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37
오르샤바라는 도시는 그 자체가 도전과 출세, 인생 역전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다.
전통도 없고 역사도 없는 도시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기득권 세력도 없다는 뜻이니까.
서부에서 온 마르틴 가야르도가 맨주먹으로 일으킨 도시.
누구든 실력만 있다면 요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실리주의의 도시가 바로 오르샤바였다.
로드릭의 표정만 보아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일 정도였다. 이 젊은 기사는 가야르도 백작 앞에서 당찬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다시 정식으로 인사하지. 반갑소, 도살자 테온. 나는 서부에서 온 방랑 기사 로드릭이오.”
“그냥 도살자가 아니라 늑대 도살자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게 만드는 로드릭이 귀찮았다. 심지어 로드릭은 악수를 위해 맞잡은 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후, 후후……. 힘이 좋구려, 테온.”
“에휴.”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똥힘’을 쓰는 로드릭을 보고 있으니 미운 걸 넘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로드릭의 행동은 명성을 얻기 위해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꼴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는 건 사파 무인의 자존심을 접는 일이었다.
나는 조금씩 손에 내공을 실었고, 로드릭의 손에서 오도독오도독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윽……!”
“계속할 거야?”
로드릭은 내 힘에 당황했는지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체격이 훨씬 큰 자신을 근력으로 압도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집이 있네.’
손이 으스러지기 직전인데도 로드릭은 힘을 빼지 않았다. 기를 쓰고 끝까지 버티는 꼴을 보니 아무래도 몸이 상해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었다.
내가 마음을 굳히고 로드릭의 손을 완전히 으깨 버리려 할 때였다.
“안녕하신가! 힘세고 강한 연회로군!”
“어라, 두란. 언제 왔어?”
익숙한 화법에 고개를 돌려 보니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두란과 붉은 모루 용병단이 웃으며 다가왔다.
“가야르도 백작 각하, 정말 멋진 연회입니다.”
“자네들은 누구인가?”
“저희는 우정과 낭만이 가득한 붉은 모루 용병단입니다. 저는 용병대장 두란 레드앤빌이고요.”
“아, 자네가 바로 그 두란 대장이군. 붉은 모루 용병단이 이번 토벌에서 많은 활약을 했다지?”
“하하, 그냥 붉은 모루 용병단이 아니라, 우정과 낭만이 가득한 붉은 모루 용병단입니다, 각하.”
“……?”
하여간 저 새끼도 보통 놈은 아니었다.
가야르도 백작은 잠깐 할 말을 찾지 못하다가 그냥 웃어 주었다. 백작이 기껍게 맞아 주자 두란도 만면에 웃음을 머금었다.
“자네의 사연은 들었네. 안타까운 일이야. 하지만 자네가 이렇게 당차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나까지 젊어지는 기분이군.”
“마음 써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번 토벌에서 크게 활약한 것이 없는데 연회에 불러 주시니 민망하군요. 사실 여기 테온이 큰 역할을 했지요.”
두란가 내 등을 팡팡 치며 겸손을 떨었다.
가야르도 백작은 두란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모르는 사연이 있나 보군.’
내가 딱히 두란의 속사정에 관심을 갖지는 않았지만, 밝은 모습과 달리 나름대로 굴곡 있는 삶을 살아온 모양이었다.
“다시 보니 좋네요, 두란 대장.”
“오, 아우레오 사제님. 빛에 찬미를!”
아우레오의 인사에 두란은 늘 그렇듯 과장된 동작과 목소리로 답례했다.
시끄러운 녀석이 등장한 덕분에 로드릭과 나의 힘 싸움도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란아, 네가 오늘 사람 하나 살렸다.”
“음?”
두란은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달리 로드릭은 만족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백작 각하,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게, 로드릭 경.”
가야르도는 로드릭이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사실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혈기 왕성한 젊은 기사는 자기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각하께서 주최하신 연회는 실로 완벽합니다. 음식과 음악, 무희들의 춤과 실내 장식까지 모두 훌륭하지요. 다만, 토너먼트를 열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그 점은 나도 아쉽게 생각하네.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오르샤바는 지난주에 막 대규모 토벌을 마친 참이야. 당장 마상 창 경기나 검술 대회를 열기에는 부적절한 시점일세.”
가야르도 백작의 대답에 로드릭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흘러간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지금 이 자리에서 목검 대련을 여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지금 당장 말인가?”
“예, 각하. 오르샤바는 개척자의 땅입니다. 한데 축제에서 피가 한 방울도 흐르지 않는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흐음.”
가야르도는 고민하는 척 턱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흥미롭게 빛나고 있었다. 기다렸던 장난감을 건네받은 어린아이 같은 눈빛이었다.
“물론 예정에 없던 대결이니 싸울 준비가 되지 않은 기사도 많겠지요. 그러니 희망자에 한해서 대결을 펼치면 될 것입니다.”
“큭큭, 자네, 보기보다 약았군.”
싸울 준비가 되지 않은 기사라는 말은 모욕이다. 로드릭의 말은 결국 자기 자랑이나 마찬가지였다. 자기 자신은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젊은 기사의 얕은꾀에 가야르도가 웃음을 흘렸다. 그는 키득거리면서도 로드릭을 질책하지는 않았다.
“자네 말에 일리가 있네, 로드릭 경. 이렇게 큰 연회를 열었는데, 기사들이 솜씨를 뽐낼 기회를 주어야겠지. 좋은 의견이야.”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상황이 뜻대로 흘러가자 로드릭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나는 두 사람의 만담 같은 대화를 한심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아주 북 치고 장구 치고 잘들 노는군.’
두 사람이 뭘 기대하는지 너무 뻔히 보였다.
로드릭은 이 자리에서 자기 실력을 뽐내고 싶어 하고, 가야르도 백작은 로드릭의 혈기를 이용해 내 실력을 직접 보고 싶어 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의 대화는 내가 예상한 그대로 흘러갔다.
가야르도 백작은 박수를 두 번 쳐서 연회장에 있는 다른 귀족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연회에 참석한 기사와 전사 들은 들어라. 지금부터 잔치의 일환으로 목검 대련을 펼쳐 볼까 한다. 뜻있는 자는 앞으로 나서라.”
“오, 그것참 좋은 볼거리입니다, 각하.”
“멋지네요. 이름 높은 기사님들의 실력을 직접 볼 수 있다니.”
백작의 선언에 귀족과 귀부인 들은 환영의 뜻을 내비쳤다. 자리에 참석한 병사와 용병 들도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반응이었다.
반면, 기사들의 표정은 영 탐탁지 않았다. 싸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땀을 흘리게 생긴 것이다.
심지어 벌써 취기가 오를 만큼 술을 마신 기사도 많았다.
“누가 먼저 나서겠는가?”
가야르도는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지만, 선뜻 나서는 자가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싸울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은 로드릭이 유일했다.
연회장을 천천히 훑던 가야르도 백작의 눈동자는 나에게 와서 멈췄다.
“늑대 도살자 테온, 나는 그대의 실력이 궁금한데……. 솜씨를 보여 주겠나?”
사파에서 온 용사
백작의 제안
명색이 백작인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불러낼 줄은 몰랐던 터라 무어라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테온, 싸우실 건가요?”
“글쎄. 박수무당도 떡고물이 있어야 칼춤을 추는 법인데.”
“예? 그게 무슨 말…….”
“실력과 별개로, 대가가 있어야 싸움에 나선다는 뜻이다.”
내 말뜻을 이해한 아우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내가 이런 광대놀음에 나설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고민하는 이유는, 저 로드릭이라는 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 서부에서 왔다는 놈은 좀 손봐 주고 싶은데, 그렇다고 가야르도 백작의 의도대로 놀아나긴 싫고……. 흐음, 어쩐다.’
어떻게 해야 두 놈을 모두 엿 먹일 수 있을까?
내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가야르도 백작에게는 악감정이 없었지만, 감히 나를 시험해 보려는 꼴을 보고 오만 정이 다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좋다. 좀이 쑤셨는데 잘됐군. 몸 한번 풀어 볼까?”
“과연 듣던 대로 호탕한 사내로군.”
나는 짧은 고민을 마치고 흔쾌히 백작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간단하게 두 사람을 모두 골탕 먹일 방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야르도 백작은 만족한 듯 좌중에 나를 소개했다.
“모두 알고 있겠지만, 여기 있는 테온은 중부에서 온 순례자 아우레오의 수호자이며, 동시에 대단한 실력의 무도가다.”
“오, 누군가 했더니, 저분이 바로 그 소문의……?”
“웨어울프를 맨손으로 죽였다는 전사가 바로 저 사람이군!”
내 소개를 들은 귀족들이 이채를 띠며 나를 쳐다봤다. 싸움에 나서길 꺼리던 기사들도 눈빛이 변했다.
이곳은 내공이 없는 세계. 평범한 체격의 나를 보고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여기 테온이 연회를 빛내 주기 위해 흔쾌히 실력 발휘를 해 주겠다고 한다. 이 이방인 강자를 맞아 누가 검을 들겠는가?”
가야르도 백작의 말에 몇몇 기사들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벌써부터 손목을 풀고 목을 돌리는 놈들도 있었다.
‘하지만 너희에게는 기회가 없을 거야. 백작이 써먹으려는 놈은 따로 있거든.’
내 예상대로 가야르도 백작은 다른 기사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로드릭만 쳐다보고 있었다.
“각하, 저한테 기회를 주십시오. 제가 흥을 돋우겠습니다.”
“그래, 서부에서 온 로드릭 경. 그대가 해 보아라.”
가야르도의 허락이 떨어졌다.
연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일제히 뒷걸음질 치며 중앙에 공간을 마련했다.
싸움에 나서려던 기사들도 아쉬운 마음을 접고 일단 물러섰다.
나와 로드릭은 연회장 중앙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목검을 가지고 왔습니다.”
“음.”
로드릭은 하인이 가지고 온 목검을 받아 허공에 몇 번 휘둘렀다. 길이와 무게를 가늠해 본 그가 목검을 앞세우고 나를 꼬나보았다.
“테온, 목검을 드시지요.”
“됐어. 난 맨손으로 하지.”
“……?”
로드릭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때 아우레오가 급히 다가와 내게 속삭였다.
“테온, 결투에 임하면서 무기를 맞대지 않는 것은 대단한 모욕입니다. 목검을 쓰는 약식 대련이라도 마찬가지고요.”
“아, 그래?”
맨손으로 묵사발을 내어 주려던 나는 그 말을 듣고 하인에게서 목검은 건네받았다.
두 사람 모두 대련 준비가 됐다고 판단한 가야르도 백작이 동전 하나를 꺼냈다.
“동전을 던지겠다. 동전이 바닥에 닿는 순간부터 대결이 시작되고, 한쪽이 항복하면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