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55
생각해 보니 이 마법 스크롤에 어떤 주문이 담겨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내 주변 인물 중에 그나마 마법에 지식을 가진 사람은 아우레오인데, 그 자식은 이걸 보여 주면 당장 태워 버리고도 남을 놈이었다.
“젠장, 골치 아프게 됐군. 무턱대고 찢어 볼 수도 없고.”
일단 챙기긴 했지만, 담긴 주문을 모르니 위기 상황에 믿고 쓸 수 없는 물건이었다.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실망감에 괜히 헛헛한 마음이 들었다.
가장 중요한 스크롤을 챙기고 나서 다른 물건도 하나씩 살폈다.
보브찬친이 자세히 설명해 준 덕분에 은화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우, 제법인데?”
작은 항아리에 은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어지간한 방랑 귀족보다 돈을 많이 벌었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진짜 잘나가는 검투사였나 보네. 이건 또 뭐지?”
항아리 옆에는 쓰다만 편지와 비단 두루마리가 있었다. 편지는 글자 위로 마구 선을 그어 댄 탓에 내용을 알아볼 수 없었다.
비단 두루마리는 펼쳐 보니 웬 미녀의 초상화였는데, 귀퉁이에 ‘스칼렛 보론초바’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보론초바라면……?”
윈스크의 주교공과 같은 성이었다. 이렇게 젊은 여자가 주교공일 리는 없으니, 그 딸이거나 가까운 친인척일 터.
“그런 지체 높은 여인의 초상을 왜 이 녀석이 가지고 있지?”
나는 의문을 뒤로하고 침상에 누웠다. 오늘은 굳이 교구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서 잠을 청할 생각이었다.
* * *
다음 날 늦은 밤. 나는 약속대로 보브찬친을 만나기 위해 교수대로 향했다.
[빨리도 오는군.]“그렇지?”
내 능청에 보브찬친이 잔소리했다.
“일찍 와도 어차피 다른 사람이 있으면 대화를 못 하잖아. 나 혼자 허공을 보며 떠들고 있으면, 사람들이 미친놈인 줄 알걸.”
[어제는 남들 모르게 잘만 얘기했잖아?]“혜광심어에 내공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네놈이 알겠냐.”
어째서인지 보브찬친에게는 평범한 전음이 통하지 않았다. 소리 내어 말하거나 혜광심어로 의지를 전달할 수밖에 없었는데, 긴 대화를 모조리 혜광심어로 나누는 건 내공의 낭비가 심했다.
[혜광심어는 또 뭐야? 그나저나 부탁에 앞서 너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해도 될까?]“그냥 본론이나 얘기하지.”
보브찬친은 검지를 세워 좌우로 까닥거리더니, 막무가내로 질문을 쏟아 냈다.
[에이, 난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야. 도대체 넌 누군데 영혼을 보고, 느끼고, 대화까지 할 수 있는 거지? 보아하니 강령술사는커녕 마법사도 아닌 것 같은데?]“……할 수 없지. 긴 이야기가 되겠군. 난 과거의 기억을 잃은 상태다. 중간 지대에 있는 압생트 마을에서…….”
나는 차근차근 내 사연을 풀어놓았다. 물론 내 과거에 대해서는 기억이 안 난다며 얼버무렸고, 이 세계에 도착한 이후부터 벌어진 내용만 이야기했다.
[세상에…… 데스나이트를 처치했다고?]보브찬친은 재미난 연극이라도 보는 사람처럼 내 이야기에 몰입했다.
“놈을 쓰러뜨리는 게 쉽진 않았다. 어쨌거나, 내가 널 볼 수 있고 대화까지 할 수 있는 건 그 영향인 것 같아.”
보브찬친은 나의 사연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데스나이트를 사냥하고 죽은 자와 대화하는 능력을 얻다니, 듣도 보도 못한 기사일 것이다.
“이 정도면 내 소개는 충분하겠지? 이제 그 부탁이란 것 좀 얘기해 봐.”
[참, 그렇지. 네가 꼭 도와줬으면 해. 부탁할 게 뭐냐면…….]“이봐, 너! 거기서 뭘 하는 거냐!”
보브찬친이 막 본론을 말하려는 순간, 누군가 이쪽을 향해 소리쳤다.
고개를 돌려보니 다섯 명의 낯선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다들 인상이 험악한 것이, 한눈에 보기에도 뒷골목을 전전하는 건달들이었다.
“아까부터 널 지켜봤다. 불길한 자식, 교수대 옆에서 혼자 뭘 중얼거리는 거야?”
“형님, 이 새끼 마법사 아닐까요? 마법사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탐내서, 교수대나 무덤 주변을 기웃거린다던데…….”
“오호라, 그러고 보니 생긴 것도 괴상한 게 딱 마법사 나부랭이처럼 생겨 먹었네.”
형님이라 불린 남자를 필두로 다섯 사내가 나를 둘러싸고 위협했다. 눈깔을 부라리며 목소리를 내리까는 모습이 실로 가소로웠다.
“생사람 잡지 말고 가던 길 가라. 뒈지기 싫으면.”
“어쭈, 세게 나오시네? 솔직하게 말해, 이 자식아. 무슨 사악한 주문 외우고 있던 것 아냐?”
내가 겁먹은 기색을 보이지 않자, 건달 두목도 슬슬 언성을 높였다. 놈은 심지어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쿡쿡 찌르기까지 했다.
[저런 깡패 새끼들이 가란다고 가겠니? 차라리 지금이라도 앞에 있는 놈을 밀치고 도망쳐라.]내가 건달들은 어떻게 손봐 줄지 생각하고 있을 때, 공중에서 지켜보던 보브찬친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는 내가 겁을 먹고 굳어 버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저놈들은 널 교회에 넘기려는 거다. 이단으로 의심되는 자를 잡아가면 포상금을 주거든.]“날 교회에 넘겨? 포상금 받으려고?”
보브찬친에게 되물었다. 하지만 보브찬친이 보이지 않는 건달들은 자기들한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대신 대답했다.
“어허, 포상금이라니. 우리는 순전히 정의감으로 나선 거야. 너처럼 수상한 놈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으니까.”
“그래, 맞아. 야밤에 교수대 아래에서 웬 이방인이 정체 모를 주문을 외우고 있는데, 윈스크의 치안을 위해 우리 같은 청년들이 나서야지.”
건달들이 한마디씩 던지며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들의 노골적인 태도에도 내가 우두커니 서 있자, 보다 못한 보브찬친이 재촉했다.
[도망쳐라. 이놈들에게 잡혀가면 끝장이다.]“끝장은 무슨. 이 몸이 이깟 놈들에게 잡혀갈 일도 없을뿐더러, 설령 끌려가도 내가 교회에서 고초를 겪을 일은 없다.”
[멍청아, 그 아우레오인가 뭔가 하는 사제를 믿고 있는 모양인데, 이 자식들은 널 북부정교회에 넘기려는 거야. 북부정교회는 윈스크 교구와 별개라고!]“알고 있다. 근데 어차피 안 끌려갈 거니까 상관없어.”
“이 자식이 아까부터 뭐라고 혼잣말을 하는 거야?”
아까부터 계속 무시당하는 게 화가 났는지 건달 한 명이 불쑥 손을 뻗어 내 멱살을 잡으려 했다.
퍼퍼퍽!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건달은 코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사파에서 온 용사
건달과 신관의 연결 고리
나는 특별한 초식도 없이 마구잡이로 주먹을 뻗어 가까이 있던 건달 세 명의 얼굴을 묵사발로 만들었다.
“이거 봐. 상관없잖아.”
내 몸이 제자리에서 솟구쳤다. 공중에서 양다리를 번개같이 휘두르자, 수박 깨지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발 차기에 맞은 건달 두 명은 공중을 훨훨 날아 바닥에 처박혔다.
“뭐야, 씨발. 무슨 상황이야!”
광장 저편에서 다른 건달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술집 창문을 통해 동료가 얻어맞는 모습을 보고 급히 나온 모양이었다.
잠시 후, 달려온 건달 십여 명도 모조리 아혈과 마혈을 제압당한 채 광장 바닥에 널브러졌다.
[대단한 실력인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네. 과연 요즘 이름을 떨치는 늑대 도살자답군.]“이놈들 앓는 소리가 거슬리는데,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할까?”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광장에서 계속 대화를 나누며 오해받느니, 차라리 방을 빌리는 게 낫겠다 싶었다.
끙끙 앓는 건달들을 뒤로하고, 우리는 가까운 여관으로 들어갔다.
한편, 바닥에 누웠던 건달들도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며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 * *
따뜻한 여관으로 들어와서 보브찬친은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과거는 생각보다 흥미진진해서, 그의 수다를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듣게 되었다.
탈출한 노예가 일 년 동안 주인에게 붙잡히지 않으면 자유인으로 인정하는 것이 겔라구스 왕국의 관례였다.
보브찬친은 열네 살 때 탈출을 감행했는데, 수많은 노예 사냥꾼의 추적을 뿌리치고 이듬해에 자유인이 되어 윈스크로 이주했다.
“기껏 자유인이 되어 놓고 자진해서 검투사가 된 게냐? 네놈도 팔자 한번 사납군.”
[검투사가 뭐 어때서? 노예 검투사도 아니잖아. 내가 먹고살 길은 처음부터 그것뿐이었어.]보브찬친은 윈스크에 도착하자마자 검투장을 찾아갔다.
척박한 북부에서 검투 경기는 최고의 유흥거리였고, 실력 있는 검투사는 당대의 유명 인사가 될 수 있었다.
뛰어난 신체 능력과 더불어 뽐내기 좋아하는 기질을 가진 보브찬친은 몇 년 지나지 않아 인기 검투사가 되었다.
[검투사로서의 내 삶은 탄탄대로였지. 내 인생의 전성기가 바로 그때야.]“그렇게 잘나가던 놈이 왜 죽은 거냐? 심지어 검투장에서 싸우다 죽은 것도 아니고, 난데없이 교수형이라니?”
검투사로 승승장구하던 보브찬친은 경기를 관람하러 온 아리따운 여인과 눈이 맞아 사랑에 빠졌다.
그 여인의 이름은 스칼렛 보론초바. 다름 아닌 보론초바 주교공의 외동딸이었다.
[나 같은 놈에게는 과분한 여인이었지.]두 청춘은 신분의 격차를 뛰어넘어 깊은 사랑을 나누었고, 남몰래 속삭이는 단꿀에 젖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운이 좋았다면 두 사람의 사랑이 천천히 식어 갈 때까지 들키지 않고 밀애가 이어졌을 것이다.
건장한 미남 검투사와 귀족 여인의 염문은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으니, 사실 들켜도 별 탈 없이 헤어지는 선에서 무마될 수 있는 관계였다.
문제는 공작 영애 스칼렛이 겁대가리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그녀가 선물이라며 웬 양피지를 한 아름 안겨 주더군. 그때 난 그게 마법 스크롤인지도 몰랐다. 태어나서 처음 본 물건이었으니까.]“귀한 집 딸이라 그런지 선물하는 배포도 남다르군. 심지어 주교공의 딸이면서 교회에서 금지한 마법 스크롤을 구해다 주다니.”
하지만 여기에는 보브찬친이 몰랐던 속사정이 있었으니, 놀랍게도 스칼렛이 선물한 스크롤은 그녀가 겔라구스 왕성에서 허락 없이 가져온, 쉽게 말해 훔쳐 온 물건이었다.
[평생 유복하게 살아왔다지만, 설마 훔친 물건을 아무렇지도 않게 선물할 줄은 몰랐지. 아마 그녀에게는 장물이라는 개념조차 없었을 거야.]“그런 위험한 물건을 왕성에서 슬쩍한 뒤 애인에게 준다고? 그게 제정신이냐?”
[이봐, 말조심해. 스칼렛이 철이 없어서 그렇지, 어쨌든 날 생각하는 마음으로 가지고 온 거라고.]보브찬친은 유령이 되어서도 스칼렛을 변호하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스칼렛이 준 스크롤은 그에게 죽음을 안겨 주었다. 몇몇 위험한 마법이 담긴 스크롤에 추적 마법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왕실에서 부정한 마법 스크롤을 대량 보유한 것도 모자라서, 추적 마법을 사용해 관리하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악운이 이렇게까지 겹친 걸 보면, 난 어차피 죽을 팔자였나 봐.]귀한 마법 스크롤이 뭉텅이로 사라지자, 왕실에서는 즉각 회수에 나섰다.
보브찬친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꽁꽁 묶여 짐승처럼 끌려갔다.
왕실 심문관은 마법 스크롤을 훔친 배후를 밝히기 위해 보브찬친을 혹독하게 고문했지만, 그는 끝까지 스칼렛의 이름을 팔지 않았다.
결국 보브찬친은 혼자서 모든 죄를 뒤집어썼고, 재판도 없이 처형당했다.
“스칼렛이 널 변호하지 않았나?”
[나는 왕실 근위대에 체포된 후 한 번도 스칼렛을 보지 못했어. 그녀는 공개 처형 당일이 되어서야 내 죽음을 알게 되었지.]왕실에서 교회 몰래 마법 스크롤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건 세간에 밝혀져선 안 될 비밀이었다.
왕실은 보브찬친이 왕가의 재물을 훔친 죄인이라고만 발표하고, 유언을 남길 기회도 없이 처형해 버린 것이다.
* * *
한편, 윈스크 뒷골목의 어느 갱단 본거지.
어두침침한 지하 도박장에 삼십여 명의 건달들이 공손한 자세로 서 있었고, 그 중심에는 한 청년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