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60
“난 곧장 나루터로 갈게. 내 신분을 밝히고 보상을 약속하면 왈패를 물러가게 할 수 있겠지.”
“아가씨, 그건 너무 위험하잖아요. 차라리 저와 함께 윈스크로 가요. 공작 전하께 사정을 말씀드리면, 분명 병사를 내주실 거예요.”
“그러는 동안에 아이들은 눈밭에 피를 뿌리고 있을 거야. 난 곧장 나루터로 갈 테니, 넌 어서 집으로 돌아가.”
스칼렛의 계획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었다.
진짜 갱단이 복수를 위해 찾아온 것이라면, 스칼렛이 신분을 드러냈을 때 오히려 그녀까지 죽여 버릴 가능성이 컸다.
그들은 빈민가에서 스칼렛을 인질로 잡은 것도 모자라, 젖가슴을 주무르기까지 했다.
그 인질이 공작 영애라는 것을 알게 되면, 후환을 없애기 위해 살인멸구를 시도할 것이 뻔했다.
똑똑하고 용감한 스칼렛이지만, 태생이 지고한 신분인 탓에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것은 별수 없었다.
“어서 가, 로라! 머뭇거릴 시간 없어!”
단호하게 말한 스칼렛이 빠르게 앞서갔다.
로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한동안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알, 알겠어요. 위험한 행동 하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 다녀올게요!”
평소답지 않은 스칼렛의 호통에 로라도 반대 방향으로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황을 오해한 두 여인이 빠르게 멀어지는 동안, 발자국의 진짜 주인공인 구마병단은 나루터에 거의 다다르고 있었다.
* * *
“아 참! 또 할 얘기가 있어요. 큰형의 첫 검투 대회 우승 메달은 도둑맞은 게 아니에요.”
“그래?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사실 제가 만물상 아저씨에게 가져다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아서 쿠키를 사 먹었거든요. 헤헤, 큰형한테 혼날까 봐 도둑맞았다고 거짓말한 거예요.”
“저런, 보브찬친이 이 사실을 알면 무척 속상하겠는걸.”
“맞아요. 그땐 쿠키를 먹고 싶어서 무턱대고 팔아 버렸는데, 지금 돌이켜 보니 큰형한테 너무 미안해요……. 하지만 그날 쿠키는 정말 실컷 먹었어요.”
머릿속에서 소리를 꽥꽥 질러 대는 보브찬친을 무시하며, 계속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아이들은 보브찬친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 보라고 하자 처음엔 그립다든가, 고맙다든가 하는 가슴 시린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점점 양심 고백으로 변해 가는 내용에 보브찬친은 피가 거꾸로 솟는 모양이었다.
[나는 이놈들 이가 상할까 봐 걱정해서 쿠키를 못 먹게 했는데, 배은망덕한 놈들이 내 첫 우승 메달을 팔아치워? 이래서 동생 키워 봤자 아무짝에도 소용없다는 거야!]중간에서 듣고 있으려니 웃음을 참느라 진땀이 났다.
아이들의 소심한 일탈이 귀엽기도 하고, 말로만 길길이 날뛰는 보브찬친이 우습기도 했다.
“하지만 보브찬친은 모두 용서할 거란다. 그깟 메달이 너희들보다 소중하겠니?”
[야! 그깟 메달? 내가 그 메달 따려고 칼침을 세 방이나 맞았……! 누군가 칼을 뽑았다. 이쪽으로 오는군.]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손에 운철묵검까지 꺼내 들자, 이고르가 잔뜩 긴장한 채 물었다.
“테온, 갑자기 왜 그래요?”
나는 대답 없이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고 지하실 쪽창으로 밖을 내다봤다.
‘대략 열 명……? 아니, 스무 명은 넘겠어. 푸른 망토와 갑옷이라……. 건달은 아닌 것 같은데, 웬 놈들이지?’
그때였다.
“야! 너희들 뭐야!”
좀 더 먼 곳에서 누군가 뾰족하게 외치며 달려오고 있었다.
“당신들, 뭔데 내 비밀 기지에서 기웃거려!”
당차게 소리치는 미모의 여인. 눈밭을 헤치며 나타난 것은 스칼렛이였다.
“……?”
갑작스러운 스칼렛의 등장에 나보다 더 당황한 것은 정체 모를 습격자들이었다.
나루터를 은밀하게 포위하고 접근하는데, 웬 젊은 여자가 멀리서부터 소리를 빽빽 질러 대며 등장하니 시작부터 일이 틀어지는 것 같았으리라.
애초에 이런 혹한에, 이런 야심한 밤에, 이런 허허벌판에 젊은 여자 혼자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황당한 경우였다.
“저 여잔 누구지? 비밀 기지는 또 무어고?”
‘이 목소리는?’
곧바로 떠오르지 않지만 분명 들어 본 목소리였다. 나는 잠시 인상을 찌푸리고 집중한 끝에 그 주인공을 기억해 냈다.
북부정교회에서 나를 포섭하러 왔던 자바니에였다.
‘자바니에가 여길 찾아와? 심지어 무장 병력까지 이끌고……. 지난번 굴욕을 준 것에 보복하기 위함인가? 한데,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았지?’
의문이 남긴 했지만, 대강의 상황이 그려졌다.
한편, 스칼렛 역시 당황한 목소리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당연히 갱단의 습격을 예상하고 급히 달려왔을 것인데, 은신처를 둘러싼 자들의 면면이 뒷골목 건달과는 영 거리가 멀었을 테니 말이다.
“어라, 북부정교회의 신관과 성전사 들이잖아? 심지어 심판관까지……?”
나는 자바니에의 목소리를 듣고 알아봤지만, 스칼렛은 그의 예복만 보고도 신분을 알아맞혔다.
자바니에의 예복 양쪽 소매에는 다른 신관과 달리 천칭이 수놓아져 있었는데, 그게 북부정교회의 심판관을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이봐, 당신들 누군데 남의 사유지를 에워싸고 있지?”
스칼렛은 처음부터 강하게 나가야겠다고 판단했는지, 다소 불손한 말투로 첫 대화의 물꼬를 텄다.
“자매님은 누구십니까?”
“내가 먼저 물었잖아!”
자바니에가 되묻자 버럭 짜증을 내는 스칼렛이었다.
사파에서 온 용사
당돌한 스칼렛
스칼렛이 어깃장을 놓자, 자바니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심호흡하는 걸 보니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는 듯했다.
“저희는 북부정교회에서 왔습니다. 이쪽은 우리 교회의 구마 신관들이고, 그 옆은 성전사들이지요.”
자바니에의 소개에 따라 신관과 성전사 들이 스칼렛을 향해 가볍게 묵례했다.
“그리고 저는 이들을 이끌고 온 심판관 자바니에입니다. 자, 그럼 저희 소개를 했으니 이제 자매님이 누구신지 들어 볼 수 있을까요?”
“북부정교회의 구마병단이 이런 외딴곳에 무슨 일로 왔지?”
자바니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스칼렛이 말꼬리를 자르며 물었다. 귀족이 평민에게 하문하듯 고고한 태도였다.
질문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하는 스칼렛을 보며 자바니에가 이마를 짚었다.
“끄응, 제가 이렇게 소개를 했으니, 자매님께서도 자기소개를 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아니면 저희에게 말씀을 높여 주시는 것부터 부탁해야 할까요?
공손하게 말하는 내용과 달리, 이마에서 손을 뗀 자바니에의 눈에 잔인한 빛이 감돌았다. 그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교회에 대한 예의를 갖추세요, 자매님.”
하지만 자바니에는 모르고 있었다. 상대는 북부정교회의 심판관 따위에 겁먹을 신분이 아니라는 것을.
“예의를 갖추라고? 흥, 일개 신관 주제에 말하는 본새가 오만하기 짝이 없구나. 네놈 눈깔은 옹이구멍이냐? 아니면 내가 누구인지를 정녕 모르는 것이냐?”
자바니에의 싸늘한 눈빛에도 스칼렛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상대가 무지몽매한 도적 떼라면 모를까, 북부정교회의 신관이면 오히려 겁먹을 필요가 없었다.
스칼렛이 방한용 두건을 벗고 맨얼굴을 드러냈다.
그녀의 풍성한 적발이 바람에 날리고, 불꽃처럼 선명한 미모가 좌중의 시선을 확 잡아끌었다. 굵은 곱슬머리가 화염의 파도처럼 출렁였고, 아름다운 이목구비는 밤하늘 아래에서 스스로 빛을 내는 것 같았다.
“내 이름은 스칼렛 블라토피나 보론초바다! 나의 아버님이 바로 북부 유일의 공작이시며, 아도나이 교회의 주교이시자, 윈스크의 대영주이신 블라토프 보론초바 주교공 전하이시다. 한낱 신관이 감히 누구더러 예를 갖추라 하느냐!”
보론초바 공작 가문의 금지옥엽, 스칼렛 보론초바가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스칼렛 보론초바?”
“사교계에서 유명한 사고뭉치 공작 영애잖아?”
몇몇 경솔한 성전사들이 스칼렛의 정체를 듣고 중얼거렸다.
“북부정교회의 성전사란 작자들은 숙녀에게 건네는 인사말이 아주 독특하구나.”
성전사들의 중얼거림을 들은 스칼렛이 자바니에를 향해 비꼬아 말했다.
상대의 신분에 놀란 마당에 질책까지 받자, 자바니에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레, 레이디 보론초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공작 영애께서 이런 험지에 계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내가 보론초바 공작 가문의 여식이 아니었다면 이런 무례를 저질러도 상관없다는 말로 들리는군.”
자바니에가 뒤늦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지만, 스칼렛의 반응은 차갑기만 했다.
“아무튼, 이곳은 나의 사유지다. 북부정교회에서 왜 이곳을 기웃거리는 거지? 구마병단까지 이끌고…… 무장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데.”
“아, 그 이유를 말씀드리지요, 레이디. 저희는 지금 정체를 숨긴 음흉한 마법사의 뒤를 쫓고 있습니다.”
“……마법사?”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을 들은 스칼렛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정확히는 마법사로 의심되는 사람이 있다는 제보를 받고 추적하고 있지요. 신뢰할 만한 제보입니다.”
“북부정교회가 장소를 잘못 찾아왔구나. 앞서 말했듯 이곳은 내가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공간이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라.”
스칼렛은 당최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일단 구마병단을 돌려보내야겠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아이들이 위험한 누명을 쓴 것일지도 모르니까.
“그건 곤란합니다, 스칼렛 아가씨.”
“……곤란하다? 네가 지금 내 말에 곤란하다고 답한 것이냐?”
“그렇습니다. 저희는 이미 북부정교회 장로회로부터 허락을 득하고 왔습니다. 아가씨 말 한마디에 물러갈 수는 없지요.”
“북부정교회 장로회의 위세가 감히 보론초바의 땅에 함부로 발을 내디딜 정도란 말이냐!”
생각 외로 물러서지 않는 자바니에의 태도에 스칼렛은 마음이 급해졌다. 또한 진심으로 분노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북부정교회가 민중의 지지를 얻으며 급속히 세를 불리고 있다지만, 감히 일개 신관이 귀족의 사유지를 수색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저희는 ‘오직’ 신을 섬길 뿐입니다, 아가씨.”
“오직? 지금 귀족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냐?”
“그렇게 들렸나요? 오해십니다.”
분노한 기색이 역력한 스칼렛과 달리, 자바니에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대답했다. 마치 그녀를 약 올리듯 능글맞은 태도였다.
“참! 그러고 보니 몇 가지 의아한 점이 있는데요…….”
자바니에는 인제야 무언가 생각난 듯 표정을 바꾸며 말을 이어 갔다.
“보론초바 가문이 북문 외곽에도 땅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처음 들어 보거든요? 그리고, 보론초바 공작 영애는 하도 사고를 많이 치고 다녀서 주교공 전하께서 외출을 금지했다고 들었습니다. 별채에 가두어 버렸다던가?”
말을 하면 할수록 자바니에는 여유를 찾아갔다. 갑자기 나타난 스칼렛의 정체에 놀라 생각하지 못했지만, 애초에 공작 영애가 이런 곳에 나타난다는 것 자체가 거짓말 같은 상황이었다.
그의 말을 들은 구마병단도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제 눈에 이곳은 보론초바 가문의 별채로 보이지 않는데요. 혹시 저기 다 쓰러져 가는 나루터가 보론초바 가문의 별채인가요?”
비아냥거리는 자바니에의 말에 몇몇 성전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본 스칼렛는 치밀어오르는 모멸감을 참지 못하고 양 주먹을 움켜쥐었다.
“감히 나를 모욕해……?!”
“아가씨께서 정말 귀족이시라면 제가 사과드리지요. 정말 스칼렛 보론초바가 맞다면요. 아가씨께서는 지금 본인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
자바니에의 물음에 스칼렛은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잡아먹을 듯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신분을 증명할 게 없나? 하긴, 가출하는데 돈만 챙기면 됐지, 무슨 소지품을 바리바리 싸 들고 나오겠어.’
내 예상대로 그녀는 저택을 빠져나올 때 소정의 은화만 가지고 나왔을 뿐, 가문을 상징하는 물건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나의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 혈관을 따라 흐르는 보론초바의 붉은 피가 곧 증거다!”
“빨간 머리는 윈스크의 술집에도 있고, 푸줏간에도 있고, 심지어 여기에도 있지요.”
스칼렛의 대답을 들은 자바니에가 손을 들어 한 성전사를 가리켰다.
성전사가 투구를 벗자, 스칼렛보다 조금 옅은 적발이 드러났다.
“아가씨의 말이 진실이라는 증거는 없으나, 거짓이라는 증거도 없으니…… 이 자리에서 죄를 묻진 않겠습니다.”
“감히 누가 누구의 죄를 묻는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