작이었다.
내가 아무리 정치에 재주가 없기로서니, 나이가 벌써 구십이다. 사람이 이 정도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눈치가 있다.
‘영주가 군사를 일으켰다. 민생을 위해 큰 비용을 지출하며 벌이는 일이지. 한데 교회에서는 체면을 운운하며 발을 빼? 민초들이 그 모습을 보면 그날로 교회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는 거야.’
세상을 움직이는 논리는 여러 가지가 있다.
단순히 내 탓, 네 탓을 따지는 것부터 복잡한 정치적 명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힘의 역학이 작용한다.
과거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젊고 혈기가 왕성한 사제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몇몇 노회한 성직자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역시나, 옐란치노 주교를 비롯해 나이 든 사제들이 젊은 성직자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전략…… 즉, 지금 종군 사제를 차출해서 영주에게 보내면, 교회가 영주의 명령을 받드는 것처럼 보이겠지요. 반대로 토벌에 불참하면, 시민들은 교회의 정의에 의문을 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적 함정이에요. 영주는 무조건 이기는 수를 둔 겁니다.”
속사정을 알게 된 젊은 성직자들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종군 사제를 보낼 수도, 보내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 복잡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우리가 모인 것입니다.”
하지만 선뜻 손을 들고 의견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딱히 떠오르는 묘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불편한 정적이 이어지고, 그것을 깬 사람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제가 종군하겠습니다.”
“잉?”
손을 든 아우레오를 보며 나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옐란치노 주교 역시 놀란 표정이었다.
“아우레오 사제가요?”
“예, 저는 중부 대교구에서 온 이방인이지요. 교구가 다르니 제가 토벌에 참여하더라도 오르샤바 교구가 영주의 명령에 굴복한 것으로 보이지 않을 겁니다.”
“호오?”
“하지만 교구가 다를 뿐, 저 역시 성직자입니다. 제가 종군하면 시민들은 교회의 정의를 의심하지 않을 테지요. 교구의 자존심을 지키는 동시에 민심을 잃지도 않는 방법은, 제가 종군하는 겁니다.”
“오오, 그런 묘수가!”
아우레오의 의견에 장내의 성직자들이 감탄을 터뜨렸다. 그의 말대로 아우레오의 존재 자체가 이 난감한 상황을 타개할 열쇠였다.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냐?]“헛!”
[나야, 인마. 테온이라고.]전음에 놀란 아우레오가 흠칫 몸을 떨었다.
[종군? 북부 순례는 어쩌고?]“그, 그게…….”
[대답하지 말고 듣기만 해, 이 눈치 없는 자식아. 잠깐 나가자. 너, 나랑 얘기 좀 해야겠다.]내 목소리에 언짢음이 묻어 나와서인지 아우레오의 표정이 다소 어두워졌다.
우리는 들뜬 사제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회의장을 벗어났다.
“야, 인마. 종군 사제? 그런 중요한 결정을 네 멋대로 하면 어떡해? 난 기억을 되찾기 위해 하루빨리 북부로 가서 마법사를 찾아야 한다니까.”
북부에서 마법사를 찾으려는 이유는 순전히 내공을 빨아먹기 위해서였지만, 나는 천연덕스럽게 난처한 연기를 했다.
순진한 아우레오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진심으로 사과했다.
“죄, 죄송해요, 테온. 하지만 이번 종군도 사제로서 외면할 수 없는…….”
“그걸 말이라고 하냐? 저 안에 있는 수많은 성직자들은 뭘 하고?”
“…….”
아우레오는 내 물음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고개를 푹 숙였다. 이건 명백하게 아우레오가 사서 고생하는 꼴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네가 종군하면 너는 오르샤바 영주의 미움을 사게 될 것이다. 불필요한 적을 만드는 셈이지.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냐?”
“저도 그 정도는 알아요…….”
아우레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세계의 문화를 모르는 나한테도 한눈에 보이는 상황인데 아우레오가 모를 리 없었다.
죄인처럼 땅만 쳐다보고 있는 꼴을 보니 더 구박하기도 어려웠다.
“공식 회의에서 한번 뱉은 말을 철회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또다시 이런 식으로 돌발 행동을 하면, 그때는 너와 함께 다닐 수 없다.”
“알겠어요, 테온.”
“토벌은 너 혼자 가라. 난 도시에서 쉬고 있을 테니.”
“아, 물론이죠. 테온은 이 토벌에 나설 의무가 없으니까요. 제가 종군하는 동안 테온이 교회에서 편히 지낼 수 있도록 미리 교구에 말해 둘게요.”
“오냐.”
일방적으로 통보한 뒤 대답도 듣지 않고 휙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아우레오가 재차 사과했다.
‘이미 결정된 일은 별수 없지. 아우레오가 토벌을 다녀오는 동안 운기에 매진하며 쉬자.’
토벌은 짧아도 몇 주가 걸릴 테니, 모처럼 휴식 시간이 생긴 셈이다.
……라고 생각했던 나는, 다음 날 생각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사파에서 온 용사
짧은 휴식
오르샤바 내성의 영주 저택.
명색이 백작의 저택인데, 실내에 그림이나 화초 따위는 없고 창칼과 짐승 가죽만 걸려 있었다.
대전 한가운데에 준비된 긴 식탁에는 듬직한 체격의 노인이 음식을 먹고 있었다.
노인의 각진 턱은 고집스러웠고, 드러난 목덜미와 팔에 자잘한 흉터가 가득했다.
숱이 빽빽한 백발은 기름을 발라 뒤로 넘겼고, 주름진 피부는 나무껍질처럼 거칠었다.
“쩝쩝.”
게걸스럽게 고기를 뜯는 노인의 이름은 마르틴 가야르도.
서부에서 온 강력한 전사이자, 스스로 작위를 쟁취한 사내. 오르샤바의 초대 영주이자, 제1대 가야르도 백작이 바로 이 남자였다.
“각하, 교회에 보냈던 전령이 돌아왔습니다.”
“들라 하라.”
가야르도 백작의 목소리는 석벽을 긁는 듯 거칠었다.
전령이 백작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읽어 보라.”
허락이 떨어지자 전령은 품에서 서신을 꺼내 낭독했다. 교회에서 받아 온 답장이었다.
“……전략…… 이러한 이유로, 본 교구에서는 이번 토벌에 사제를 파견하지 않는다. 다만, 중부 대교구에서 온 사제 아우레오가 자의로 종군할 예정이니, 영주는 종군 사제에게 합당한 편의를 제공하길 바란다. 이상입니다.”
“…….”
가야르도 백작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미간에 잡힌 주름이 언짢은 심기를 드러냈다.
“중부 대교구에서 온 사제?”
“그렇습니다. 앞서 보고드렸던 아우레오란 자인데, 순례 중 마녀를 체포해 도시에 내방한 인물입니다.”
“돼지들이 꾀를 냈군, 클클.”
가야르도 백작이 헛웃음을 흘렸다.
교회의 체면을 구겨 주려 했는데, 다른 교구의 사제가 끼어드는 바람에 실패한 셈이다.
“물러가라.”
“예, 각하.”
전령은 고개를 숙여 보이고 물러갔다.
가야르도 백작은 생각에 잠겼다. 방금까지 신나게 뜯어 먹던 돼지 앞다리가 갑자기 맛없게 느껴졌다.
“리암 경.”
“예, 각하.”
옆에 시립해 있던 기사가 한 발짝 나서며 부름에 답했다.
“이번 토벌은 경이 총대장을 맡아라. 병력과 물자의 동원은 재량에 맡기겠다.”
“신명을 다해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리암이 힘 있게 대답했다.
가야르도 백작은 눈길도 주지 않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중앙에서 온 미꾸라지 한 마리가 자꾸 물을 흐리는군.’
동쪽 숲에서 연이어 발생한 실종 사건으로 민심이 흉흉한 때, 중부의 사제가 시기적절하게 마녀를 잡아 왔다.
이 멋진 업적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도시의 민심이 교회로 쏠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교회와 세력 다툼을 하는 와중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 가야르도 백작도 무언가 성과를 내야 했다.
애초에 아우레오가 마녀를 잡아 오지 않았다면, 그가 이렇게 토벌을 서두를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눈치 없는 놈.’
짜증이 치밀어도 다른 수가 없었다.
그는 이번 토벌을 통해 마녀 체포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의 성과를 얻어야 했다.
도시의 민심을 자기한테 확 끌어올 수 있는 강력한 사냥감이 필요한 것이다.
* * *
나는 아우레오와 헤어진 뒤 곧장 도시의 중심가로 향했다. 옐란치노 주교에게 받은 망토와 브로치는 일부러 교구에 두고 나왔다.
“역시 사람 사는 곳은 어딜 가나 비슷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