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38
가야르도의 손을 떠난 동전이 빙글빙글 회전하며 공중을 날았다.
그 짧은 순간 로드릭의 혼잣말이 내 귀에 들렸다.
“이건 기회야……. 백작 각하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는 거야…….”
이윽고 동전이 땅에 떨어지고, 로드릭은 빠른 쾌검으로 찔러 들어왔다.
나는 목검을 공중으로 던져 버리고 맨손으로 금룡십팔해를 펼쳐 로드릭의 찌르기를 흘렸다. 로드릭의 팔은 이미 내 겨드랑이에 감겨 있었다.
우득!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로드릭의 팔이 기괴한 각도로 꺾였다.
“아악!”
어린아이 같은 비명이 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나는 고통에 뒷걸음질 치는 로드릭의 발목을 걷어차고, 그가 바닥을 구르는 동안 공중에 던졌던 목검을 잡았다.
“좋은 승부였다.”
검 끝은 이미 로드릭의 목에 닿아 있었다.
* * *
로드릭의 팔을 부러뜨렸지만, 연회는 계속 이어졌다. 오히려 사람이 다치자 더 흥이 오른 것 같았다.
중원이라면 잔치를 망쳤다며 나와 로드릭 둘 다 욕을 먹었을 테지만, 이곳의 연회 문화는 좀 더 거칠었다.
대련을 빙자한 칼부림만 허용되는 게 아니라, 남녀 간의 불륜이나 동성 간의 애정 행각도 빈번히 일어났다.
“경의 용맹은 귀가 따갑게 들었어요.”
“부인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것이지요.”
등 뒤에서 속삭이는 두 남녀는 각각 배우자가 있었지만, 거의 대놓고 사랑을 속삭이더니 함께 연회장 밖으로 나갔다.
“호호, 포도를 나르는 하녀의 미색이 참 곱구나.”
“오늘 밤 침실로 올려보내겠습니다, 부인.”
한 귀부인의 신호에 다른 하인이 대답했다. 귀부인은 만족한 듯 입술을 핥고 연회장을 나갔다.
잠시 후 하인이 말을 전하자, 하녀는 얼굴을 붉히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방탕하기 짝이 없군.’
귀족의 연회란 호화스러움을 넘어 일견 추악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더 많은 음식을 맛보기 위해 섭식과 구토를 반복하는 놈이 있는가 하면, 이기지도 못할 술을 쉴 새 없이 퍼마시는 놈도 있었다.
귀족들은 싸움이 주는 피의 흥분과 육욕이 주는 쾌락에 몸을 맡겨 버린 주제에 꼴에 고귀한 혈통이라고 서로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가야르도 백작은…….’
문득 가야르도 백작의 상태가 궁금해 그를 찾았는데,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상석에 앉아 연회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이 더없이 차갑고 심유했던 것이다.
즐기는 자의 눈이 아니라, 진흙을 헤치며 옥석을 가리는 군주의 눈이었다.
“……?”
가야르도 백작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 슬쩍 웃었다.
뜨거운 연회는 밤이 지나 해가 뜰 때까지 이어졌다.
* * *
연회가 끝나고 나서도 교구에 며칠을 머물렀다.
의외로 백작은 연회에서 웨어울프의 사쳇값을 치러 주지 않았다. 그저 ‘대가를 어떻게 지불할지 고민 중이니 기다리게.’라며 시간을 끌었다.
내가 그냥 돈으로 달라고 해도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설마 백작이란 놈이 체면도 없이 내 돈을 떼어먹진 않을 테고.’
혹시 이렇게 시간을 끌면서 나를 오르샤바에 머무르게 할 셈인가 싶었지만, 이런 좀스러운 짓으로 날 계속 붙잡아 둘 수 없다는 건 가야르도 백작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결국 며칠 더 기다리기로 한 이상, 내가 교구에서 할 일이라고는 사제들에게 글을 배우거나, 성기사들과 검로를 논하는 등 소소한 것뿐이었다.
때로는 용병들과 번화가로 가서 술을 마시기도 했다.
특히 붉은 모루 용병단과 맥주를 마시며 떠드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한가하게 지내니 시간도 술술 흘렀다.
놀고먹은 지 일주일이 지날 무렵, 술집에서 홀로 잔을 기울일 때였다.
“수호자 테온.”
“뭐냐.”
처음 보는 사내가 말을 붙여 왔다. 아까부터 이쪽을 힐끔힐끔 살피는 모습이 거슬리던 놈이다.
“백작 각하께서 귀하를 사냥에 초대하셨습니다.”
“몬스터 사냥 말이냐? 날 굳이 찾다니, 대단한 놈이 나타난 모양이지?”
“예?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여우 사냥입니다.”
“뭐야. 관심 없다 전하거라. 그리고 나한테 할 말 있으면 불쑥 찾아오지 말고 아우레오를 통해 연통을 넣어라.”
술맛 떨어지게 심각한 척하는 모습이 꼴같잖았다.
솜씨 한번 보여 줬더니 고작 여우 사냥 따위로 사람을 오라 가라 하다니, 보기와 달리 가야르도 백작도 사람 마음 얻는 법을 모르는 듯했다.
‘돈이나 빨리 줄 것이지. 웬 여우 사냥이야.’
“아니, 저기…… 사냥이란 것이…….”
전령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골랐다.
마치 이 말귀 못 알아듣는 이방인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칼을 맞지 않고 뜻을 전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사냥에 초대한다는 건 일종의 관용어입니다. 비밀 대화를 하자는 말이지요. 귀족들은 은밀한 제안을 할 때 사냥터를 애용하거든요.”
“아, 그런 거였어?”
전령의 귓속말에 머쓱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면 가야르도 백작이 고작 여우 사냥에, 그것도 교단 몰래 따로 접근해서 나를 초대할 이유가 없었다.
‘백작이 나에게 은밀히 제안할 게 있나? 지금 나는 명백한 교단파인데.’
당장 떠오르는 이유는 없지만, 백작의 은밀한 부름이라면 뒤따르는 보상도 대단할 것이다. 어쩌면 웨어울프 사쳇값으로 줄 보상이 남들 보기에 부적절한 것일 수도 있고.
‘어차피 독촉할 겸 한번 찾아가려고 했으니 잘됐군.’
“응하겠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말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전령이 안도하며 길을 안내했다.
그를 따라 외성을 통과해 가야르도 가문의 사냥터로 이동했다.
* * *
“늑대 도살자 테온. 와 주었군.”
‘누구는 수호자라고 부르고, 누구는 도살자로 부르고…….’
백작은 말을 탄 채 호탕하게 웃으며 반겼다.
나도 인사를 받으며 말을 몰아 다가갔다.
주변의 기사들이 백작과 간격을 좁히는 게 느껴졌다.
“되었다. 테온은 얕은수를 쓰지 않을 것이다.”
“맞아. 그리고 그럴 이유도 없어.”
나는 표면적으로 교단파의 인물이다.
아우레오의 수호자이며 이번 놀 토벌에서 큰 역할을 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뛰어난 무력을 가진 교단파 인물이 접근하니 백작의 호위 기사들은 긴장했지만, 그들의 생각과 달리 나는 교단에 깊게 발을 들인 사람이 아니었다.
“말타기가 능숙해 보이는군.”
“소싯적에 배웠지.”
“기억을 잃었다고 들었는데.”
“땀 흘려 익힌 기술은 무뎌질지언정 사라지지 않는 법이니까.”
“전사다운 말이군.”
순간 말문이 막힐 뻔했지만, 다행히 부드럽게 넘어갔다. 가야르도 백작 또한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본론을 꺼냈다.
“여우 사냥은 즐거운 일이지만, 오늘 그대를 부른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네.”
백작이 말 머리를 나란히 하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의 병사들이 숨겨진 사원을 하나 찾았는데 말이야…….”
“사원? 신성제국 시절의 사원인가?”
이 세계가 지금처럼 마구잡이로 찢기기 전, 이곳에도 제국이 있고 황제가 있었다고 한다.
신성제국이라 불리는 고대의 국가는 지금까지도 많은 유물과 유산을 남기고 있었다.
“그건 모르겠어. 아직 내부를 탐색하지 못했거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탐색은 했지. 탐색하라고 들여보낸 병사들이 돌아오지 못하는 게 문제지만…….”
가야르도 백작은 새롭게 발견한 사원에서 마법의 기운이 흐른다는 보고를 들었다.
매몰된 신성제국의 사원에는 대부분 막대한 재물이 함께 묻혀 있었다. 금화는 물론이고 각종 패물과 무구, 드물게는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도 나왔다.
그러니 귀족들은 자기 영지에서 신성제국의 유적이 발견되면 어떻게든 내부를 수색하려 애썼다. 더구나 보호 마법까지 걸려 있다면 대박일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날 불렀군.’
마법이 걸린 사원을 탐색하는데 기사들이 계속 죽어 나간다면, 교단의 힘을 빌리는 게 정석이다. 마력의 천적은 신성력이니까.
하지만 가야르도 백작은 정치적 상황이나 본인의 자존심 탓에 차마 옐란치노 주교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했다.
게다가 교단이 끼어들면 기껏 발견한 사원에서 나온 전리품을 부정하다는 이유로 모조리 소각할 터, 더더욱 손을 벌릴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애꿎은 기사들을 계속 소모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결국 위험을 대신해 줄 사람을 찾다 나를 떠올린 것이다.
사파에서 온 용사
던전 탐사
“사원은 입구가 비좁아 대병력을 투입할 수 없어.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만큼 좁은 통로를 한참 지나야 하지. 자네는 일신의 무력은 뛰어난데, 체격은 아담하고 심지어 갑옷도 입지 않으니 제격이야.”
‘게다가 뒈져도 상관없는 이방인이고.’
거기에 더해서 과거 마녀를 상대해 본 경험이 있다는 것도 가야르도 백작의 결정에 영향을 끼쳤으리라.
결론적으로, 백작은 사람을 제대로 골랐다.
“하겠다.”
“역시! 내가 사람을 제대로 봤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마법의 기운이 흐르는 사원이라면 분명 내가 얻을 것이 있을 터. 또한 기관진식이 설치되어 있어도 지금의 나에게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느껴지진 않았다.
‘어쩌면 토벌 중에 찾지 못한 놀 주술사가 거기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행운이다.
십 년 내공을 얻은 이상 이제는 어지간한 마법사와 일대일로 붙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하물며 인간 마법사보다 약한 놀 주술사라면 거저먹는 싸움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아우레오는 데리고 가자.’
“아, 그리고. 당연히 자네 혼자 가야 하네. 교구에는 발설하지 않는 게 조건이야.”
“…….”
생각해 보면 가야르도 백작의 요구는 당연했다.
교구에 손 빌리기 싫어 외부의 전사를 고용하는 것인데, 내가 아우레오와 함께 움직이면 결국 교단의 도움을 받는 셈이다.
“좋아. 나 혼자 가겠다.”
“자네라면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지.”
“한데, 내가 비밀을 지킬 거라고 어떻게 믿지? 아니, 그보다 사원에서 발견한 보물을 내가 꿀꺽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잖아?”
“하하, 날 너무 물렁하게 보는군.”
내 의문에 가야르도 백작이 웃었다.
“사원의 출입구는 하나뿐이네. 주변을 샅샅이 수색하고 내린 결론이지. 자네가 들어간 뒤 나의 병사들은 출입구를 계속 지키고 있을 테니, 자네가 날 배신하고 빠져나갈 방법은 없어.”
“그렇군.”
“위치를 가르쳐 주지. 준비되면 곧장 출발하게. 혹시 필요한 게 있나?”
“없어. 그보다 웨어울프 사쳇값은 언제 치러 줄 생각이지?”
“내 명예를 의심하는군. 이번 임무를 마치면 한꺼번에 포상하겠다.”
가야르도 백작은 웃으며 말 머리를 돌렸다.
애초에 여우 사냥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던 만큼, 용건이 끝나자 곧장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