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59
“이고르 형, 저 사람은 별로 나쁜 사람 같지 않아.”
이고르의 야단에도 아이들은 하나둘씩 벽 뒤에서 나와 내 앞에 섰다.
나는 그런 아이들의 눈을 한 명씩 마주치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검투사로 활약하며 그 상인의 추악한 소문을 들어 이미 알고 있던 보브찬친은 필립도 동생으로 거두었지. 그렇게 한 가족이 된 게 너희 넷이다. 아직도 내가 사기꾼으로 보이니?”
“아니요!”
막내 필립이 낭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풀어놓은 사연들은 사기꾼이나 노예 사냥꾼이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 모든 걸 당신이 어떻게 알고 있지?”
“보브찬친에게 직접 들었으니까. 이것뿐만 아니라 너희들의 사소한 버릇, 신체적 특징이나 보브찬친과의 추억까지 모두 들었다.”
“당신 정말 큰형의 친구야? 큰형이 당신을 우리에게 보낸 거야?”
이고르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기 시작했다. 자신보다 더 어린 동생들을 책임지기 위해 견디고 있었지만, 그 역시 아직 여린 소년이었다.
“와! 큰형의 친구라니! 처음 봐!”
“큰형은 친구가 없는 줄 알았는데. 큰형은 여자랑 노는 것만 좋아했잖아.”
어린 동생들은 벌써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기세를 몰아 계속 보브찬친의 말을 옮겼다.
“롭은 왼쪽 새끼발가락이 없지. 니콜라는 등에 줄무늬 같은 채찍 흉터가 있고, 필립은…….”
[필립은 남색가에게 팔려 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노예 상인이 몸에 상처를 내지 않았다.]“필립은 딱히 흉터가 없지.”
보브찬친이 말해 주는 아이들의 끔찍한 과거와 흉터에 가슴이 아팠다.
노예 상인이 어린 노예를 길들이기 위해 손가락, 발가락을 자르거나 채찍질을 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중원이나 여기나, 인간 세상은 어딜 가도 실로 추악하구나…….’
새삼 생각에 잠겼다. 나도 나름 힘겨운 삶을 살았지만, 세상은 아직도 내가 모르는 고통으로 가득했다.
“좋아요. 당신을 믿어요. 어차피 이곳엔 훔쳐 갈 것도 없고, 적어도 당신이 우릴 해칠 것 같진 않군요.”
이윽고 이고르도 완전히 경계를 풀었다.
녀석이 내 말을 들을 준비가 되었으니, 나도 본격적으로 보브찬친의 유언을 전달했다.
유언은 이고르에게 전하는 말로 시작됐다.
“이고르, 보브찬친이 너에게 남긴 말부터 전해 주마. 잘 들어라.”
큰형의 유언을 전해 준다는 말에 이고르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젠 네가 맏형이 되었지만, 동생들을 위해 자신을 지나치게 몰아세우지 말아라. 많은 돈을 남겨 두었으니, 여유를 갖고 또래 친구도 사귀도록 해. 그리고…….”
아이들은 보브찬친의 밝은 모습이 생각나는지 눈물을 흘리면서도,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경청하고 있었다.
네 명의 소년에게 각각 필요한 당부를 남긴 보브찬친이 마지막으로 모두에게 하고픈 말을 했다.
“도시는 가혹한 곳이다. 너희처럼 힘없는 아이들에게 특히 더 그렇지. 하지만 춥고 황량한 북부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살아갈 순 없어. 너희도 결국 도시에서 다른 사람과 섞여 살아가야 해.”
내 입을 통해 보브찬친의 안배가 술술 풀려 나왔다.
“윈스크로 돌아가라. 비록 추방되었지만, 너희에겐 죄가 없어. 귀족 영애도 너희를 후원하고 있으니, 도시의 위정자들에게 자비를 청한다면 다시 성내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당장 올겨울을 버티기 위해서라도 도시에 들어가야 했다.
빈민가에 지었던 판잣집은 임시 가옥인지라 추위도 제대로 막아 주지 못할뿐더러, 요즘처럼 민심이 흉흉한 시기엔 너무 위험했다.
지금 숨어 있는 나루터 지하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치유 스크롤을 숨겨 두었던 빈집 있지? 거기서 지내면 돼. 원래 아이들과 함께 살던 넓은 집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팔렸겠군.]이어지는 보브찬친의 말을 듣고 내가 머물렀던 빈집의 용도를 알 수 있었다.
어쩐지 출세한 검투사가 동생을 넷이나 데리고 살기엔 너무 좁다고 생각했는데, 그 집은 보브찬친이 따로 쓰던 별채였다.
동생들은 그 집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는데, 보브찬친이 스칼렛과 안전하게 밀애를 즐기기 위해 몰래 마련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사나이는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하니까……. 겸사겸사 준비한 거야.]보브찬친이 민망한 듯 군소리를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별채 덕분에 아이들은 도시에서 지낼 곳이 생겼다.
도시 경비대도 보브찬친이 집을 두 채나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에 별채는 몰수당하지 않은 것이다.
보브찬친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의 비참한 과거를 듣고 나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보브찬친의 유품과 유언은 모두 전했으니, 이제 너희들의 이야기를 좀 들어 보자. 내가 떠나기 전에 보브찬친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부 해라.”
“떠나다니요? 테온은 이제부터 우리와 계속 함께 지내는 게 아니에요?”
필립이 아쉬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필립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에겐 해야 할 일이 있다.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여기서 묵고, 해가 뜨면 곧장 떠날 거야.”
“너무 아쉬워요, 테온…….”
아이들은 속상한 마음을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그나마 철이 든 이고르만이 내색하지 않으려 애쓸 뿐이었다.
“대신 오늘 밤은 보브찬친이 너희에게 남긴 많은 이야기를 해 주마. 그리고 보브찬친에게 하지 못한 말이 있다면 나에게 하거라.”
“큰형한테 하지 못한 말을 왜 테온한테 해요?”
“내가 교회로부터 인정받은 수호자라는 걸 얘기했지? 너희들이 하는 말을 내가 천국에 있는 보브찬친에게 전해 주마.”
“우와, 그럼 큰형이 우리 얘기를 들을 수 있어요?”
“당연하지!”
어린아이들은 내 말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바싹 다가와 앉았다.
그렇게 시작된 수다는 해가 뜨고, 다시 저녁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사파에서 온 용사
다시 만난 자바니에
한편, 테온과 아이들이 떠난 빈민가.
심판관 자바니에가 이바노프의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내가 분명 그냥 매복만 하라고 했는데, 왜 이런 일이…….”
자바니에의 표정이 복잡했다.
사실 그와 이바노프는 애증의 관계라고 할 수 있었다.
자바니에의 어린 시절, 이바노프는 그를 괴롭히거나 두들겨 패기도 했지만, 동냥 거지였던 그를 조직원으로 거두어 먹여 살린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 이런 모습이 당신의 마지막이군요. 솔직히 말해서, 마음이 아프진 않아요. 하지만…….”
자바니에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복수는 해 줄게요.”
눈에 독기를 품은 자바니에가 뒤를 돌았다. 그의 등 뒤로 성전사와 신관으로 이루어진 수십 명의 병단이 도열해 있었다.
북부정교회가 자랑하는 구마병단이었다.
“작은 흔적도 놓치지 마십시오. 늑대 도살자 테온은 마귀가 씐 게 분명하니, 반드시 추적해 척살해야 합니다.”
자바니에는 더 이상 테온을 생포할 마음이 없었다. 심지어 테온이 진짜 마법사인지 아닌지도 상관없었다.
그는 지금까지의 정황증거만으로도 테온을 처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네놈이 혹여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내가 마법사로 만들어 주마. 늑대 도살자 테온, 넌 오늘 내 손에 죽는다.’
자바니에의 서슬에 구마병단이 바쁘게 움직였다.
하지만 수색은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때 이른 폭설이 시작된 것이다.
추위에 익숙한 북부의 성전사들이지만, 어느새 허리 어름까지 쌓인 눈 더미를 헤치며 빈민가를 수색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성전사들을 이끄는 상급 성전사가 일단 철수를 권했다.
“심판관님, 이미 표적이 은신처를 벗어난 이상 이렇게 무턱대고 찾아 헤매는 것은 하책(下策)입니다. 일단 교회로 돌아가 장기간 추적에 필요한 준비를 하고, 추가 정보도 더 수집한 뒤 다시 출정하는 것이 상책…….”
“안 됩니다. 경의 뜻은 충분히 알겠으나, 이미 우리 바보 같은 뒷골목 형제님들께서 긁어 부스럼을 만드셨죠. 상대도 자기가 쫓기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테니, 오늘 중으로 잡지 못하면 영영 잡을 수 없는 곳으로 도망쳐 버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대로 눈 속을 헤집다 보면 성전사들이 먼저 지쳐 버릴 것입니다. 늑대 도살자의 전투력이 대단하다던데, 지친 상태로 놈과 맞닥뜨리면 제압을 할 수가…….”
설득하던 성전사는 자바니에의 굳은 얼굴을 보고 차마 말을 마치지 못했다.
자바니에는 노한 얼굴로 성전사를 꾸짖었다.
“그게 북부정교회 성전사의 입에서 나올 말입니까? 푸른 망토를 두른 성전사가 적과 마주치는 것을 겁내다니!”
“거, 겁을 내는 것이 아니오라……. 우리 성전사들이 갑옷까지 입은 채 설원을 수색하다 보니 지치기도 했고, 이러다 해가 지면 어차피 수색은 중단해야 하니 차라리 미리…….”
“듣기 싫습니다! 해가 저물어도 수색은 계속할 것입니다. 그렇게 아세요.”
버럭 화를 내는 자바니에의 모습에 상급 성전사는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공손한 태도와 달리 뒤로 돌아선 상급 성전사의 얼굴에는 분노와 짜증이 가득했다.
‘빌어먹을, 북부가 거꾸로 돌아가는군. 전장에서 백 명도 넘는 사내를 죽인 내가 저따위 책벌레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니.’
북부정교회는 역사가 짧은 만큼 성전사들의 신앙도 얕았다.
아도나이 교회의 성기사와 달리 성전사들은 검투사나 용병 출신이 대다수였고, 그들은 성경보다 창칼의 힘을 믿었다.
상급 성전사가 간신히 화를 억누르고 있을 때, 다행히 성전사 하나가 흔적을 발견했다.
“소수의 인원이 이동한 흔적이 있습니다! 벨로베강 북쪽 지류로 향합니다!”
성전사의 말에 자바니에를 비롯한 구마신관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사방으로 흩어져 설원을 뒤지던 성전사들도 다시 집결했다.
“훌륭합니다, 경. 분명 강변으로 나아간 흔적이 있군요.”
발견된 흔적을 찬찬히 살피던 자바니에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분명 도망자의 흔적이었다.
다른 신관들도 자바니에의 의견에 동의하며 성전사들을 불러 모았다.
“흔적을 따라 이동합시다. 교활한 마법사가 역으로 기습해 올 수 있으니, 성전사들은 주변 경계를 늦추지 마십시오. 자, 출발!”
갱단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한 자들이 테온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 *
“역시 털옷이 최고네요, 아가씨.”
“진작 이렇게 입을 걸 그동안 괜히 고생했어.”
여관에서 낮 동안 휴식을 취한 스칼렛과 로라는 나루터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미 해가 떨어진 지 오래였지만, 밝은 달빛이 흰 눈에 반사되어 별로 어둡지 않았다. 설피를 준비해 왔기에 높이 쌓인 눈도 장애가 되지 않았다.
“어라? 아가씨, 저기…….”
로라가 무언가 발견한 듯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수많은 사람이 눈을 헤치고 나아간 흔적이 있었다.
북부정교회의 구마병단이 지나간 흔적이지만, 두 여인이 그런 것까지 알 수는 없었다.
“이거 방향이…….”
“아이들이 있는 나루터 방향이야.”
구마병단의 추적을 모르는 두 여인은 눈밭에 난 흔적을 보며 갱단의 보복을 떠올렸다.
오두막에서 된통 당한 그들이 죽은 동료의 복수를 하기 위해 조직원을 더 동원해 나루터로 몰려갔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쩌죠? 지금이라도 저택으로 돌아가서 사람들을 모아 올까요?”
“그래야겠다. 로라, 네가 가서 별채의 호위병들을 데리고 와.”
“저 혼자요? 아가씨는 어쩌시고요?
대답을 들은 로라가 놀란 눈으로 스칼렛를 쳐다봤다. 그녀는 당연히 스칼렛도 함께 돌아간다고 할 줄 알았다.