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36
“웨어울프는 겨우 두 마리를 죽였을 뿐인데 무슨 도살자야? 놀은 많이 죽였으니 차라리 개 도살자가 어울리지 않나?”
나는 음식을 쩝쩝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에릭은 그런 나를 보며 뭘 모른다는 듯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매년 토벌하는 놀 따위가 어디 웨어울프와 같나?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몬스터를 두 마리씩이나, 그것도 혼자서 죽였다면 소문이 널리 퍼질 만한 위용이지.”
에릭은 자기가 더 들떠서 설명을 늘어놓았다. 심지어 항상 뚱한 토마스도 부럽다는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별명이 붙는다는 것이 이곳에서는 대단한 명예인가? 딱히 마음에 드는 별호는 아닌데.’
중원식으로 번역하면 낭살객(狼殺客) 따위의 별호가 붙은 셈인데, 그다지 위엄이 느껴지는 별호는 아니었다.
‘무슨 저잣거리 파락호도 아니고, 도살자가 뭐냐.’
반면, 토마스는 부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음식을 깨작거렸다.
“별명이 붙는 게 그렇게 부러운 일이냐? 턱 빠지겠다, 이놈아.”
“넌 정말 신기할 정도로 세상 물정을 모르네. 칭호가 생기는 건 대단한 영광이야. 게다가 악명도 아니고, 늑대 도살자면 끝내주게 멋진 칭호잖아?”
토마스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는 명성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는 사람답게 특히나 더 부러워했다.
‘이곳 문화가 그렇다면 이 명성도 써먹을 곳이 있겠군.’
중원에서는 별호가 없는 무인이 오히려 드물었다. 전 무림에 위명을 떨치지 못하면 하다못해 지역명이라도 넣어서 별호를 붙이는 게 중원의 문화였다.
별호가 없는 강호초출은 간혹 자기 별호를 직접 짓는 경우도 있었다.
강호의 호사가들이 별호 붙이기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 괜히 이상한 별호가 붙기 전에 직접 정한 별호로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다.
‘특히 사파인은 대부분 좆같은 별호가 붙기 마련이니…….’
사파 무인으로 활동할 때와는 달리, 이곳에서 이름을 떨치는 건 실보다 득이 많은 것 같았다.
그때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교회의 어린 부제가 나를 찾았다.
“수호자 테온, 식사를 하고 계셨군요.”
“부제가 여긴 어쩐 일이야?”
부제는 성호를 그리며 예를 표했다.
“전달할 소식이 있어서 왔습니다. 영주 성에서 이번 놀 토벌에 참여한 주요 인사들을 초청해 연회를 연다고 하더군요. 테온에게도 초대장이 왔습니다.”
부제가 내미는 손에는 작은 편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나는 편지의 봉인을 뜯고 더듬거리며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친애하는…… 용맹한…… 무슨 미사여구가 이렇게 많아?”
“하하, 귀족의 서신이란 다 그런 겁니다. 아직 글 읽기가 어려우시면 제가 대신 읽어 드릴까요?”
“됐어. 자꾸 읽어야 연습이 되니까.”
아우레오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틈틈이 말과 글을 배웠다. 이제 말하기는 제법 유창해졌지만, 읽기와 쓰기는 아직 더뎠다.
불필요한 내용으로 가득 찬 서신을 손으로 짚어 가며 읽어 보니, 결론은 영주가 주최하는 연회에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아니 씨팔, 그냥 한 줄짜리 내용이잖아?”
내 욕설에 부제는 민망한 듯 고개를 돌렸고 에릭과 토마스는 킬킬대며 웃었다.
“알겠어. 뭐, 따로 준비할 건 없지?”
“있습니다. 연회에 참석하려면 복장을 갖추어야 하거든요. 한데 지금 테온의 옷은…….”
“내 옷이 뭐 어때서?”
나는 익살스럽게 웃으며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 돌았다. 중원에서부터 입고 있던 흑의 무복과 장삼이 펄럭였다.
“복장 자체도 너무 특이하고, 무엇보다 곳곳이 해지고 뜯겨서 보기에 좋지 않아요. 옐란치노 주교님께서 옷을 선물하셨으니, 저를 따라오세요.”
공짜로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부제를 따라 응접실을 나섰다.
부제와 함께 도착한 곳에는 수염을 멋지게 기른 제단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줄자로 내 몸 치수를 꼼꼼하게 측정하고 나서 말했다.
“옷은 이틀이면 완성됩니다. 벌써 거의 다 만들어 놓았고, 품과 기장만 수선하면 되거든요.”
“오, 그래? 어떤 옷인지 미리 볼 수 있나?”
명색이 주교가 선물하는 옷이니 싸구려는 아닐 테지만, 그 모양새는 우려되는 면이 있었다. 사제들이 입는 치렁치렁한 옷이 아닐까 싶어 형태를 미리 보아 두고 싶었다.
제단사는 내 물음에 웃으며 화첩을 꺼내 들었다.
화첩에는 다양한 옷이 그려져 있었는데, 다행히 내가 입을 옷은 별다른 장식이 없는 수수한 형태였다.
“좋네. 잘 부탁해.”
“맡겨 주십시오. 늑대 도살자의 옷을 짓게 되어 영광입니다.”
“어? 어, 그래.”
예상하지 못한 제단사의 말에 나는 얼떨떨한 대답을 했다. 늑대 도살자라는 별명이 생각보다 시중에 널리 퍼진 모양이었다.
‘좋은 건가?’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제단실을 나섰다. 그런 나를 보며 어린 부제가 웃고 있었다.
* * *
“테온, 긴장되진 않아요?”
“긴장? 왜?”
“풉, 역시 테온은 남다르네요.”
아우레오가 피식 웃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늘은 오르샤바의 영주 가야르도 백작이 주최하는 연회 날. 나와 아우레오는 방금 연회장에 도착한 참이었다.
교회에서는 이번 토벌에 사람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연회에 초청받은 사제는 아우레오뿐이었다.
“보통 귀족의 연회에 처음 참석한 사람은 기가 죽기 마련이거든요.”
“죄다 약골들인데 왜 내가 기가 죽어? 저놈들 우스꽝스러운 옷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지긴 하네.”
나는 연회장의 다른 귀족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귀족들이 입은 옷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여인들은 허리를 어찌나 조였는지 톡 치면 부러질 것 같았고, 풍성한 치맛자락과 부풀린 어깨는 불편해 보였다.
사내들은 더 가관이었다. 바지는 살수의 잠행복처럼 살에 딱 달라붙어 보기 흉할 지경이고, 목에는 괴상한 장식 천을 수탉처럼 둘러 우스꽝스러웠다.
‘그 와중에 보석은 엄청나게 달고 다니는군.’
귀족의 복식은 화려함의 극치였다. 온갖 장식과 수실을 끼워 놓은 것으로 부족해 보석까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무림의 담백한 의복에 익숙한 나에게는 귀족의 치장이 그다지 미학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옐란치노 주교에게 감사해야겠군. 내게 저따위 옷을 선물하지 않아서.”
옐란치노에게 받은 옷은 장식을 최소화한 대신 고급 옷감을 사용해 기품을 지킨 형태였다.
나는 내심 옐란치노의 취향에 안도하며 연회장 중앙으로 걸어갔다.
‘저자가 바로…….’
연회장을 절반쯤 가로지르자 앞쪽 연단에 마련된 상석이 눈에 들어왔다.
연단에는 화려한 의자 세 개가 놓여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중앙의 권좌에 앉은 사내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가야르도 백작.’
그곳에는 오르샤바의 영주, 마르틴 가야르도 백작이 앉아 있었다.
사파에서 온 용사
백작의 연회
‘저자가 바로 가야르도 백작이군. 서부에서 소수 부족을 이끌고 이곳으로 와 고작 한 세대 만에 대도시를 건설한 개척자.’
가야르도 백작은 겉모습만 보아도 비범한 인물이었다.
다른 귀족들과 달리 드러난 얼굴과 팔뚝에 자잘한 흉터가 가득했고, 복장은 실용적이고 간소했다.
그에게는 겉치장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다른 귀족들을 압도하는 위엄이 있었다.
“오르샤바에 빛을! 반갑습니다, 백작 각하. 중앙 교단에서 온 사제 아우레오입니다.”
“그대였군. 명성은 익히 들었지. 어린 순례자 아우레오.”
아우레오의 인사를 받은 가야르도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구의 전사인 백작이 몸을 일으키자 눈앞에 그림자가 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등빨이 좋네. 힘깨나 쓰겠어.’
가야르도 백작은 단순히 체격만 좋은 게 아니라 전체적인 균형이 돋보였다.
의자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하는 간단한 동작이지만 빈틈이 적고 중심이 안정되어 있었다.
상당한 경지의 외공을 수련한 모습이었다.
“그대가 사제 아우레오라면, 옆에 서 있는 이 친구는 그 유명한 도살자 테온이겠군.”
“그냥 도살자가 아니라, 늑대 도살자다.”
나는 퉁명스럽게 가야르도 백작의 말을 고쳤다.
“하하하! 듣던 대로 겁 없는 친구로군!”
가야르도 백작은 호쾌하게 웃었다. 목젖이 훤히 보일 만큼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모습이 시원시원했다.
웃음소리는 또 어찌나 큰지 연회장 전체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아주 괄괄한 양반이구만. 어쩌면 교회보다 이쪽이 나랑 결이 맞을지도?’
백작의 첫인상은 호감이었다. 어딘가 세외 무림의 외공 고수 같은 분위기라 친근하게 느껴졌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테온은 기억을 잃어 경어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각하의 양해를 구합니다.”
“괜찮아. 사제는 너무 괘념치 말게.”
가야르도 백작은 아우레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 다시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자네 말이 맞아. 늑대 도살자는 그냥 도살자와 다르지. 뭐, 사실 난 자네가 명성을 떨치는 걸 바라지 않았지만……. 일이 결국 이렇게 되어 버렸군.”
“교회에서 발바닥에 땀 나게 뛰어 준 덕분이지.”
“뭐? 푸하하핫! 이 친구 정말 재미있는 친구로군!”
가야르도 백작의 솔직한 말에 나 역시 솔직하게 대답했다.
백작은 내가 마음에 드는지 연신 큰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이렇게 빨리 유명세를 치르게 된 것은 교회의 덕이 컸다.
이번 놀 토벌은 웨어울프까지 사냥할 만큼 대성공이었고, 영주 성과 교회는 서로 자기 공이 크다며 여론전을 펼치고 있었다.
교회에서는 당연히 웨어울프를 직접 사냥한 나를 띄워 주려 했다. 내가 순례의 수호자 자격으로 토벌에 참여했으니, 나를 띄우는 게 교회를 띄우는 셈이었다.
“자네가 활약한 덕분에 내 부하들이 아쉽게 됐어. 하지만 고맙다는 인사를 먼저 해야겠지. 어쨌거나 자네는 토벌의 주역이니까.”
“전투의 상세 개요까지 보고받았나 보군.”
“당연하지. 그런데 정말 웨어울프를 손바닥으로 때려죽였나?”
“상처가 생기면 가죽값이 떨어진다길래.”
내 대답을 들은 가야르도 백작은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됐다. 하인들은 쉴 새 없이 술과 음식을 내왔다.
귀족은 귀족끼리, 병사는 병사끼리, 용병은 용병끼리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백작은 나를 데리고 연회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과 인사를 나누게 했다.
‘이 새끼 혹시 나를 자기 쪽으로 감아 보려는 건가?’
백작은 시종일관 나에게 호감을 내비쳤다.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면 대뜸 봉신 제안이라도 할 기세였다.
이런 분위기를 읽은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대가 테온이군요. 순례자 아우레오의 수호자이며, 늑대 도살자인 테온.”
대화를 끊고 들어온 인사에 나와 백작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젋은 기사 한 명이 도발적인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반갑소, 테온. 나는 로드릭이요.”
악수를 청하는 로드릭의 표정에 의미심장했다.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는 걸 보니, 속으로 딴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로드릭의 손을 맞잡았다.
‘그래, 시비 거는 놈이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오르샤바는 각지의 유망주들이 몰려드는 도시였다.
몰락 가문의 후예, 실력은 있으나 돈이 없는 방랑 기사, 굵직한 일거리를 찾는 용병단 등 자기 가치를 알아봐 줄 사람을 찾는 사내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도시가 바로 오르샤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